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성 행궁
1. 개요
북한산성 행궁은 조선의 행궁 가운데 하나로 북한산성 내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래의 북한산성 행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완전 파괴되어 소실됐고,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다.
북한산성 행궁지는 2007년 사적 제479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
북한산성의 중성문을 지나 남쪽 골짜기로 진입해 동장대가 바라보이는 북한산 상원봉 아래에 위치했다. 남한산성 행궁과 달리 종묘와 사직은 두지 않았으나[2] 비상시에 예비 수도로서의 기능을 하였기에 필요한 시설을 일단은 최대한 갖추어 놓았다. 그러나 실제로 사용된 적은 없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한양도성의 방위 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북한산성을 축성할 때 같이 만들어졌다. 1711년(숙종 37년)에 착수하여 이듬해 5월 완공하였다.
행궁의 규모는 내전 정전이 28칸, 외전 정전이 28칸, 부속건물 68칸 등 총 124칸에 이르며, 내전 정전은 좌우 상방이 각각 2칸, 대청이 6칸, 사면에 퇴가 18칸이 있었으며, 부속 건물로 좌우 행각방이 9칸, 청이 5칸, 중문이 1칸, 대문 3칸, 수라간이 5칸, 중문이 1칸, 측소 2칸으로 이루어졌다. 외전 정전은 내전 정전과 체제가 같다. 부속건물로 대문 3칸, 북협문 1칸, 외북장중문 1칸, 외행각방 12칸, 루 4칸, 청 4칸이 있고 헛간이 2칸, 중문 2칸, 외대문 3칸, 북변외대문 1칸이 있었다.
평상시에는 행궁에 북한산 서고를 마련하여 고문헌을 비밀리에 보관하였으며, 숙종과 영조 등이 이곳을 찾은 기록이 남아 있다. 수해와 일제의 파괴 등으로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하나도 없으며 건물 터만 남아있다. 특히 외전 지역은 지반까지 유실되었다. 그러나 1999년에 실시한 지표조사 결과 내전이 있었던 지역은 기단석과 계단, 주춧돌 등이 뚜렷이 남아있어 당시 내전과 행각의 배치상황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앞으로 발굴조사와 자료 수집이 어느 정도 완료되면 남한산성 행궁처럼 복원하려는 계획이 있다.
3. 바깥고리
4. 사적 제479호
북한산성행궁은 도성 외곽의 전략적인 요지인 북한산성에 위치한 행궁으로서 남한산성 행궁, 강화행궁과 더불어 전란을 대비한 임시궁궐이며, 도성 방어의 의지를 표출하기 위해서 축조된 것으로 다른 행궁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중요한 문화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또한 북한산성 행궁은 조선 후기 집권층의 국가의식과 애민의식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유적으로 현재는 행궁으로서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지만 1999년에 실시한 지표조사 결과 행궁지의 과거 모습을 알 수 있는 유구들이 노출되고 지하에도 유구가 매장되어 있는 중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