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덕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서초구 을)'''
제13~17대
김덕룡

'''제18대
고승덕'''

제19대
강석훈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고승덕
高承德 | Ko Seung-deok
'''
'''출생'''
1957년 11월 12일 (67세)
전라남도 광주시 월산동
(현 광주광역시 남구 월산동)#
'''본관'''
제주 고씨[1]
'''가족'''
父 고익태, 母 윤순엽 / 2남 2녀 중 셋째
'''종교'''
개신교(감리회)
'''소속 정당'''
무소속
'''정치 성향'''
보수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8'''
'''학력'''
광주대성초등학교 (졸업)
광주무등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 72회)
서울대학교 (법학 / 학사·석사)
예일 대학교 (법학 / 석사)
하버드 대학교 (법학 / 석사)
컬럼비아 대학교 (법학 / 박사)
'''병역'''
면제(제2국민역)
1. 개요
2. 생애
2.1. 원조 공부의 신
2.1.1. 고승덕 모드
2.2. 정치 활동
2.2.1. 선거 이력
2.3. 방송 및 주식 관련 활동
2.5. 2014년 6월 교육감 선거 이후
3. 가족 관계
4. 일화
4.1. 공부법과 자기개발서 관련
4.2. 허위판결문에 대한 소신 발언 - “판사도 실수한다.”
5. 이력
6. 논란
6.1. 용산구의 이촌파출소땅 매입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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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정치인.

2. 생애



2.1. 원조 공부의 신


대한민국 역사상 고시류 시험 공부를 가장 잘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이다. 고시 3관왕, 원조 공부의 신으로 유명하다.
광주대성초등학교, 광주무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1976년 경기고등학교(72회)를 졸업하고[2][3] 같은 해에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1976년 1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1977년 2월까지 사법고시를 준비한지 단 3개월만에 1차를 합격하는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1년 후인 1978년 3월(3학년) 사법고시 2차까지 합격하며 당시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이라는 타이틀을 얻는다.[4] 그리고 그해 9월 행정고시 1차를 합격한다. 이듬해인 1979년 (4학년) 봄에 외무고시 1,2차를 합격하고 그해 11월 행정고시 2차까지 수석으로 합격했다.

2.1.1. 고승덕 모드


수험생이라면 '고승덕모드' 라고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는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 라는 고승덕이 쓴 책에서 나오는 고승덕의 고시 공부 시절 생활 패턴을 뜻한다. 하루 7시간을 수면하고 17시간을 벼락치기하듯 초긴장 초집중해서 공부했다고 한다. 밥먹는 시간도 아까워서 고기를 아주 잘게 썰어서 만든 (씹는 시간을 줄이고 위의 부담을 줄이려고) 비빔밥을 만들어 먹으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천장 전등에 끈을 매달아놓고 하루 17시간을 초집중해서 자기전에 전등끈을 당길 에너지만 남겨놓았다고 한다. 극강의 재능과 노력이 결합된 말그대로 공부의 신(문과 고시형 공부에 한해서)이라고 할 수 있다.

2.2. 정치 활동


1999년 4월 1일, 고승덕은 당시 김대중 정부에서 여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 당사를 방문하여, 정균환 당시 새정치 국민회의 사무총장에게 이력서를 제출하였다. 국민회의에서 공천을 받기 위함 이었다. 그러나 공천이 불분명해지자, 같은 해 4월 26일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김덕룡 부총재의 후원회 행사에 참석하여 "지연은 국민회의(광주 출생), 혈연은 자민련과 맺어져 있으나(장인 박태준), 정치는 한나라당에서 하겠다"라고 입당을 선언하고, 서울 송파갑 재선거에 후보로 공천을 받았다.
1999년 홍준표의 의원직 상실에 따라서 실시된 송파구 갑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공천받았으나, 하필이면 장인인 박태준이 당시 김대중 정부의 공동여당이던 자유민주연합의 대표를 맡고 있어서 결국 출마를 포기한다. 결국 1999년 상반기 보궐선거에서 해당 지역구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직접 출마하였고, 이회창은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되었다.
2007년 말에 방영된 YTN돌발영상에서 고승덕은 '''양념 승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2016년 현재는 그렇게 많이 쓰이지 않는 모양.
2008년 서초구 을에 전임 서초구 을 한나라당 국회의원이었던 김덕룡을 공천에서 밀어내고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무난히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012년 1월에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를 폭로해서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후 박종진의 쾌도난마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이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해당 프로그램이 주목받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국회의원 임기가 끝난 뒤 새누리당을 탈당했다. 교육감 후보로 나서기 위해서는 정당 당적으로 적어도 후보 등록 1년 전에는 포기해야 한다라는 조건이 있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교육감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정치인 고승덕은 뼛 속까지 친이로서 이명박이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BBK 주가조작 사건에서 이명박 측 변호인으로 나섰으며 그것도 땡전 한 푼 받지 않고 공짜로 변호해 줬다.

