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약신강
君弱臣强
이 강희제의 말에 조선은 안그래도 청나라를 오랑캐국이라며 싫어했는데[1] 이후 굉장히 분노하여 대기근으로 사정이 극도로 나쁜 와중에도 청에 도움 요청을 하지 않았고, 대기근 동안 더 굶었다(...). 강희제의 의도가 조롱인지 조언인지는 불명이지만[2] , 확실한 건 경신대기근 시기 '''중국도 포함한''' 지구상 대부분의 국가가 대기근을 겪었다.[3] 이후 을병대기근이 일어나 도움 요청이 들어오자 강희제는 조선으로 쌀 5만석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조선에선 고마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 쌀을 굉장히 치욕스럽게 여겨 도움을 요청한 신하들을 탄핵했으며 대기근의 원인이 청나라 쌀이라는 소문까지도 돌았다.[4] 이후로도 조선은 더더욱 청나라를 싫어하게 되었으며[5] 고려천자라는 별명이 붙었던 만력제[6] 를 모신 만동묘의 제사를 지냈다.
사실 정치체제가 대개 그러하듯 어느 한 주체가 너무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니다. 조선에 패기넘치는 충고를 날린 강희제의 경우 문자의 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하고 분서와 검열을 행했는데,[7] 적어도 조선에서는 왕이 아무리 진노했다고 해도 그 정도까지 피바람이 부는 일은 적었다. 즉 강희제의 저 말은 왕권이 지나치게 강한 나라에서 그 부작용까지 실시간으로 집행했던 황제의 '''자뻑'''[8] 에 지나지 않는다.
동아시아 역사에서는[9][10] 거의 모든 나라들이 막장 테크를 탈 때 신하의 힘이 강력해 졌다는 것을 봤을 때 조선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당장 중국사에서 십상시의 예가 있다. 게다가 건국 초 청나라의 경우, 실제로 황제의 권한이 명나라와 비교해봐도 유달리 강한 편이었다.
어디까지나 왕조 국가인 만큼, 기본적으로 왕에게 주어진 권한은 매우 강력하고 왕통의 불안 요소만 없다면 조선의 왕권도 대단히 강력해진다. 조선의 경우, 왕통이 불안하게 승계되다보니 왕권이 약화되는 면이 있었다. 반정이나 방계로 교체되는 경우가 자주 있었고 그때마다 왕권이 약해지고 신권이 강해지는 일이 벌어졌다. 저 말이 나왔던 현종 시대는 소현세자 문제 때문에 효종, 현종의 왕권이 어느 정도 제약 받을 수 밖에 없었던 문제가 있었다.[11]
이론상으로 조선의 왕은 마음 먹으면 어떤 신하를 불문하고 죽이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고, 모든 재판을 주관하여 그 어떤 죄라도 사면해 줄 수 있었으며, 왕이 내린 명령은 곧 법률이었다. 조선의 왕은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을 한 몸에 가졌다. 또한 왕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내수사의 내탕금은 조선 시대 내내 고갈된 적이 없었으며, 왕실은 조선 내에서는 누구와도 비교할 상대가 없는 탄탄한 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실제로 현종의 뒤를 이은 숙종에게는 별다른 불안 요소가 없었기 때문에 무서울 정도로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다. 즉, 이론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조선은 '''한국사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두를 수 있는''' 국가였다.
다만 불안 요소 없이 멀쩡하게 왕권을 누린 왕이 아버지가 불안 요소를 다 쳐내 준 세종, 스스로 사화를 일으켜 다 쳐내버린 연산군, 왕의 적장자로서 원자부터 세자까지 정석 테크 트리를 탄 숙종 정도 밖에 없다.
숙종의 장남 경종은 폐서인 된 장희빈의 아들인 데다가 아버지인 숙종의 눈밖에 난 천덕구러기 신세라 불안 요소가 다분히 많았지만, 일단 왕위에 오른 뒤에는 자신의 정파를 바로 세우고 동생 연잉군의 세제 자리를 지켜줄 정도의 권위는 확보할 수 있던 걸로 보아 왕의 역량에 따라서는 군약신강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심지어 경종은 신임옥사로 자기한테 딴죽걸던 노론 4대신을 저세상으로 보내버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왕의 권력 = 국력(國力)이라는 공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한민족이 세운 국가, 그 중 특히 조선은 전제군주제 국가 치고는 군주의 패악질이 다른 주변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인데, 여기에는 신권이 끊임없이 왕을 견제한 점이 매우 크게 작용한다. 왕권과 신권이 균형을 이루어야 나라가 잘 굴러가는 법이다.[12] 단지 조선 후기에 들어서 신권이 너무 강해진 게 문제일 뿐.
다만 조선 후기에 신권이 너무 강해진 것도 정조 사후 왕위에 오른 순조가 정치에 지나치게 무관심했고 그 이후 헌종이 지나치게 일찍 세상을 떠나고 중앙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철종이 왕위에 올라 마찬가지로 무기력 했기 때문이지, 왕의 권한이 약했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조선 시대를 통틀어 (세도 정치도 일종의 신하의 권력이라 봐야한다면) 신권이 왕권을 완전히 압도했다고 볼 수 있는 시기는 순조 - 헌종 - 철종에 이르는 3대 뿐이고[13] , 이도 곧 강한 권력 의지를 가진 흥선대원군이 아들 고종을 왕위에 올리며 집권하자 바로 뒤집어진다.
그나마 심환지 어찰[14] 에서 확인되듯이, 그 신권의 견제조차도 왕이 마음만 먹으면 이면에서 정치적으로 조율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다. 왕 빼고 다 가졌던 노론과 안동 김씨는 경종과 고종을 낀 흥선 대원군이 자기들에게 반대하자 권력에서 밀려났다.[15]
조선이 타국과 다른건 왕과 신하들의 세세한 대화 기록이 사초로 남아있다는 점인데 그것들에서 오해가 생기는 부분이 많은거 같다. 유교 질서에 따라 의례적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간언하는 이야기들이 희화돼서 군약신강의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전하, 경연에 힘쓰소서' '전하, 마음을 다잡으소서' 이런 간언들은 경전에 나오는 의례적인 이야기로 별의미가 없다. 경연이 왕을 압박하고 견제하는 도구라고도 하는데 그 경연을 활성화시키고 후대 왕들을 괴롭힌 장본인은 다름 아닌 세종대왕이다.[16] 그리고 모든 왕들이 세자들 제왕 교육에 열혈이라서 어떻게든 나라에서 제일가는 학자들을 선별해서 공부시키려고 난리였다고 한다. 오히려 그만큼 조선에서 제왕의 역할과 영향력이 컸다는 반증이 경연제라고 볼수 있다.
실제 조선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지방관 - 중앙 조정 - 왕의 결재까지 철저한 유례없는 중앙 집권 시스템이 자리 잡았다. 당연히 그 시스템에서 힘의 균형은 최종 결재자인 왕이 우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임란 이후 이러한 정치 체제가 마비되고 인조 반정을 거치면서 정통성에 하자가 있는 군주(인조, 효종) 라인이 펼쳐지면서 예송논쟁과 같은 군신간의 대결이 펼쳐졌다. 하지만 이것도 내막을 보면 혈통과 원칙을 우선하는 유교적 원리와 그래도 왕실인데 그쯤은 넘어갈 수 있다는 현실 논리와의 싸움이기에 양측 모두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 결국은 원리주의자 대표인 송시열을 숙종이 처단하면서 이 기나긴 싸움은 왕실의 승리로 끝이났고 숙종은 당대의 전제 군주로서의 위상을 제대로 누리다 떠났다.
택군을 받았다고 일부 창작물에서 왜곡되는 영조는 즉위 이전부터 왕의 아들이 아닌 왕의 동생이라는 불안한 위치를 극복하고자 자발적으로 정치 세력을 구축하면서 왕세제로서 왕위 계승권을 단단히 했는데 그 정치 세력이 바로 노론이었다. 즉 노론은 영조가 왕위를 위해 키운 친위대였지 공신 세력이 아니었다. 영조는 이 친위 세력을 쥐락펴락했고 확실한 왕권을 확립하면서 50년 넘게 왕노릇 잘했다. 그리고 사도 세자 이야기만 해도 실제로는 미래 권력에 대한 눈치를 본다고 신하들이 영조에게 사도 세자의 비행에 대해 제대로 보고하지 않아 영조가 진노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인데 노론에 대항하다가 희생되었다는 스토리는 애초에 이치에 맞지 않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순수 혈통의 외동이라 왕 자리는 그냥 이어받는 세자가 굳이 아버지 심기 불편하게 반노론이니 친소론이니 정치셈법하며 투쟁할 이유는 제로에 가깝다.[17] 그러니까 애초에 조선시대에 이덕일이 주장하는 "거대 신권에 도전하는 왕의 투쟁" 같은 스토리는 아예 없었다.
대표적인 군약신강 시대인 고려는 무신들의 간섭을 받은 왕들은 집권 무신 세력이 교체될 때마다 왕위 교체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고 특히 희종은 서슬퍼런 세습 독재자 최충헌을 제거하고 왕권을 되찾고자 하다가 실패해서 비참하게 폐위당하고 유뱃길에 올라야만 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이덕일식 군약신강 투쟁 스토리가 나오지 조선 시대에는 저렇게 서슬프런 권신도 없었고 저렇게 무기력한 군주들도 별로 없었다. 더군다나 그 고려도 문벌귀족들과 무신정변 이후의 무신들 등등의 강력한 집권층 탓에 왕권이 유명무실한 신세였을지언정 최소한 16대인 예종 시기까지만 했어도 (막강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왕권이 허약하지는 않았고 어떻게든 제 역할을 했었다.[18] 고려 시대에서는 지나친 신분제 고착화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었을지언정 초중기까지는 왕의 권한이 신권에 압도되는 것은 아니었고 그때까지만큼은 제대로 된 왕조 국가의 왕권으로 남아있었다.
조선 왕들은 그냥 대체로 제 밥값은 다했다. 그 존재감 없는 예종이나 인종도 짧은 시간 동안 제 할일을 했고 예송논쟁 시대에 왕 노릇 했던 현종도 군사, 외교, 경제 분야에서 분명한 업적을 이루었을 정도다. 세도 정치 때 군주들 같은 경우 순조는 편전보다 병상이 더 친숙한 역대급 약골 군주였기에 정상적인 통치력을 발휘하기 힘든 군주였고 이후 헌종 같은 경우도 소년 시절에 왕위에 올라서 수렴청정 받다가 성인되고 친정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승하하면서 평가의 여지가 없다.[19]
정리해서 보면 실제적으로 진짜 군약신강에 휩쓸린 허수아비 군주는 철종 정도밖에 없다고 보면된다. 당대 나름 권신들이라 불리던 조광조, 윤원형, 김자점, 송시열, 홍국영까지 공통점은 왕의 신망을 잃자 모든 것이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신하들이 아무리 설쳐도 그 배후에는 왕이 있었고 그들의 생사 여탈권은 왕이 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악랄하다고 욕먹는 유교 탈레반 송시열은 왕과 대립하는 흑막의 마왕이 아니라 효종의 제왕 교육을 담당한 스승이었고 효종이 즉위한 이후부터 현종 대에 이르기까지 왕들이 어떻게든 옆에 두고 써먹으려 안달했던 양반이었다. 왕은 치세를 위해 어떻게든 유능한 신하를 곁에 두려했고 그 신하들은 왕의 신임을 통해 권력과 부를 얻을 수 있었다. 조선은 군약신강의 나라가 아니라 아주 원초적인 왕조 국가의 특성을 보여준 나라였다. 특히 영조 치세 이후 새로운 정치 체제인 특정 정파나 특정 가문과 왕실의 밀월 체제는 훗날 세도 정치라는 결과물로 이어졌고 이는 구한 말까지 이어져 나라를 망조로 이끈다. 그리고 수렴청정 경우도 왕실에서 행해지는 만큼 최고 권력자가 왕실 사람이라면 그 실권자의 권력이 곧 왕의 권력을 대변한다. 명종 대의 문정왕후와 헌종 대의 조 대비가 권력을 제대로 행사했다면 그것은 왕권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었다 봐야한다. 그런 면에서 조선은 시스템적으로 국왕 중심의 국가 체제가 정상적으로 돌아갔다고 보면된다.
고려 시대에 왕을 자택에 감금했던 이자겸이나 자신의 정치셈법에 따라 마구잡이로 왕을 갈아치우던 최충헌 같은 괴물같은 신하는 조선에 없었다. 중국과도 비교할 거리가 없는 게 중국은 대체로 왕조가 300년 넘긴 적이 거의 없고[20] 조선은 명나라가 망하고도 200년 이상을 더 존속했는데 이 긴 시간 동안 왕권의 사이클이 이어지는 게 더 어렵다. 왕권이 길수록 권력의 사이클은 있기 마련이고 그 왕권을 제대로 누리는 건 국왕 개인의 능력이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강화시킨 연산군은 그 권력을 본인 쾌락에 활용하다 자멸했고 광해군은 측근 관리 실패로 아마추어들의 어설픈 정변에 훅갔다. 이런 실제적인 국왕의 역량은 배제하고 실록의 1차원적인 몇몇 사례로 군약신강의 논리를 정설화하는 것만큼 넌센스는 없다. 확실한 건 조선에서 왕권과 신권은 상호 보완의 협력 관계였지 대립 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왕이 바뀔 때마다 권력 지형이 바뀌았고 국왕 외에는 세습적인 권력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21] 조선에서 왕이라는 존재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 외에도 조선사 500년에서 일어난 역모사건도 보면 성공 사례를 빼면 '대게 XX대군/XX군을 옹립하여 했다.', '상왕을 옹립하려 했다.', '폐주를 복위/상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등이고 그나마 왕족과 연관이 없어보이는 일도 뿌리를 파헤쳐 보니 왕족인 경우고[22] 진짜배기 역성혁명은 드물었다. 고작해봐야 '이홍윤의 옥사'때 이홍윤이 직접 왕이 되려고 했다는 것이니 '김자점의 옥사'에서 김식을 추대하자는 의견이 나왔다든가 하는 정도, 즉 역모를 일으키는 쪽에서도 '전주 이씨가 왕이 되는건 당연하지' 라고 생각했고 단지 그 안에서 골랐을 뿐이다.
