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예멘)

 



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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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사나 옛 시가지†[1]
영어
Old City of Sana'a
아랍어
مدينة صنعاء القديمة
프랑스어
Vieille ville de Sana'a
국가·위치
예멘 사나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6년
등재기준
(iv)[2], (v)[3], (vi)[4]
지정번호
385
[image]
사나의 숭례문이라 할 수 있는 밥 알 야만, 즉 예멘 문
1. 개요
2. 역사
2.1. 중세 혼란기
2.2. 북예멘 국가들의 수도
2.3. 사나 쟁탈전
2.3.1. 자이디 vs 라술 왕조
2.3.2. 자이디 이맘국
2.3.3. 자이디 vs 타히르 왕조
2.3.4. 자이디 vs 오스만 제국
2.4. (자이디) 카심 왕조의 수도
2.4.1. 혼란의 재림
2.4.2. 사나 '코뮌'
2.5. 근현대
2.5.1. 자이디-오스만 전쟁
2.5.2. 무타와킬 왕국
2.5.3. 공화국, 통일, 내전
3. 여행


1. 개요


예멘수도. 인구는 97만 2000명(1995)... 이나 24년이 지난 지금은 400만이 넘는다. 기후는 몬순 영향을 받아 아라비아 반도에 위치한 것 치고는 강수량이 꽤 많은 편으로,[5] 기원전 1000년 경부터 도시가 세워졌다. 고대 사바 왕국부터 중세의 자이디 이맘국, 북예멘, 현대 예멘까지 천년 가까이 수도 지위를 누리며 번영과 쇠퇴를 반복하였다. 시내에는 점토로 만든 벽돌 구조의 건물이 있고 아랍 문화가 현저하게 남아 있다. 종교적으로 경건했던 예멘의 자이디 이맘들이 수세기에 걸쳐 공을 들인 사나는 전통적인 이슬람 도시이며 시내에는 이슬람 대학이나 모스크가 많이 있다.
명실상부한 예멘의 정치/문화적 중심지로, 대한민국 헌법의 서울처럼 예멘 헌법에도 수도는 사나로 명시되어 있다. 2004년 아랍 문화 수도로 선정되었으며, 구시가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는 독립 후 무려 3번째로 내전에 시달리고 있다. 2014년 8월 18일 시아파후티 반군은 사나에서 유가 인상을 이유로 반정부 시위를 벌였고, 9월 21일 사나를 장악하였다. 이듬해 1월 후티 반군이 사나 대통령궁까지 장악하면서 하디 대통령은 사나를 떠났다. 3월 16일부터 사우디아라비아 주도 아랍 연합군의 공습을 받고 있다.

2. 역사


전설에 의하면 사나는 노아 (누흐)의 아들 셈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고대의 지명은 아잘이었으며, 이는 셈의 후예중 남부 아랍인의 시조인 카흐탄의 아들 우잘에서 유래된 것이다. 동시에 셈계 언어인 사바어로 '잘 방비된' 곳이란 뜻이었다. 아랍 역사가 알 함다니에 의하면 사나는 사바인들의 왕 샤르 아우타르에 의해 도시를 두르는 성벽과 굼단 궁전이 세워졌다고 한다. 사바 왕국은 솔로몬 (술레이만)과 결혼하여 유명한 시바 (셰바)의 여왕으로 유명하다. 고대의 사나는 홍해와 내륙의 고대도시 마리브의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이점 때문에 상업적으로도 번영하였다.
275년 사바 왕국을 멸망시킨 아랍계 유대교 국가 힘야르 왕국은 4세기 초엽부터 기존 수도인 자파르와 함께 사나를 공동 수도로 삼았다. 530년 기독교 국가인 악숨 왕국의 장군 아브라하가 힘야르 왕국을 정복하였고, 그 총독부가 사바에 위치하였다. 악숨의 지배는 40년에 그쳤지만, 그동안 사나에 세워진 성당은 향후 도시의 건축 양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 570년 사산 제국의 장군 바레즈가 포위 끝에 사나를 점령, 힘야르 왕국을 이란의 속국으로 복구시켰다. 7세기 이슬람이 도래한 후 무함마드의 지시로 옛 성당은 대사원으로 개조되었다.[6]

2.1. 중세 혼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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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 대사원. 예멘의 모스크들의 전형이다. 1972년 복원 시에 7세기 전반에 쓰여진 쿠란 파편이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영문 위키
이슬람 제국 하의 사나는 예멘 총독들의 치소였다. 고대의 구담 궁전은 반란의 거점이 될 것이라 염려한 칼리파 우스만에 의해 파괴되었다.그후 사나는 급속도로 이슬람적인 도시로 변모하였다. 순니의 4대 법학파 중 하나인 샤피이파의 스승 이맘 앗 샤피이는 사나를 꼭 봐야 할 도시라고 묘사하며 자주 방문하였다. 그 무렵인 715년 칼리파 왈리드 1세에 의해 시내의 대사원이 현재의 규모로 확장되었다. 8세기 우마이야 조의 혼란을 틈타 예멘은 카와리지 세력의 거점이 되었는데, 칼리파 마르완 2세가 사나에 토벌군을 보내기도 하였다. 위키 그후 카와리지들은 동쪽의 시밤을 거쳐 오만에 정착한다. 9-10세기 예멘인 지리가 알 함다니는 도시가 매우 깨끗하다고 묘사하였다.[7] 10세기 페르시아인 지리가 이븐 루스타는 '그보다 더 위대하고. 더 인구가 많고, 더 번성하고, 더 고귀한 기원이나 맛있는 음식을 지닌 도시를 찾을 수 없다'며 칭찬하였다.
한편 9세기 중엽, 압바스 조의 쇠퇴를 틈타 예멘 동부 내륙에서 흥기한 유피르 왕조는 종종 사나로 세력 확대를 꾀하였다. 841년 유피르 군의 사나 공격은 그 총독이 이라크의 압바스 정규군을 지원받아 격퇴하였다. 다만 압바스 군의 시밤에 대한 반격 역시 실패하였다. 이후 압바스 조가 사마라의 혼란에 빠진 틈에 869년 유피르 조는 사나를 정복하였다. 876년 대홍수가 발생해 사나의 시가지가 침수되었다. 후에 재건되긴 했지만 대사원 역시 큰 피해를 입었고, 유피르 조의 군주 무함마드 이븐 유피르는 메카로 속죄 목적의 순례를 떠나기도 하였다. 비록 유피르 조가 중시하긴 했지만 수도는 여전히 위태로운 사나 대신 내륙의 시밤으로 남았다. 880년대의 반란들로 사나는 불안정한 시기를 맞았고, 곧 세력을 회복한 압바스 조가 지배권을 회복했지만 그 총독인 아불 아타히야는 899년 유피르 조에 복속하였다. 한편 897년 사나에서 북서쪽으로 120여 km 떨어진 사다 (쑤드하)에선 후에 도시와 깊은 연관을 맺게 될 쉬아 계열의 자이디 이맘국이 세워졌다.
그 초대 이맘인 알 하디 야흐야는 901년 1월 19일 사나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내 건강이 악화된 알 하디는 902년 5월 들것에 실려 사다로 돌아갔다. 이듬해 회복한 알 하디는 재차 사나를 공격했지만 유피르 군에게 패배하였고 그 아들 무함마드가 포로가 되었다. 901년과 913년 사이에 사나는 20번 정복되고, 3번은 협상을 통해 항복하고, 그외에 5번은 포위를 격퇴하는 등 혼란기를 보냈다.[8] 한편 알 하디는 예멘의 유일한 쉬아 지도자가 아니었다. 이미 881년부터 이스마일파 선교사들이 예멘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그 선교사 (다이)들인 이븐 하우샵과 알리 이븐 알 파들이 각각 사나의 서북쪽과 아덴 북쪽의 산지에서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중 알리는 905년 11월 사나를 정복하였고, 비슷한 시기 이븐 하우샵은 시밤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사다의 자이디 이맘국을 제외한 예멘 내륙 지방 대부분이 파티마 조에 충성하는 이스마일파 세력의 소유가 되었다.
비록 906년 4월, 알리에 반감을 품은 부족들의 초대로 알 하디는 재차 사나를 점령하였으나 곧 유력자인 아사드 이븐 아비 유피르와 다툰 후 같은해 11월 도시를 떠났다. 이후 이스마일파가 재차 사나를 장악하였다. 910년 4월 7일, 알리가 서부 저지대로 원정을 나선 틈에 알 하디는 재차 사나를 점령하였으나 6월 23일 재차 물러나야 했다. 911년에 사나는 이스마일파 극단주의 세력인 카르마트의 습격을 받았다. 이때 대사원이 파괴되는 등 도시에 큰 피해가 유발되었다. 그동안 내륙에서 세력을 재정비하던 유피르 조는 마침내 916년 이스마일파로부터 사나를 점령할 수 있었다. 한편 이스마일파와의 일전을 준비하던 자이디 이맘 앗 나시르 아흐마드는 함단, 나즈란, 카울란 부족을 모아 그 지도자인 압둘 하미드와 사나 외곽에서 3일간 전투를 벌였다. (누가쉬 전투, 920년 1월) 결과는 압둘 하미드가 전사하는 등 자이디 연합군의 대승이었고, 예멘에 대한 이스마일파의 지배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리고 10세기 중반 유피르 조는 내분으로 쇠퇴하였고, 956년 자이디 이맘 알 무크타르가 도시를 점령했다. 다만 그는 같은해 함단 부족에게 암살된다.