2.2.1. 선거 이력


<rowcolor=#ffffff>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초구 을)
''' '''
'''48,224 (60.3%)'''
'''당선 (1위)'''

2014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 교육감)
무소속
1,117,060 (24.3%)
낙선 (3위)


2.3. 방송 및 주식 관련 활동


역시 이름이 알려진 것은 고시 3관왕 시절. 고시계에서 고승덕의 기록은 거의 불멸의 기록 수준으로 2020년 들어서는 고시 3관왕을 기록한 인물이 10명 남짓 되지만 합격자 숫자가 바닥을 기던 당시에는 단 2명만이 존재하던 기록이었다. 참고로 1번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처조카 사위이자 장관도 역임한 바 있는 장덕진이었다.
이 인지도를 바탕으로 전문 방송인 수준으로 방송 출연이 매우 잦아지게 되었다. 특히 1995년 SBS의 <코미디전망대>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인기가 크게 상승했으며 이때 유행어로 밀었던 멘트가 '안녕하십니까? 못 먹어도 고'. 그리고 아역 배우로 꽁트를 통해 잘 나가던 인병국과 아버지와 아들 기믹도 만들고, 실제로 인병국의 어머니 역할 꽁트를 했던 김미화와도 살짝 부부 기믹 상황극을 하기도 하며, 유명해져서 잘 나가게 된다. 이 김미화와의 인연으로 2000년대에 같은 방송을 진행하게 되기도 하며, 고승덕 혼자 진행하던 프로그램에 김미화가 나온 적도 있다. 이는 당시 변호사가 TV 예능 프로에 출연한 최초의 사례였다고 한다. 1998년에는 KBS 2TV <생생경제연구소> 프로그램의 MC가 되었는데 이는 당시 변호사가 TV 예능 프로의 진행자를 맡은 최초의 사례였다고 한다.
또한 2002년부터 SBS 〈솔로몬의 선택〉 프로그램(진행 임성훈)에 고정 출연하며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다. 원래 프로그램 형태는 법률적 문제가 발생하는 상황을 재연으로 보여주고, 고승덕, 김병준, 진형혜, 신은정 등의 변호사가 그에 대해 판단하여 법률적으로 설명하는 틀로 가는 거였는데, 그 중에서도 인지도가 압도적으로 높은 고승덕은 몇몇 특집때 재연 배우 역할까지 했다.(...). 특정 회차의 재연 장면에서의 취객 연기는 후에 다른 방송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에 나올 만큼 엄청났다. 연기력 자체는 별로였지만 당시 변호사가 그런 연기를 하기로 했다는 사실 자체가 파격적이었는데, 주정을 부리는 장면 이후 경찰과 주변인들이 의견 다툼을 하는데 뒤에서 술 취한 고승덕 혼자 바닥에 누워 자면서 뒹굴거리고 있는 장면이 크게 화제가 되었다.
그야말로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변호사하면 누구나 고승덕이라 할 만큼 잘 나갔고, 연예인 이미지까지 가지고 있는 변호사는 처음이었다.
2000년에는 한국경제TV에서 '천재 고 변호사의 증권고시패스' 진행을 맡았다. 2003년에 일반자산운용전문인력 자격을 취득하고 2002년에서 2005년 사이에 주식 관련 자기개발서를 5권 정도 써냈다.
2006년 로드투자자문을 설립했는데, 2000년대 중반 당시는 국내 증시 역사상 손 꼽히는 활황기였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손실을 보았다며 넷상에서 까였던 것과 달리 객관적으로 큰 손해를 입었다고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펀드가 기대와 다르게 크게 수익을 내지 못했고 이 이야기가 정치적 반대 진영과 네티즌들이 흑색 선전 혹은 놀림거리로 삼은 이야기가 부풀려진 것.
2007년 11월 7일 당시 민주당 노식래 부대변인이 논평에서 “고승덕의 투자 상품이 지난 1년간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했고, 금융감독원으로부터 경고를 받았다”고 하자 고승덕은 "금융감독원으로부터 경고를 받은 사실이 없고, 2006년 11월부터 올해 11월까지 1년 동안 대표 이사로 있는 로드투자자문사에서 운용자문하는 투자 상품(한국투자증권로드주식형신탁)의 수익률이 연 16%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노 부대변인은 아무런 확인도 없이 인신공격할 목적으로 금융감독원으로부터 경고를 받았다고 발표했다"고 밝히면서 노식래 부대변인을 영등포 경찰서에 고소하였다.
2007년에 코스피 시장이 50.5%나 상승한 호황이었지만 고승덕 변호사의 펀드는 15.8%의 수익률을 거둬 사실상 시장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고 한다.기사
또한 고승덕이 자신의 이름을 직접 걸고 펀드를 개설했다라고 하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고승덕이 출시한 '고승덕펀드'는 '펀드 매니저 실명을 펀드 명칭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업계 자율 규제와 '투자 자문과 운용을 함께 할 수 없다'는 법령을 어겨 금융감독위원회로부터 경고를 받았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고승덕은 실제로는 금융감독위원회로부터 정식으로 경고받은 사실이 없었다.

