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 NHK 사건

 


1. 개요
2. 내용
2.1. 전개
3. 이 사건의 당사자
3.1. 발단
3.2. 5월 24일 (6월 2일) 원문
3.3. 5월 26일 기자회견 전문
3.4. 파장
4. 평가
5. 여담


1. 개요


2000년 5월 17일,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 전야제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광주를 방문한 386세대 정치인들이 전야제가 끝난 바로 직후 시내의 '새천년NHK'[1]라는 유흥주점에서# 다수의 여성 종업원을 대동하고 술을 마셔 논란이 된 사건. 새정치의 희망으로 부각되던 386정치인들뿐 아니라 박노해, 이종걸 등 인사들의 추태로 큰 파문이 일었으며, 특히 우상호의 경우에는 임수경에게 욕설을 하여 도덕성 논란이 일었다.
이 사건은 잠시 술자리에 참석한 임수경이 386 커뮤니티인 '제3의 힘'에 올린 게시글을 통해 세간에 알려졌다.
이쯤되면 짐작가겠지만 같은 이름을 쓰는 일본의 공영방송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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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용



2.1. 전개


5.18 민주화운동 20돌을 하루 앞두고 86세대 정치인들이 광주를 찾았다. 김민석 의원과 송영길, 장성민, 정범구, 김성호, 임종석 당선자와 낙선한 우상호 서대문갑 지구당 위원장등 86세대 정치인들이 주류인 셈. 오후 1시께 망월동 구묘역의 제단에 참배할 때는 박노해가 추가되었다.
한 쪽에는 임수경도 참석했고 임수경은 전야제가 끝난 후 정범구와 약속을 잡는다. 임종석은 다른 일정을 이유로 떠나고 남은 이들은 김태홍이 마련한 광주광역시지역 재야인사들과 86정치인과의 간담회를 치른 후 전야제에 참석한다. 전야제가 끝난 후 계획은 숙소인 금수장 호텔에서 '정치개혁-초선의원이 해야 할 일'이란 주제로 세미나를 열 예정이었으나 숙소가 아닌 '새천년 NHK' 단란주점으로 향하고 말았다.#
'새천년 NHK' 단란주점은 기자협회 회장 출신으로 서울의 봄* 때 전두환의 김대중내란음모조작 사건* 에 연루되어 징역을 살고 민주언론운동협의회에서 활동한 후 공천 받은 김태홍과 친분이 있는 단란주점이다.[3] 당시 이 자리에 참석하였던 이상수는 다음해 새천년민주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승리한 바 있는데, 정치판의 초선의원 섭외작전이 투표권 때문에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상수계였던 김태홍이 준비된 일정을 바꿔 단란주점으로 유도해 지지를 호소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당시 연합뉴스 기사 역시 이상수가 원내총무에 출마했음을 알리고 있으며 예정 변경후의 단란주점행 역시 김태홍이 주선했음을 밝히고 있다. #
가장 민감한 부분인 접대부의 술시중 여부에 대해 일부 정치인은 부인하며 넘어가려 했다. 그러나 일부는 결국 접대부가 동석해 술시중을 든 것을 시인했다. 송영길 당선자는 한 인터뷰에서 “아가씨도 들어오고 노래도 한곡씩을 부르고 박수도 쳤다”며 접대부가 동석한 것을 실토했다. 당시 술자리에 함께 있었던 이상수 의원의 한 측근은 “술집에서 아가씨들이 나와 자리에 앉는 것이야 다 아는 건데 굳이 따질 필요가 있느냐”며 접대부가 합석한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월25일 이들이 ‘광주를 방문했던 젊은 위원장들’이란 이름으로 발표한 공동해명서에는 “술집 주인과 남녀 종업원이 번갈아 드나들었다”고만 밝혔을 뿐, 합석여부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단란주점 주인 최아무개씨는 "접대부요? 마담에게 물어보세요. 우리 애들 한두명이 들어가서 노래방 기계에 번호 눌러준 것이 전부인데…. 언론에서 너무 뻥튀기 했어요." 라며 접대부설을 부인했다. 그러면서 "김태홍 당선자는 제가 평소 알고 지내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다른 정치인들하고 오셨기에 대접한 거죠. 인원은 많았지만 술은 거의 드시지 않았습니다. 열대여섯명이 국산양주 세병하고 맥주 여남은 병 밖에 안 드셨으니까요. 술값도 한 70~80만원 나왔을텐데 제가 안받았습니다." 라며 김태홍과의 친분관계를 인정했다. 술집 주인과 종업원은 이들이 술집에 온 시간은 10시 30분부터 11시 사이이며 얼굴이 벌개지도록 마신 사람은 없었고 두 시간 정도 후에 숙소로 돌아갔다고 말했지만, 이들을 인터뷰한 한겨레는 "그러나 최씨 등의 말에는 사건을 ‘축소’하려는 기색이 역력히 엿보였다. 그러면 실제 진실은 무엇일까?"라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접대부 여럿이 술시중을 들고 있었고 부르스를 추는 정치인도 있었다는 임수경의 발언을 보도했다.#