2.2. 북예멘 국가들의 수도


이후 자이디 이맘 앗 다이 유수프는 지야드, 유피르 왕조를 차례로 물리치고 사나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11세기 초 이맘국은 내전에 돌입하였다. 사나는 이맘이 아닌 사이디 (무함마드 혈통) 알 카심 빈 알 후세인이 차지하였는데, 1012년 도시에서 축출된 후 추격당하던 중 살해되었다. 그러자 이맘 알 마흐디 알 후세인이 사나를 얻었지만, 그 역시 1013년 두 빈에서 함단 부족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이후 혼란한 사나를 두고 자이디 이맘국의 중심은 일시적으로 예멘 대신 이란 북부로 옮겨졌다. 그러던 1027년 이맘 알 무이드가 사나를 장악했지만 3년 후 내분으로 살해되었고, 1031년 이맘 아부 하쉼 알 하산이 사나를 접수하였다. 하지만 아부 하쉼 역시 1037년 함단 부족에 의해 사나에서 축출되었고, 그들은 알 마흐디의 동생 자파르를 초청해 도시의 아미르로 추대하였다. 그후 잠깐 사나를 수복했던 아부 하쉼은 다시 도시를 상실한 후 옛 수도인 사다로 물러나 1040년 사망하였다.
후대 이맘인 앗 나시르 앗 다일라미는 1046년 함단 부족의 지지로 사나를 접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내 앗 나시르는 일전에 복속해왔던 자파르 및 함단 부족과의 대립으로 사나를 상실하였다. 그는 디빈[9]으로 물러나 사나의 자파르와 싸웠는데, 이내 파티마 조에 충성하는 다이 알리 앗 술라이히의 위협으로 각지를 전전하다가 1053년[10] 나즈드 알 자흐에서 술라이히 군에게 패하고 70명의 추종자들과 살해되었다. 그러던 1062년 알리는 사나를 점령하고 수도로 삼았는데, 그는 5년 후 핫즈 (메카 순례) 도중 자비드의 바누 누자흐에 의해 알리가 살해되었다. 그 틈에 자이디 이맘 알 무타시브 알 무자히드 함자가 함단 부족을 중심으로 5백 기병과 1만 5천의 보병을 모아 사나 점령을 목적으로 진군하였는데, 반격에 나선 술라이히 장군 아미르 앗 자와히에게 대패하고 전사하였다. (알 말와 전투, 1067년 11월 2일)
그후 사나는 알리의 부인 아스마와 며느리 아르와 앗 술라이히의 지도 하에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1087년 전권을 장악한 아르와는 요새화된 지블라로 천도하긴 했지만, 동시에 사나의 대사원을 증축하고 도로를 보수하는 등 도시에 관심을 기울였다. 천도 후 함단 부족의 이므란 이븐 알 파들이 아르와의 숙부인 아사드 이븐 쉬합과 함께 사나의 총독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1100년경 아르와의 남편 사바가 사망한 틈에 함단 부족장 하팀 이븐 알 가쉼이 사나를 점령하고 술탄을 칭하였다. 이로써 사나를 수도로 삼은 또하나의 이스마일파 국가인 함단 왕조가 세워졌다. 다만 세부적인 종파에 있어 타이비를 제창한 술라이히 조와 달리 함단 조는 이집트처럼 하피지를 따랐기에 상호 대립하였다. 한편 알 말와에서의 괴멸적인 패배 이후 전무후무하게도 72년간 자취를 감추었던 자이디 이맘국은 1138년 아르와의 사망으로 술라이히 조가 분열된 후에야 알 무타와킬 아흐마드의 선출로 부활하였다.
그 무렵 함단 왕조의 6대 술탄 하팀 2세 대인 1139년, 부족 간 다툼으로 사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전 실권자 아흐마드의 아들 하미드 앗 다울라 하팀이 7백여 함단 기병들과 사나에 입성해 반란을 진압하고 술탄이 되었다. 하팀은 정당성 확보와 사나의 안정을 위해 자이디 이맘국을 공격, 그 수도인 사다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1150년 반격에 나선 알 무타와킬은 사나로 남하하여 하팀을 격파했는데, 동맹 부족들의 태업으로 도시를 점령하진 못하고 돌아갔다.[11] 예멘의 여타 세력들과 대립하던 하팀의 후계자 알리는 1173년 자이디 이맘국을 토벌하기 위해 아덴의 주라이 왕조, 자비드의 마흐디 왕조와 연합하였다. 그러나 연합군이 편성되기도 전에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원정군이 당도했다는 낭보에 알리는 사나로 돌아왔다. 살라흐 앗 딘의 동생 투란 샤가 이끄는 아이유브 군대가 사나 외곽에 당도하자 기겁한 알리는 산악 성채로 도주하였고, 따라서 투란 샤는 1174년[12] 8월 사나에 무혈입성하여 약 2세기 만에 수니파를 복구할 수 있었다. 이로써 한 세기에 걸친 파티마 칼리파 계열 왕조들의 사나 지배도 종식되었다.

2.3. 사나 쟁탈전


투란 샤는 분열되어 있던 예멘을 빠르게 평정, 자이디 이맘국을 제외한 통일을 이루었다. 그러나 예멘에 애착을 느끼지 못한 투란 샤는 살라흐 앗 딘에게 청하여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전임되었다.[13] 이후 그의 막내 동생 툭테긴이 예멘의 아미르가 되었다. 산지에 웅거하던 함단 조의 알리는 아이유브 군이 부재한 틈에 사나를 재점령, 상당 기간 유지하였다. 이렇듯 불안이 이어지던 사나 대신 툭테긴은 본국과 항시 소통 가능한 해안의 자비드와 타이즈를 중심지로 삼았다. 그럼에도 그의 치세에 사나에는 사일라 강 서안의 부스탄 앗 술탄 정원과 궁전이 지어졌다. 1197년 가을 툭테긴이 사망하자 그 다음 달에 함단 부족 출신의 자이디 이맘 알 만수르 압둘라는 복속해온 알리와 함께 사나를 공격하였다. 그들은 비록 툭테긴의 아들 알 무이즈 이스마일에게 패배했으나 알 만수르는 아이유브 진영을 이탈해온 맘루크 샴스 알 카와스의 도움으로 사나를 점령하였다.
그후 샴스 알 카와스와 대립하게 된[14] 알 만수르는 전자의 위협에 단신으로 사나를 빠져나온 후, 성밖의 군대와 돌아와 도시를 점령하였다. 그는 사나 주변에 있던, 그가 이단이라 여기던 무타리피야 종파의 사원들을 가차없이 파괴하였다. 1198년 알 만수르는 아이유브 토벌군을 격퇴하였지만, 다른 군대에 의해 사나가 점령되자 산지로 철수하였다. 이후로도 사나에 대해 몇번 잠깐씩 점유와 상실을 반복한 끝에 알 만수르는 1205년 사나의 아이유브 총독과 휴전을 맺었다. 하지만 휴전은 2년만에 깨졌고, 1215년 아이유브 군의 반격을 피해 카우카반으로 도주한 알 만수르는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 아들인 앗 나시르 무함마드는 아이유브 조의 공세에 1220년 재차 그들과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내부 반발에 직면한 앗 나시르는 1226년 7백의 기병과 2천 보병을 이끌고 사나로 진격하였다. 7월 23일 사나 근교에서 자이디 군대는 아이유브 장군 누르 앗 딘 우마르와 대결하였다. 밤까지 지속된 전투에서 자이디 군대는 대패하였고, 화살에 눈을 다친 앗 나시르는 40여기의 잔여 병력과 툴라 성채로 도주한 후 그해 말엽 사망하였다.