그 외에도 2013년에 MBN에서 '고승덕의 집중분석', 한국경제TV에서 '고승덕의 인생2막 행복포트폴리오' 를 진행했다.

2.4. 못난 아버지를 둔 딸에게 정말 '''미안하다!'''




2.5. 2014년 6월 교육감 선거 이후


고승덕은 2014년 9월 24일 "서울사이버대학교 석좌교수로서 이번 학기에 청소년역량개발이란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앞으로 청소년 문제에 전념하겠다고 한다. #
2015년 3월즈음부터는 경기도의사회 법제이사로 선임돼 활동하고 있다. #
2017년 11월 파출소 이전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용산구 이촌동이촌역 인근에 있는 토지를 2007년 매입했는데 이 토지에 이촌파출소가 있어서 개발이 제한된다며 이전을 요구한 것. #
2018년 7월 4일 1심 법원에서 승소했다.관련기사
현재 이에 대해서 사실상 정치권에 대해 뜻을 접고 개인의 삶에 충실하기로 결정했다는 반응이 상당하다. 현재 해당 소송으로 인해 평판이 크게 깎여나갔기 때문. 게다가 이후 파출소로 인한 부지 사용 제한 사항은 매입자가 책임진다는 조항이 있었던 것도 밝혀지면서 논란이 되었다.[5][6]
2020년부터는 종편 시사프로그램에 적극 출연하고있다.

3. 가족 관계


종로에서 '고 피부과 의원'을 운영한 아버지 고익태[7]와 어머니 윤순엽 슬하 2남 2녀 중 셋째로서 위로는 누나 2명이 있다. 2번의 결혼과 1번의 이혼을 하였다.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1녀 1남이 있다.
1984년 포스코(포항제철) 창립자인 박태준의 차녀 박유아와 결혼했다. 둘 다 유학생 신분인 상태에서 지인의 소개로 만나 결혼, 슬하에 1남 1녀(둘 다 1986년생)를 두었으나 2002년에 이혼했다.
이혼 원인에 대해서는 전처 박유아와 고승덕의 말이 다르다. 전처에 따르면 이혼 원인은 고승덕의 정치 활동 때문. 고승덕은 1999년 야당인 한나라당에서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 공천을 받았다. 원래는 새정치국민회의 공천을 받으려고 했으나 당내 반발로 인해 공천이 어렵게 되자 한나라당 공천을 받은 것. 그런데 장인어른은 당시 김대중 정부의 공동 여당인 자유민주연합의 총재였으니 노발대발할 수밖에.
박태준은 고승덕의 부모를 만나 “장인이 여당[8] 총재인데 사위가 야당후보로 출마하는 것은 집안 망신”이라고 설득했고, 결국 고승덕은 자민련 당사를 찾아가 박태준에게 사과하고 “이번 일로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송구스럽다”, “양가 부모님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면서 공천을 반납하겠다고 발표했다. # “문은 국민회의에서 두드리고 공천은 한나라당에서 받고 사퇴는 자민련에서 했다”는 우스개소리도 나왔다. 장인의 의지에 가로막혀 뜻을 이루지 못한 셈. 그 후로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처 박유아 씨는 이를 부인했다. 부친은 자식이나 사위의 의사를 존중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간섭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이 반대했다고 한다. 반대 이유는 이미 변호사를 잘 하고 있는데 정치계에 입문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정치를 시작하면 자신과 가족들의 사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등 희생할 게 많아서 절대적으로 말렸다는 것. 이 과정에서 고승덕이 정치 입문 의사를 굽히지 않자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유아는 자녀들을 데리고 1998년 미국으로 가 있던 상태라, 당시 두 사람은 이미 별거 상태였다고 한다.
여하튼 2002년 합의 이혼하고, 2004년에 지인인 왕종근 아나운서의 중매로 재혼했다. 새 아내 이무경 씨는 10살 연하로서, 경향신문 기자 출신이다.
2014년 교육감 선거에서 아버지의 가족에 대한 무관심과 아버지의 과거 발언들을 폭로[9]하여 선거 과정에 큰 영향을 주었던 딸 캔디 고(고희경) 씨가 주목을 받기도 했다. 미국에서 로스쿨 재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고희경 기사