3. 이 사건의 당사자


  • 임수경: 이 사건을 알린 당사자.
  • 우상호: 17, 19~21대 현역 국회의원, 1개월 전 있던 선거에서 낙선. 임수경의 목덜미를 잡고 욕설을 했다고 알려짐.
  • 송영길: 16~18, 20~21대 현역 국회의원, 당시 당선자.
  • 김민석: 15~16, 21대 현역 국회의원, 당시 의원.
  • 이종걸: 16~20대 국회의원, 당시 당선자.
  • 정범구: 16, 18대 국회의원, 당시 당선자.
  • 김태홍: 16~17대 국회의원, 당시 당선자.
  • 이상수: 13, 15~16대 국회의원, 당시 의원.
  • 김성호: 16대 국회의원, 당시 당선자.
  • 장성민: 16대 국회의원, 당시 당선자. 이후 제19대 대통령 선거 출마.
  • 박노해: 시인이자 노동운동가.
  • 문용린: 당시 교육부 장관.
  • 한상진: 당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
  • 노성만: 당시 전남대학교 총장.
  • 오수성: 당시 전남대학교 5.18연구소장.
  • 천득염: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처장.
  • 박종율: 당시 전남대학교 교무처장.
  • 임종석: 16~17대 국회의원, 당시 당선자. 그 날 5.18 묘역에서 참배를 마친 후 고향인 장흥으로 갔기 때문에 이 자리에 없었음.
  • 이 인물 외 다른 인물이 더 있음.

3.1. 발단


처음 임수경이 5월 24일 오전 9시 55분 '제3의힘'에 올린 글은 약 10시간 동안 47명이 조회한 후 삭제되었다.# 그러나 같은 날 오후 9시 17분 익명의 독자가 동아닷컴 독자게시판에 386-그 두 얼굴의 위선을 알린다(임수경 주장대로 가필이 있는 글)는 글을 올리며 파문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임수경은 26일 "내가 쓴 글은 사이트에서 금방 삭제됐는데 악의적으로 본질을 왜곡한 글들이 인터넷상에 돌아다니고 있다", "상황묘사를 하지 않았음에도 인터넷상에서는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등 장문의 글이 떠돌며 젊은 세대에 대한 비난여론만 부각시키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6월 2일 한 네티즌이 다시 제3의힘 게시판에 원본 글을 올림으로써 거짓 해명이었음이 밝혀졌다. 이 네티즌은 "그날 한밤중에 우연히 제3의힘에 들어왔다가 이 글을 프린트해서 읽게 되었습니다"라면서 "임수경 씨 보호를 위해 공개를 회피하는 제3의힘 입장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원문이 공개되지 않음으로 인해 쓸데없는 추측만 늘어나는 것 같아 그냥 올립니다"라고 공개 이유를 밝혔다. '제3의힘'의 한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현재 원문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5월 24일 임수경 씨가 올린 원문을 읽었던 회원들의 말에 따르면 오늘 네티즌이 원문이라고 올린 내용이 임수경 씨의 글의 일부를 누락시켰거나 첨가시킨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라고 말했다.# @ 원문글이 밝혀진 이후 임수경 씨는 6월 8일 한겨레21에 실은 특별기고에서 무엇보다 참기 힘든 것은 지난 시기 어렵고 험난한 길을 함께 걸어온 운동권 내부에서의 비난이었음을 토로하며, 오늘 쏟아지는 이 모진 매를 매로 생각하지 마시고, 386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와 희망을 잊지마시기 바란다며 이 사건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나무위키의 일부유저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임수경이 반박성 글을 썼음을 강조하는 편집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임수경의 왜곡된 글이라는 주장은 원문이 아닌 위 "386-두 얼굴의 위선을 밝힌다"라는 글에 대한 주장이다. 6월 2일 올라온 원문에 대한 반박이 아니므로 향후 왜곡성 편집은 자제하기 바란다.

3.2. 5월 24일 (6월 2일) 원문


'''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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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6월 2일에 올라온 원문이다.출처 @ 부자연스러운 줄바꿈과 폰트 깨짐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독자가 올린 임수경씨의 '386 술파티' 원문입니다. 이미 몇몇 사이트에올라갔지만 원문을 그대로 옮깁니다.

출처: 제3의힘 자유게시판

임수경 씨 원문입니다. 그 날 한밤중에 우연히 제3의 힘에 들어왔다가 이 글을 프린트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임수경 씨 보호를 위해 공개를 회피하는 제3의 힘 입장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원문이 공개되지 않음으로 인해 쓸데없는 추측만 늘어나는 것 같아 그냥 올립니다.

안녕하세요.

미국에서 공부를 하다가 여러가지 일로 잠시 서울에 온지가 벌써 한달이 훌쩍 지났습니다.

오자마자 긴장이 풀려서인지 많이 아팠고 - 거의 병원에 입원하기 직전의 상황까지 - 개인적인 일들이 많아 많은 분들께 연락도 못드리고 한달을 보냈습니다. 혹시 저를 아시는 분이 계시다면 연락도 안하고 괘씸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귀국을 한 가장 큰 이유는 5.18 전야제의 사회자로 행사준비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저는 그날, 5월 17일에 있었던 일에 대해 여러분과 의견을 나누기 위해 이 자리에 들어왔습니다.