일단 당시 주변 국가들에서도 있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우선 대부분의 나라가 막장 테크를 탈 때에 군약신강이 이뤄진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이해해줘도 이 발언이 나온 시기의 조선은 멸망까지 거의 200년 이상을 남겨둔 시점이었다[23] . 막장 테크를 탈 때에는 신하들의 발호가 이뤄진다면 조선은 남은 기간 동안 막장 테크를 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이 200년에는 숙종 - 영조 - 정조로 이어지는 기간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이런 배경은 조선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청이 유목 국가라서 특수한 것이라고 보는 것도 맞지 않는 것이, 한족 국가였던 명나라도 황제권이 절대적 위치에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청나라의 경우는 황제가 주도적으로 만주족의 관습을 강조하기 때문에 두드러져 보일 뿐이다. 조선은 거의 동 시대에 건국된 명나라와 비교해도 왕권이 유달리 약했다. 이에 비견하려면 봉건제 국가의 군주나 강남으로 도주한 이후의 중국 국가들 정도는 되어야 비교가 가능한데, 통일 국가에 중앙 집권적 국가의 왕권이 이런 케이스와 비교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24][25]
일반적으로 왕조 국가에 있어서 왕의 권한이 강한 것은 일반적 상황이다. 그로 인하여 부정적인 영향이 드러나는 것도 사실이고, 왕권을 제약하면 왕으로 인한 문제를 줄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줄어든 문제가 대신 왕을 대신해서 권한을 가진 이들에 의해서 벌어지면 거기서 거기다'''. 더구나 왕조 국가의 왕들은 자신의 권력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제도적으로 왕에게 권한이 있기 때문인데, 신하들 입장에서 이걸 압박을 통해서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양자간의 권력 투쟁이 벌어지게 된다. 군약신강의 근본적인 문제는 제도적으로 강한 왕권을 현실적으로 강한 신권이 억누른 결과물이란 것이다.[26]
현실적으로 강한 신권의 배경이 바로 성리학이다. 원래부터 문치주의가 극에 달했던 남송 시기 주희에 의해서 본격화된 성리학[27] 의 정치 이념화는 조선 초기 정도전에 의해서 '''군신공치'''라는 개념으로 본격화 된다. 하지만 이 군신공치 개념은 이미 증명된 것처럼 극히 예외적인 경우 외에는 실행된 적이 없다.[28] 군신공치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세종이나 성종 마저도 후반부에는 그냥 자기들 맘대로 했다[29] . 영조나 정조는 더욱 그랬으니 다른 왕들은 언급할 것도 없다.[30] 군신공치는 성리학을 신봉한 신하들의 입장에서 가정한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이지 그게 실제로 실행된 적은 없다. 애초에 군신공치를 처음들고나온 정도전만 해도 그 권력은 군신공치 운운하기에는 너무 강했고, 이건 이방원과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애초에 군신공치라고 하는 세종 때의 기록을 보면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다. 태종이 자신의 서녀를 결혼시키려고 했을 때, 이속(조선)이 이걸 깠다가 패가망신한 적이 있었다. 이후 세종 때에, 태조 이성계의 서녀인 의령옹주의 자손 이선이 과거를 보게 되자 그가 서얼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즉, 왕의 외손이지만 그래도 서녀의 자손이니 서얼이라는 것. 왕 = 사대부 중 한 명으로 보면 이것도 허용되어야 하지만, 세종은 이 말을 한 사간원 관료들을 바로 의금부로 보내서 국문하게 한다. 당시 기사 이들은 장형을 당하고 유배까지 가지만관련 기사, 이들이 속했던 사간원[31] 에서 '''이들이 한 말은 미친 소리가 맞지만[32] , 그래도 언관이니까 봐주세요'''라고 하고, 세종은 이속의 이야기를 들어서 비판하다가, 그래도 언관이라서 봐주게 된다. 하지만 이후에도 왕실 족보에 오른 이들은 서자 취급에서 완전히 제외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서얼과 결혼 시스템을 보면 정도전 관련해서도 복잡해진다. 정도전이 밀었던 방석은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데, 신덕 왕후 강씨는 이성계의 본처였던 신의왕후 한씨가 살아있는 상황에서 이성계가 혼인을 한 상대이고, 이 결혼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도 전이기 때문에 명백한 첩이 된다. 하지만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를 때는 신의왕후 한씨는 죽은 뒤였기 때문에 개경 귀족의 자손인 신덕왕후 강씨가 정식 왕후로 올라갔다. 즉, 왕과 사대부가 같다고 한다면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양첩이었다가 다시 결혼한 상대가 되고 그 자손들의 지위는 본처였던 신덕왕후 자손보다 낮아진다.[33] 반면 왕은 별개라고 보면 조선이 건국할 때 왕후로 오른 신덕왕후 강씨도 정처가 되고 그 자손들도 신의왕후의 자손들과 동등한 위치가 된다. 이처럼 군신공치를 주장했던 정도전의 행적도 그의 주장과는 상당히 안 맞다. 현실을 위해서 이론 따위는 때려치웠다면 모르겠지만.
성리학에서 군신공치가 가능하다고 본 이유이자, 그리고 군신공치 개념이 어려운 이유가 있는데 바로 도학 군주 개념이다. 집권층 전체가 성리학에 물든 조선에서 신료에서 재야의 선비들은 물론이고 왕도 성리학에 충실한 군주가 되기를 요구받았다. 유학적 개념에 있는 아시아권, 특히 성리학으로 통일된 조선에 익숙해지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보이지만 서구권이나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해도 이는 상당히 특이하다. 당장 세자를 가르치는데 사용된 책들을 보면 실무적인 정치 지식을 다룬 《정관정요》나 《국조보감》과 같은 서적들 보다 《대학》의 주석서인 《대학연의》, 《중용》, 이이가 저술한 《성학집요》, 《성리대전》 등 성리학과 관련된 서적이 더 많다.[34] 그리고 이것은 왕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아서 경연의 형태로 성리학과 유학에 대해서 공부하는 형태가 된다. 이건 플라톤의 철인 군주론의 보다 적극적 개념일 수도 있지만, 국왕이나 세자의 두뇌를 성리학으로 고착화해버리는 역할을 한다. 그나마 이런 과정을 적극적으로 왕권 강화에 활용한 정조와 같은 국왕도 있지만,[35] 그 결과 정조는 문체 반정 운동과 같이 철저한 도학 군주로서의 한계를 지니게 되었고, 이런 세뇌에 가까운 과정에 반발을 품은 이들은 양녕대군이나 사도세자처럼 세자 시절에 엇나가거나 혹은 연산군처럼 재위 기간 도중에 막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도학 군주 개념마저도 시간이 갈수록 신권 강화로 전개되었음을 볼 수 있다. 단적인 예가 이황과 이이의 논쟁인데, 이황은 '''국왕이 스스로 깨달아서 군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에, 이이는 '''신하의 교육을 거쳐서''' 국왕이 군자가 된다라고 주장했다.
이 부분이 중국 성리학보다 이이와 정도전의 방법론이 더 나가는 것이다. 중국 성리학에서 왕은 특히 높으면서도 신하 전체로 대립이 가능한 수준이었다면, 이이와 정도전의 방법론은 왕 = 신하들이 포함된 사대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게 실현된 것은 중국에서도 송대의 문제가 아니다. '''남북조시대'''의 극혼란기 속에서나 이게 가능했고, 그 결과는 문벌 귀족의 난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장면은 고려 초의 문벌 귀족 시기에도 나타난다. 당장 고려만 해도 일반적으로 기억에 남는 왕이 몇명 안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광종 이후로 왕권이 강했던 특이한 예(숙종, 예종의 경우)나 그 와중에도 깽판친 경우(단적으로 충혜왕의 경우)를 제외하면 공민왕 이전까지 기억나는 왕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36] 왜냐하면 왕의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반기는 문벌 귀족, 중반기는 무신 정권, 후반기는 권문세족. 그래서 고려 시대의 상태가 좋았는가? 고려사 및 관련 사료들의 상당수가 문신 관료들에 의해서 쓰여졌기 때문에, 문벌 귀족의 정치는 대단히 긍정적으로 무신은 대단히 부정적으로, 권문세족 시기는 조선 건국자들이 때려부순 이들이라서 부정적으로 쓰여진 것 까지 고려하면 고려 시대 백성들의 삶은 정말 갑갑해진다.[37]
앞서서 왕권이 약해도 관료층에서 난리치면 별 차이 없다는 것이고, 성리학은 전통적으로 약했던 왕권을 이론적으로 확립시켰을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문벌 귀족 시기의 정치 모습[38] 과 별반 차이도 없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정통성의 문제 때문에 왕권이 약했다고 하지만, 애초에 정통 개념을 극도로 중시한 것 자체가 성리학의 특징이다. 공자의 정명론이건 양명학이나 고증학이건 성리학만큼 정통론에 입각하여 이 국왕, 이 왕조에게 정통이 있네 없네를 따진 학문은 찾아보기 어렵다.[39] 그리고 국왕의 후계자들에게 있어서 정통성이 있네 없네 현 국왕에게 정통성을 부정하네 운운하면 조선 시대 후반을 뒤흔든 문제, 즉 택군이 등장한다. 신하들이 국왕을 선택한다고 하면 입헌 군주제 분위기라서 좋아 보일지 몰라도, 그 신하들이 실질적으로 대표로서 보다는 귀족의 개념에 더 가깝다면 귀족 과두정의 문제만 나올 뿐이다. 실제로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전체 민의의 대표자보다는 자신들의 특권 유지와 자신들의 이상을 유지하고 펼치는데 대부분의 열의가 사용되었다. 소위 애민 정신도 위에서 아래를 보는 긍휼히 여김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조선의 왕들의 권력은 정통이 있느냐 없느냐도 있지만은 왕이 재위하여 집권한 시기가 얼마나 되느냐와 실제로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역량이 있느냐라는, 보다 개인적인 부분의 비중이 컸다. 단적으로 군약신강이라는 표현이 나온 현종은 세손 - 세자 - 왕이라는 루트를 착실하게 밟아서 왕위에 오른 몇 안 되는 인물이다.[40] 현종이 효종의 아들이라서 정통성이 문제를 보였다면 현종의 아들인 숙종이 정통성이 강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2대는 약하지만 3대 정도 가면 정통성이 보강되어서 그런가? 성리학의 개념에서 보자면 정통성은 현실적인 문제나 몇대를 지났느냐 같은 것과는 별로 상관없다. 예송논쟁 과정만 보아도 재위 초기였던 1차 예송과는 달리 2차 예송에서 현종은 송시열을 밟아버렸다. 송시열이 현종 대가 아니라 숙종 대에 죽은 것은 현종이 정통성이 약하고 숙종이 정통성이 강해서가 아니라, 현종이 34세의 나이로 도중에 사망했기 때문이다.[41] 이건 왕권이 정통이 아니라 왕과 신하들간의 권력 다툼에서 나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조선의 왕들은 이론적으로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집권층 모두가 성리학 일색이라 세자 시기부터 시작되는 세뇌에 가까운 교육과 왕권을 견제하기 위해서 촘촘히 마련되어가는 신하들의 견제에 운신을 마음대로 못 하게 되고, 이에 어긋나면 광해군마냥 쫒겨날지도 모른다는 반정의 위험을 느끼는 와중에서 별 소리를 하지 못하다가 자기도 나이를 먹고 재위 기간이 길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펴기 시작했다.
그런데 워낙에 견제에 배운 것이 성리학 뿐이라서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거나 기존 제도를 손대기 보다는 그냥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면서 놀아버렸다. 애초에 다른 뭔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지쳐버리던가 그 신하들의 정쟁에 말려들어 강력해진 권력을 숙청 등에 쓰던가이다. 그나마 강화한 권력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신하들과 아웅다웅해야 한다. 학문에 손을 대고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은 정말 특이한 사례일 뿐이다. 아예 집권 초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그것을 진압하는 동안 권력이 강해진 영조조차 신하들에게 치여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지쳐갔다.[42]
상단에서 언급된 '군약신강의 기준 = 군주가 완전히 허수아비 수준'이란 것은 기준점을 극단적으로 옮겨 놓은 형태에 가깝다. 그 정도가 되면 춘추 시대의 주나라나 전국 시대 이후부터 메이지 유신 전까지의 일본 조정에 가까운데, 거기까지 가면 무늬만 군주제에 가깝다. 하지만 이는 정상적인 국가 체제가 아니라 제도의 파행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500년, 실제로는 그 것도 안되는 성리학만 고려해서, 동아시아를 2000년간 지배한 시스템, 바로 율령제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통치 기준은 성리학 이론이 아니라 율령격식이다. 애초에 유교식으로만 통치했다면 조선은 봉건제 국가가 되었어야 맞을 정도다.
'왕과 신하가 상호 보완의 협력 관계'라는 위의 언급은 대통령과 국회가 상호 보완의 협력 관계라고하는 것과 달리 '동아시아의 전제 군주정에 기반한 율령제' 하에서는 개소리가 된다. 효종이 송시열을 다루기 힘들어하고, 정조가 심환지에게 어찰을 보내는 것은 그들이 유능한 신하여서가 절대로 아니다. 그들이 정치 권력자이기 때문이다. 효종이 송시열을 바로 죽이지 못하는 것은 송시열이 효종의 스승이고 유능한 신하라서가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반정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왕이 자신의 측근 세력을 차곡차곡 쌓고, 상대가 유능하건 말이 맞건 틀리건 하는 것은 상관없이 신하들이 서로를 여차하면 발목 잡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나서야 자기 정치를 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의 15년이 각 왕마다 필요 하다는 것이 군약신강의 증거이다.
그리고 성리학과 엮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정통성'이라는 개념[43] 을 왕에 집어넣으면 택군의 문제는 언제든지 고개를 들 여지가 있다. 이방석과 이방과 혹은 이방원 중에서 도대체 누구에게 정통성이 있는가, 계유정난 이후 정통성은 왕위를 계승한 세조에게 있는가, 폐위된 단종에게 있는가. 선조의 뒤를 이을 정통성은 광해군에게 있는가 영창대군에게 있는가.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에 정통성은 있는가, 인조의 뒤를 이을 정통성은 효종에게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소현 세자의 후손인 이석견에게 있는가[44] , 숙종의 후계자는 명목상으로는 인현왕후의 아들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에게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무수리의 아들이지만 적어도 장희빈의 아들은 아닌 연잉군에게 있는가, 이런 대답을 할 권리는 왕실에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신하에게 있는가. 만일 신하에게도 있다면, 그게 바로 택군이다. 이 택군 문제가 조선 후기에나 나오는 것은 조선 전기의 유일한 택군은 삽시간에 반란으로 끝나서 선택의 여지도 별로 없었다는데 있다. 위에 택군의 대상이었다는 영조에게 노론은 친위 세력이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영조 입장에서는 그렇다. 반면에 자기 몰아내려고 드는 상황이 되는 경종 입장에서는 언제 정리를 해야할까를 고민해야 하는 상대가 된다.
왕은 계승이 되고, 신하는 계승이 안되니까 왕이 절대적 존재라는 것도 사실이 아닌 것이 그럼 만세일계라는 일본 덴노는 막부 시대건 전국 시대건 절대적 존재였나? 현대 일본 정치계에서 현대에 되살아난 막부 취급 받는 자민당은 그 당수가 세습을 하나?[45] 문묘 배향된 인물들이 결국 초기 사림이 계보에 이이의 학맥들이 줄줄이 들어간 것은 혈맥이 아니라 학맥이니까 상관없는 문제인가?
이런 기본적인 문제에 더해서, 조선중기가 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바로 '''사림 일색의 신료들로 인한 진짜 사대주의의 등장'''이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면, '''중국의 황제와 조선의 왕'''이라는 구도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는 성리학의 관점에서 중국황제>조선 왕 구도를 만들었고, 위에 언급된 신하들 개개인과 마찬가지인 군주는 어디까지나 조선의 왕으로 제한되었다. 즉, 어차피 중국 황제의 밑인 것은 자기들이나 조선 왕이나 똑같다는 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때문에 광해군 때만 되어도 '''차라리 왕을 거역하지 명나라에 거역할 수 없다'''는 발언을 왕 앞에서 대놓고 하는가 하면[46] , 병자호란 이후에 청나라에 끌려간 삼학사라는 인물들은 '''대명조선국의 신하''' 운운해대기 시작한다. 아예 대놓고 명나라로 귀화해버린 임경업이 이후 사림들에게 추앙 받았던 것도 이런 사례이다.
그리고 시기가 더 흘러가면, 송시열 같은 자기들 학파의 스승도 왕보다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는 기미가 보인다. 재야의 일이긴 하지만, 송시열의 후손이 정쟁과정에서 밀려났다고 이를 비판하고, 비판한 자를 처벌하자 처벌당한 사람을 옹호하다가, 왕을 걸주에 비교하면서 반란 도모하는 일까지 생긴다. 그 왕이 바로 정조다.
이때문에 이런 조선의 모습은 중국의 황제들 입장에서는 군약신강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청이 정복 왕조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같이 성리학을 신봉한 남송이나 황제는 덤이고 실제로는 권문세족이 통치한 남북조시대의 황제들 정도를 제외하면 조선의 국왕들만큼 왕들이 뭘하는데 제약이 많았던 시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멀리 갈 것 없이, 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건국한 명나라만 해도 황제의 권한은 내부에서 거의 무한한 수준이었다.[47]
전제군주가 통지하는 이른바 동양국가는 작게는 동북 아시아의 중국과 한국 넓게는 중앙 아시아와 중동, 더 멀리는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제국에 이르기까지 이론상 전제군주가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신민의 생사여탈권한을 쥐고 있었다. 즉, 모든 귀족과 관료는 왕의 노예로 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이자 왕을 위하는 게 존재 의의였다.
이에 반해 서유럽의 경우, 왕의 권한이 매우 제한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게르만 시절 선거부족장 시대의 족장이 왕이 된 이유도 있었을 것이며 교회의 사회적 힘도 무시할수 없었을 것이다. 그로인해서 왕이 국가원수이긴 하지만 각자의 영역을 존중해야 하는 사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서유럽의 절대왕정도 사회변화에 따른 왕의 영역이 비대하게 강해지면서 얻은 불안정한 권력이었다. 이는 왕은 법위의 존재라는 일반적 전제군주제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론과 현실은 다른 법이고 실제로는 아무리 강력한 전제군주라도 왕의 명령을 집행하고 통치를 보좌하는 관료와 고위 관료를 독점하는 귀족 및 사대부, 지방의 토지를 소유한 소귀족과 호족에게 권력이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강력한 군주라도 혼자서 모든 일을 할 수 없는 이상에 이런 통치권을 어느 정도 나누어 가진 지배층과 온갖 이해관계 속에서 타협을 하면서 움직여야 했다. 더구나 왕은 궁궐에서 혼자서 고립된 존재이지만 권력층은 혼인, 학연, 지연 등등 각종 인맥으로 맺어진 사이였다. 이러니 아무리 막강한 전제군주라도 명령 한 마디에 모든 일이 일사분란하게 돌아가게 하기는 어려웠다.
