복국장공주 의문사 사건

 


1. 개요
2. 복국장공주는 누구인가?
3. 충숙왕의 구타가 사인인가?
4. 사건의 파장
5. 학계의 주장


1. 개요


1319년 11월 8일[1], 고려 제 27대 국왕인 충숙왕의 왕비인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가 의문사한 사건이다. 이 사건 때문에 충숙왕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위태로워질 뻔할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1320년 1월에 당시 원나라 황제였던 인종 보르지긴 아유르바르와다(孛兒只斤 愛育黎拔力八達)가 갑자기 죽으면서 사건이 유야무야 묻히게 되었다. 그 때문에 사건이 일어난 지 704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복국장공주의 정확한 사인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2. 복국장공주는 누구인가?


우선 이 사건을 알기 위해선 먼저 복국장공주가 누구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복국장공주의 이름은 보르지긴 이린진발(孛兒只斤 亦憐眞八剌)로, 원나라 영왕(營王) 보르지긴 에센테무르(孛兒只斤 也先帖木兒)[2]의 딸이었다.
당시 고려원나라부마국이었는데, 1316년충숙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부마국의 지위 유지를 위해 결혼하게 되었다. 그런데 충숙왕은 이미 덕비 홍씨(훗날의 명덕태후)와 결혼한 사이였을 뿐만 아니라 복국장공주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왕자 왕정(王禎)을 얻은 유부남이자 아이의 아버지였고, 또한 덕비를 더 사랑했는지라 복국장공주한테는 정을 주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충숙왕은 복국장공주와 결혼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덕비의 처소를 드나들었고, 복국장공주와는 결혼생활 내내 부부관계가 소원했는지 3년이 지나도록 복국장공주의 임신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특히 충숙왕은 결혼생활 내내 수시로 사냥을 하러 나가거나 평민 복장을 하고 밤에 궁을 나가 돌아다니는 등[3] 도통 복국장공주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다. 덕분에 말만 부부 사이였지 실상 남보다도 못한 사이였다.
그러던 중 1319년 9월에 들어 복국장공주는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1319년 음력 9월 7일에 복국장공주가 몸이 좋질 않았는데 왕은 사원과 도관(道觀) 및 개인의 집으로 자주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의원들도 정성껏 치료를 했음에도 전혀 소용이 없었고, 결국 불과 20일도 채 되지 않은 음력 9월 26일에 끝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렇게 복국장공주가 갑자기 병을 앓다가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기에, 원나라에선 공주의 사인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3. 충숙왕의 구타가 사인인가?


복국장공주가 병을 앓고 불과 20일도 채 안 되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원나라에서는, 복국장공주의 사인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그리하여 당시 원나라 황제였던 인종은 선사(宣使) 이상지(李常志)를 보내 복국장공주의 사인을 조사하도록 했다. 고려에 도착한 이상지는 궁녀였던 쿠라치(胡刺赤)와 요리사 한만복(韓萬福)을 억류하여 복국장공주의 사인을 조사했다. 그런데 그 때 한만복의 입에서 충격적인 증언이 나오게 된다. 한만복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지난 해 8월 국왕이 연경궁으로 덕비(德妃)를 찾아간 것을 공주가 시샘하다가 왕에게 맞아 코피를 흘렸습니다. 9월에도 왕이 묘련사(妙蓮寺)에 갔다가 공주를 때렸는데, 에센부카(於侁夫介) 등이 말린 일이 있습니다."'''

- <고려사> 권 89 열전 2 후비 2 충숙왕 후비

즉, 충숙왕은 복국장공주와 결혼한 이후에도 꾸준히 전처였던 덕비를 찾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복국장공주가 질투를 했는데 충숙왕이 복국장공주를 코피가 나도록 두들겨 팼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달에 왕이 공주와 함께 묘련사란 절에 행차했는데, 그 때에도 충숙왕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또 복국장공주를 마구 때려서 호종하던 몽골인 관리인 에센부카란 인물 등이 충숙왕을 뜯어말렸다는 것이다. 결국 쿠라치와 한만복은 원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 증언을 들은 원 인종은 충숙왕이 복국장공주를 구타해서 죽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이에 고려는 크게 난처해졌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었는데, 감히 원나라 공주를 때려죽였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원나라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충숙왕은 백원항(白元恒), 박효수(朴孝脩) 등을 시켜서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올려 "한만복이 거짓말을 했다"고 변명하도록 했다. 그리고 1320년 2월에 복국장공주를 정화공주(靖和公主)로 추증하고 후히 장례를 치르며 원나라의 의심을 풀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그 무렵에 이 사건을 조사하던 원 인종 역시 승하하면서, 결국 이 사건은 유야무야 묻히게 되어 현재까지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