2.3.1. 자이디 vs 라술 왕조


이 승전으로 아이유브령 예멘에서 입지가 커진 사나 총독 우마르는 1228년 주군인 아미르 알 마수드 유수프가 시리아로 향할 시에 섭정으로 봉해졌다. 지속적으로 아이유브 조에 복속해 있던 우마르는 1235년 압바스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 1세의 책봉을 얻어 술탄 알 만수르를 칭하며 라술 왕조를 세웠다. 아이유브 시대와 마찬가지로 라술 왕조 역시 자비드를 수도로 삼았다. 우마르는 자이디 이맘국을 공격, 1231년 이맘 알 하디 야흐야와 휴전을 체결하였다. 1250년 우마르가 암살당하자 자이디 이맘 알 마흐디 아흐마드가 라술 가문의 아사드 앗 딘이 총독이던 사나를 점령하였다. 다만 1년도 안되어 도시를 포기한 알 마흐디는 라술 왕조의 술탄 알 무자파르 유수프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후자가 보낸 자객에게 부상을 입고 결렬되었다. 1258년 자이디 내전에서 알 마흐디가 전사한 후 술탄 알 무자파르는 지속적으로 원정군을 보내 이맘국을 압박하였댜. 따라서 이맘국은 쇠퇴하였고 오랫동안 사나는 안정적으로 라술 왕조의 지배 하에 유지되었다. 1264년에는 일시적이긴 하지만 그 수도인 사다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던 1275년 라술 왕조에 반기를 든 맘루크들이 사나를 점거하고 이맘 알 마흐디 이브라힘을 초청하였다. 이에 알 무자파르는 곧장 친정에 나섰고, 자이디 군대를 격파한 후 포위 끝에 이맘을 포로로 잡았다. 이맘의 용맹함을 존중한 술탄은 그를 대접하고 타이즈에 집을 주어 은퇴시켰다. 연이은 패배에도 점차 세력을 회복한 자이디 이맘국은 1311년 알 마흐디 무함마드의 지휘 하에 라술 군을 격파하고 이듬해 3천 두카트의 연공을 조건으로 한 10년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술탄 알 마아야가가 반격에 나서며 평화는 5년 후에 깨졌다. 1322년 알 무아야드가 사망하자 알 마흐디는 전군을 동원해 사나로 진군하여 유리한 조건의 휴전을 체결하였다. 이듬해 사나의 총독이 사망한 후 도시가 혼란에 빠지자 알 마흐디는 손쉽게 그를 정복하였다. 이로써 라술 왕조는 고지대 예멘에 대한 지배력을 잃기 시작하였다. 1328년 사망 시까지 사나를 다스린 이맘 알 마흐디 무함마드는 사후 도시의 대사원에 안장되었다. 사후 내분을 거쳐 사나를 장악한 알 무아야드 야흐야는 그를 거점으로 타이비 이스마일파를 공격하였다.

2.3.2. 자이디 이맘국


1349년 알 무아야드가 사망한 후 동생 알 와시크 알 무타하르가 사나에서 즉위하였다. 그러나 툴라 성채의 알 마흐디 알리가 수도 사다를 비롯한 대부분의 영토를 장악하자 알 와시크는 사임한 후, 사나에서 교육과 집필에 전념하다 사후 그 대사원에 안장되었다. 알 와시크의 사임 후 다른 자이디 가문의 이브라힘과 다우드 이븐 압둘라 형제가 사나를 장악하였다. 이에 알 마흐디는 사나를 공격했는데, 형제는 6개월의 포위를 이겨내었다. 이맘 대신 아미르 직에 만족한 그들과 그 후손들은 1381년까지 사나를 다스렸다. 다음 이맘 앗 나시르 무함마드 살라흐 앗 딘 역시 1373년 사나를 공격했으나 강한 저항에 격퇴되었다. 이에 그는 아미르 이브리스 이븐 압둘라의 모친과 결혼하였고, 이에 이드리스가 의부를 만나러 오자 체포한 후 전군을 이끌고 사나를 점령하였다. 다만 이드리스 모자는 사나에 살게 허가되었다. 이렇게 사나를 되찾은 이맘국은 아시르 지역의 티하마까지 점령하며 쇠퇴하는 라술 왕조를 압박하였다. 앗 나시르는 1391년 낙마 사고를 당한 후 사나에서 사망, 자신이 지은 살라흐 앗 딘 사원에 안장되었다.[15]
혼란을 막기 위해 앗 나시르의 죽음은 2달간 숨겨졌다. 그후 사나의 자말 앗 딘 사원에 모인 자이디 울라마는 알 마흐디 아흐마드를 이맘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사다의 카디 앗 다와리가 앗 나시르의 아들 알 만수르 알리를 추대하였고, 이에 알 마흐디는 사나에서 물러나 산악 지역에서 저항했으나 포로가 되었다.[16] 이로써 이맘국을 재통합한 알 만수르는 1403년 함단 부족이 사나를 공격해오자 출정하여 도시 외곽에서 그들을 격파하였다. 이후 반격에 나서 영토 할양 조건의 휴전을 맺었고, 얼마 후 라술 왕조와도 휴전이 체결되었다. 이후 30여년간 안정적으로 통치하던 알 만수르는 1436년 예멘을 덮친 역병으로 사망한 후 사나의 살라흐 앗 딘 사원에 안장되었다. 이후 세 이맘들이 나타나 내전을 벌였는데, 가장 먼저 패하고 옥사한 알 마흐디 살라흐 앗 딘은 사나의 무사 사원에 안장되었다. 그를 패배시킨 알 만수르 앗 나시르 역시 곧 알 무타와킬 알 무하타르에게 패하고 옥사하였다.

2.3.3. 자이디 vs 타히르 왕조


한편 약해지던 라술 왕조는 결국 1454년 타히르 왕조로 대체되었다. 그 술탄 알리는 내부를 안정시킨 후 분열된 이맘국을 공격하였다. 1460년 다마르를 점령한 알리는 1461년 자이디 반군의 협조로 알 무타와킬을 축출, 사나를 점령하였다. 그후 알리는 자신의 총독 알 바다니와 함께 이맘의 아들 역시 그 영주로 봉하였다. 그러던 1464년 알 만수르의 아들 알 무아야드 무함마드가 파견한 장군 무함마드 이븐 이사 샤리브가 자신이 사나의 타히르 조 총독과 같은 이름인 것을 이용한 대담한 속임수로 사나를 점령하였다. 이듬해 타히르 군대가 진군해오자 알 무아야드는 연공을 약속하며 그들을 돌려보냈다.[17] 이후 알 무아야드는 타히르 조와 우호를 유지하며 사힙 (영주)으로서 카우카반, 사다, 툴라 등지의 경쟁 이맘들이 호시탐탐 노리던 사나를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그러나 1501년 타히르 군대는 사나를 포위, 투석기 등으로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러나 사나는 완강히 저항하였고, 5개월의 포위 후 술탄 아미르는 가져갈 수 없는 물자를 불태우고 회군하였다. 이에 자이디 군대가 추격했으나 패하였다.
사나를 지켜낸 알 무아야드는 1503년 초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 이전에 사나를 점령했던 장군 무함마드 샤리브가 도시를 지배했고, 그 동생이 이맘 알 무스탄시르 아흐마드로 선포되었다. 다만 후자는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1504년 타히르 술탄 아미르는 재차 사나를 공격하였다. 대립 이맘 알 만수르 무함마드가 구원에 나섰지만, 그는 타히르 군에 패하고 사로잡혔다. 이후 사나를 점령한 타히르 조는 공포 정치를 행하였고, 그곳에 투옥된 이맘 알 만수르는 3개월 후 독살되었다. 위기에 처한 자이디 세력은 새로운 이맘 알 무타와킬 야흐야 샤라프 앗 딘 하에 뭉쳤고, 행운이 찾아왔다. 1517년 맘루크 왕조의 원정군에 패배한 술탄 아미르가 그해 5월 15일 사나 부근에서 붙잡혀 처형된 것이다. 그런데 같은해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 역시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하자 사나의 수비대는 해안으로 철수하였다. 따라서 알 무타와킬은 수월히 도시를 점령하였고, 타히르 잔당[18]과 맘루크 군의 대립을 틈타 1534년 타이즈를 점령하는 등 영토를 확장하였다. 알 무타와킬은 그전에도 사실상의 수도였던 사나를 정식으로 자이디 이맘국의 수도로 삼았다.