당연히 이런 군주권이 제한된 상황을 왕이라고 좋아하는 건 아니였다. 특히나 중앙집권이 강력한 동양권 국가일수록 이론상 권력과 실제로는 중앙 관료 집단과 마찰로 인한 제한받는 현실의 괴리감이 클 수 밖에 없었다.[48] 군주의 명령을 받는 관료집단 그 자체가 왕을 견제하는 형태이니 왕들이 답답함을 느꼈고 이런 상황을 타파하고자 몇가지 일종의 편법이 넓게 사용되었다. 통상적으로 많이 쓰이는 방법은 왕의 친가인 왕실 인사의 기용, 왕의 외가인 외척 기용, 환관의 중용이었다. 문제는 세 가지는 널리 쓰이는 만큼 효과가 있었지만 부작용도 심했다.
친가인 왕실 인사 기용은 동일한 이익을 공유하는 친족에게 권력을 몰아줌으로써 폐쇄적인 관료집단을 자기 혈연을 통해서 통제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장점이었다.[49] 거기다 왕실 인물인만큼 귀족보다 더 권위가 있어서 말빨도 서고 귀족/사대부에게 이익이 되는 것보다 왕실에 이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였다. 혈연인만큼 통상적으로 충성을 받아내기도 쉬었다.
문제는 이런식으로 권력을 가진 왕실 인사는 왕위 계승권이 있기에 까딱하다가는 반역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나 중앙의 권위가 허약할수록 반역 가능성이 높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팔왕의 난. 이러니 통상 계승권이 가까운 인물일수록 중용되기 어렵고 이러면 권위가 살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계승권에서 멀면 100% 안전한 것도 아니였다. 그리고 왕실 기용의 폭이 클수록 지배층의 반발도 커져서 한계가 있었다. 이래서 어느 정도 정비되는 국가일수록 왕실 기용의 폭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신라에서도 고위상층부는 죄다 진골귀족들이었는데 문제는 이 진골들은 너나없이 왕위계승권을 쥐어 신라 하대가 개판이 되는 원인이 되었다.
왕실 인사의 단점을 해소하면서 혈연이 있는 인척을 기용하려는 시도에서 사용되는 게 왕의 외가를 중용하는 방법이었다. 외척은 왕이라는 존재가 있는 모든 국가에서 사랑받는 권력 장악 수단이었다. 일단 왕가는 혼인으로 이어진 혈족에 가까운 관계로 왕과 이익을 공유하는 면이 있다. 또한 왕실과 혼인할 정도면 어느 정도 세력이 있기 때문에 동맹으로는 제격이며 지배층 내에서 상당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관료통제에도 용이했다. 그렇기에 설사 고위직을 맡기더라도 반발이 적었고 다른 지배층과 인맥이 있기 때문에 여론을 이끌기도 쉬었고 왕실에 충성하는 당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계승권은 없었으니 왕실 인사보다 훨씬 안전했다. 중앙집권이 강할수록 왕에 의지해서만 권력을 가질수 있는 외척은 더더욱 왕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후한은 관료를 장악한 귀족과 호족에 대해서 외척을 기용해서 대응했다.
하지만 이것도 100% 해결책은 아니었다. 외척이라는 게 기형적으로 한 가문이나 집단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일이고 이는 왕실에 필적할 세력의 등장이었다. 통상 새왕이 즉위해서 외척이 갈리면서 문제가 해결되지만 이 경우에는 구 외척과 신 외척의 갈등이 발생한다. 그렇다고 구 외척을 계속 중용하면서 혼인을 맺다가는 외척이 왕을 잡아먹는다. 원래부터 상당히 강력했을 외척은 왕실이 얽매이지 않고 다른 귀족/사대부와 연결되는 인맥이 있는 만큼 세력 만들기도 더 쉬웠다. 왕망은 외척이라는 입장으로 전한을 몰락시키고 신을 건국했고 조선은 안동 김씨 세도가 한 때는 나라를 흔들었다.
이렇게 피가 흐르는 친족은 계승권 분쟁으로, 혼인으로 맺어진 외척은 권력 독점과 견제 불가한 지배층 등장이라는 문제 때문에 기피하는 대신에 애용한 게 환관이었다. 기본적으로 환관은 노예로써 왕의 사유재산이나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궁궐에서 고립된 왕이 어려서부터 가까이 지낸 사이로 인간적 관계가 가까웠다. 당연히 생사여탈 문제가 임면 문제에서 훨씬 자유로웠다. 환관 하나 죽이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었으니. 친가나 외가는 어째든 기존 관료제를 안에서 인사로 통제하는 방법이고 관료 집단과 권력과 이익을 공유하는 순간 왕이 고립되는 문제가 있었지만 환관은 관료제 밖의 존재였다. 이런 점 등에서 지배층과 연결될 고리도 적었다. 거기다 왕이 아니면 권력을 가질 수 없다보니 다른 지배층과 결탁할 수도 없었고 기본적으로 원래 신분도 낮은 편이었으니 귀족이나 사대부가 친하게 지내기 어려웠다. 고자라서 권력이나 재물을 몰아줘도 물려받을 자식이나 가족도 없어서 죽으면 기본적으로 왕에게 돌아오고 새왕이 즉위한다고 환관이 유세부리기도 어려웠다. 그러면서 원래 고자니 역성혁명 가능성도 없었다. 이러니 원래 하렘이 있던 나라들은 물론이고 기독교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도 하렘이 없음에도 환관을 관료로 기용했을 정도로 왕들에게 사랑받았다. 중국은 환관을 조직화 했고 단순한 왕의 명을 받드는 거부터 시작해서 기밀관리, 군대 감독을 맡기더니 아예 군대 지휘와 관료 감시까지 도맡았다. 명의 강력한 황제권 뒤에는 동창으로 대표되는 거대한 환관 조직이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도 나르세스 같은 환관 장군이 있었다.
문제는 환관을 기용했다가 망한 사례가 조선의 이웃인 중국사에 잔뜩이었다. 기본적으로 환관은 궁정 사무를 처리하는 존재였고 신분이 높지 않은 이들로 학문적 소양이 높지 않았고 높을 필요도 없었다. 이러니 국가를 운영하려는 큰 철학이나 비전이 없었고 출세 때문에 환관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니 권력 획득 후 큰 그림을 그리는 대신에 자기 욕구 해결이 우선이었다. 거기다 군주에게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획득하게 되는 만큼 윗사람에게 잘보이는 아부와 처세술이 뛰어난 전형적인 간신, 무능력한 상사가 권력을 가지기 쉬웠다. 안 그런 경우도 있지만 그런 인간성 좋고 능력있고 정치적 안목도 있는 환관은 긴 중국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수준이었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조고가 국정 농단과 황제시해를 자행했고, 이후 후한도 환관의 농단과 십상시의 전횡으로 결정타를 맞고 망했으며 당나라는 황제가 환관의 반란으로 노예인 환관의 포로이자 사실상 노예라는 처참한 상태가 되었다. 강력한 황제권을 가진 명은 황제가 환관에게 농락당하지 않았지만 대신에 환관이 황제를 홀리고 권력을 대신 휘두르면서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다.
이런 점 때문에 조선은 아예 위의 세 가지를 전부 봉인해버렸다.[50]
왕실 인사 기용은 초반에는 딱히 큰 제약이 없었다. 건국 후 중앙집권화와 권력 다툼 과정에서 태종의 권력 장악과 사병 혁파를 거치면서 왕실 일가가 가진 권력이 왕에게 귀속되면서 전주 이씨가 중책을 맡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나라가 안정되고 세종이 대군들에게 일을 맡기고 세조가 공신 견제 목적으로 신 공신과 함께 왕족인 구성군을 영의정 삼아서 파격적으로 기용했지만 사후에 남이의 옥사로 죄다 날려버리면서 구성군은 정치적으로 거세해버리고 법으로 가까운 전주 이씨 왕족은 아예 과거 자체를 금지하면서 왕족이 아니게 된 경우만 관료로 임용되게 했다.[51] 단 명예직에는 제수해서 흥선대원군은 도총관을 지내기도 했다. 어쨌든 정치권력은 주지 않았다. 물론 이는 흥선대원군 집권기에는 좀 달라서 종친들을 여기저기 앉혀주긴 했다.
외척의 경우는 태종은 손수 처가에 사돈까지 박살을 내었고 이후에도 딱히 외척이 힘을 쓰는 경우는 없었다. 외척을 중요하기에는 왕권이 강했고 외척이 나설 상황이 되려면 왕의 어머니가 중전이어야지 후실인 비빈의 경우에는 법적 어머니인 중전이 멀쩡하게 있을 경우 행동이 제약되었다. 특히나 수렴청정 같은 상황이면 더더욱 그랬다. 그래도 중반기 들어서면서 윤임, 윤원형 같은 외척이 나타났지만 명종이 직접 숙청했고 이후로도 외척은 영조가 붕당에 질려서 척신 정치를 하면서 권력을 집중해주기 전까지는 대세가 되지 못했다.
환관은 아예 초기에는 없애려고 했었고 이후에도 왕실 사무만 처리하는 조직으로 한계를 그었다. 경종이 환관의 도움으로 소론과 소통해서 정국 뒤집기가 있었기도 했지만, 동창 같은 관료 사찰 능력은 없었다. 당연히 군대 사무나 지휘도 불가능했고 왕의 시중만 드는 노예라는 위치를 고정시켰다. 더해서 가족도 가질 수 있게 해주고 양자도 들이게 해서 가족을 돌보게 해서 권력에서 눈을 돌리게 하고 어느 정도 재물도 축적해서 욕구도 달래고 유사시 가족을 인질로 삼게 했다. 물론 왕실의 재산인 내탕금을 관리하는 내수사 소속이거나 왕명을 출납하는 내시와 같은 고위직들은 위세를 부릴 수도 있었지만 이 역시 현실 정치와는 거리가 멀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수준이었으며 기존 관료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여기에 더불어서 군주들이 가지는 개인적인 권력 기구도 거의 없어서, 금의위나 동창 같은 직속감찰 및 비밀경찰 조직도 없었고 군주들이 관료제를 압박하고 동시에 감시 및 감독하게 하는 친위군 세력도 미약했다. 실상 이런 근위대 세력도 관료들을 통해서 조직되고 관리되는 만큼 왕이 보통 관료를 우회해서는 군대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국왕 직솔 조직으로 의금부가 있었지만 특정 범죄 수사나 군대 감독을 제외하면 임무의 한계가 있었다. 고려 초까지 쓰였던 기존 세력과 연관이 없는 외국인 기용이라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나마 몇몇 왕들은 승지들을 육성하여 기반으로 삼으려고 하기도 했다.
군주가 가지고 있는 자산은 내탕금, 내수사의 형태로 유지했으며 이 자체의 규모는 결코 작지 않았다. 하지만 이 돈을 군주 자신의 권력을 위해 쓸 방도가 마땅치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군주의 권력 강화 방안 및 권력 기구의 운용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탕금의 소비는 주로 왕실의 행사를 위해 쓰거나 구휼 등의 형태로 백성들에게 베푸는 등 왕실의 명분상의 권위를 살리는데 사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왕이 절대군주로 무제한 권력을 휘두르려면 방법은 딱 하나만 남았다. 바로 '''숙청'''.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다는 왕인 태종, 세조는 즉위 과정에서 반대파를 깡그리 정리했고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반대파가 될만한 세력을 나서서 혹은 미연에 알아채고 숙청했다. 연산군과 광해군도 사대부의 약점을 잡고는 숙청을 통해서 사대부를 압박하고 찍어눌렀다. 숙종도 방향성이 좀 다를 뿐 결국은 사대부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절대 권력을 획득했다.
문제는 숙청은 한계가 있는 일이고 결국은 나라는 좀 먹고 나중에는 연산군, 광해군처럼 못 견딘 사대부가 들고 일어날 위험이 있었다.
그래도 이런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왕들이 권력을 강화시킬 방법이 이거뿐인지라[52] 많이 애용되었고 연산군이나 광해군 정도를 제외하면 또 숙청을 하면서도 또 다른쪽은 잘 대해주어서 그런 일은 없었다.[53]
태종, 선조, 영조 등은 종종 선위(양위) 소동을 벌이고는 했는데 선위 소동이 일어나게 되면 일시적으로 왕의 권위가 치솟게 된다. 이유는 왕위를 받게 될 세자는 (대개) 왕의 아들이고 세자의 섬기게 될 신하들은 왕의 신하이기에 덥석 받았다가는 세자는 불효자 신하들은 불충으로 낙인찍히기 때문, 그래서 일단 선위 쇼가 시작되면 세자와 신하들이 왕이 선위의 뜻을 거두기 전까지 그만두어달라고 애걸복걸해야 한다. 때문에 태종이 양위를 할 때는 워낙에 멀쩡한데다가 세자 책봉 3달 뒤에 하는 일인지라 신하들이 모두 그만두어달라고 빌었고 이에 태종은 아얘 세종에게 군주의 복장을 입혀서 신하들에게 '이번엔 진짜다!' 라는 뜻을 보여주었다. 신하들도 "군주의 복장을 했으니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 라며 받아들였다. 다만 모든 선위를 선위 쇼처럼 반대만 한 것은 아니라서 세조, 중종처럼 반대없이 선위한 경우가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진짜로 오늘내일하는 사람이 한 일인지라...
그 외에 세조 시기에는 특이한 선위 쇼가 벌어졌는데 양정 문서 참조
문제는 왕의 권위는 올라가지만 반대급부로 세자의 권위가 약해진다.
왕들이 많이 즐겨쓴 것이 식사의 거부다. 왕이 신하들 때문에 밥을 먹지 않다가 죽게 되면 신하들은 당연히 불충으로 찍히기에 왕의 대표적인 시위 수단이었다. 물론 이것은 왕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서 정순왕후가 정조 재위시절에 정조를 상대로 사용한 바 있다.[54][55] 앞의 선위 쇼보다는 사용빈도가 많고 사용한 왕도 많다.
조선, 정확하게는 대한제국이 망하게 되는 근본적 배경중 하나인 '''재정문제, 더 정확하게는 조세시스템'''도 군약신강을 고착화시키는 구조였다. 특히 조선시대는 이 시스템이 완전히 개판이었다. 조선은 '''겉으로는 성리학적 민본정치+청백리 시스템'''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적게 거두고, 관료들은 적은 녹봉을 받고, 일선 아전들은 무급봉사자'''였다. 이건 정도전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처음 만들 때부터 계획한 것이다.[56] 조선 전기와 후기의 차이는 관리들에게 과전을 주었다는 것 하나인데, '''정도전이 살아있을 때 이미 과전이 부족해진다'''. 결국 이후 과전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역으로 중앙 정부는 뭘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만성적 재정부족에 시달리는 처지가 된다.
실제로 조선 초기 전성기로 불리는 '''태종과 세종 시기 정도'''를 제외하면, 더 정확하게는 이때도 꼼수로 국가가 운영되게 된다. '''아전들은 자진해서 굶어 죽을리가 없으니까 백성들을 착복하게 되고, 중앙 관료는 지방관들에게 '수증'이라는 사실상 제도화된 뇌물을 받아서 생계를 유지했고, 지방관들은 수증을 바치기 위해서라도 지방민들을 수탈하고, 왕은 왕대로 국고와 별개로 내장원이라는 자기 주머니 별도로 만드는 시스템'''이 완성됐다.[57]
조선의 공식적 세금은 1/10이라는 기록적 저세율이었지만 실제론 이것저것 고려하면 적어도 30%까지는 올려 잡아야 한다. 당시 소작농과 지주는 병작반수라고 해서 쌀 수확량을 절반씩 나누었다. 이때문에 소작농은 인두세를 50% 수확량에서 내야 했기 때문에 빈곤한 처지가 된다. 그래도 일본 같은 살인적 고세율 하에서 그짓을 하는 것보다는 압도적으로 많이 남길 수 있었다. 특히 2모작을 하는 경우 보리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이것도 남았고.