4. 사건의 파장


하지만 묻힌 건 어디까지나 복국장공주의 사인 뿐이었다. 이 사건이 중요한 것은 이후 정치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낳게 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기 위해선 심왕 제도를 알아야 한다. 쿠빌라이 칸이 승하한 후 한동안 원나라의 정치 상황이 어지러웠는데, 혼란기를 거친 후 무종 보르지긴 카이샨(孛兒只斤 海山)이 즉위하였다. 그런데 이 무종이 즉위하는데 크게 힘을 써준 인물이 바로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인 충선왕이었다.[4]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오는데 크게 도움을 준 충선왕이 너무나도 고마웠던 무종은 그에게 심양왕이란 작위를 추가로 부여해 만주 지역까지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보장해주었다. 이후엔 심양왕을 심왕으로 높여주며 더욱 충선왕의 지위를 높여주었다.
하지만 이것이 후에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고려 국왕과 심왕 작위를 겸직하고 있었던 충선왕이 1313년에 양위할 때, 고려 왕위는 아들인 충숙왕에게 물려주었지만 심왕은 조카왕고에게 물려주었던 게 화근이었다. 왕고는 충선왕의 이복형인 강양공의 차남이었는데, 충선왕이 몽골에 체류할 당시 그를 아끼고 사랑하여 양자로 삼았던 인물이었다. "고려왕이 심왕을 겸직하는 게 옳지 못하다"는 여론의 압력도 있었고, 또 형님에게 미안했던 것도 있었던 데다, 조카를 너무도 아끼고 사랑했던 충선왕이었기에 결국 이런 실수를 범한 것이다.
이후 왕고는 내심 자신이 고려 국왕 자리까지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미며, 지속적으로 충숙왕을 참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다 충숙왕은 본인대로 정사를 소홀히 하고 사치와 향락을 부리며 스스로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고 말았다.

5. 학계의 주장


사건이 일어난지 704년이나 지났기에 현재로서는 추측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원나라가 복국장공주의 사인을 의심하게 된 한만복의 증언을 '과장된 증언'이라고 보고 있다고 한다. 즉, 한만복의 증언대로 충숙왕이 복국장공주를 몇 번 손찌검한 건 사실일지 몰라도, 그것이 직접적인 사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나라에서 처음부터 복국장공주의 사인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는데, 한만복의 과장 섞인 증언을 듣자 결국 '충숙왕의 구타 때문에 복국장공주가 죽었다'고 믿어서 일이 커지게 된 것이라는 게 학계의 주장이다. 즉, 일종의 확증편향이라 할 수 있다.
우선 당시 고려는 정치적으로 원나라에 예속되어 있었던 반독립(半獨立) 상태였는데, 이 상황에서 충숙왕이 원나라의 공주를 죽을 정도로 마구 두들겨 팬다는 건 너무 무모하고 위험하다는 게 첫 번째 이유이다. 충숙왕 본인의 아들인 충혜왕은 새어머니인 경화공주를 강간했다는 죄목으로 폐위되고 귀양까지 가는 신세가 되었다.[5] 원나라 공주를 죽인 것도 아니고 강간했는데도 이 정도였는데, 두들겨 패죽였다면 과연 충숙왕이 왕위를 무사히 유지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즉, 정치적으로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에, 충숙왕이 복국장공주를 몇 번 손찌검한 적은 있었을지 몰라도, 죽을 정도로 심하게 구타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리고 2번째 이유는, 복국장공주는 이미 건강이 좋지 못했다는 것이다. 비록 정략 결혼한 사이였고 부부 관계도 소원했지만 복국장공주가 건강이 악화되자 충숙왕은 나름대로 사원과 도관(道觀) 및 개인의 집으로 자주 거처를 옮기며 공주의 병이 낫길 기원하는 모습도 보였다. 또 <고려사>를 보면 알겠지만 본래 그 사서가 조선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고려를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에서 서술했다. 특히 고려 말기 국왕들을 보면 꼭 어딘가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인물들인 양 서술되어 있다.[6] 충숙왕도 예외는 아니다. <고려사> 속에 묘사된 충숙왕은 아들 충혜왕만큼은 아니어도 그 역시도 대단히 놀기 좋아하고 정사를 게을리하는 암군이었으며 함부로 살인까지 한 악당이었다.
이렇게 충숙왕을 부정적으로 서술한 사서인데 만약 정말로 복국장공주의 사인이 충숙왕의 구타 때문이라면 직접적으로 그렇게 서술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사>는 복국장공주가 죽을 무렵에 그녀의 건강이 매우 좋지 못했다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충숙왕의 구타가 복국장공주의 직접적 사인이라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복국장공주 이외에도 고려에 시집을 온 몽골 공주들은 그나마 60세 정도까지 살았던 덕녕공주를 제외하면 모두 단명했고 대부분 남편들보다 더 먼저 죽었다. 이러한 이유로는 오랜 타지 생활로 인한 향수병과 고려와 몽골의 다른 환경으로 인한 풍토병 등이 꼽힌다. 복국장공주 역시 크게 다르진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단지 충숙왕이 자주 손찌검을 했던 사실로 인해 폭행치사 의혹이 불거진 것이란 게 학계의 주장이다.
[1]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이다. 음력 날짜는 9월 26일이다.[2] 원 세조 쿠빌라이의 5남인 운남왕(雲南王) 보르지긴 쿠가치(孛兒只斤 忽哥赤)의 아들. 아버지가 죽은 후 그 지위를 승습받아 운남왕으로 있었다가 1307년에 영왕으로 진봉되었다고 한다.[3] 심지어 이 때 충숙왕은 길에서 만난 사람을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까지 했다고 한다.'''[4] 원 무종은 쿠빌라이 칸의 장남이었던 보르지긴 친킴(孛兒只斤 眞金)의 손자였는데, 친킴은 충선왕의 어머니 제국대장공주오빠이며, 충선왕의 아내 계국대장공주의 할아버지이다. 고로 충선왕은 무종의 아버지 보르지긴 다르마발라(孛兒只斤 答剌麻八剌)에게 고종사촌 동생이 되는 인물이었고 무종 본인의 5촌 아저씨 뻘이었다.[5] 결국 충혜왕은 귀양가던 중에 30세로 죽었다.[6] 최악의 폭군인 충혜왕은 말할 것도 없고 개혁 군주로 이름난 공민왕조차도 말년의 모습을 보면 동성애관음증까지 있는 변태 성욕자로 묘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