2.3.4. 자이디 vs 오스만 제국


1540년 경까지 알 무타와킬은 예멘의 자이디 지역 대부분과 일부 수니 지역까지 차지하였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보다 더 번성한' 예멘을 포기할 마음이 없었고, 인도양의 패권을 두고 포르투갈과 맞서기 위해 예멘의 소유는 필수적이었다. 1539년 자비드에 오스만 군대가 파견된 이후 자이디 왕실은 내분을 겪었다. 알 무타와킬의 장남 알 무타하르가 오스만 측에게 침공을 부탁하기까지 하였다. 1547년 오스만 군이 공세에 나서 타이즈를 점령하였다. 74세의 이맘은 무력하였고, 이에 실권을 잡은 알 무하타르가 출정했으나 역시나 역부족이었다. 같은해 8월 23일, 오스만 사령관 웃지미르 파샤는 내통자를 통해 사나에 입성하였고 자이디 세력인 하심 가문원 1200명을 학살하였다. 알 무타하르는 툴라 성채를 기반으로 저항을 이어갔으나 1552년 오스만 측과 휴전을 맺었고, 그로부터 사나 북서쪽 방면의 산작베이로 봉해졌다. 종교적 영향력만 지니던 알 무타와킬은 1555년 사망하였다.
그러나 1566년 예멘 각지에서 대규모 반터키 봉기가 일어나자 알 무타하르는 그를 이끌었고, 이듬해 사나를 점령하였다. 뒤늦게 파견된 오스만 원군은 산악 부족들의 매복에 당해 전멸되었다. 80여 차례의 전투 중 마지막 차례에서 오스만 총독 무라드 파샤가 잡혀 처형되었고, 그 수급은 사나의 알 무타하르에게 보내졌다. 1568년 오스만 조의 지배권은 자비드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동원력은 여전했고, 이듬해 술탄 셀림 2세가 원군으로 파견한 시난 파샤는 알 무타하르를 내륙으로 밀어내고 1570년 카우카반에서 휴전을 맺었다. 1572년 알 무타하르의 사후 이맘국은 재차 분열되었고,[19] 신임 총독 하산 파샤의 공세에 1583년 사나와 그 너머의 사다와 나즈란까지 함락되었다. 험준한 샤라흐에서 버티던 이맘 앗 나시르 하산은 배신으로 1585년 9월 11일 사로잡혔고, 사나에 투옥되었다가 터키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사망한다. 이대로 자이디 이맘국이 멸망하고 예멘 전역에 대한 오스만 지배가 확립되려나 싶던 1597년 9월, 알 만수르 알 카심이 이맘으로 옹립되며 반격의 불씨가 점화되었다.
알 만수르는 자이디 이맘국의 창건자 알 하디 야흐야의 고손자인 앗 다이 유수프의 14대손이었다. 알 무타하르를 지지한 집안 출신인 그는 오스만령 사나의 다우드 사원에서 종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한편 오스만 지배가 극심하던 무렵 그의 제자들 중 한명이 자이디 이맘국 재건을 제안하였다. 그는 거절하였으나 이로써 오스만 당국의 의심이 증폭되자 사나를 떠나 그 서남쪽의 하라즈 산지로 피신하였다. 아흐누미 부족의 지지로 하주르에서 이맘위에 오른 알 만수르는 대오스만 투쟁에 나섰다. 이는 실패의 연속이었으나 1604년 핫자의 아미르가 대의에 합류하며 상황이 호전되었다. 오스만 지휘부는 단결되어 있지 않았고, 지나친 과세에 예멘의 민심 역시 튀르크 인들에게 부정적이었다. 끈질긴 게릴라 투쟁 끝에 1607년 오스만측 총독 시난은 알 만수르에게 그의 점령지 지배를 인정하는 협정을 맺었다. 1613년 튀르크 군부의 내분으로 그 통치력이 약화되자 1617년 알 만수르는 이맘국의 옛 수도 사다를 점령하였다. 2년 후 오스만 당국은 재차 그의 영토를 인정했고, 알 만수르는 사나 북쪽의 모든 영토를 장악한 상태에서 1620년 사망하였다.
본래 자이디 이맘은 무함마드 가계, 즉 사이디 중 그 누구도 선출될 수 있었으나 알 만수르 사후 그 후손들은 20세기까지 직위를 세습하였다. (카심 왕조) 그 2대 군주 알 무아야드 무함마드는 1626년 사나로 향하던 자이디 성직자가 오스만 당국에 의해 처형당하자 휴전을 파기, 공세에 나섰다. 바누 술라이만 등 북부 부족들과 카우카반 아미르의 열정적인 지지와 함께 내륙 대부분을 정복, 사나를 포위하였다. 같은 시기 사파비 제국의 압바스 1세가 오스만령 이라크를 침공한 것도 호재였다. 1629년 3월 9일 알 무아야드는 오스만령 예멘의 총독 하이다르 파샤와 휴전을 맺었고, 후자는 평화의 증표로 이맘의 아들 알리에게 사나의 열쇠를 내주었다. 약속대로 그 수비대 역시 안전히 철수하였고, 이맘의 다른 왕자 야흐야가 사나의 아밀 (총독)로 봉해졌다. 같은해 타이즈 역시 자이디 군에게 점령되었다. 1635년 오스만 군은 증강된 병력으로 반격에 나섰으나 이 역시 격퇴되자 마침내 자비드와 모카를 내어주고 철수하였다. 이로써 한세기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예멘 지배는 종식되었다.