그래서 이 모든 것을 고려하면 그냥 세금 30% 거두고, 중앙 정부에서 이 모두를 통제하는 것이 당연히 낫다. 중앙정부에서 세금 더 거두고 별도의 수탈 못하게 하면서 월급 더 주는 것이 백성들에게는 예상 가능한 지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은 이걸 안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국왕에게 세금을 관리하고, 관료와 아전, 병사들의 월급을 관리할 전권을 주느니 그냥 꼼수로 돌아가게 하면서 겉으로는 민본주의의 휘장을 치는 것을 당시 관료들이 더 선호했다는 이야기다.
유럽식 중앙 집권 국가에서도 중앙집권의 상징은 3가지로 나온다. 첫번째는 군사력이고, 두번째는 행정관료집단이고, 세번째는 조세시스템이다. 그런데 이중 가장 어려웠던 것이 조세시스템이었다. 조선이 가난했다고 평가하게 되는 이유중 하나가 이 중앙정부로 들어오는 세금만 고려했을 경우이다. 이 암묵적이고 제도화된 부패가 공식적인 중앙정부 예산의 몇배가 되는 이 시스템이야말로 국왕의 권한을 줄이는 핵심적 요소였고, 군약신강 시스템을 유지시켰던 토대였다. 심지어 농민 반란의 대상이 지방 아전이나 수령이 되지, 중앙정부까지 올라가지 않게 만든 배경이기도 했다.[58]
이러니 조선의 왕은 철저하게 사대부로 구성된 관료집단을 거치지 않고서는 권력을 휘두를 수 없었다. 여기다 제도적으로 왕을 견제하는 삼사를 두었다. 거기다 배운 것도 사대부와 왕의 공치를 통한 정치이니 왕들이 사대부와 협력할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왕이 정치를 알게 되고 머리도 굵어져서 사대부와 반대되는 일을 하고 싶어도 배운 것도 사대부와 동일하니 한계가 있었고[59][60] 사대부로 이루어진 관료 집단에 둘러쌓여서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없었다.
이래서 조선의 왕은 중세 시절 끝판 수준의 강력한 왕권을 보유했으면서도 정작 권력 행사가 상식적 수준에서 제한이 되었고, 권력을 국가 운영에 우선시하게 되었다. 만약에 한계를 넘을 경우 연산군, 광해군의 예처럼 관료 조직을 장악한 사대부들의 다수가 동의가 있다면 교체도 가능했다. 관료 집단을 장악한 사대부가 힘을 합치면 견제가 불가능함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황희가 사위인 서달의 죄를 감추려 했던 스캔들. 황희 자신부터 시작해서 수십 명의 관료들이 사건을 묻어버리고 왕에게 올라가는 보고서까지 가로채서 조작했던 것이다. 이때 왕인 세종이 권력이 약했던 것도 아니었음에도 관료들이 작정하고 짜고 움직이자 왕은 순식간에 고립되었다.[61]
이딴 거 없고 '''사극에서는 거의 대부분 군약신강이다'''. 이유야 간단한 것이, 안 그러면 긴장감도 못만들 정도로 '''사극 작가들이 무능해서'''이다.[62] , 실제 역사와 괴리가 너무 심해서 문제다.
사실 군약신강이 편한 이야기 전개인 이유는 간단하다. 상업용 스토리의 전형적인 베이스인 '''선한 영웅 주인공이 악당의 악행을 모두 해결하고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스토리를 만들기 매우 쉽기 때문.[63] 때문에 대부분의 사극이 신하가 아닌 왕을 주인공으로 삼거나[64] , 그게 아니더라도 왕에게 충성하는 신하를 주인공으로 삼아서 주인공, 혹은 주인공의 충성의 대상인 왕이 왕으로서 모든 걸 해결하고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까지 완벽하게 깔아놓는다.
심지어 바로 위에서 언급된 강력한 왕권의 숙종조차도 신하들에게 벌벌 긴다(…). 조선만이면 모를까 전기 고려도 군약신강, 전성기 고구려도 군약신강. 이렇게 타성에 젖은 스토리는 제작에 드는 비용은 적고 타성에 젖은 시청자들을 쉽게 안방으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에 제작이 끊이질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묘사가 점점 지나쳐서 권신이 대놓고 왕을 눈앞에서 무시하거나 협박하고, 반말이나 직접 물리적으로 타격하는 묘사까지 나오곤 한다. 하지만 신하가 왕을 꼭두각시로 다루었다는 세도정치기에도, 왕의 권위라는 건 아무도 무시할 수 없었고 밑에서 실권을 장악할 지언정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왕에 대한 격식을 지켜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훌륭한 반란의 명분이 된다. 왕권이 세도정치기는 비교도 안 되게 실추한 고려 무신정권 때도, 이의민이 이미 폐위된 의종을 죽인 이력으로도 두고두고 정치적 부담이 되었는데, 체제가 그럭저럭 돌아가는 나라에서 현왕을 모욕하는 것은 어떻게 보이겠는가? 당장의 극적 묘사에 치중해 실제 역사성을 무시하는 케이스들이다.
1. 개요
2. 부정하는 입장
3. 긍정하는 입장
4. 조선의 군약신강의 구조적 문제
4.1. 전제군주의 의미
4.2. 현실
4.3. 일반적인 왕권강화 방법
4.4. 조선의 정책
4.4.1. 기존방법 봉인
4.4.2. 개인적 권력기구 및 자산: 아예 없거나 미약함
4.4.3. 조선왕들의 남은 방법: 숙청
4.4.3.1. 단점: 사대부의 반란
4.4.4. 번외1: 선위 쇼
4.4.4.1. 단점: 세자의 권위 약화
4.4.5. 번외2: 단식
4.4.6. 조세 시스템의 무능
4.4.6.1. 단점: 만성적 재정부족
4.5. 결론: 관료집단과의 공존
5. 미디어에서는
6. 관련 문서
1. 개요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경신대기근이 일어난 조선을 보고는 현종(생몰년: 1641년 ~ 1674년, 34년, 재위기간: 1659년 ~ 1674년)에게 건넨 말이다. '조선은 군주의 왕권이 약하고 신권이 강한 탓에 백성이 굶는다.'는 표현이다.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어서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은 신하가 강한 소치라고 한다. 돌아가서 이 말을 국왕에게 전하라.
이 강희제의 말에 조선은 안그래도 청나라를 오랑캐국이라며 싫어했는데[1] 이후 굉장히 분노하여 대기근으로 사정이 극도로 나쁜 와중에도 청에 도움 요청을 하지 않았고, 대기근 동안 더 굶었다(...). 강희제의 의도가 조롱인지 조언인지는 불명이지만[2] , 확실한 건 경신대기근 시기 '''중국도 포함한''' 지구상 대부분의 국가가 대기근을 겪었다.[3] 이후 을병대기근이 일어나 도움 요청이 들어오자 강희제는 조선으로 쌀 5만석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조선에선 고마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 쌀을 굉장히 치욕스럽게 여겨 도움을 요청한 신하들을 탄핵했으며 대기근의 원인이 청나라 쌀이라는 소문까지도 돌았다.[4] 이후로도 조선은 더더욱 청나라를 싫어하게 되었으며[5] 고려천자라는 별명이 붙었던 만력제[6] 를 모신 만동묘의 제사를 지냈다.
사실 정치체제가 대개 그러하듯 어느 한 주체가 너무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니다. 조선에 패기넘치는 충고를 날린 강희제의 경우 문자의 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하고 분서와 검열을 행했는데,[7] 적어도 조선에서는 왕이 아무리 진노했다고 해도 그 정도까지 피바람이 부는 일은 적었다. 즉 강희제의 저 말은 왕권이 지나치게 강한 나라에서 그 부작용까지 실시간으로 집행했던 황제의 '''자뻑'''[8] 에 지나지 않는다.
2. 부정하는 입장
동아시아 역사에서는[9][10] 거의 모든 나라들이 막장 테크를 탈 때 신하의 힘이 강력해 졌다는 것을 봤을 때 조선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당장 중국사에서 십상시의 예가 있다. 게다가 건국 초 청나라의 경우, 실제로 황제의 권한이 명나라와 비교해봐도 유달리 강한 편이었다.
어디까지나 왕조 국가인 만큼, 기본적으로 왕에게 주어진 권한은 매우 강력하고 왕통의 불안 요소만 없다면 조선의 왕권도 대단히 강력해진다. 조선의 경우, 왕통이 불안하게 승계되다보니 왕권이 약화되는 면이 있었다. 반정이나 방계로 교체되는 경우가 자주 있었고 그때마다 왕권이 약해지고 신권이 강해지는 일이 벌어졌다. 저 말이 나왔던 현종 시대는 소현세자 문제 때문에 효종, 현종의 왕권이 어느 정도 제약 받을 수 밖에 없었던 문제가 있었다.[11]
이론상으로 조선의 왕은 마음 먹으면 어떤 신하를 불문하고 죽이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고, 모든 재판을 주관하여 그 어떤 죄라도 사면해 줄 수 있었으며, 왕이 내린 명령은 곧 법률이었다. 조선의 왕은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을 한 몸에 가졌다. 또한 왕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내수사의 내탕금은 조선 시대 내내 고갈된 적이 없었으며, 왕실은 조선 내에서는 누구와도 비교할 상대가 없는 탄탄한 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실제로 현종의 뒤를 이은 숙종에게는 별다른 불안 요소가 없었기 때문에 무서울 정도로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다. 즉, 이론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조선은 '''한국사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두를 수 있는''' 국가였다.
다만 불안 요소 없이 멀쩡하게 왕권을 누린 왕이 아버지가 불안 요소를 다 쳐내 준 세종, 스스로 사화를 일으켜 다 쳐내버린 연산군, 왕의 적장자로서 원자부터 세자까지 정석 테크 트리를 탄 숙종 정도 밖에 없다.
숙종의 장남 경종은 폐서인 된 장희빈의 아들인 데다가 아버지인 숙종의 눈밖에 난 천덕구러기 신세라 불안 요소가 다분히 많았지만, 일단 왕위에 오른 뒤에는 자신의 정파를 바로 세우고 동생 연잉군의 세제 자리를 지켜줄 정도의 권위는 확보할 수 있던 걸로 보아 왕의 역량에 따라서는 군약신강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심지어 경종은 신임옥사로 자기한테 딴죽걸던 노론 4대신을 저세상으로 보내버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왕의 권력 = 국력(國力)이라는 공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한민족이 세운 국가, 그 중 특히 조선은 전제군주제 국가 치고는 군주의 패악질이 다른 주변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인데, 여기에는 신권이 끊임없이 왕을 견제한 점이 매우 크게 작용한다. 왕권과 신권이 균형을 이루어야 나라가 잘 굴러가는 법이다.[12] 단지 조선 후기에 들어서 신권이 너무 강해진 게 문제일 뿐.
다만 조선 후기에 신권이 너무 강해진 것도 정조 사후 왕위에 오른 순조가 정치에 지나치게 무관심했고 그 이후 헌종이 지나치게 일찍 세상을 떠나고 중앙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철종이 왕위에 올라 마찬가지로 무기력 했기 때문이지, 왕의 권한이 약했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조선 시대를 통틀어 (세도 정치도 일종의 신하의 권력이라 봐야한다면) 신권이 왕권을 완전히 압도했다고 볼 수 있는 시기는 순조 - 헌종 - 철종에 이르는 3대 뿐이고[13] , 이도 곧 강한 권력 의지를 가진 흥선대원군이 아들 고종을 왕위에 올리며 집권하자 바로 뒤집어진다.
그나마 심환지 어찰[14] 에서 확인되듯이, 그 신권의 견제조차도 왕이 마음만 먹으면 이면에서 정치적으로 조율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다. 왕 빼고 다 가졌던 노론과 안동 김씨는 경종과 고종을 낀 흥선 대원군이 자기들에게 반대하자 권력에서 밀려났다.[15]
조선이 타국과 다른건 왕과 신하들의 세세한 대화 기록이 사초로 남아있다는 점인데 그것들에서 오해가 생기는 부분이 많은거 같다. 유교 질서에 따라 의례적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간언하는 이야기들이 희화돼서 군약신강의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전하, 경연에 힘쓰소서' '전하, 마음을 다잡으소서' 이런 간언들은 경전에 나오는 의례적인 이야기로 별의미가 없다. 경연이 왕을 압박하고 견제하는 도구라고도 하는데 그 경연을 활성화시키고 후대 왕들을 괴롭힌 장본인은 다름 아닌 세종대왕이다.[16] 그리고 모든 왕들이 세자들 제왕 교육에 열혈이라서 어떻게든 나라에서 제일가는 학자들을 선별해서 공부시키려고 난리였다고 한다. 오히려 그만큼 조선에서 제왕의 역할과 영향력이 컸다는 반증이 경연제라고 볼수 있다.
실제 조선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지방관 - 중앙 조정 - 왕의 결재까지 철저한 유례없는 중앙 집권 시스템이 자리 잡았다. 당연히 그 시스템에서 힘의 균형은 최종 결재자인 왕이 우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임란 이후 이러한 정치 체제가 마비되고 인조 반정을 거치면서 정통성에 하자가 있는 군주(인조, 효종) 라인이 펼쳐지면서 예송논쟁과 같은 군신간의 대결이 펼쳐졌다. 하지만 이것도 내막을 보면 혈통과 원칙을 우선하는 유교적 원리와 그래도 왕실인데 그쯤은 넘어갈 수 있다는 현실 논리와의 싸움이기에 양측 모두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 결국은 원리주의자 대표인 송시열을 숙종이 처단하면서 이 기나긴 싸움은 왕실의 승리로 끝이났고 숙종은 당대의 전제 군주로서의 위상을 제대로 누리다 떠났다.
택군을 받았다고 일부 창작물에서 왜곡되는 영조는 즉위 이전부터 왕의 아들이 아닌 왕의 동생이라는 불안한 위치를 극복하고자 자발적으로 정치 세력을 구축하면서 왕세제로서 왕위 계승권을 단단히 했는데 그 정치 세력이 바로 노론이었다. 즉 노론은 영조가 왕위를 위해 키운 친위대였지 공신 세력이 아니었다. 영조는 이 친위 세력을 쥐락펴락했고 확실한 왕권을 확립하면서 50년 넘게 왕노릇 잘했다. 그리고 사도 세자 이야기만 해도 실제로는 미래 권력에 대한 눈치를 본다고 신하들이 영조에게 사도 세자의 비행에 대해 제대로 보고하지 않아 영조가 진노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인데 노론에 대항하다가 희생되었다는 스토리는 애초에 이치에 맞지 않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순수 혈통의 외동이라 왕 자리는 그냥 이어받는 세자가 굳이 아버지 심기 불편하게 반노론이니 친소론이니 정치셈법하며 투쟁할 이유는 제로에 가깝다.[17] 그러니까 애초에 조선시대에 이덕일이 주장하는 "거대 신권에 도전하는 왕의 투쟁" 같은 스토리는 아예 없었다.
대표적인 군약신강 시대인 고려는 무신들의 간섭을 받은 왕들은 집권 무신 세력이 교체될 때마다 왕위 교체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고 특히 희종은 서슬퍼런 세습 독재자 최충헌을 제거하고 왕권을 되찾고자 하다가 실패해서 비참하게 폐위당하고 유뱃길에 올라야만 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이덕일식 군약신강 투쟁 스토리가 나오지 조선 시대에는 저렇게 서슬프런 권신도 없었고 저렇게 무기력한 군주들도 별로 없었다. 더군다나 그 고려도 문벌귀족들과 무신정변 이후의 무신들 등등의 강력한 집권층 탓에 왕권이 유명무실한 신세였을지언정 최소한 16대인 예종 시기까지만 했어도 (막강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왕권이 허약하지는 않았고 어떻게든 제 역할을 했었다.[18] 고려 시대에서는 지나친 신분제 고착화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었을지언정 초중기까지는 왕의 권한이 신권에 압도되는 것은 아니었고 그때까지만큼은 제대로 된 왕조 국가의 왕권으로 남아있었다.