5월 17일 아침, 저를 포함한 전야제 관계자들은 아침 9시에 망월동 묘역에 가서 참배를 하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가서보니 오후 1시에 여야 386 당선자들이 참배를 온다고 하더군요. 저는 광주에 온 김에 저와 절친한 임종석씨와 만날수 있을까 해서 그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광주에 내려오는 중이라며 1시에 꼭 만나자고 하더군요. 저는 이미 참배를

한 상황이고 오후에는 전야제 리허설이 있어서 사실 망월동에 다시 오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여러 선배들에게 이 기회에 한번에 인사를 하면 좋겠다 싶어서 다소 무리한 일정이었지만 일부러 다시 망월동으로 가서 그들을 만났습니다.

당선자들 뿐만아니라 낙선한 분들도 같이 오셔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고, 저는 그 선배들을 보며 든든하고 흐뭇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분들은 광주에서 하루 머물 예정이라며 저녁에 시간이 나면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5.18 전야제 행사에 참가했구요.

다소 서언이 길었는데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전야제가 다 끝나갈 무렵 정범구 박사가 제가 있는 무대 앞으로 오셨습니다. 정박사님과는 기독교방송에서 같이 일한 적이 있어서 상당히 친한 관계입니다. 휴대폰 번호를 적어주시며 행사가 끝나면 꼭 한번 보자고 하시더군요. 저는 오후 6시부터 밤 11시까지 전야제 사회를 보며 저녁밥도 쫄쫄이 굶어가며내내 서있었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뒷풀이 장소에서 겨우 밥을 먹을 수있었지요. 그때 정박사님께 전화를 걸었더니 일행이 있으니 저보고 오라고 하시더라구요. 대부분 낮에 망월동에서 만난 분들이었지요. 저는 여러사람들 모인 곳에 가기가 뭐해서 처음엔 안 가겠다고 했는데 대여섯 차례의 전화를 계속 받고보

니 그곳에 안가는 것이 참 결례인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장소가 어디인지를 물으니 새천년이 어쩌구 NHK가 어쩌구 하시대요. 저는 새천년 민주당 사람들이 NHK 하고 인터뷰를 하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알고보니 그곳은 새천년 NHK 라는 가라오케였습니다. 어쨌든 그곳으로 가서 그분들이 계신 룸으로 들어갔습니다. 찾을 것도 없이 적어도 7-8개의 룸이 있는 그 술집의 손님이 있는 방은 그 방이 유일했습니다.

문을 열자 송영길 선배가 아가씨와 어깨를 붙잡고 노래를 부르고 계시더군요. 박노해 시인은 아가씨와 부르스를 추고 있었고 김민석 선배는 양쪽에 아가씨를 앉혀두고 웃고 이야기하느라 제가 들어선 것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마이크를 잡고있던 송영길 선배님은 저를 보고 같이 노래를 부르자는 듯이 손짓을 하셨고 얼핏보기에 정범구 박사를 포함하여 김성호, 장성민, 이종걸, 김태홍, 이상수 의원 등이 있더군요. 저는 아가씨들이 있건 말건 선배들에게 인사나 하고 가려고 다가서는 순간 누군가

제 목덜미를 뒤에서 잡아끌며 욕을 하더군요. 야 이-년-아, 니가 여기 왜 들어와, 나가...

믿고싶진 않지만 이 말을 한 사람은 우상호씨였습니다.

술집 아가씨들은 놀라서 모두 저를 쳐다보았고, 저는 매우 당황했습니다. 우상호는 -미안합니다. 저는 이 사람에게 더이상 존칭을 붙여주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금 말했습니다.

이-놈의 기-집-애, 니가 뭔데 이 자리에 낄려고 그래? 미-친-년...

저는 일단 방을 나와 저와 함께 온 전야제팀이 앉아있는 방으로 갔습니다.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참외를 하나 집어들었는데 우상호가 들어와 앉더군요. 그는 다시 말했습니다.

아 그 기-집-애, 이-상-한 년-이네. 아니 지가 뭔데 거길 들어와, 웃기는 기-집-애 같으니라고...

한두번도 아니고 저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참외를 테이블에 던지며 저도 욕을 한마디 했지요.

이런 씨-*, 어따대고 이-년 저-년이야. 나두 나이가 30이 넘었고 애기엄만데 어디서 욕을 해...라고요.

여러분, 정말 죄송합니다. 시정 잡배들의 오고가는 대화도 아니고 참 부끄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어쨌든 계속 하겠습니다. 주변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우상호에게 사과를 하라고 했지만 그는 끝까지 사과를 하지 않았습니다. 술이 꽤 취해있긴 하더군요.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우상호에게 발언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의 불만은 이것이더군요. 서울에 온지 3주가 지났는데 제가 연락을 안 했다는 것, 5.18 전야제 사회를 본다는 소리를 듣고 임수경 이름 또 팔아먹는구나 하고 생각했답니다. 발언중간 중간 이-놈의 기-집-애, 저-놈의 기-집-애, 이-년, 저-년 소리는 계속 되었구요. 그러더니 마무리를 하면서 자리에 있던 광주의 김태홍 당선자 에게 선배님, 죄송합니다...하더라구요.