2.4. (자이디) 카심 왕조의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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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 시가지 풍경
1644년 오스만 축출의 과업을 이룬 알 무아야드가 사망하자 짧은 내분 끝에 동생 알 무타와킬 이스마일이 계승하였다. 그의 치세는 자이디 이맘국 사상 최전성기로 평가된다. 1645년 자이디 군대는 아덴을 점령, 예멘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1654년엔 하드라마우트의 카티리 왕조 내분에 개입하여 그들을 복속시켰고, 1658년엔 현재의 오만 서부인 도파르 지역까지 속국으로 삼았다.[20] 일반 부족들이 세금을 내는 것과 달리 알 무타와킬은 어떤 부족들의 경우에는 역으로 조용히 지내는 대가로 보조금을 지급하는 관례를 만들어 안정을 유지하였다. 사나는 총독에게 맡기고 동남 방면 앗 수다에 마물던 알 무타와킬은 1676년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 두 조카들이 다툰 후 알 마흐디 아흐마드가 집권하였다. 그는 1679년 사나 일대의 유대인 공동체를 추방하였고, 그들은 모카나 마즈와 등지로 향하였다가 이듬해가 되어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마즈와 추방)[21]
1681년 알 마흐디가 요절하자 울라마의 중재를 거쳐 알 무타와킬의 아들 알 무아야드 무함마드 2세가 이맘위에 올랐다. 그의 치세에 하드라마우트 총독이 축출되는 등 이맘국의 쇠퇴가 시작되었다. 사나에 머물던 그는 이내 처소를 다우란으로 옮겼고, 이러한 풍조는 후대에도 종종 나타난다. 1686년 알 무아야드가 사망하자 7명의 왕공들이 이맘위를 놓고 3년간 내분을 벌였다. 그중 알 마흐디의 아들 알 마흐디 무함마드가 최종 승자로 떠올랐다. 다마르 동쪽 알 무와히브에 거처한 그는 부친에 의해 마즈와 추방을 겪었던 유대인들에게 사나 성내의 기존 집들을 돌려주었다. 한편 그의 치세에 카심 왕조의 쇠퇴는 더욱 분명해졌다. 1689년 하드라마우트 수복 시도는 실패했고 1708년 야파 부족에게 역으로 변경을 약탈당하였다. 1691년과 1709-12년엔 진압되긴 했지만 옛 수도 사다에서 반란이 일어났다.[22] 1714년에는 반란군이 이맘이 있던 알 무와히브를 일시 포위하기도 하였다.
1716년 알 만수르 알 후세인의 반란 시에는 그 군대가 사나 근교를 약탈, 유대인 구역인 비르 알 아잡이 파괴되었다. 그후 알 마흐디는 아들 알 카심에게 반란 진압을 맡겼으나, 알 카심은 알 만수르에게 패한 후 그에게 복속하였다. 이에 알 마흐디는 양위하였는데, 알 카심이 선수를 쳐 스스로 이맘으로 선언하였다. (알 무타와킬 알 카심) 그러한 상황에서 연로한 알 마흐디는 알 무와히브에서 포위된 채로 사망하였고, 알 만수르 역시 샤라하에서 고립된 채로 1720년 사망하였다. 이로써 이맘국을 통합한 알 무타와킬은 1726년 한동안 경시된 사나의 아르합 부족과 대립을 빚었다. 알 무타와킬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그들과 맞서 힘겹게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듬해 아르합 부족은 하쉬드, 바킬리 등 다른 부족들과 재차 봉기하였고 이맘의 아들 알 후세인마저 가담하였다. 이에 학자 무함마드 빈 이스마일 알 아미르가 중재에 나서 휴전이 성립되었고, 몇달 후 알 무타와킬은 사망하였다. 이후 반군에 가담했던 알 후세인이 이맘으로 계승한다. (알 만수르 알 후세인 2세) 그는 친척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반란에 시달렸다.
알 만수르는 한때 앗 나시르에게 복속하기도 했으나 결국 1729년 후자는 사나로 찾아와 복속하였다. 그럼에도 혼란은 지속되었다. 1731년 아덴에는 라헤즈 술탄국이 세워졌고, 타이즈의 동생 아흐마드도 사실상 자립하였다. 그무렵 유럽은 자바카리브해 식민지에서 커피를 수입, 예멘의 커피 독점권이 붕괴되었다. 이로써 카심 왕조의 경제는 악화되었고[23] 그러한 상황에서 1748년 알 만수르는 사망하였다. 그를 계승한 알 마흐디 압바스는 경제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고 사나에 여러 공공 건물들과 사원을 세웠다. 1761년 덴마크 사절단을 이끈 독일인 탐험가 카슨 니부르가 사나의 궁정을 방문하고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24] 같은해 알 마흐디는 사나의 14개 시나고그 중에서 12개를 파괴하였고 시내의 유대인들이 집을 7.5m 이상의 높이로 짓지 못하게 하였다. 한편 사나의 주민들이 이단적으로 행동한다고 여긴 카디들은 1768년 반란을 선동했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다만 1772년 옥수수 부족에 분노한 사나 주민들이 실제로 봉기하자 알 마흐디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이를 진압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 및 프랑스 외인부대를 두었다.
1775년 알 마흐디가 사망하자 사나 총독이던 아들 알 만수르 알리가 계승하였다. 1781-85년 사이디인 이븐 이샤크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한편 아라비아 반도의 신흥 강국 1차 사우디 국가의 동맹인 아시르의 아부 눅타가 1803년부터 이맘국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더니 티하마를 정복하였다. 그럼에도 알 만수르는 반격을 계획만할 뿐 실행하지 못하였다. 왕권의 쇠퇴로 사나는 와지르 하산 알 울피의 수중에 있다가 1808년에야 이맘의 아들 아흐마드가 그를 체포하고 실권을 회수할 수 있었다. 연로한 이맘 대신 실세가 된 아흐마드는 사나를 습격하던 인근 부족들을 잠재우는데 성공하였고 1809년 부친이 사망하자 이맘이 되었다. (알 무타와킬 아흐마드) 그는 민심을 얻기 위해 세금 인하, 사면, 빈민 구제 등에 나섰다. 비슷한 시기 반기를 들었던 모카의 총독이 죽었고, 와하비 세력의 준동도 메흐메트 알리의 원정 후 수그러들었다. 후자가 진행 중이던 1816년 알 무타와킬은 사망하였고 아들 알 마흐디 압둘라가 계승하였다.

2.4.1. 혼란의 재림


그 무렵 카심 왕조의 세력은 미약하였다. 호전적인 부족들은 점점 더 많은 보조금을 요구하였고, 1818년 알 마흐디가 바클리 부족의 사절단을 홀대하자 이들은 사나를 함락하고 22일간 약탈하였다. 알 마흐디가 12만 리얄 납부를 약속한 후에야 그들은 철수하였다. 다만 같은해 티하마를 정복한 오스만 군은 이맘이 이스탄불 궁정으로 커피를 보내는 대가로 일대를 돌려주었다. 한편 1820년, 그 3년 전에 영국인 장교가 현지인들에게 박대받은 것을 핑계로 영국군은 모카를 공격하였다. 이듬해 알 마흐디는 모카의 영국 상관에게 관세 완화를 약속하였지만, 이미 항구는 아덴에게 밀려났다.[25] 1832년에는 오스만 군에서 이탈한 일단의 튀르크 군단이 티하마로 남하, 모카와 호데이다를 점령하였다. 이듬해에 영국의 승인으로 메흐메트 알리의 이집트 군이 개입하여 모카를 점령한 후 약탈하였다. 그후 현지인들과 충돌한 이집트 군은 1837년까지 예멘 서해안을 평정하였다. 무력하게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국토 보전을 할 수 없다고 여긴 알 마흐디는 메흐메트 알리에게 나라를 넘길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하였다.
1835년 11월 알 마흐디가 사망할 당시 카심 왕조는 허상에 불과하였다. 그를 계승한 아들 알 만수르 알리 2세는 애주가로서 이맘의 자격조차 없었다. 1836년 사나를 방문한 영국인 크루텐든과 후르톤은 4년간 비가 내리지 않은 이유로 도시는 기근 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다고 기록하였다. 1837년 알 만수르가 사나의 군부에 의해 폐위되고 친척이자 사나의 한 사원의 이맘이던 앗 나시르 압둘라가 집권하였다. 당시까지 예멘 서부는 이집트 지배 하에 있었고, 앗 나시르는 출두하여 사나를 내놓으라는 메흐메트 알리의 명을 거절하였다. 앗 나시르는 사나 서쪽의 타이비 이스마일파를 탄압했는데, 이에 하라즈의 타이비 세력이 자립하였고 이맘 본인도 1840년 그들에게 암살되었다. 그후 알 만수르의 조카 알 하디 무함마드가 이맘이 되었는데, 1840년 이집트 군은 예멘에서 철수하였다. 이듬해 알 하디는 모카와 타이즈를 수복하였지만 이미 많은 시민들이 안정을 찾아 영국령 아덴으로 또난 상태였다. 그는 영국에게 실지 회복을 위한 원조를 청했으나 거절되었다. 1844년 알 하디가 사망하자 알 만수르가 복위하였다. 그는 오스만에 복속한 티하마를 공격하여 몇몇 승리를 얻었으나 와병과 숙부 알 카심의 반란으로 철수하였다.
1845년 친척 무함마드 이븐 야흐야가 티하마 군대와 사나 앞에 나타나자 주민들은 성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알 만수르를 재차 폐위하며 이맘이 되었다. (알 무타와킬 무함마드) 그와 총리 아부 지야드 빈 하산은 사나의 유대인들을 크게 박해하였고 거금을 내놓을 때까지 고문을 가하였다. 1847-48년 알 무타와킬은 기존 동맹이던 티하마를 공격, 그 파샤인 샤리프 후세인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자비드, 모카 등이 수복되며 카심 왕조는 중흥기를 맞는듯 하였다. 그러나 샤리프 후세인이 감금지에서 탈출, 타이비 세력의 도움으로 자이디 군을 격파하고 내통자를 통해 모카를 점령하였다. 알 무타와킬 역시 1848-49년 타이즈와 야림을 점령하며 반격하였다. 그러던 1849년 4월 오스만 군이 호데이다에 상륙, 샤리프 후세인을 항복시켰다. 오스만 사령관 텝피크 파샤의 소환에 알 무타와킬 역시 그곳으로 향하여 오스만 제국에 복속하기로 서명하였다. 1849년 7월 15일, 그는 튀르크 군과 함께 사나에 입성하였다. 그 다음날 맹렬한 군중 봉기가 일어나 수백의 튀르크 인들이 살해되었다. 중상을 입은 텝피크 파샤는 곧바로 알 무타와킬을 공모 혐의로 폐위하고 알 만수르를 복위시켰다. 25일 후 튀르크 군은 호데이다로 철수하였다. 투옥되었던 알 무타와킬은 그해 12월 11일 반역 혐의로 처형되었다.
오스만 군대가 철수한 후 사나의 혼란은 극에 달하였다. 알 만수르의 억압적인 재상 알 미스리에 분노한 사이디, 카디들이 사나를 떠나 옛 수도 사다에서 알 만수르 아흐마드를 이맘으로 세웠다.[26] 1850년 알 만수르 아흐마드는 사나를 포위했는데, 도시의 귀족들은 알 만수르를 폐위하고 다른 이맘 알 무아야드 압바스를 추대하였다. 두 이맘들간의 공성전이 이어졌고, 시타델에서 농성하던 알 무아야드는 결국 항복하였다.[27] 하지만 재정 파탄으로 군대의 봉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던 알 만수르 아흐마드는 알 만수르가 하쉬드와 바클리 부족과 함께 사나를 포위하자 3개월만에 도시에서 패주하였다. (1851년 2월) 하지만 같은해 알 만수르가 원정에 나간 틈에 알 무타와킬의 아들 알 하디 갈립이 반란을 일으켜 집권하였다. 그는 관대하게도 부친의 죽음에 대한 완전한 복수 대신 알 만수르의 재산을 빼앗는 것으로 그쳤다.[28] 사나 북쪽의 라우다 회의에서 단독 이맘으로 선출되었음에도 알 하디의 치세 역시 불안의 연속이었다. 경쟁 이맘 압둘라의 도전에 그와 사나를 양분하는 지경에 이른 끝에 1852년 알 하디는 사나에서 축출되었다.