조선 왕들은 그냥 대체로 제 밥값은 다했다. 그 존재감 없는 예종이나 인종도 짧은 시간 동안 제 할일을 했고 예송논쟁 시대에 왕 노릇 했던 현종도 군사, 외교, 경제 분야에서 분명한 업적을 이루었을 정도다. 세도 정치 때 군주들 같은 경우 순조는 편전보다 병상이 더 친숙한 역대급 약골 군주였기에 정상적인 통치력을 발휘하기 힘든 군주였고 이후 헌종 같은 경우도 소년 시절에 왕위에 올라서 수렴청정 받다가 성인되고 친정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승하하면서 평가의 여지가 없다.[19]
정리해서 보면 실제적으로 진짜 군약신강에 휩쓸린 허수아비 군주는 철종 정도밖에 없다고 보면된다. 당대 나름 권신들이라 불리던 조광조, 윤원형, 김자점, 송시열, 홍국영까지 공통점은 왕의 신망을 잃자 모든 것이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신하들이 아무리 설쳐도 그 배후에는 왕이 있었고 그들의 생사 여탈권은 왕이 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악랄하다고 욕먹는 유교 탈레반 송시열은 왕과 대립하는 흑막의 마왕이 아니라 효종의 제왕 교육을 담당한 스승이었고 효종이 즉위한 이후부터 현종 대에 이르기까지 왕들이 어떻게든 옆에 두고 써먹으려 안달했던 양반이었다. 왕은 치세를 위해 어떻게든 유능한 신하를 곁에 두려했고 그 신하들은 왕의 신임을 통해 권력과 부를 얻을 수 있었다. 조선은 군약신강의 나라가 아니라 아주 원초적인 왕조 국가의 특성을 보여준 나라였다. 특히 영조 치세 이후 새로운 정치 체제인 특정 정파나 특정 가문과 왕실의 밀월 체제는 훗날 세도 정치라는 결과물로 이어졌고 이는 구한 말까지 이어져 나라를 망조로 이끈다. 그리고 수렴청정 경우도 왕실에서 행해지는 만큼 최고 권력자가 왕실 사람이라면 그 실권자의 권력이 곧 왕의 권력을 대변한다. 명종 대의 문정왕후와 헌종 대의 조 대비가 권력을 제대로 행사했다면 그것은 왕권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었다 봐야한다. 그런 면에서 조선은 시스템적으로 국왕 중심의 국가 체제가 정상적으로 돌아갔다고 보면된다.
고려 시대에 왕을 자택에 감금했던 이자겸이나 자신의 정치셈법에 따라 마구잡이로 왕을 갈아치우던 최충헌 같은 괴물같은 신하는 조선에 없었다. 중국과도 비교할 거리가 없는 게 중국은 대체로 왕조가 300년 넘긴 적이 거의 없고[20] 조선은 명나라가 망하고도 200년 이상을 더 존속했는데 이 긴 시간 동안 왕권의 사이클이 이어지는 게 더 어렵다. 왕권이 길수록 권력의 사이클은 있기 마련이고 그 왕권을 제대로 누리는 건 국왕 개인의 능력이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강화시킨 연산군은 그 권력을 본인 쾌락에 활용하다 자멸했고 광해군은 측근 관리 실패로 아마추어들의 어설픈 정변에 훅갔다. 이런 실제적인 국왕의 역량은 배제하고 실록의 1차원적인 몇몇 사례로 군약신강의 논리를 정설화하는 것만큼 넌센스는 없다. 확실한 건 조선에서 왕권과 신권은 상호 보완의 협력 관계였지 대립 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왕이 바뀔 때마다 권력 지형이 바뀌았고 국왕 외에는 세습적인 권력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21] 조선에서 왕이라는 존재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 외에도 조선사 500년에서 일어난 역모사건도 보면 성공 사례를 빼면 '대게 XX대군/XX군을 옹립하여 했다.', '상왕을 옹립하려 했다.', '폐주를 복위/상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등이고 그나마 왕족과 연관이 없어보이는 일도 뿌리를 파헤쳐 보니 왕족인 경우고[22] 진짜배기 역성혁명은 드물었다. 고작해봐야 '이홍윤의 옥사'때 이홍윤이 직접 왕이 되려고 했다는 것이니 '김자점의 옥사'에서 김식을 추대하자는 의견이 나왔다든가 하는 정도, 즉 역모를 일으키는 쪽에서도 '전주 이씨가 왕이 되는건 당연하지' 라고 생각했고 단지 그 안에서 골랐을 뿐이다.
3. 긍정하는 입장
일단 당시 주변 국가들에서도 있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우선 대부분의 나라가 막장 테크를 탈 때에 군약신강이 이뤄진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이해해줘도 이 발언이 나온 시기의 조선은 멸망까지 거의 200년 이상을 남겨둔 시점이었다[23] . 막장 테크를 탈 때에는 신하들의 발호가 이뤄진다면 조선은 남은 기간 동안 막장 테크를 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이 200년에는 숙종 - 영조 - 정조로 이어지는 기간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이런 배경은 조선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청이 유목 국가라서 특수한 것이라고 보는 것도 맞지 않는 것이, 한족 국가였던 명나라도 황제권이 절대적 위치에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청나라의 경우는 황제가 주도적으로 만주족의 관습을 강조하기 때문에 두드러져 보일 뿐이다. 조선은 거의 동 시대에 건국된 명나라와 비교해도 왕권이 유달리 약했다. 이에 비견하려면 봉건제 국가의 군주나 강남으로 도주한 이후의 중국 국가들 정도는 되어야 비교가 가능한데, 통일 국가에 중앙 집권적 국가의 왕권이 이런 케이스와 비교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24][25]
일반적으로 왕조 국가에 있어서 왕의 권한이 강한 것은 일반적 상황이다. 그로 인하여 부정적인 영향이 드러나는 것도 사실이고, 왕권을 제약하면 왕으로 인한 문제를 줄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줄어든 문제가 대신 왕을 대신해서 권한을 가진 이들에 의해서 벌어지면 거기서 거기다'''. 더구나 왕조 국가의 왕들은 자신의 권력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제도적으로 왕에게 권한이 있기 때문인데, 신하들 입장에서 이걸 압박을 통해서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양자간의 권력 투쟁이 벌어지게 된다. 군약신강의 근본적인 문제는 제도적으로 강한 왕권을 현실적으로 강한 신권이 억누른 결과물이란 것이다.[26]
현실적으로 강한 신권의 배경이 바로 성리학이다. 원래부터 문치주의가 극에 달했던 남송 시기 주희에 의해서 본격화된 성리학[27] 의 정치 이념화는 조선 초기 정도전에 의해서 '''군신공치'''라는 개념으로 본격화 된다. 하지만 이 군신공치 개념은 이미 증명된 것처럼 극히 예외적인 경우 외에는 실행된 적이 없다.[28] 군신공치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세종이나 성종 마저도 후반부에는 그냥 자기들 맘대로 했다[29] . 영조나 정조는 더욱 그랬으니 다른 왕들은 언급할 것도 없다.[30] 군신공치는 성리학을 신봉한 신하들의 입장에서 가정한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이지 그게 실제로 실행된 적은 없다. 애초에 군신공치를 처음들고나온 정도전만 해도 그 권력은 군신공치 운운하기에는 너무 강했고, 이건 이방원과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애초에 군신공치라고 하는 세종 때의 기록을 보면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다. 태종이 자신의 서녀를 결혼시키려고 했을 때, 이속(조선)이 이걸 깠다가 패가망신한 적이 있었다. 이후 세종 때에, 태조 이성계의 서녀인 의령옹주의 자손 이선이 과거를 보게 되자 그가 서얼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즉, 왕의 외손이지만 그래도 서녀의 자손이니 서얼이라는 것. 왕 = 사대부 중 한 명으로 보면 이것도 허용되어야 하지만, 세종은 이 말을 한 사간원 관료들을 바로 의금부로 보내서 국문하게 한다. 당시 기사 이들은 장형을 당하고 유배까지 가지만관련 기사, 이들이 속했던 사간원[31] 에서 '''이들이 한 말은 미친 소리가 맞지만[32] , 그래도 언관이니까 봐주세요'''라고 하고, 세종은 이속의 이야기를 들어서 비판하다가, 그래도 언관이라서 봐주게 된다. 하지만 이후에도 왕실 족보에 오른 이들은 서자 취급에서 완전히 제외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서얼과 결혼 시스템을 보면 정도전 관련해서도 복잡해진다. 정도전이 밀었던 방석은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데, 신덕 왕후 강씨는 이성계의 본처였던 신의왕후 한씨가 살아있는 상황에서 이성계가 혼인을 한 상대이고, 이 결혼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도 전이기 때문에 명백한 첩이 된다. 하지만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를 때는 신의왕후 한씨는 죽은 뒤였기 때문에 개경 귀족의 자손인 신덕왕후 강씨가 정식 왕후로 올라갔다. 즉, 왕과 사대부가 같다고 한다면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양첩이었다가 다시 결혼한 상대가 되고 그 자손들의 지위는 본처였던 신덕왕후 자손보다 낮아진다.[33] 반면 왕은 별개라고 보면 조선이 건국할 때 왕후로 오른 신덕왕후 강씨도 정처가 되고 그 자손들도 신의왕후의 자손들과 동등한 위치가 된다. 이처럼 군신공치를 주장했던 정도전의 행적도 그의 주장과는 상당히 안 맞다. 현실을 위해서 이론 따위는 때려치웠다면 모르겠지만.
성리학에서 군신공치가 가능하다고 본 이유이자, 그리고 군신공치 개념이 어려운 이유가 있는데 바로 도학 군주 개념이다. 집권층 전체가 성리학에 물든 조선에서 신료에서 재야의 선비들은 물론이고 왕도 성리학에 충실한 군주가 되기를 요구받았다. 유학적 개념에 있는 아시아권, 특히 성리학으로 통일된 조선에 익숙해지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보이지만 서구권이나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해도 이는 상당히 특이하다. 당장 세자를 가르치는데 사용된 책들을 보면 실무적인 정치 지식을 다룬 《정관정요》나 《국조보감》과 같은 서적들 보다 《대학》의 주석서인 《대학연의》, 《중용》, 이이가 저술한 《성학집요》, 《성리대전》 등 성리학과 관련된 서적이 더 많다.[34] 그리고 이것은 왕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아서 경연의 형태로 성리학과 유학에 대해서 공부하는 형태가 된다. 이건 플라톤의 철인 군주론의 보다 적극적 개념일 수도 있지만, 국왕이나 세자의 두뇌를 성리학으로 고착화해버리는 역할을 한다. 그나마 이런 과정을 적극적으로 왕권 강화에 활용한 정조와 같은 국왕도 있지만,[35] 그 결과 정조는 문체 반정 운동과 같이 철저한 도학 군주로서의 한계를 지니게 되었고, 이런 세뇌에 가까운 과정에 반발을 품은 이들은 양녕대군이나 사도세자처럼 세자 시절에 엇나가거나 혹은 연산군처럼 재위 기간 도중에 막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도학 군주 개념마저도 시간이 갈수록 신권 강화로 전개되었음을 볼 수 있다. 단적인 예가 이황과 이이의 논쟁인데, 이황은 '''국왕이 스스로 깨달아서 군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에, 이이는 '''신하의 교육을 거쳐서''' 국왕이 군자가 된다라고 주장했다.
이 부분이 중국 성리학보다 이이와 정도전의 방법론이 더 나가는 것이다. 중국 성리학에서 왕은 특히 높으면서도 신하 전체로 대립이 가능한 수준이었다면, 이이와 정도전의 방법론은 왕 = 신하들이 포함된 사대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게 실현된 것은 중국에서도 송대의 문제가 아니다. '''남북조시대'''의 극혼란기 속에서나 이게 가능했고, 그 결과는 문벌 귀족의 난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장면은 고려 초의 문벌 귀족 시기에도 나타난다. 당장 고려만 해도 일반적으로 기억에 남는 왕이 몇명 안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광종 이후로 왕권이 강했던 특이한 예(숙종, 예종의 경우)나 그 와중에도 깽판친 경우(단적으로 충혜왕의 경우)를 제외하면 공민왕 이전까지 기억나는 왕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36] 왜냐하면 왕의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반기는 문벌 귀족, 중반기는 무신 정권, 후반기는 권문세족. 그래서 고려 시대의 상태가 좋았는가? 고려사 및 관련 사료들의 상당수가 문신 관료들에 의해서 쓰여졌기 때문에, 문벌 귀족의 정치는 대단히 긍정적으로 무신은 대단히 부정적으로, 권문세족 시기는 조선 건국자들이 때려부순 이들이라서 부정적으로 쓰여진 것 까지 고려하면 고려 시대 백성들의 삶은 정말 갑갑해진다.[37]
앞서서 왕권이 약해도 관료층에서 난리치면 별 차이 없다는 것이고, 성리학은 전통적으로 약했던 왕권을 이론적으로 확립시켰을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문벌 귀족 시기의 정치 모습[38] 과 별반 차이도 없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정통성의 문제 때문에 왕권이 약했다고 하지만, 애초에 정통 개념을 극도로 중시한 것 자체가 성리학의 특징이다. 공자의 정명론이건 양명학이나 고증학이건 성리학만큼 정통론에 입각하여 이 국왕, 이 왕조에게 정통이 있네 없네를 따진 학문은 찾아보기 어렵다.[39] 그리고 국왕의 후계자들에게 있어서 정통성이 있네 없네 현 국왕에게 정통성을 부정하네 운운하면 조선 시대 후반을 뒤흔든 문제, 즉 택군이 등장한다. 신하들이 국왕을 선택한다고 하면 입헌 군주제 분위기라서 좋아 보일지 몰라도, 그 신하들이 실질적으로 대표로서 보다는 귀족의 개념에 더 가깝다면 귀족 과두정의 문제만 나올 뿐이다. 실제로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전체 민의의 대표자보다는 자신들의 특권 유지와 자신들의 이상을 유지하고 펼치는데 대부분의 열의가 사용되었다. 소위 애민 정신도 위에서 아래를 보는 긍휼히 여김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조선의 왕들의 권력은 정통이 있느냐 없느냐도 있지만은 왕이 재위하여 집권한 시기가 얼마나 되느냐와 실제로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역량이 있느냐라는, 보다 개인적인 부분의 비중이 컸다. 단적으로 군약신강이라는 표현이 나온 현종은 세손 - 세자 - 왕이라는 루트를 착실하게 밟아서 왕위에 오른 몇 안 되는 인물이다.[40] 현종이 효종의 아들이라서 정통성이 문제를 보였다면 현종의 아들인 숙종이 정통성이 강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2대는 약하지만 3대 정도 가면 정통성이 보강되어서 그런가? 성리학의 개념에서 보자면 정통성은 현실적인 문제나 몇대를 지났느냐 같은 것과는 별로 상관없다. 예송논쟁 과정만 보아도 재위 초기였던 1차 예송과는 달리 2차 예송에서 현종은 송시열을 밟아버렸다. 송시열이 현종 대가 아니라 숙종 대에 죽은 것은 현종이 정통성이 약하고 숙종이 정통성이 강해서가 아니라, 현종이 34세의 나이로 도중에 사망했기 때문이다.[41] 이건 왕권이 정통이 아니라 왕과 신하들간의 권력 다툼에서 나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조선의 왕들은 이론적으로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집권층 모두가 성리학 일색이라 세자 시기부터 시작되는 세뇌에 가까운 교육과 왕권을 견제하기 위해서 촘촘히 마련되어가는 신하들의 견제에 운신을 마음대로 못 하게 되고, 이에 어긋나면 광해군마냥 쫒겨날지도 모른다는 반정의 위험을 느끼는 와중에서 별 소리를 하지 못하다가 자기도 나이를 먹고 재위 기간이 길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펴기 시작했다.
그런데 워낙에 견제에 배운 것이 성리학 뿐이라서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거나 기존 제도를 손대기 보다는 그냥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면서 놀아버렸다. 애초에 다른 뭔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지쳐버리던가 그 신하들의 정쟁에 말려들어 강력해진 권력을 숙청 등에 쓰던가이다. 그나마 강화한 권력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신하들과 아웅다웅해야 한다. 학문에 손을 대고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은 정말 특이한 사례일 뿐이다. 아예 집권 초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그것을 진압하는 동안 권력이 강해진 영조조차 신하들에게 치여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지쳐갔다.[42]
상단에서 언급된 '군약신강의 기준 = 군주가 완전히 허수아비 수준'이란 것은 기준점을 극단적으로 옮겨 놓은 형태에 가깝다. 그 정도가 되면 춘추 시대의 주나라나 전국 시대 이후부터 메이지 유신 전까지의 일본 조정에 가까운데, 거기까지 가면 무늬만 군주제에 가깝다. 하지만 이는 정상적인 국가 체제가 아니라 제도의 파행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500년, 실제로는 그 것도 안되는 성리학만 고려해서, 동아시아를 2000년간 지배한 시스템, 바로 율령제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통치 기준은 성리학 이론이 아니라 율령격식이다. 애초에 유교식으로만 통치했다면 조선은 봉건제 국가가 되었어야 맞을 정도다.