저는 그랬죠. 국회의원이라고 선배님이고 죄송하냐고... 나는 내가 존경하던 선배에게는 술집 아가씨들 앞에서 이-년 저-년 소리 듣고 끌려나와야 하고, 같이 고생하던 후배에게는 사과 한마디 없이 국회의원한테만 미안하냐고...우리같은 사람들은 아가씨들 나오는 술집에서 양주마실 팔자가 안되니 나가서 소주나 먹자고..

. 그리고 나왔습니다. 모두 일어서는 순간 우상호가 테이불에 있던 양주의 병을 새로 따더군요. 그러거나 말거나 나왔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술을 한잔도 마시지 않았지만 계산대

로 갔습니다. 이미 정범구 박사가 계산을 했다고 하더군요. 저는 명세서를 조목조목 써달라고 했습니다. 양주 두병에 음료수, 안주가 서너가지로 22만 7천원이 나왔고, .양주 한병과 안주 한접시는 서비스였답니다.

저는 술집 아저씨한테 물었죠.

난 이집에 처음으로 오는데 이집은 처음 오는 사람한테도 서비스를 주느냐, 우리는 서비스 받을 일이 없으니 모두 계산서에 넣으라고 말이죠.

그 아저씨는 그냥 서비스로 드시라고 했고, 저는 계산을 하겠다고 부득불우겼습니다. 그 아저씨는 좀 황당했겠지

요. 서비스 주고 욕먹고...

아무튼 계산은 하되 다는 못 내겠다, 양주 한병은 우상호가 땄으니 저 사람에게 꼭 받아라, 이미 계산한 돈은 정박사에게 꼭 돌려줘라 당부를 한 후 20만원을 저와 함께 전야제 사회를 본 송선태 선배님의 카드로 계산을 했습니다.

계산대에서 실랑이를 하며 저는 그랬습니다. 낮에는 검은 넥타이 매고 망월동 참배하러 온 사람들이 밤에는 아가씨끼고 술 먹고 잘들 한다 등등... 술마시고 노래부르며 떠들던 그 방에서는 아주 조용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한 말을 다 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아무 반응이 없더군요.

가라오케 술집을 나서며 송선태 선배님에게 술값은 나중에라도 꼭 갚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때 저는 지갑을 갖고있지 않았습니다. 송선배님은 물론 괜찮다고 하셨지만 저는 정말 갚을 생각입니다. 그때 우상호가따라오더군요. 수경아, 이-놈의 기-집

애야, 너 거기 안 설래?? 아, 이 구제불능의 인간을 어쩌면 좋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저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우상호, 당신하고는 이제부터 끝이야, 우리서로 아는 척 하지 맙시다. 나 정말 당신하고 아는 척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저는 돌아섰습니다. 돌아서는데 왜 그렇게 가슴이 아프던지요. 제 친구들은 다 압니다. 제가 존경하는 선배 세사람을 대라면 그중에는항상 우상호 형이 있었다는 것을...

저는 단순히 술취한 우상호에게 욕먹은 것을 이야기하고자 이글을 쓰고있지는 않습니다. 386, 사람들은 386이 어쩌구 하며 회의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만 저는 386이라는 이름에 자부심을 ��資笭윱求� 그 386의기반은 바로 5월의 광주입니다. 80년대의 학생운동은 그것으로 부터 시작되었고, 지속되었습니다. 광주를 떠나서는 386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저는 선배들이 아가씨 나오는 술집에서 술을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5월의 광주에서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광주의 라디오방송에서는 시끄러운 음악을 틀지도 않습니다. 그 커다란 가라오케에 그들이 유일한 취객이었다는 것이 말

해주듯이 광주 사람들은 5.18이 되면 먹고 노는 일을 자제합니다.

그런데 다른 일도 아니고 망월동 참배를 위해 광주에 내려왔다는 사람들이, 386을 내세워 국회의원 선거전에 나와 그것을 기반으로 당선되었다는 사람들이, 낮에는 망월동에서 광주의 영령을 추모하던 사람들이 그렇게 광주의 정신을 밟아버렸습니다.

만약 5.18 유족이 이 사실을 안다면, 386의 순수성과 역사성으로 그들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이, 그들과 거리에서 어깨를 겨누며 민주주의를 외치던 동지들이, 5월 17일 하루종일 아들의 무덤 곁에서 참배객을 맞고 계시던 이한열 열사의 어머님이 이 사실을 아신다면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저는 감히 주문합니다. 386의 이름을 더이상 들먹이지 말던가, 망월동 참배가 아닌 놀러왔다고 하던가, 한때나마 그들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음을 자랑스러워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더이상 믿음도 희망도 걸 곳이 없음에 앞이 캄캄합니다.

다음날 아침 신문에는 386 당선자가 망월동 묘역을 참배했다는 기사가 신문마다에 났더군요. 술에 취했던 그들은 다음날인 5.18 아침에 대통령이 참석한 기념식에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밤새 광주 영령을 진심으로 추모했다는 듯이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겠지요.