2.4.2. 사나 '코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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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 구도심의 중심인 밥 알 야만과 대사원 일대
1852년 알 하디의 축출 이후 사나 시민들은 셰이크 아흐마드 알 하이미를 왈리로 하는 자치 정부를 세웠다. 공석으로 남은 이맘위에 대해 이듬해 울라마는 카심 가문 밖의 알 만수르 무함마드를 선출하였다. 하지만 그 역시 얼마 못 가 주민들에 의해 축출되었고, 알 만수르는 도시를 나서며 알 만수르는 그들을 저주하였다.[29] 그 때문인지 사나는 여러 재앙에 직면하였다. 가축과 포도에 병이 퍼졌고, 1854년에는 사나 자체에 역병이 엄습하였다. 이후 안정을 되찾아가던 사나는 다시 자이디 이맘들의 도전에 직면하였다. 1858년 이전에 축출되었던 알 하디가 사나로 돌아오려 했으나 시민들에게 입성을 거부당하였다. 이에 그는 도시를 포위했으나 격퇴되었고, 왈리 알 하이미의 명목상 복속에 만족해야 했다. 이듬해인 1859년, 알 하이미의 실정에 지친 시민들은 그의 암살을 계획하였다. 알 하이미는 도시를 탈출하여 해안의 오스만령으로 향하였으나 현지 부족들에게 붙잡혀 카우카반 서쪽 앗 타윌라에 웅거하던 이맘 알 만수르 알 후세인 3세에게 넘겨졌다. 그후 알 만수르는 무정부 상태이던 사나를 점령, 도시는 7년만에 이맘에 의해 통치되었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맘의 귀환을 반기지 않았다. 감금된 알 하미미의 선동으로 일어난 군중 폭동에서 하라트 알 필라이히에 있는 이맘의 저택이 파괴되기도 하였다. 일련의 혼란 후 1860년 알 만수르는 사나에서 축출되었고, 내전에 지친 사나의 주민들은 자치를 선포한 후 셰이크 무흐신 무이드를 왈리로 선출하였다. 무흐신은 비 카심 계열로, 1855년부터 이맘을 칭하며 산간 요새에 웅거하던 알 무타와킬[30]을 이맘으로 인정하였다. 1863년 알 무타와킬은 알 만수르를 격파하며 입지를 다졌다.[31] 이에 불안을 느낀 무흐신이 그를 견제하였고, 양측의 불화로 이어졌다. 알 무타와킬은 1867년 무력으로 사나를 점령했으나 적대적인 분위기에 곧 물러났고, 이듬해 쿠트바에 언급되는 조건으로 무흐신과 화해하였다. 알 무타와킬은 사나 부근의 이스마일리 마크라마 세력을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도시는 그들의 약탈에 시달렸다. (1870년경) 이로써 알 무타와킬에 대한 사나의 여론은 냉랭해지자, 무흐신은 그 대신 알 하디를 이맘으로 모셨다. 사나의 독립된 지위는 20여년의 실험 끝에 외세의 개입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2.5. 근현대


1869년 수에즈 운하의 개통은 유럽-인도뿐만 아니라 이스탄불에서 예멘 간의 수송도 크게 수월해졌다. 점점 커져가던 예멘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경계하던 오스만 제국은 마침내 아흐메드 무크타르 파샤 휘하의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사나의 무흐신과 이맘 알 하디는 크림 전쟁 이후 근대화된 오스만 군대에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고, 1872년 4월 튀르크 군대는 자이디 원로들과 함께 사나에 진주하였다. 이로써 카심 왕조의 자이디 이맘국은 약 240여년 만에 사실상 멸망하였다. 빈곤한 이맘 알 하디는 정치에서 배제된 채로 오스만 당국의 연금을 받으며 살다가 1885년 알 라우다에서 사망하였다. 1873년까지 북부 예멘 대부분이 오스만 지배 하에 놓였고, 사나는 신설된 예멘 빌라예트의 주도가 되었다. 17세기의 실패에서 반면교사를 얻은 오스만 조는 각 부족들을 회유하며 관직을 주어 분산된 부족제 대신 중앙 정부를 세우고 근대화와 세속화를 통해 중앙 통제력을 강화하려 하였다.
오스만 지배기에 사나에는 새로운 도로와 학교, 병원이 세워지는 등 도시 계획이 이루어졌다.[32] 그러나 오스만 제국에 있어 변방 중 변방이던 예멘은 기피되던 임지였고, 정계에서 밀려나거나 좌천된 이들이 주로 부임하였다. 따라서 대체적으로 그 통치의 수준과 열정이 낮았고 부패가 만연하였다. 또한 근대적인 탄지마트 개혁은 자이디 부족들에 있어 이단적이라 여겨졌고, 일련의 실패한 반란들[33]을 거쳐 저항의 불씨는 비 카심 계열의 이맘 알 하디 샤라프 앗 딘[34]에게로 이어졌다. 사나 남쪽의 하다흐에서 게릴라 활동을 이어가던 알 무타와킬[35]의 후 이맘위에 오른 그는 대오스만 항쟁을 결의, 옛 자이디 거점인 사다[36]를 거점으로 1884년 여름부터 본격적인 반란에 나섰다. 알 하디는 사나 서쪽의 자피르 등 비옥한 지대를 공격했으나 오스만 군에게 사다까지 밀리는 등 힘겨운 싸움을 지속하다가 1890년 사망하였다. 그 무렵 오스만령 예멘은 해안의 루하야에서 훗자, 아므란, 사나에 이르렀고 그를 꼭짓점으로 남쪽으로 꺾여 다마르, 라다, 카타바, 타이즈, 모카로 이어지는 국경을 지니고 있었다.[37]