'왕과 신하가 상호 보완의 협력 관계'라는 위의 언급은 대통령과 국회가 상호 보완의 협력 관계라고하는 것과 달리 '동아시아의 전제 군주정에 기반한 율령제' 하에서는 개소리가 된다. 효종이 송시열을 다루기 힘들어하고, 정조가 심환지에게 어찰을 보내는 것은 그들이 유능한 신하여서가 절대로 아니다. 그들이 정치 권력자이기 때문이다. 효종이 송시열을 바로 죽이지 못하는 것은 송시열이 효종의 스승이고 유능한 신하라서가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반정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왕이 자신의 측근 세력을 차곡차곡 쌓고, 상대가 유능하건 말이 맞건 틀리건 하는 것은 상관없이 신하들이 서로를 여차하면 발목 잡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나서야 자기 정치를 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의 15년이 각 왕마다 필요 하다는 것이 군약신강의 증거이다.
그리고 성리학과 엮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정통성'이라는 개념[43] 을 왕에 집어넣으면 택군의 문제는 언제든지 고개를 들 여지가 있다. 이방석과 이방과 혹은 이방원 중에서 도대체 누구에게 정통성이 있는가, 계유정난 이후 정통성은 왕위를 계승한 세조에게 있는가, 폐위된 단종에게 있는가. 선조의 뒤를 이을 정통성은 광해군에게 있는가 영창대군에게 있는가.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에 정통성은 있는가, 인조의 뒤를 이을 정통성은 효종에게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소현 세자의 후손인 이석견에게 있는가[44] , 숙종의 후계자는 명목상으로는 인현왕후의 아들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에게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무수리의 아들이지만 적어도 장희빈의 아들은 아닌 연잉군에게 있는가, 이런 대답을 할 권리는 왕실에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신하에게 있는가. 만일 신하에게도 있다면, 그게 바로 택군이다. 이 택군 문제가 조선 후기에나 나오는 것은 조선 전기의 유일한 택군은 삽시간에 반란으로 끝나서 선택의 여지도 별로 없었다는데 있다. 위에 택군의 대상이었다는 영조에게 노론은 친위 세력이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영조 입장에서는 그렇다. 반면에 자기 몰아내려고 드는 상황이 되는 경종 입장에서는 언제 정리를 해야할까를 고민해야 하는 상대가 된다.
왕은 계승이 되고, 신하는 계승이 안되니까 왕이 절대적 존재라는 것도 사실이 아닌 것이 그럼 만세일계라는 일본 덴노는 막부 시대건 전국 시대건 절대적 존재였나? 현대 일본 정치계에서 현대에 되살아난 막부 취급 받는 자민당은 그 당수가 세습을 하나?[45] 문묘 배향된 인물들이 결국 초기 사림이 계보에 이이의 학맥들이 줄줄이 들어간 것은 혈맥이 아니라 학맥이니까 상관없는 문제인가?
이런 기본적인 문제에 더해서, 조선중기가 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바로 '''사림 일색의 신료들로 인한 진짜 사대주의의 등장'''이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면, '''중국의 황제와 조선의 왕'''이라는 구도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는 성리학의 관점에서 중국황제>조선 왕 구도를 만들었고, 위에 언급된 신하들 개개인과 마찬가지인 군주는 어디까지나 조선의 왕으로 제한되었다. 즉, 어차피 중국 황제의 밑인 것은 자기들이나 조선 왕이나 똑같다는 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때문에 광해군 때만 되어도 '''차라리 왕을 거역하지 명나라에 거역할 수 없다'''는 발언을 왕 앞에서 대놓고 하는가 하면[46] , 병자호란 이후에 청나라에 끌려간 삼학사라는 인물들은 '''대명조선국의 신하''' 운운해대기 시작한다. 아예 대놓고 명나라로 귀화해버린 임경업이 이후 사림들에게 추앙 받았던 것도 이런 사례이다.
그리고 시기가 더 흘러가면, 송시열 같은 자기들 학파의 스승도 왕보다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는 기미가 보인다. 재야의 일이긴 하지만, 송시열의 후손이 정쟁과정에서 밀려났다고 이를 비판하고, 비판한 자를 처벌하자 처벌당한 사람을 옹호하다가, 왕을 걸주에 비교하면서 반란 도모하는 일까지 생긴다. 그 왕이 바로 정조다.
이때문에 이런 조선의 모습은 중국의 황제들 입장에서는 군약신강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청이 정복 왕조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같이 성리학을 신봉한 남송이나 황제는 덤이고 실제로는 권문세족이 통치한 남북조시대의 황제들 정도를 제외하면 조선의 국왕들만큼 왕들이 뭘하는데 제약이 많았던 시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멀리 갈 것 없이, 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건국한 명나라만 해도 황제의 권한은 내부에서 거의 무한한 수준이었다.[47]
4. 조선의 군약신강의 구조적 문제
4.1. 전제군주의 의미
전제군주가 통지하는 이른바 동양국가는 작게는 동북 아시아의 중국과 한국 넓게는 중앙 아시아와 중동, 더 멀리는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제국에 이르기까지 이론상 전제군주가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신민의 생사여탈권한을 쥐고 있었다. 즉, 모든 귀족과 관료는 왕의 노예로 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이자 왕을 위하는 게 존재 의의였다.
이에 반해 서유럽의 경우, 왕의 권한이 매우 제한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게르만 시절 선거부족장 시대의 족장이 왕이 된 이유도 있었을 것이며 교회의 사회적 힘도 무시할수 없었을 것이다. 그로인해서 왕이 국가원수이긴 하지만 각자의 영역을 존중해야 하는 사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서유럽의 절대왕정도 사회변화에 따른 왕의 영역이 비대하게 강해지면서 얻은 불안정한 권력이었다. 이는 왕은 법위의 존재라는 일반적 전제군주제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4.2. 현실
하지만 이론과 현실은 다른 법이고 실제로는 아무리 강력한 전제군주라도 왕의 명령을 집행하고 통치를 보좌하는 관료와 고위 관료를 독점하는 귀족 및 사대부, 지방의 토지를 소유한 소귀족과 호족에게 권력이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강력한 군주라도 혼자서 모든 일을 할 수 없는 이상에 이런 통치권을 어느 정도 나누어 가진 지배층과 온갖 이해관계 속에서 타협을 하면서 움직여야 했다. 더구나 왕은 궁궐에서 혼자서 고립된 존재이지만 권력층은 혼인, 학연, 지연 등등 각종 인맥으로 맺어진 사이였다. 이러니 아무리 막강한 전제군주라도 명령 한 마디에 모든 일이 일사분란하게 돌아가게 하기는 어려웠다.
4.3. 일반적인 왕권강화 방법
당연히 이런 군주권이 제한된 상황을 왕이라고 좋아하는 건 아니였다. 특히나 중앙집권이 강력한 동양권 국가일수록 이론상 권력과 실제로는 중앙 관료 집단과 마찰로 인한 제한받는 현실의 괴리감이 클 수 밖에 없었다.[48] 군주의 명령을 받는 관료집단 그 자체가 왕을 견제하는 형태이니 왕들이 답답함을 느꼈고 이런 상황을 타파하고자 몇가지 일종의 편법이 넓게 사용되었다. 통상적으로 많이 쓰이는 방법은 왕의 친가인 왕실 인사의 기용, 왕의 외가인 외척 기용, 환관의 중용이었다. 문제는 세 가지는 널리 쓰이는 만큼 효과가 있었지만 부작용도 심했다.
4.3.1. 왕실 인사(친가)기용
4.3.1.1. 장점
친가인 왕실 인사 기용은 동일한 이익을 공유하는 친족에게 권력을 몰아줌으로써 폐쇄적인 관료집단을 자기 혈연을 통해서 통제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장점이었다.[49] 거기다 왕실 인물인만큼 귀족보다 더 권위가 있어서 말빨도 서고 귀족/사대부에게 이익이 되는 것보다 왕실에 이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였다. 혈연인만큼 통상적으로 충성을 받아내기도 쉬었다.
4.3.1.2. 단점: 반란
문제는 이런식으로 권력을 가진 왕실 인사는 왕위 계승권이 있기에 까딱하다가는 반역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나 중앙의 권위가 허약할수록 반역 가능성이 높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팔왕의 난. 이러니 통상 계승권이 가까운 인물일수록 중용되기 어렵고 이러면 권위가 살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계승권에서 멀면 100% 안전한 것도 아니였다. 그리고 왕실 기용의 폭이 클수록 지배층의 반발도 커져서 한계가 있었다. 이래서 어느 정도 정비되는 국가일수록 왕실 기용의 폭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신라에서도 고위상층부는 죄다 진골귀족들이었는데 문제는 이 진골들은 너나없이 왕위계승권을 쥐어 신라 하대가 개판이 되는 원인이 되었다.
4.3.2. 외가 중용 방법
4.3.2.1. 장점
왕실 인사의 단점을 해소하면서 혈연이 있는 인척을 기용하려는 시도에서 사용되는 게 왕의 외가를 중용하는 방법이었다. 외척은 왕이라는 존재가 있는 모든 국가에서 사랑받는 권력 장악 수단이었다. 일단 왕가는 혼인으로 이어진 혈족에 가까운 관계로 왕과 이익을 공유하는 면이 있다. 또한 왕실과 혼인할 정도면 어느 정도 세력이 있기 때문에 동맹으로는 제격이며 지배층 내에서 상당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관료통제에도 용이했다. 그렇기에 설사 고위직을 맡기더라도 반발이 적었고 다른 지배층과 인맥이 있기 때문에 여론을 이끌기도 쉬었고 왕실에 충성하는 당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계승권은 없었으니 왕실 인사보다 훨씬 안전했다. 중앙집권이 강할수록 왕에 의지해서만 권력을 가질수 있는 외척은 더더욱 왕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후한은 관료를 장악한 귀족과 호족에 대해서 외척을 기용해서 대응했다.
4.3.2.2. 단점: 라이벌의 등장(구, 신외척)
하지만 이것도 100% 해결책은 아니었다. 외척이라는 게 기형적으로 한 가문이나 집단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일이고 이는 왕실에 필적할 세력의 등장이었다. 통상 새왕이 즉위해서 외척이 갈리면서 문제가 해결되지만 이 경우에는 구 외척과 신 외척의 갈등이 발생한다. 그렇다고 구 외척을 계속 중용하면서 혼인을 맺다가는 외척이 왕을 잡아먹는다. 원래부터 상당히 강력했을 외척은 왕실이 얽매이지 않고 다른 귀족/사대부와 연결되는 인맥이 있는 만큼 세력 만들기도 더 쉬웠다. 왕망은 외척이라는 입장으로 전한을 몰락시키고 신을 건국했고 조선은 안동 김씨 세도가 한 때는 나라를 흔들었다.
4.3.3. 환관이용
4.3.3.1. 장점
이렇게 피가 흐르는 친족은 계승권 분쟁으로, 혼인으로 맺어진 외척은 권력 독점과 견제 불가한 지배층 등장이라는 문제 때문에 기피하는 대신에 애용한 게 환관이었다. 기본적으로 환관은 노예로써 왕의 사유재산이나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궁궐에서 고립된 왕이 어려서부터 가까이 지낸 사이로 인간적 관계가 가까웠다. 당연히 생사여탈 문제가 임면 문제에서 훨씬 자유로웠다. 환관 하나 죽이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었으니. 친가나 외가는 어째든 기존 관료제를 안에서 인사로 통제하는 방법이고 관료 집단과 권력과 이익을 공유하는 순간 왕이 고립되는 문제가 있었지만 환관은 관료제 밖의 존재였다. 이런 점 등에서 지배층과 연결될 고리도 적었다. 거기다 왕이 아니면 권력을 가질 수 없다보니 다른 지배층과 결탁할 수도 없었고 기본적으로 원래 신분도 낮은 편이었으니 귀족이나 사대부가 친하게 지내기 어려웠다. 고자라서 권력이나 재물을 몰아줘도 물려받을 자식이나 가족도 없어서 죽으면 기본적으로 왕에게 돌아오고 새왕이 즉위한다고 환관이 유세부리기도 어려웠다. 그러면서 원래 고자니 역성혁명 가능성도 없었다. 이러니 원래 하렘이 있던 나라들은 물론이고 기독교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도 하렘이 없음에도 환관을 관료로 기용했을 정도로 왕들에게 사랑받았다. 중국은 환관을 조직화 했고 단순한 왕의 명을 받드는 거부터 시작해서 기밀관리, 군대 감독을 맡기더니 아예 군대 지휘와 관료 감시까지 도맡았다. 명의 강력한 황제권 뒤에는 동창으로 대표되는 거대한 환관 조직이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도 나르세스 같은 환관 장군이 있었다.
4.3.3.2. 단점: 무능력
문제는 환관을 기용했다가 망한 사례가 조선의 이웃인 중국사에 잔뜩이었다. 기본적으로 환관은 궁정 사무를 처리하는 존재였고 신분이 높지 않은 이들로 학문적 소양이 높지 않았고 높을 필요도 없었다. 이러니 국가를 운영하려는 큰 철학이나 비전이 없었고 출세 때문에 환관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니 권력 획득 후 큰 그림을 그리는 대신에 자기 욕구 해결이 우선이었다. 거기다 군주에게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획득하게 되는 만큼 윗사람에게 잘보이는 아부와 처세술이 뛰어난 전형적인 간신, 무능력한 상사가 권력을 가지기 쉬웠다. 안 그런 경우도 있지만 그런 인간성 좋고 능력있고 정치적 안목도 있는 환관은 긴 중국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수준이었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조고가 국정 농단과 황제시해를 자행했고, 이후 후한도 환관의 농단과 십상시의 전횡으로 결정타를 맞고 망했으며 당나라는 황제가 환관의 반란으로 노예인 환관의 포로이자 사실상 노예라는 처참한 상태가 되었다. 강력한 황제권을 가진 명은 황제가 환관에게 농락당하지 않았지만 대신에 환관이 황제를 홀리고 권력을 대신 휘두르면서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다.
4.4. 조선의 정책
4.4.1. 기존방법 봉인
이런 점 때문에 조선은 아예 위의 세 가지를 전부 봉인해버렸다.[50]
왕실 인사 기용은 초반에는 딱히 큰 제약이 없었다. 건국 후 중앙집권화와 권력 다툼 과정에서 태종의 권력 장악과 사병 혁파를 거치면서 왕실 일가가 가진 권력이 왕에게 귀속되면서 전주 이씨가 중책을 맡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나라가 안정되고 세종이 대군들에게 일을 맡기고 세조가 공신 견제 목적으로 신 공신과 함께 왕족인 구성군을 영의정 삼아서 파격적으로 기용했지만 사후에 남이의 옥사로 죄다 날려버리면서 구성군은 정치적으로 거세해버리고 법으로 가까운 전주 이씨 왕족은 아예 과거 자체를 금지하면서 왕족이 아니게 된 경우만 관료로 임용되게 했다.[51] 단 명예직에는 제수해서 흥선대원군은 도총관을 지내기도 했다. 어쨌든 정치권력은 주지 않았다. 물론 이는 흥선대원군 집권기에는 좀 달라서 종친들을 여기저기 앉혀주긴 했다.
외척의 경우는 태종은 손수 처가에 사돈까지 박살을 내었고 이후에도 딱히 외척이 힘을 쓰는 경우는 없었다. 외척을 중요하기에는 왕권이 강했고 외척이 나설 상황이 되려면 왕의 어머니가 중전이어야지 후실인 비빈의 경우에는 법적 어머니인 중전이 멀쩡하게 있을 경우 행동이 제약되었다. 특히나 수렴청정 같은 상황이면 더더욱 그랬다. 그래도 중반기 들어서면서 윤임, 윤원형 같은 외척이 나타났지만 명종이 직접 숙청했고 이후로도 외척은 영조가 붕당에 질려서 척신 정치를 하면서 권력을 집중해주기 전까지는 대세가 되지 못했다.
환관은 아예 초기에는 없애려고 했었고 이후에도 왕실 사무만 처리하는 조직으로 한계를 그었다. 경종이 환관의 도움으로 소론과 소통해서 정국 뒤집기가 있었기도 했지만, 동창 같은 관료 사찰 능력은 없었다. 당연히 군대 사무나 지휘도 불가능했고 왕의 시중만 드는 노예라는 위치를 고정시켰다. 더해서 가족도 가질 수 있게 해주고 양자도 들이게 해서 가족을 돌보게 해서 권력에서 눈을 돌리게 하고 어느 정도 재물도 축적해서 욕구도 달래고 유사시 가족을 인질로 삼게 했다. 물론 왕실의 재산인 내탕금을 관리하는 내수사 소속이거나 왕명을 출납하는 내시와 같은 고위직들은 위세를 부릴 수도 있었지만 이 역시 현실 정치와는 거리가 멀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수준이었으며 기존 관료들의 벽을 넘지 못했다.