제가 밥도 굶어가며 다섯시간씩 서서 전야제 사회를 보던 그 시간에 내가 존경하던 선배들은 아가씨와 술마시고 춤추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면서, 오히려 나보고 5.18에 이름을 팔아먹었다고 말한 사실 역시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날 아침 10시경, 제 휴대폰 벨이 울리더군요. 저는 그들 중의 한명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전화를 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우상호와의 선거전에서 승리한 이성헌 선배였습니다. 망월동에서 만났는데 반가왔다는,서울에 올라오면 꼭 한번 만나자는 전화였습니다. 이성헌 선배는 제가 미국에 있는 동안 두차례 만난 것이 전부인데도 우리나라로 귀국하실때, 또 귀국을 해서도 저에게 미국까지 수시로 전화를 하던 분입니다. 전화를끊으며 생각했습니다. 왜 이성헌이 당선되고 우상호는 선거에서 떨어졌는가를...

그후 며칠 동안 저는 그들로부터 단 한통의 전화도, 제3자를 통한 메시지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느닷없이 그 자리에 잇었던 김성호 당선자가 전화가 와서 저녁을 함께 먹자고 하더군요. 통화를 하던 중 자연스럽게 그날의 사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제 의사를 밝혔습니다.

우상호와 아는척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말이죠.

그런데 다음 날인 오늘, 우상호가 전화를 했더군요. 아마 김성호씨가 무슨 말을 했으리라 짐작합니다.

여보세요, 임수경씨 부탁합니다.

전데요.

수경아, 나 상호야.

누구시죠?

나 ;야, 우상호.

저는 우상호라는 사람을 모르는데요...

수경아, 미안하다.

실례했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저는 이렇게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를 끊으면서 새천년 NHK 는 가라오케를 나설 때 처럼 왜 그렇게 가슴이 아프던지요...

한낮 버스정류장에서 땡볕을 받으며 버스를 기다리다가 받은 전화 한 통, 그것은 지금 이 시간까지도 저를 심란하게 만듭니다. 제 어머니는 우상호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하셨고, 저와 친한 선배언니는 아주 잘했다고말했습니다.

저는 잘 한걸까요, 잘못한걸까요...

긴 글을 마칩니다. 결국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 셈이 되어버리긴 했는데, 제 개인적인 이야기라기 보다는 모두가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임수경 올림



3.3. 5월 26일 기자회견 전문


'''기자회견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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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에 기자회견을 한 임수경의 일문 일답 #

--기자회견을 자청한 취지는.
▲현재 인터넷상에 유포되는 글은 내가 쓴 것이 아니다. 당초 내가 '제3의 힘'이라는 사이트에 올린 글과는 다르고 취지나 의미들이 변질,각색되고 있어 안타깝고 서글프다.
당초 취지는 존경하던 선배들이 5월17일 광주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사실이 실망스러워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를 공유하고 비판하려던 것이다.
'제3의 힘' 사이트에서 파장을 우려, "사후에 삭제해도 좋냐"며 동의를 구해왔다. 그들의 이미지나 입장을 흐릴 우려가 있다고 판단,삭제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후에 유포된 글들은 악의적이고 과장된 측면이 있다.
그들(선배들)이 존립하는 근거가 광주 5.18 항쟁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현실속에서 술자리를 가졌다는 것 자체에 화가 났다. 내가 인터넷 매체의 파장을 감안하지 못한 점 반성하고 있고, 그같은 파장을 미리 알았다면 다른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이 문제가 정치 쟁점화되고 그들의 정치적 생명을 위협하는 현실속에서 나 자신이 침묵해서는 안되겠다고 판단했다. 그들의 행동자체는 용서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아직 젊은 세대의 정치생명을 위협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못한다.
그들이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그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반성의 계기로 삼으려는 것이 당초의 취지였다.
--당초 올린 글과 유포되고 있는 글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차이가 나나.
▲원문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내가 올린 글의 내용은 '5월17일밤 광주에서 있었던 일'이라는 제목에 임수경이라는 실명으로 글을 올렸다. 그들이 새천년 NHK 가라오케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담고 있다.
--당시에 누구 옆자리에 여종업원이 있었고, 누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는 것을 실명으로 적시했는가.
▲실명으로 거론한 것은 맞다. 내가 들어갔을 때 송영길씨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같이 노래를 하자고 했다.그 부분만 확인해줄 수 있다. 나머지 누가 여자를 옆에 끼고 있고,춤을 추고 있었다는 부분은 내 글에 포함돼 있지 않다.
내가 당시 그 방에 들어가 머문 시간이 얼마 되지 않고, 들어가자마자 나왔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상황을 말하기 어렵다. 다만 그들이 그렇게 술에 많이 취한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은 받았다.
--여종업원들이 방에 없었는가.
▲여종업원들이 있었다고 글에 썼다. 그러나 나머지 부분들은 당사자들에게 확인해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이트의 글은 마치 구체적으로 목격한 것처럼 기술돼 있는데.
▲당시 그 술집에는 우리 일행과 종업원들외에 다른 일행은 없었으므로 다른 목격자가 글을 썼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확신한다. 내글에서는 그들이 술에 취해 흐느적거렸다는 표현도 쓰지 않았다.
사태가 확산되고 각당의 성명이 나오고하는 현실을 보면서 젊은 세대의 몰락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광주술판'기사를 올린 '오마이뉴스'에 "내가 쓴 글이 아니다"고 얘기했나.
▲어제 오후 5시께야 오마이뉴스에 그런 글이 올라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여종업원 3-4명이 있었고, 일행중 2명 정도는 서 있었다. 그리고 우상호씨와 들어가자 마자 말다툼을 해서 바로 나왔다. 우씨는 평소 존경하는 선배다, 당시 약간의 의견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3.4. 파장