2.5.1. 자이디-오스만 전쟁


19세기 후반 사나에는 카심 왕가의 방계인 무함마드 이븐 야흐야 하미드 앗 딘이 살고 있었다. 1839년 사나에서 태어난 그는 자이디 종교 학자로 성장하였고 1876년 오스만 당국과 마찰을 빚은 후, 그에 의해 다른 사나의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호데이다로 유배되었다. 2년간의 유형 후 사나로 돌아온 무함마드는 이맘 알 하디의 누이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1890년 알 하디가 사망했을 당시 오스만 당국의 탄압으로 마땅한 후보감이 없던 차에 그는 울라마에 의해 이맘으로 선출되었다. 이에 사나를 떠난 무함마드는 1890년 7월 사다에서 이맘위에 올랐다. 그의 정식 칭호는 알 만수르 빌라 아흐마드 앗 딘 무함마드였다. 알 만수르는 돈과 곡식을 분배하여 울라마의 지지를 얻었고, 북부의 부족들에게 서신을 돌려 대오스만 항쟁 동참을 촉구하였다. 대부분의 부족들이 이에 호응하자 1891년 알 만수르는 세력을 규합하여 거병하였다. 그해 핫자와 다마르가 점령되었고 1892년에는 실패로 귀결되었지만 총독부가 있는 사나 자체도 잠깐 포위하였다. 실정으로 민심을 잃어가던 오스만 당국의 영향력은 점차 축소되었다.
오스만 측은 군사 개입으로 실지를 수복할 수는 있었지만, 민중에 대한 이맘의 영향력 확대는 막을 수 없었다. 자이디 부족들의 치고 빠지기 전술은 오스만 군대를 소모시켰다. 1891년과 1896년 오스만 술탄 압둘 하미드 2세는 알 만수르에게 서면으로 좋은 관직을 대가로 복속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이맘은 그의 목적은 단순히 정치적인 것이 아닌, 샤리아를 적용하고 부조리를 바로잡는 것이라며 거절하였다. 예멘인들에게 그는 세속적이고 서구에 물든 터키인들에 대항하는 이슬람의 수호자로 인식되었다. 한편 전쟁이 소강 상태로 접어들자 알 만수르는 대부분의 북부 부족들 사이의 관습법을 폐지하고 신앙의 전사들을 위한 봉급과 과부, 고아, 교사들을 위한 기부의 재정비를 통해 카심 왕조 때의 전통적인 지배 체제를 회복하였다. 전쟁은 1898년 재개되었으나 큰 규모의 전투는 없었다, 그러던 1904년 6월 알 만수르는 샤라하 부근의 카플라트 아다르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로서 이맘위에 오른 알 무타와킬 야흐야는 대규모 전쟁에 나섰다. 1904년 말엽 자이디 군대는 각지에서 발생한 봉기와 함께 다마르, 야림을 점령하였다. 동시에 사나와 그 외항 호데이다 간의 교통로와 전선을 차단한 후 12월 12일에는 사나를 포위하였다. 도시를 구원하기 위한 오스만 원군은 반복적으로 매복에 당해 분쇄되었고, 1905년까지 오스만측 사상자는 2만 5천을 상회하였다. 그해 봄 자이디 군대는 핫자, 마나카, 이브, 카타바 등을 함락하였고 사나는 6개월간 고립된 끝에 1905년 4월 항복하였다. 알 무타와킬은 사나의 오스만 수비대를 살려주는 조건으로 휴전을 요구하였다. 우선 1년 휴전이 성립되었고, 6월부터 협상이 개시되었는데 지지부진하였다. 그러던 8월 오스만 군이 휴전을 파기, 진군하여 사나를 수복하였다, 이후 야림, 이브, 아므란, 카우카반, 툴라 등이 오스만 군에게 점령되었다. 오스만 당국은 여세를 몰아 반군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사다의 관문 샤라하까지 진군했으나 험준한 지형과 게릴라에 막혀 철수하였다. 알 무타와킬이 반격에 나서자 오스만 군은 남쪽 타이즈까지 도주하였다.
오스만 측의 전진 기지들을 일소한 자이디 군은 1905-6년 겨울에 재차 사나를 봉쇄하였다. 그러나 호데이다에서 재정비한 오스만 군이 재차 반격에 나서자 알 무타와킬은 다마르, 야림, 아므란, 카우카반, 핫자, 앗 타윌라 점유 조건의 휴전을 제안하였다. 사실상의 고지대 분할안에, 전쟁에 지쳐있던[38] 오스만 당국 역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1906년 8월 오스만 사절단의 이맘 방문을 시작으로 협상은 5년간 지속되었다. 협상의 진척에 불만이던 알 무타와킬은 1911년 다시 공세에 나서 1월 12일 사나를 기습 점령하였다. 다만 다른 부족들의 비협조로 곧 철수하였고, 그해 6월부터 비밀 협상에 임한 끝에 10월 18일 다안 협정이 체결되었다. 자이디 이맘국은 칼리파[39] 칭호를 포기한 채 오스만 조의 제후국으로써 점령지를 지배하고, 오스만 영토 중에서도 저지대 샤피이 지역 외에는 전통적인 샤리야가 적용된다는 내용이었다. 1913년 이스탄불 조정이 협정을 비준, 이로써 30년간 이어지던 자이디-오스만 전쟁은 평화적으로 마무리되었다.[40] 이는 튀르크 제국에 대한 아랍의 첫번째 온전한 승리로, 3년 후 '아랍 대반란'의 전조로도 여겨진다.

2.5.2. 무타와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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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 외곽의 알 무타와킬 야흐야의 궁전인 다르 알 하자르 (바위의 집)
1914년에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2년 후 아랍 대반란으로 헤자즈를 상실한 오스만 제국은 예멘과 단절되었다. 그럼에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내부를 다지던 알 무타와킬에게 1918년 11월 14일 오스만 제국의 패전 소식이 전해졌다.[41] 3일 후 사나로 향한 그는 각 부족 대표들과 튀르크 수뇌부, 법관들 및 수많은 군중이 모인 자리에서 전 예멘의 통치자로 선포되었다.[42] 그의 첫 칙령은 한세기 이상 혼란에 시달렸던 수도 사나에 무장한 채로 입성하는 것을 금지하고 각 성문에 보초병을 둔 것이었다. 북예멘 지역은 수월히 그의 통치 하에 통합되었고, 기존 오스만 관리들 역시 남기 원하는 자에 한해 그대로 기용되었다. 1919년에는 사나 주변의 부족들을 중심으로 정규군을 창설하였고, 그와 함께 아들들을 주요 지역의 총독으로 봉하며 중앙 집권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근대 국가의 건설과 별개로 알 무타와킬은 결국 보수적인 군주의 전형이었다. 외부 사상의 유입을 경계하던 그는 같은 아랍권에 조차도 고립주의 정책으로 일관하였고, 사나의 인프라 개선을 추진하긴 커녕 오스만 지배기에 세워진 여학교를 폐쇄하였다.
오스만 체제의 근대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이맘의 중세식 정치에 반발하는 조직들이 생겨났다. 특히 수도 사나에서 그 움직임이 활발하였고,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1930년대에 세워진 파타트 알 풀라이히였다. 이는 사나의 풀라이히 마드라사에서 공부한 무슬림 학자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는데, 이를 경계한 알 무타와킬은 그 지도부 대부분을 투옥시켰다. 1941년에는 다른 조직인 샤바브 알 아므르가 이슬람 원칙에 입각한 의회 구성 등 나흐다 (개혁)를 제창하였으나 역시 탄압에 직면하였다. 어수선한 분위기의 1948년 2월, 사나 외곽으로 나들이를 나선 이맘의 리무진은 영국의 지원으로 이맘위를 노리던 알 와지리 조직의 습격을 받았다. 알 무타와킬은 동행한 손자와 함께 살해되었다. 한편 자이디-오스만 전쟁이 한창이던 1906년 당시 사나의 유대인들은 오스만 군이 일시적으로 도시를 비운 틈에 전부 성밖으로 나와 이맘을 맞이한 바가 있을만큼 이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던 1948년 그가 암살된 후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민 금지령에도 영국령 아덴을 통해 신생 이스라엘로 이주하였다.
알 무타와킬의 암살 후 알 와지리 지도자 압둘라 이븐 아흐마드가 이맘을 칭하며 사나를 장악하였다. 한편 타이즈에 있던 왕자 아흐마드는 군대와 함께 핫자로 북상, 현지 왕당파 부족들의 보급을 받으며 병력을 모았다. 곧 그의 동생 하산이 합류하였고, 북부 부족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던 그는 그들과 함께 사나를 포위해 점령하였다. 와지리 반란은 몇 주만에 사나에서만 5천의 사상자를 내며 진압되었다. 그후 자칭 이맘 압둘라를 포함한 반란의 주모자들 뿐만 아니라 개혁파 조직인 샤바브 알 아므르의 지도부 역시 처형되었다. 이맘 앗 나시르로 등극한 아흐마드는 (반란에 협조한 대가로?) 부족들에게 약탈되도록 한 사나 대신 본거지인 타이즈를 수도로 삼았다. 자다만 이는 사나 주민들의 반왕정 기류를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불만을 완화하고자 앗 나시르는 부왕의 고립주의에서 벗어나 점진적인 경제, 정치적 자유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정권의 정예 병력이던 이라크 장교단 중 나세르주의자들이 1955년 3월 쿠데타를 일으켜 일시적으로 앗 나시르를 폐위시키기도 하였고, 1961년 사나 시민들은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다.