4.4.2. 개인적 권력기구 및 자산: 아예 없거나 미약함
여기에 더불어서 군주들이 가지는 개인적인 권력 기구도 거의 없어서, 금의위나 동창 같은 직속감찰 및 비밀경찰 조직도 없었고 군주들이 관료제를 압박하고 동시에 감시 및 감독하게 하는 친위군 세력도 미약했다. 실상 이런 근위대 세력도 관료들을 통해서 조직되고 관리되는 만큼 왕이 보통 관료를 우회해서는 군대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국왕 직솔 조직으로 의금부가 있었지만 특정 범죄 수사나 군대 감독을 제외하면 임무의 한계가 있었다. 고려 초까지 쓰였던 기존 세력과 연관이 없는 외국인 기용이라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나마 몇몇 왕들은 승지들을 육성하여 기반으로 삼으려고 하기도 했다.
군주가 가지고 있는 자산은 내탕금, 내수사의 형태로 유지했으며 이 자체의 규모는 결코 작지 않았다. 하지만 이 돈을 군주 자신의 권력을 위해 쓸 방도가 마땅치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군주의 권력 강화 방안 및 권력 기구의 운용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탕금의 소비는 주로 왕실의 행사를 위해 쓰거나 구휼 등의 형태로 백성들에게 베푸는 등 왕실의 명분상의 권위를 살리는데 사용했다.
4.4.3. 조선왕들의 남은 방법: 숙청
이런 상황에서 왕이 절대군주로 무제한 권력을 휘두르려면 방법은 딱 하나만 남았다. 바로 '''숙청'''.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다는 왕인 태종, 세조는 즉위 과정에서 반대파를 깡그리 정리했고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반대파가 될만한 세력을 나서서 혹은 미연에 알아채고 숙청했다. 연산군과 광해군도 사대부의 약점을 잡고는 숙청을 통해서 사대부를 압박하고 찍어눌렀다. 숙종도 방향성이 좀 다를 뿐 결국은 사대부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절대 권력을 획득했다.
4.4.3.1. 단점: 사대부의 반란
문제는 숙청은 한계가 있는 일이고 결국은 나라는 좀 먹고 나중에는 연산군, 광해군처럼 못 견딘 사대부가 들고 일어날 위험이 있었다.
그래도 이런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왕들이 권력을 강화시킬 방법이 이거뿐인지라[52] 많이 애용되었고 연산군이나 광해군 정도를 제외하면 또 숙청을 하면서도 또 다른쪽은 잘 대해주어서 그런 일은 없었다.[53]
4.4.4. 번외1: 선위 쇼
태종, 선조, 영조 등은 종종 선위(양위) 소동을 벌이고는 했는데 선위 소동이 일어나게 되면 일시적으로 왕의 권위가 치솟게 된다. 이유는 왕위를 받게 될 세자는 (대개) 왕의 아들이고 세자의 섬기게 될 신하들은 왕의 신하이기에 덥석 받았다가는 세자는 불효자 신하들은 불충으로 낙인찍히기 때문, 그래서 일단 선위 쇼가 시작되면 세자와 신하들이 왕이 선위의 뜻을 거두기 전까지 그만두어달라고 애걸복걸해야 한다. 때문에 태종이 양위를 할 때는 워낙에 멀쩡한데다가 세자 책봉 3달 뒤에 하는 일인지라 신하들이 모두 그만두어달라고 빌었고 이에 태종은 아얘 세종에게 군주의 복장을 입혀서 신하들에게 '이번엔 진짜다!' 라는 뜻을 보여주었다. 신하들도 "군주의 복장을 했으니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 라며 받아들였다. 다만 모든 선위를 선위 쇼처럼 반대만 한 것은 아니라서 세조, 중종처럼 반대없이 선위한 경우가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진짜로 오늘내일하는 사람이 한 일인지라...
그 외에 세조 시기에는 특이한 선위 쇼가 벌어졌는데 양정 문서 참조
4.4.4.1. 단점: 세자의 권위 약화
문제는 왕의 권위는 올라가지만 반대급부로 세자의 권위가 약해진다.
4.4.5. 번외2: 단식
왕들이 많이 즐겨쓴 것이 식사의 거부다. 왕이 신하들 때문에 밥을 먹지 않다가 죽게 되면 신하들은 당연히 불충으로 찍히기에 왕의 대표적인 시위 수단이었다. 물론 이것은 왕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서 정순왕후가 정조 재위시절에 정조를 상대로 사용한 바 있다.[54][55] 앞의 선위 쇼보다는 사용빈도가 많고 사용한 왕도 많다.
4.4.6. 조세 시스템의 무능
조선, 정확하게는 대한제국이 망하게 되는 근본적 배경중 하나인 '''재정문제, 더 정확하게는 조세시스템'''도 군약신강을 고착화시키는 구조였다. 특히 조선시대는 이 시스템이 완전히 개판이었다. 조선은 '''겉으로는 성리학적 민본정치+청백리 시스템'''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적게 거두고, 관료들은 적은 녹봉을 받고, 일선 아전들은 무급봉사자'''였다. 이건 정도전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처음 만들 때부터 계획한 것이다.[56] 조선 전기와 후기의 차이는 관리들에게 과전을 주었다는 것 하나인데, '''정도전이 살아있을 때 이미 과전이 부족해진다'''. 결국 이후 과전은 폐지되었다.
4.4.6.1. 단점: 만성적 재정부족
그러나 역으로 중앙 정부는 뭘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만성적 재정부족에 시달리는 처지가 된다.
실제로 조선 초기 전성기로 불리는 '''태종과 세종 시기 정도'''를 제외하면, 더 정확하게는 이때도 꼼수로 국가가 운영되게 된다. '''아전들은 자진해서 굶어 죽을리가 없으니까 백성들을 착복하게 되고, 중앙 관료는 지방관들에게 '수증'이라는 사실상 제도화된 뇌물을 받아서 생계를 유지했고, 지방관들은 수증을 바치기 위해서라도 지방민들을 수탈하고, 왕은 왕대로 국고와 별개로 내장원이라는 자기 주머니 별도로 만드는 시스템'''이 완성됐다.[57]
조선의 공식적 세금은 1/10이라는 기록적 저세율이었지만 실제론 이것저것 고려하면 적어도 30%까지는 올려 잡아야 한다. 당시 소작농과 지주는 병작반수라고 해서 쌀 수확량을 절반씩 나누었다. 이때문에 소작농은 인두세를 50% 수확량에서 내야 했기 때문에 빈곤한 처지가 된다. 그래도 일본 같은 살인적 고세율 하에서 그짓을 하는 것보다는 압도적으로 많이 남길 수 있었다. 특히 2모작을 하는 경우 보리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이것도 남았고.
그래서 이 모든 것을 고려하면 그냥 세금 30% 거두고, 중앙 정부에서 이 모두를 통제하는 것이 당연히 낫다. 중앙정부에서 세금 더 거두고 별도의 수탈 못하게 하면서 월급 더 주는 것이 백성들에게는 예상 가능한 지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은 이걸 안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국왕에게 세금을 관리하고, 관료와 아전, 병사들의 월급을 관리할 전권을 주느니 그냥 꼼수로 돌아가게 하면서 겉으로는 민본주의의 휘장을 치는 것을 당시 관료들이 더 선호했다는 이야기다.
유럽식 중앙 집권 국가에서도 중앙집권의 상징은 3가지로 나온다. 첫번째는 군사력이고, 두번째는 행정관료집단이고, 세번째는 조세시스템이다. 그런데 이중 가장 어려웠던 것이 조세시스템이었다. 조선이 가난했다고 평가하게 되는 이유중 하나가 이 중앙정부로 들어오는 세금만 고려했을 경우이다. 이 암묵적이고 제도화된 부패가 공식적인 중앙정부 예산의 몇배가 되는 이 시스템이야말로 국왕의 권한을 줄이는 핵심적 요소였고, 군약신강 시스템을 유지시켰던 토대였다. 심지어 농민 반란의 대상이 지방 아전이나 수령이 되지, 중앙정부까지 올라가지 않게 만든 배경이기도 했다.[58]
4.5. 결론: 관료집단과의 공존
이러니 조선의 왕은 철저하게 사대부로 구성된 관료집단을 거치지 않고서는 권력을 휘두를 수 없었다. 여기다 제도적으로 왕을 견제하는 삼사를 두었다. 거기다 배운 것도 사대부와 왕의 공치를 통한 정치이니 왕들이 사대부와 협력할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왕이 정치를 알게 되고 머리도 굵어져서 사대부와 반대되는 일을 하고 싶어도 배운 것도 사대부와 동일하니 한계가 있었고[59][60] 사대부로 이루어진 관료 집단에 둘러쌓여서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없었다.
이래서 조선의 왕은 중세 시절 끝판 수준의 강력한 왕권을 보유했으면서도 정작 권력 행사가 상식적 수준에서 제한이 되었고, 권력을 국가 운영에 우선시하게 되었다. 만약에 한계를 넘을 경우 연산군, 광해군의 예처럼 관료 조직을 장악한 사대부들의 다수가 동의가 있다면 교체도 가능했다. 관료 집단을 장악한 사대부가 힘을 합치면 견제가 불가능함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황희가 사위인 서달의 죄를 감추려 했던 스캔들. 황희 자신부터 시작해서 수십 명의 관료들이 사건을 묻어버리고 왕에게 올라가는 보고서까지 가로채서 조작했던 것이다. 이때 왕인 세종이 권력이 약했던 것도 아니었음에도 관료들이 작정하고 짜고 움직이자 왕은 순식간에 고립되었다.[61]
5. 미디어에서는
이딴 거 없고 '''사극에서는 거의 대부분 군약신강이다'''. 이유야 간단한 것이, 안 그러면 긴장감도 못만들 정도로 '''사극 작가들이 무능해서'''이다.[62] , 실제 역사와 괴리가 너무 심해서 문제다.
사실 군약신강이 편한 이야기 전개인 이유는 간단하다. 상업용 스토리의 전형적인 베이스인 '''선한 영웅 주인공이 악당의 악행을 모두 해결하고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스토리를 만들기 매우 쉽기 때문.[63] 때문에 대부분의 사극이 신하가 아닌 왕을 주인공으로 삼거나[64] , 그게 아니더라도 왕에게 충성하는 신하를 주인공으로 삼아서 주인공, 혹은 주인공의 충성의 대상인 왕이 왕으로서 모든 걸 해결하고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까지 완벽하게 깔아놓는다.
심지어 바로 위에서 언급된 강력한 왕권의 숙종조차도 신하들에게 벌벌 긴다(…). 조선만이면 모를까 전기 고려도 군약신강, 전성기 고구려도 군약신강. 이렇게 타성에 젖은 스토리는 제작에 드는 비용은 적고 타성에 젖은 시청자들을 쉽게 안방으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에 제작이 끊이질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묘사가 점점 지나쳐서 권신이 대놓고 왕을 눈앞에서 무시하거나 협박하고, 반말이나 직접 물리적으로 타격하는 묘사까지 나오곤 한다. 하지만 신하가 왕을 꼭두각시로 다루었다는 세도정치기에도, 왕의 권위라는 건 아무도 무시할 수 없었고 밑에서 실권을 장악할 지언정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왕에 대한 격식을 지켜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훌륭한 반란의 명분이 된다. 왕권이 세도정치기는 비교도 안 되게 실추한 고려 무신정권 때도, 이의민이 이미 폐위된 의종을 죽인 이력으로도 두고두고 정치적 부담이 되었는데, 체제가 그럭저럭 돌아가는 나라에서 현왕을 모욕하는 것은 어떻게 보이겠는가? 당장의 극적 묘사에 치중해 실제 역사성을 무시하는 케이스들이다.