임수경이 제3의 힘 게시판에 비공개로 올렸던 글은 인터넷에 퍼지면서 엄청난 파문을 낳았고, 오마이뉴스를 시작으로 언론 매체를 통해 보도되기에 이른다.한겨레21 기사 파문이 확산되자 386세대들의 모임인 '한국의 미래 제3의 힘'에서는 5월 30일 비상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총회에서 '한국의 미래 제3의 힘'은 결의문을 채택, 동시대인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하고 국민에게 사죄한다는 입장을 발표하고, 집행부 전원이 사퇴하였다. 그러나 정작 술자리 참석자들은 비상 총회에 불참했으며, 이들에 대한 징계도 흐지부지 되었다.
임수경의 비판이 386세대의 도덕성에 초점을 맞추면서, 386세대가 아닌 '''이종걸, 정범구, 김태홍, 이상수 등은 은근슬쩍 넘어가버렸다.''' 특히 이종걸은 2020년까지 국회의원 활동을 했다. 무려 5선... 지금도 보통 386세대의 타락과 변질이라는 측면에서만 회자되고, 위에 4명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대부분 5.18술판사건 하면 임팩트가 컸던 김민석, 송영길, 우상호[4]만 이야기하지 나머지 인사들은 잘 모른다.
박노해 시인도 이 사건으로 도덕성에 치명타를 맞으면서, 사실상 진보진영에서 사라졌다. 박노해는 1997년 출간한 옥중에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부터 1998년 준법서약서 서명, 그리고 출소 이후 행보에 대해서 진보진영 내에서 변절이다, 변화다 등 뜨거운 논쟁이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호의적이었던 인사들도 모두 등을 돌려버렸고, 이후 진보진영에서 박노해를 찾는 일은 없었다. 박노해는 생명운동을 한다면서 충청도로 낙향하였고, 이후 완전히 잊혀지게 된다.
언론의 취재가 계속되면서 같은 시간 새천년NHK가라오케에는 문용린 교육부 장관 일행도 술판을 벌이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문용린 장관은 5.18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기조 연설을 한 이후 전남지역 교육계 인사들과 뒷풀이 차원에서 1시간가량 술을 마셨다고 해명하였다. 당시 참석자는 '''문용린 장관, 한상진 한국정신문화연구원[5]''', 노성만 전남대 총장, 오수성 전남대 5.18연구소장, 천득염 전남대 학생처장, 박종율 전남대 교무처장 등으로 알려졌다. 문용린 교육부 장관은 결국 '5.18정신을 훼손하는 부적절한 행동이었다'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자진사퇴하였다. 장관 취임 7개월 만이었다. [6]
보수 진영은 이 사건을 두고 386 정치인들의 위선이 드러났다며 비판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임수경은 26일 다른 인터넷 게시물에서 '사건을 악의적으로 왜곡, 과장하고 정치 쟁점화해 젊은 세대의 몰락을 즐기려는 세력이 있다'면서 보수 진영의 이런 태도에 대해서도 경계하였다."386당선자 5.18전야 술자리" 인터넷에서 왜곡돼...임수경 씨 임수경은 386세대 내에서 자체적인 자정작용을 촉구하고자 386커뮤니티인 제3의힘 게시판에 비공개로 글을 올렸는데, 외부로 공개되면서 386세대 전체가 공격받게 되자 당황한 것으로 보인다. 파문이 일파만파 확산되자 임수경은 한겨레21에 다시금 새롭게 시작하자는 특별기고를 실었다.새롭게 시작하십시오 - 예상되지 못한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선 임수경 특별기고 임수경은 같은 해 연말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책임지는 자세가 중요하다'면서 당사자들의 태도가 너무나 무책임했음을 지적했다.임수경 격정토로
당시 중도언론이던 동아일보는 '386 새정치가 고작 이거냐'는 제목으로 "예전엔 독재의 칼날과 사람답지 않은 세상에 내 아이를 낳기 싫었는데 지금은 당신들 같은 위선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에 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게 서글프다." "너무 슬퍼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17일부터 19일까지 광주에서는 시끄러운 음악도 삼갈 정도였다”며 “더 이상 기대도 관심도 없다"는 등의 네티즌, 광주시민들의 비판을 보도했다.