2.5.3. 공화국, 통일,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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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공습으로 파괴된 옛 저택
그러던 1962년 앗 나시르가 사망하고 일주일 후 공화파 군부는 재차 쿠데타를 일으켰다. 신임 국왕이자 이맘 알 만수르 무함마드 (알 바드르)는 산지로 도주하였고, 사나는 14년만에 이번에는 예멘 아랍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후 공화국 정부와 이맘 군대 간에 벌어진 북예멘 내전은 사나의 유서깊은 구시가지를 일부 파괴하였다. 6년간 이어지던 내전은 1968년 2월 이집트 등의 원조에 힘입은 공화국의 승리였다. 그러나 사나에선 연이은 쿠데타와 정치 테러가 이어지며 혼란이 이어졌고, 도시는 70년대 후반에야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한편 1967년에 아덴을 중심으로 한 남부는 한세기의 영국 지배에 이어 예멘 인민 민주 공화국이 세워졌다. 두 예멘 정부는 1972년과 1978년 두 차례 전쟁을 벌인 후 협상을 통해 1990년 통일을 이룩하였다.
1994년 남북 예멘은 재차 분열되었으나 북예멘이 군사적 우위를 앞세워 무력으로 재차 통일하였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경제 위기와 함께 내부 불만이 커져가던 때에 장기 집권하던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은 2008년 사나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대사원을 세우는 등 실정을 거듭하였다. 2011년 아랍의 봄과 함께 사나에서는 타흐리르 광장 등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그 결과 2012년 살레 정권은 퇴진하였다. 하지만 그 세력과 연합한 자이디 계열인 후티 군단이 반란을 일으키며 예멘은 재차 내전에 돌입하였다. 2015년 1월 후티 군대는 사나를 장악하였고 대통령 하디는 아덴으로 도피하였다. 북예멘 내전 당시 자이디 왕실을 지원하던 사우디는 이번에는 자이디에 맞서 하디 정부를 지원, 수차례 사나를 공습하였다. 그로 인해 구시가지가 크게 파괴되었다. 2017년 말에는 사나로 돌아온 살레 전 대통령이 후티 측으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도주하던 중 사살되었다.

3.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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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심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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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의 거리
비록 이곳이 내전 중이지만 옛날 내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예멘의 목욕 문화랑, 시밤, 예멘 특유의 집과 시내를 둘러볼 수 있었다. 물론 언제까지나 옛날 얘기다. 이미 사나는 후티 반군에게 사실상 점령당했으며, 테러가 매우 자주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을 여행하다 살아 돌아온다 해도 여권법에 의해서 처벌을 받는다.
[1]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일 것[4]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5] 198mm에 정도이다. 물론 아라비아반도가 사막 기후인 것을 생각하면 198mm는 스텝 기후에 가까운 강수량이다.[6] 이는 히자즈 지방 외의 도시에 지어진 첫 대사원이었다.[7] 배수구 역시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아주 구체적으로.. 칭송하였다.[8] 901.1 / 902.5 / 903 - / 905.11 / 906.4 / 906.11 / 910.4 / 910.6 / 911[9] 방어가 취약한 사나의 상실을 예견했는지 도시를 얻은 후에도 디빈에 산악 요새를 세워 머물렀다.[10] 혹은 1055년[11] 이맘은 북부 부족들의 활약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하미드 앗 다울라는 항복을 선언하고 잔여 병력과 도시를 떠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승리 직후 북부 부족들이 각자의 지역으로 돌아가버리자 알 무타와킬 역시 별수 없이 회군하였다.[12] 혹은 1175년[13] 혹은 대규모 반란에 직면한 것이 원인이었다고도 함[14] 군중에 대한 이맘의 영향력과 그의 야심을 경계한 것이 발단[15] 그외에 그의 치세에 사나에는 처가인 쿠르드계 가문이 알 압하르 사원을 세운바 있다.[16] 다만 1399년 알 마흐디는 간수들의 도움으로 탈출, 1436년 역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은둔하며 집필에 전념하였다.[17] 그해 말엽 타히르 조와의 전쟁이 재개되었지만, 그 왕자 아미르가 전사한 후 철수하였다.[18] 아덴에서 계속 저항하다가 자이디 군에게 포위된 후 오스만 제독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처형당하였다.[19] 예컨데 그의 조카 알리는 오스만 조에 복속하고 카우카반을 통치하였다. 그 후손들은 1626년 아미르로 격상되어 1872년까지 그곳을 통치한다. 한편 알 무타하르는 예멘의 타이비 종파를 탄압, 그들이 구자라트로 망명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다.[20] 다만 이로써 오만의 술탄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그 강력한 해군에게 공격당하여 한동안 해상 무역이 침체되기도 하였다.[21] 아라비아에 두 종교가 있지 않는다는 무함마드의 언행에 따라 유대인 추방을 계획한 선대 이맘 알 무타와킬이 와병으로 시행하지 못하고 죽으며 후계자 알 마흐디에게 시행을 명령. 따라서 유대인들이 거금을 납부하겠다는 제안도 묵살된 채로 행한짐, 다만 소말리아의 제일라로 추방하려던 계힉은 유대인들을 동정한 아랍 부족들의 탄원으로 서북 해안에 추방하는 것으로 국한됨. 또한 이듬해 유대인 장인들의 부재로 농기구 등 기본재가 부족해진 것에 대한 민원으로 마즈와에 식량 보내고 복귀 허용. 다만 성내의 집 포기하게 하고 사나에서 2km 떨어진 카아 알 야후드에 살도록 조치됨[22] 1699년엔 사이디인 이브라힘 알 무하트와리가 마흐디를 자칭하며 반란을 겨우 진압되었다.[23] 17세기 83만 리얄이던 1년 수입은 18세기 초엽 30만 리얄로 급감하였다. 알 마흐디의 노력으로 50만 디나르 선까지 회복되긴 하였다.[24] 정치적 상황에 대해 니부르는 다음과 같은 분권화된 상황을 기록하였다. 카우카반 - 사이드 영주 / 아부 아라쉬 - 샤리프 / 사다 - 사이드와 독립적인 셰이크들 / 나즈란 - 마크라미 / 카울란, 마리브 - 독립 셰이크 / 아덴 - 자체 군주[25] 영국인들은 모카 대신 아덴에 더 큰 잠재력을 발견하곤 1839년 그곳을 점령하였다. 이후 모카는 쇠퇴하고 사실상 버려진다.[26] 10세기 중반의 이맘 알 만수르 야흐야의 23대손인 그는 17세기 이래로 카심 가문원이 아닌 유일한 이맘이다.[27] 1851년 그는 이맘 주장을 내려놓고 학자로 은퇴하였다.[28] 그후 알 만수르는 계속해서 사나 근교에 살았고 1870년 고지대의 혼란을 끝내주도록 오스만 조정을 초청하는 편지를 공동 집필하기도 함[29] 한편 본거지 와딜 시르로 돌아간 알 만수르는 1890년 사망 시까지 이맘을 칭하였다.[30] 13세기 말의 이맘 알 무타와킬 알 무타하르의 15대손으로 샤하라 출신.[31] 이후 사실상 은퇴한 알 후세인은 1872년 오스만 총독 아흐마드 무크타르 파샤가 사나에 입성할 때에 동행한 원로 중 한명이었다. 그러고 16년 후 그는 사나에서 사망하였다.[32] 이러한 개혁들은 발전하는 이집트와 아덴의 영국, 소말리아의 이탈리아, 지부티의 프랑스 등 외세에 맞서고 사나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만 제국의 변방인 한계로 적극적으로 추진되지 못하고 제한적인 성과만을 거두었다.[33] 1876년 하쉬드와 바클리 부족의 반란이 대표적. 오스만 당국이 선물 주어 무마시킴. 아흐메드 이제트 파샤는 자이디 부족들에 대한 과도하고 불필요한 원정을 자제하고 (사나에만 수비대를 남긴 채) 고지대에서 철수해 티하마 저지대만 소유할 것을 주장하기도 함[34] 14세기 전반의 이맘 알 무아야드 야흐야의 14대손[35] 1872년 하다흐에서 하쉬드, 아릅합 부족과 봉기했으나 같은해 오스만 군에게 연패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사망 (1878년 7월 29일) 시까지 오스만 당국을 괴롭혔다. 저항을 이어가던 그의 아들들도 1888년 연금을 대가로 오스만 측에 복속하였다.[36] 정확힌 그 남쪽 교외 산지의 앗 사마 성채를 세워 거처로 삼음[37] 알 하디의 반란은 오스만 조의 고지대 지배력을 약화시키긴 했지만 예멘 지배 자체를 위협하진 못하였다. 다만 후의 반란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공이 있다.[38] 1904년부터 1911년까지의 반란은 오스만 조에게 매년1만 병력과 50만 파운드를 소모하게 하였다. 쇠퇴하던, 그리고 빚더미에 앉아 있던 제국에게는 큰 부담일 수 밖에 없었다.[39] 정확히는 전부터 자이디 이맘들이 '아미르 알 무미닌' (신도들의 사령관)을 칭한 것을 포기한다는 것[40] 쇠퇴하던 오스만 제국에게 있어 1911년 9월 이탈리아의 리비아 침공으로 인해 유발된 양면전선을 유지하기 부담스러웠고, 예멘의 고산지대 보다는 지중해권인 리비아의 트리폴리가 훨씬 중요했다.[41] 항복 선언 자체는 10월 30일이었는데 2주만에 전해진 것[42] 정식으로 무타와킬 왕국이 선포된 것은 1926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