6. 관련 문서
[1] 특히 서인, 그 중에서도 노론은 알레르기급으로 이 발언을 싫어했는지 현종 사후 숙종이 즉위했을 때 청나라에서 조문을 하러 온 사신이 두 번이나 치제를 하자 숙종이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사신에게 물어보게끔 했는데 당시 사신들을 접대하던 오시수가 생전에 왕이 '''강신들에게 고생한 것''' 안타까워서 그랬다고 말했는데 노론 쪽에서는 오시수가 송시열을 찝어 얘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6년 뒤 경신환국때 그 당시의 역관들로부터 젊은 나이에 요절해 안타까워서 그랬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오시수를 죽여버린다. 하지만 당시에도 말도 안된다고 여겼는지 소론도 오시수 처리에 대해서 제 발 저린 격 아니냐는 식으로 반응했다.[2] 실록을 보면 말이 오가는 분위기는 험악하지 않았고, 후에 지원요청이 들어왔을 때는 성의껏 지원도 해줬던걸 생각해보면 악감정을 가지고 말했을 가능성은 적어보인다.[3] 당장 일본만 해도 엔포 대기근(延宝の飢饉, 1674-75)이 일어났고, 유럽에서는 포도 수확일이 늦어졌고 평균 기온이 떨어졌으며, 알프스 산맥의 빙하가 확산되고 강과 운하가 자주 얼었다. 중국에서는 추위로 인해 강남 감귤 농장들이 전멸했으며 천진 운하의 결빙 기간이 늘어났다. 자세한 사항은 경신대기근 참조.[4] http://kiss.kstudy.com/thesis/thesis-view.asp?key=3220808[5] 특히 청나라는 호란에서 조선을 유린하고 삼전도의 치욕이라는 굴욕까지 주었기에 조선은 청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다.[6] 고려천자는 좋은 의미가 아니라 암군이라고 까는 별명이다. "니 어느 나라 황제니?'라는 식으로.[7] 하지만 강희제는 그나마 그 대상자들이 반체제적이라서 변명이라도 된다. 진짜 문제는 별 꼬투리를 다 잡아 숙청한 건륭제다.[8] 천고일제로 평가받는 강희제니까 어느 제후국 임금한테라도 저런 말 해볼 자격 있지 않냐고 착각할 수 있는데, 시기를 감안하자. 이 시기 그는 막 오보이를 숙청하고 친정을 시작해놨더니 곧 삼번의 난이 터지면 겁을 집어먹고 발을 동동 구르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9] 세계사급으로 범위를 넓히면 상당히 복잡해진다. 서양의 경우 공화주의에 입각한 혼합전 전통 때문에, 고대 로마 공화국이나 중세 이탈리아의 도시 공화국들처럼 이 사례에 반대하는 경우도 나오기 때문. 사실 동아시아사에 한정하더라도, 명말 청초의 황종희가 명나라 쇠퇴의 원인을 '지나치게 강력한 전제 권력'으로 꼽는 등 '왕권 강화 = 좋은 것'이라고 단편적으로 말하긴 어렵다. 다만 교과서적인 설명에 한정한다면,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대체로 왕권 강화가 좋은 것으로 통하기는 한다.[10] 특히 명나라의 경우는 권력이 황제 한 사람에게만 지나치게 집중된 체제가 안 좋은 방향으로 나타나 나라가 망하게 되었는데, 바로 만력제가 그 사례다. 모든 권력이 황제인 만력제에게 집중되어있는데, 그 황제가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맨날 술 마시고 놀고 앉아있는데다가, 세자의 권위를 뒤흔드는 등 연신 트롤링만 하고 있으니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다. 그 후 명나라는 숭정제 때 망하긴 했지만, 후에 중원대륙을 차지한 청나라조차도 '명의 멸망은 숭정제가 아니라 만력제가 제일 잘못이 크다.' 라고 했다.[11] 그나마 현종은 효종보다는 나았다. 효종은 구도자의 삶을 살다시피 해야했지만 현종은 그보다는 나아서 경연도 게을리하고 후원에서 노닌다는 비판을 들을 정도였다.[12] 왕권이 너무 강하면 폭군의 등장을 막기 어렵고 신권이 너무 강하면 역성혁명의 가능성이 커진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신하들끼리 패싸움을 벌이거나 왕이 정치를 제대로 못하거나 안 하게 만들어서 혼란을 초래하기 쉽다.[13] 헌종도 일찍 죽어서 그렇지 죽기 직전까지 안동 김씨를 왕의 권위를 이용해 극딜하고 있었다. 헌종이 몇년만 더 살았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14] 그런데 심환지 어찰도 문제인 것이, 이런 어찰은 원래 받으면 보고 불살라야 한다. 이걸 가지고 있다가 현대까지 남아서 발견되면 안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심환지 어찰이 어떻게 남아있을 수 있었는지를 고려하면 결론이 좀 달라지게 된다.[15] 다만 대원군 집권 시기에도 대원군 자체의 권력 기반이 약한 것도 있고 세도 정치동안 안동 김씨의 세력이 여기저기 뿌리를 내렸었기 때문에 쇠퇴할지언정 위세는 남아있었다.[16] 아이러니하게도 경연 담당 관리들에게는 세종대왕과의 경연은 안좋은 시간이었는데 세종대왕이 너무 먼치킨이다보니 담당관리들도 왕의 수준에 맞추기 위해 열심히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이외에 태종, 영조, 정조 등 학식이 높은 왕의 경우 경연관들이 상대하기 어려워했다고 한다.(영조는 초기에는 별로 학식이 대단하진 않았지만 갈수록 학식이 쌓여간다.) 정조는 아예 신하들 학식이 떨어져 경연 못해먹겠다며 아예 '''자기가 신하들을 가르쳐 인재를 발굴했다(...)''' 그런데도 신하들은 아무도 뭐라 못했는데 '''신하들이 감히 반박을 못할 정도로 정조가 너무 먼치킨이었다(...)''' 아이러니하지만 경연 대상자가 학식이 높으면 외려 경연으로 왕을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 고생했다(...)[17] 사도세자가 죽을 때 당시 영조 나이가 60대였다. 그 당시로 비춰보면 당장 내일 급사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으니 사도세자는 오늘은 세자이나 내일은 왕이 될 수 있는 몸으로 모함이고 나발이고 할 수 없다. 죽기 싫으면 말이다.[18] 15대인 숙종과 16대인 예종의 왕권은 유명무실 수준이 아니라 진짜 제대로 된 전제적 왕권이었다. 신하들이 함부로 나서기가 버겨웠을 지경.[19] 그 헌종조차도 친위세력 하나 없이도 왕권 회복에 나서자 그 튼튼해보였던 안동 김씨의 세도가 흔들렸다. 더 할 말이 필요한지?[20] 진시황의 통일 이후 단일왕조가 온전히 300년을 간 사례가 없다. 한은 전한과 후한 으로 분리되어 사실상 별개의 국가로 봐도 될정도로 성격이 다르고 청은 296년, 당은 289년으로 300년은 못 채웠으며 송은 남쪽으로 쫓겨난적이 있어서 논외이다.[21] 안동 김씨가 그나마 예외 사항에 가깝긴 한데 이쪽은 권력을 어느정도 세습받다시피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신정권 시절의 최씨 가문처럼 왕을 쫓아내고 즉위하는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는데 일례로 헌종의 경우 아얘 재위 말엽에는 대놓고 안동 김씨와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이때에 일어난 일은 고작해야 헌종이 총애하는 조병현 다구리 치기, 안동 김씨 옹호하는 상소 쓰기 정도 뿐이었는데 전자는 어느정도 받아들여져 조병현은 위리안치까지 되었지만 헌종은 끝내 국문하라는 주장은 씹었고 그나마도 1년정도 만에 유배까지 풀어주었으며 후자는 헌종이 아얘 상소 올린 이는(유배) 물론 옹호하는 정원용까지 같이 처벌(파직)했다. 최씨 정권같으면 간단하게 왕을 쫓아내고 말면 될 일이었지만 안동 김씨는 그 방법을 쓰지 않았다. 헌종이 죽고서야 철종을 즉위시켜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철종도 사면 문제에서는 제 목소리를 제법 냈다.[22] 이이명은 세종대왕의 서자인 밀성군의 8대손이었다. 족보상으로는 세종대왕 후손인 셈이다.[23] 기본 500년을 가는 한국 역사에 익숙하면 200년 막장 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으나, 전근대 국가에서 200년이면 한 나라의 역사 전체라고 해도 절대로 짧은 기간이 아니다. 당장에 중국의 통일왕조들의 평균 존속기간도 주나라를 빼고 보면 300여년 남짓이다.[24] 이와 유사한 경우라면 '''문벌 귀족들이 득세한 고려 전기''' 정도가 비교가 되는데, 조선이 귀족제 국가라고 대놓고 말하는 경우는 없지만은 그 고려 전기와 비교될 정도로 신하들의 권한이 강한 수준이었다.[25] 다만 이런 가정에도 문제가 있는데 전근대 시기 제대로된 중앙집권을 한 나라는 중국과 조선 정도 밖에 없다는 점이다.[26] 강희제의 말을 전한 원접사 수촌 오시수는 그 말을 꺼림직하게 여겼던 당시의 집권 세력인 노론에 의해 있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 현자(송시열)를 모해하려 든다는 이유로 주살된다.(현종 사후 청나라 사신들은 두번이나 치제를 했는데 이에 숙종이 의아하여 대체 왜 저들이 두번이나 치제를 하냐고 묻자 당시 접반관이었던 오시수가 "강신들에게 고생하다 죽은게 안타까워서 그랬답니다." 라고 했다. 문제는 송시열 계열은 이를 송시열을 강신으로 낙인찍은것이라 보았고 서인정권이 들어서자 오시수 잡기에 나섰다. 당시의 역관들은 대충 분위기 알아서 "걍 젊은 나이에 죽은게 안타까워 그랬던 거에요." 라고 말했다. 오시수가 아니라고 항변했음에도 결국 사약크리) 그리 당파적인 인물도 아니었고 정승까지 역임했던 중신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죽했으면 소론도 오시수를 죽인건 억지라고 평가했을까[27] 애초에 성리학이 등장한 남송 시기부터 왕권의 약화, 문치주의 강화, 교조화, 배타주의 등이 모조리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의 경우는 원을 거쳐서 명과 청으로 이어지면서 성리학의 방법론이 박살나고 왕권이 다시 강해진다.[28] 애초에 중국식 성리학의 개념으로는 군주와 신하는 그 격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라인에 설 수도 없다. 이이와 이황의 개념으로 보자면 이황이 보다 중국식 정통성리학 개념에 가깝고, 이이의 그것은 거의 마개조에 가깝다. 그리고 이이의 책 성학집요에서 군신공치의 개념이 다시 등장한다.[29] 군신공치가 완벽하게 실행되었으면 훈민정음은 창제되지도 못했거나 혹은 제대로 반포되지도 못하고 끝났을 것이다.[30] 다만 정조는 좀 독특한 타입인데 이쪽은 조선의 학통은 자신에게 있다고 자부할 정도로 학문의 수준이 압도적이었고 나중에는 내가 신하들에게 더 배울게 없다며 아얘 자기가 신하들을 가르쳤다. 그런데도 신하들은 꿀먹은 벙어리마냥 고분고분하게 따랐다.[31] 좌사간, 우사간, 지사간, 좌헌납, 우헌납 등 대사간을 제외한 사간원의 주요 인사들이 거의 다 포함되어 있었다.[32] 사간원에서 올린 글을 보면, <사물의 대체에 어둡고 말하는 것이 마땅한 바를 잃어서 임금의 귀를 더럽혔으니> <그들의 미치고 소경 같은 말을 올린 죄> <대체에 어두워서 말한 것이 마땅치 못하여 천청(天聽)을 모독하였으니> 그러니까 사간원에서도 '이놈이 제대로 된 놈은 아니에요.' 라고 말한 것[33] 조선시대에서 왕조 자체에서는 첩/후궁이 나중에 왕비가 되면 그 자식들도 자연스레 적자, 적녀가 되게 되어있었다. 당장에 이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단종, 연산군, 중종도 서자다. 이 세명도 자신들의 어머니가 처음 입궁했을때는 첩/후궁이었다. 앞서 본 이속 사건의 모습을 보면 결국 이 부분에서는 왕과 사대부는 다르다고 적용된듯[34] 서양으로 치자면 미래에 왕이 될 후계자에게 철학자들의 책이나 성경을 가르친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35] 이쪽은 경연을 안했는데 그 이유는 경연이 지긋지긋하여 때려치운게 아니라(실제로 경연은 왕들에게 싫은 시간이었다.) 경연관들의 수준을 왕이 능가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정조는 경연 대신에 자기가 직접 신하들을 가르쳤다. 게다가 이런 보통의 왕들이라면 신하들이 들고 일어날 일을 신하들 자신들도 인정할 정도로 자신들이 왕보다 딸려서 순순히 따라야 했다.[36] 물론 그 와중에도 거란 침공시의 임금인 성종과 현종 이자겸이 꺵판치고 서경천도운동이 일어난 시기의 임금 인종 그리고 무신정변을 불러일으킨 의종 등은 들어보았을 것이다.[37] 신라 헌강왕의 사례를 봐도, 나라가 개판이라도 집권층과 사관의 의향이 맞으면 기록은 전혀 달라질 수도 있을 정도이다.[38] 물론 문벌 귀족은 세습을 노골적으로 했고 조선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조선은 고려에 비해 인재풀을 좀 더 넓힌 것은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이너서클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조선 시대에 당상관 이상에 오를 수 있는 관리들의 명단인 도당록에 기재된 인물들을 분석해보면 '''지리적이고 혈통적으로''' 능력과 성품에 따른 인재 채용이라는 성리학적 관료제가 얼마나 허구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애초에 정치 성향도 아니고 학파로 파벌 만들던 것은 중국에서는 송대에 이미 끝난 것이다.[39] 단적인 예로 자치통감을 좀 간단하게 만든 역사서인 자치통감 강목의 경우 정통성에 치중하다보니 책의 앞뒤가 맞지 않기도 한데 이 책의 저자는 바로 주자였다.[40] 단종도 세손 - 세자 - 왕이라는 루트를 탔지만 자기 힘도 제대로 못 휘둘러보고 쫒겨났다.[41] 현종이 2차 예송으로 송시열을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아서 독살설까지 만들다가 재위 16년만에 사망했고, 숙종이 송시열을 죽인 것도 재위 15년이 되던 해이다. 실제로 국왕들은 초기에는 대신들과 협의하거나 오히려 휘둘린 왕들도 집권이 15년에서 20년 정도 되면 정국 주도권을 쥐고 잡아대기 시작했다.[42] 영조의 업적 대부분은 즉위 전반부에 몰려 있고, 후반부로 가면 큰 일은 별로 없다.[43] 이건 하북을 내주고 장강으로 도망친 남송이라는 상황에서, 정신 승리하느라 만들어졌다. [44] 이 부분이 예송논쟁의 핵심이다.[45] 국회의원들의 지역구 세습은 있지만 적어도 당수 세습은 없다.[46] 이 말이 나온 것은 북인 정권이다. 위에 사색당파에서 남인과 서인을 구별한 것이 무색할 지경이다.[47] 정덕제의 경우 자신의 외출을 제재하려는 신하들에게 화가나서 그들에게 태형을 선고하여 그대로 집행하자 신하들도 정덕제를 무서워하며 그의 외출을 제재하지 못했다. 애초에 왕이 4대 100년 넘게도 일 제대로 안하는데도 별 사건도 말도 없던것부터가 황제의 권력이 막대하다는 거다. 조선에서 이랬다면 쫓겨났을 것이다.[48] 이 괴리감을 뒤엎으려고 시도한게 연산군[49] 요컨데 신하들에게 지연, 학연, 혈연이 있다면 왕에게는 왕족이라는 혈연이 있는 것이다.[50] 이는 또 왕권견제도 있겠지만 앞서 말한 단점이 너무나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당장에 전대인 고려왕조만 해도 왕조 초기에는 왕해먹겠다고 나대는 왕족들이 많았고 헌종, 인종때는 외척이 설치기도 했고 의종때는 환관이 설치기도 했다. 멀리 중국사 볼것도 없이 당장에 한국사에서도 이런 폐단이 있었으니 손을 안댈 수가 없던 것[51] 조선의 경우 왕족들에게 왕족으로서 여러 품계가 있었는데 이것은 대가 지날수록(정확히 말하자면 현재 왕과 촌수가 멀어질수록) 점점 낮아져 어느 순간부터는 왕족으로서 품계가 없어진다. 즉 왕족이 아니게 된다. 다만 그렇기는 해도 여전히 왕과 같은 전주 이씨이기에 왕이 못 된다는건 아니다.[52] 그게 아니면 사대부들을 압살할 정도의 학식인데 그런 학식을 지닌 왕은 세종, 정조 정도를 제외하면 별로 없었다.[53] 연산군의 경우에는 숙청만 열심히하고 정작 자기 세력을 만드는 일은 매우 게을렀다. 실제로 중종반정 당시 주역들이었던 박원종 등은 제거대상으로는 고작 임사홍과 신수근 형제 정도로 삼았고(이게 무슨 소리냐면 무오사화의 주범이기도 했던 '''유자광'''이 빠졌다는 거다. 실제로 유자광은 중종반정에 참여해 공신이 되기도 했고) 그 신수근마저도 설득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그정도로 연산군은 자기 기반이 되어줄 내편을 만드는데 소홀리했다는 거다. 그리고 그 결과 광해군은 인조 6년까지도 대북파에 의한 광해군 복위나 광해군을 상왕으로 옹립한 후 다른 왕족을 새 왕으로 옹립할 계획을 세운 역모사건이 벌어졌음에도 연산군의 경우 어느 누구도 옹호해주지 않았다. 물론 연산군은 일찍 죽은데다가 일족도 박살난 것이 이유기도 하지만[54] 이에 정조가 똑같이 단식으로 맞받아쳐서 단식 VS 단식 메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물론 이 때 똥줄이 탄건 당연히 신하들[55] 참고로 혜경궁 홍씨 또한 정조 초기 공격받는 홍봉한을 위해 이를 사용한 바 있다.[56] 근데 실은 이걸 극단적으로 밀어붙이긴 했지만 이런거 했다가 망한 케이스가 있다. 바로 왕망의 신나라, 왕망은 정도전보다 더 막나가서 모든 관료들을 무보수직으로 만들었다.[57] 즉, 왕부터 말단 신하에 이르기까지 나라에서 받는 돈만으로는 먹고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서 생계를 위해서라도 뇌물을 받고, 백성들을 수탈할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58] 이 때문에 아전들이 그냥 월급 받으면 안될까요라고 상소운동을 했던 적도 있다. 다만 조선말기에 가면 세금 제도가 막장이 되고 중앙정부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민중의 불만이 폭발해 홍경래의 난, 임술민란, 임오군란, 동학 농민 운동처럼 중앙정부를 향한 반란들이 일어나게 된다.[59] 예외가 있는데 정조로 문무에 모두 능했고 아예 신하들을 가르쳤다.[60] 애초에 성리학 교육을 받지 않은 왕이라고는 태조와 정종뿐이다. 그런데 태조는 정도전 일파와 사실상 한마음 한뜻이었고 정종은 과거급제자 출신인 태종의 허수아비..[61] 물론 세종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왕이었기 때문에 올라온 보고서를 보고 수상히 여겨 사건 조사를 직접 했고, 그 결과 수많은 신하들이 하루 아침에 모가지 당했다.[62] 대표적으로 사극의 레전드 취급받는 용의 눈물만 봐도 군약신강이라 하면 코웃음칠 태종 시기임에도 세종이 즉위하기까지의 기간을 매우 맛깔나고 재미있게 그려냈다. 이쪽은 기록이 풍부해서 그런거 아니냐고 한다면, 애초에 조선왕조 중에서 기록이 부실한 시기 따위는 '''없다'''. 또한 기록이 풍부해서 그렇다면, 군약신강 클리셰 대다수가 역사왜곡 그 자체이며 이는 그 과정을 작가들이 기록이 아닌 상상으로 때운다는 말이니 애당초 성립하지 않는 반박. 즉, 그만큼 사극 패턴이 고정되어 이야기 뼈대는 똑같고 인물과 배경만 바꾼 사극이 양산된다는걸 뜻한다. 다양한 이야기 전개를 못할 정도로 사극 작가들의 필력이 뒤떨어졌다는걸 자인하는 셈이다.[63] 여기서 선한 영웅 포지션에 신하를 넣고 악당을 왕으로 넣으면 왕의 힘이 너무 강대하여 이길 수도 없고,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부분에서 주인공이 왕이 되어야 하는데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쿠데타, 역성혁명인데다가 도를 넘은 역사왜곡이다.[64] 이 경우 초반부엔 주인공이 태자나 왕자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