4. 평가


해당 사건으로 술자리에 참석한 정치인들의 도덕성에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정치개혁시민연대는 25일 이와 관련, “국민은 물론 광주영령 앞에서 용서받지 못할 행위”라는 논평을 냈고 이 단체의 김석수 사무총장은 “이번 일은 단순히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고 필요하다면 당사자들이 의원직 사퇴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 여담


  • 참고로 훗날 우상호와 임수경은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 같은 당의 의원으로서 4년간 함께 의정활동을 했다. 그런데 19대 총선 선거 유세 등에서 임수경이 우상호를 우산을 씌워주고 있거나 하는 등 서로 즐겁게 웃고 있는 사진도 많다. 2012년 총선에서 임수경우상호 선거운동을 도와 줄 정도이다. 아래 처음 사진의 가장 오른쪽은 페미니스트 정치인으로 유명한 진선미 국회의원이다.
[image]
  • 하지만 임수경은 탈북자에 대한 폭언으로 인해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얼굴을 보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안 그래도 임수경은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을 크게 갉아먹는 주범으로 인식되어 있기에 일반 여론도 "짤릴 만한 사람들이 들어갔네" 정도로 좋지 않았으며, 오히려 임수경을 쳐내고 나니 원내 제1당으로 올라섰다는 말까지 돌던 상황. 17대 총선에서 정동영,[7] 19대 총선에서 김용민[8]에게 제대로 데였다 보니 후보들의 그런 면면 하나하나가 중요한 더불어민주당 입장에선 임수경을 배척해야 할 상황이었던 것.
* 우상호는 2020년 서울시장에 출마하여 해당 사건에 대한 언급을 했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white 뉴스 1 인터뷰
성인지감수성 및 NHK 관련 문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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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4
▷Q1. (서울시 젠더대책) 서울시장이 이번에 되면 1년 짜리가 된 것이 성 비위문제가 터졌기 때문이다. 불상사가 발생했고, 그 자리를 채우시게 되는 건데, 서울시가 내놓은 대책도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수면실을 없앤다? 저는 좀 화가 나더라구요.
▶A1. 전임시장님도 살아오신 인생을 보면 여성인권이나 여성 정책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었어요. 젠더특보같은 자리도 있지 않았습니까? 근데 가만히 보면 그 직책을 맡고 있던 여성들에게 실제적인 권한을 준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저는 서울시장의 직속으로 당분간은 양성평등 전담부서를 둬야한다고 생각해요. 권한을 많이 줄 것. 어떤 일을 할 때 데스크가 있잖아요. 어떤 정책을 펼칠 때 반드시 그 곳에서 데스킹을 봐야 해요. 저는 그런 측면에서 조치까지 가지 않고 소위 말하는 옆에 그런 것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한 두명 있다는 수준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여러 요인들이 있었어요. 여성 피해자가 처음에 동료 남성에게 못된 짓을 당했을 때도 왜 빠르게 이 사람에게 제대로 된 구호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보호하지 못했느냐. 저는 그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나름대로 선진적인 제도가 있었죠. 다른 지자체에 비해서 선진화된 것들이 있었는데..
▷Q1-1. 없었던 것이 아니죠. 그러나 리더의 여성관이라던지 이게 문제가 아니었을까요?
▶A1-1. 결국은 견제 기능이 있어야 하는 거죠. 그 문제와 결착한 사람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와 견제기능이 없었다. 서울시 전체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기능이 약했다. 어떻게 보면 보조적으로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으니 신경쓴 것 아닙니까? 했지만 실제적인 권한은 없었고. 그래서 저는 그런 측면들이. 다른 문제보다도 너무 큰 문제가 된 것을 보면 그만큼 국민들이 관심이 있는 사안이라는 것이고 상처를 받는 사안이잖아요? 이것은 재발방지를 위한 이야기를 해봤자 몇 개월 지나면.. 그런 것 몇 개 하는 것 보다 시장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시장뿐만 아니라, 각종 정책들을 스크린 받고 오는 것. 양성평등의 인식에서 볼 때, 성인지 감수성의 인식에서 볼 때 문제가 없는지 한 번 걸러보는 이런 형태의.. 모든 영역을 할 수는 없겠지만, 영역을 정해야 겠죠. 이런 이런 영역에 대해서는 이 곳을 거쳐서 와라. 이렇게 생각합니다.
▷Q2. (우상호의 여성관) 리더로써 서울시장으로써의 우상호의원님의 여성관은 어떠세요? 이걸 여쭤보는 것은 제가 같이 생활을 했던 586 선배들의 여성관은 동지라고 했지만, 결국은 동지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시대를 자라면서 가지고 있었던 남성관과 여성관이 참 달랐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기 어려웠던 점이 많이 있었거든요.
▶A2. 그것은 성장과정에서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죠. 저희 세대의 장점은 학습을 통해서, 선진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그룹이 우리 안에 있었거든요. 그분들이 여성운동이나 성폭력 상담소, 여성인권을 위한 곳에 가있죠. 우리 시대, 같은 동시대에 사회운동을 했던 분들이죠. 그런 동지들이 제일 먼저 문제제기를 한 것들이 아마 우리들일 거에요. 저는 인정합니다. 우리가 처음 출발 했을 때는 우리 부모님 세대로부터 학습했던, 박정희 때 받았던 교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사회운동을 통해 아버지세대의 보수적 가치관을 깨는데 성공 했구요, 동료 여성 활동가들에게서 우리의 문제점을 지적받고 개선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죠. 물론 완벽하지는 않아요. 어떻게 보면 존재적 조건을 계속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저같이 사회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은 아니었던 사람들에 비해서 비교적 담론과, 가치와, 강제 받는 영역이 많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두 번째는 공적 영역에 있으면서 저는 많이 변했다고 생각해요. 늘 감시받으니까, 늘 그런 잣대로 저희를 보니까요. 그것이 최근 10년 사이에는 정치권의 주요 기준이 되었어요.
▷Q2-1. 그런 잣대들이 많이 조이듯이..
▶A2-1. 많이 바뀌었어요. 제가 정치를 처음 시작했을 때, 2000년 쯤 되면요 당 지도부부터 밑에 있는 국회의원까지 그 자리에 여성 한 명이라도 있으면요 성적 농담하고, 비하하고, 그러면서 다 웃고 그 여성은 항의하지 않고 그냥 있다가 가고. 그런 일을 한 두 번 본게 아니에요.
▷Q2-2. 그 일을 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버틴 경우가 많았죠, 여성들은.
▶A2-2. 그렇죠. 그러니까 이제 누가 그렇게 합니까? 지금은 남자끼리 모여도요, “이 사람아, 조심해, 어디 가서 그런 얘기 하지마” 이렇게 지적하거든요. 이런 것은 성인지적 감수성의 영역에서 보면요, 그 지적을 하는 사람들이 과거에는 그런 행위를 한 사람들이거든요. 이 사람들의 변화는 놀라운 것이에요.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적어도 공직에 있으면서 많은 검열과 많은 구설수, 스캔들을 보면서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는 가치규범이 많이 형성되었습니다. 지난 20년 정치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이런 문제의 구설수에 휘말린 적이 없다. 그것도 보면 원래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이다.
▷Q3. (새천년NHK 사건) 구설수가 하나 있었잖아요. 시작할 때. 사실이었나요?
▶A3. 과장된 측면이 조금 있다. 그것을 하나하나 설명하면 임수경씨에게 상처를 줘요. 그 친구는 통화를 가끔 길게하면서.. 원래는 저랑 정말 친한 사이였어요. 그러니까 제가 허물없이 대하다가 아주 나쁜 관행으로 툭 한 건데 그것이 상처가 깊었고. 그 때 굉장히 반성을 많이 했고, 그게 저한테는 제 정치 일생에서.. 그 때가 정치 입문했을 때 딱 한 달 되었을 때잖아요? 그 친구는 한 달 만에 바뀌었다고 생각을 한 것이고, 나는 술취해가지고 실수를 한 것인데, 그것이 저에게는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교만하지 말고 친하다고 후배에게 함부로 하면 안 되고. 왜냐하면 그 때에는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정치를 그만 두어야하나 할 정도로.. 모든 언론이 두 달 정도를.. 쓰레기였죠. 집에 가면 부인이 울고 있고, 돕던 동료 다 떠나고 힘들었어요. 그 때의 경험이 많이 도움이 되었죠. 뭔 일이 있으려고 하면 그 때의 일이 딱 떠오르니까요. 궁금해 하는 분이 많아요.


[1] 광주 동구 불로동에 소재한 2차까지 이루어지는 유흥주점으로 지금은 없어진 그랜드호텔 인근에 있었다.[2] 80년대 말부터 90년대만 해도 일본 대중문화는 정식으로 들어올 수는 없었지만 암암리에 퍼져서 우리 대중문화보다 한수 위라는 인식이 있었고, 그로 인해 일본문화를 암시하는 NHK라는 이름이 90년대 중반이후 노래방, 술집 등에 폭넓게 사용되고 있었다.[3] "일정을 변경하며 친분이 있는 단란주점으로 끌고 간 것은 김태홍임에도 묘하게 86 세대 정치인들을 때리는 정쟁으로 비화된 면도 있다."는 주장이 있지만 아무런 출처도 근거도 없이 "끌고 갔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실드를 치는 것은 편향적인 서술임이 분명하다. 특히 술집으로 향하게 된 것 자체는 그렇다 치더라도 해당 장소에서 있었던 추태와 폭언이 김태홍 혼자서 책임질 일이 아님은 당연하고, 이에 대한 비판을 86세대 정치인들을 "때리는" 것으로 서술하는 것 자체가 86세대 정치인과 그들의 지지자들의 내로남불적 사고방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4] '''셋 다 21대 현역 국회의원'''이다.[5] 국민의당 공동 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았던 그 한상진 교수가 맞다.[6] 문용린은 이후 서울대 교수로 돌아갔다가, 곽노현의 교육감직 상실로 열린 2012년 서울시 교육감 보궐선거에 보수 후보로 나와 당선되었으나 2014년 지방선거에선 고승덕과의 폭로전과 소송전까지 벌이는 추태를 보였고, 결국 보수표의 분산으로 3위로 낙선했다. 지방선거때도 이 5.18술판이 다시 불거지면서 도덕성 시비가 일었으나, 딸이 아버지 노릇을 못했다고 고승덕 후보를 비난하자, 고승덕의 못난 아버지를 둔 딸에게 정말 미안하다! 드립이 터지면서 상대적으로 묻혔다.[7] 노무현 대통령 탄핵정국에서 나온 열린우리당 압승 분위기에 노인 폄하 발언으로 찬물을 끼얹었다.[8] 라디오21 시절 막말이 드러나면서 민주통합당 전체에 찬물을 끼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