4. 일화



4.1. 공부법과 자기개발서 관련


고등고시 삼관왕이라는 전설적인 이력을 바탕으로 2003년부터 공부법 관련한 자기개발서를 쓰기 시작했다.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라는 책으로 고시3관왕 및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 본인 스스로 쓴 책이다. 사실 자기계발서라기보다는 절반이상이 자전적 에세이에 가깝다. 하지만 고시 3관왕이라는 것이 아무나 해낼 수 없는 것이고 이에 대해 자신이 치열하게 노력했던 바를 솔직하게 또는 처절하게 담은 탓에 인기를 끌었다. 외모에 대한 극도의 컴플렉스 및 고시 3관왕을 했을 때의 치열했던 공부방법등등이 잘 알려진 까닭도 이 책 때문이다. 단순히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순박한 이미지의 변호사에서 나름의 처절한 독종의 이미지를 추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책의 영향이 컸다.
고승덕이 <솔로몬의 선택> 등으로 대중적으로 친밀한 이미지를 가졌을 때 교육열이 강한 학부모와 학생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기도 했다. 그 때문에 그의 교육감 출마는 비판의 목소리도 컸지만, 반면에 그의 지지율이 선두인 굉장히 모순적인 양상을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정당 표명이 금지되어있고 동시에 진행되는 지자체장 선거에 비하여 관심을 받기 어려운 교육감 선거의 경우는 준깜깜이 선거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초기 고승덕의 높은 지지율은 공부 법이 인정을 받아서라기보다는 단순히 인지도가 높아서라는 평가도 많았다. 실제로 고승덕의 지지율은 학부모 세대인 30~40대가 아닌 (어릴 때 <솔로몬의 선택>을 보고 자란) 20대 청년 세대에서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의 화려한 스펙과 고시 3관왕 커리어, 대학입시의 경쟁을 뚫고 우뚝 선 것 등이 학부모의 완벽한 롤 모델이었고 그가 교육감에 출마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학부모들도 이러한 억지 공부가 별로 효과가 없음을 자기네들 스스로 이미 학창 시절에 겪어보았을 터인데, 전혀 개선의 여지가 없다. 허울 뿐인 야간자율학습이나 시키고 학원이나 보내봐야, 공부 안 할 애들은 그냥 공상의 시간을 보낸다.
그의 공부 방법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의 공부 방법이라는 것이 한국의 기형적인 교육 시장이기에 먹히는 것이지, 그 공부법 자체로는 대단히 문제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한국의 뒤틀린 교육 시장을 일개 개인이 뒤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그가 권하는 이런 공부 방법은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긴 하다. 고승덕 본인이 EBS의 한 육아 프로그램에 나와서 방학이 기회이므로 아이를 '''6시간''' 재우고 나머지는 전부 공부를 시키라는 강의를 한 적이 있어 나중에는 이러한 공부 법에 대한 비판이 높아졌다. 정작 고승덕 본인도 고시 준비를 할 때에는 2차 시험 보는 며칠을 제외하면 최소 8시간, 최대 피로가 풀리고 머리가 맑아질 때까지 잤으며, 고시생들에게는 충분히 잠을 잘 것을 강조했다.
어쨌든 고승덕의 공부 방법은 콩나물 공부 법, 고승덕 공부 법이라고 포털에 치면 나온다. 그의 책을 요약하면 '''책 1권을 7번~10번 반복해서 읽으면 나중엔 빨리 읽게 된다'''라는 것, '''남들보다 더 높은 성적을 받고 싶으면 남들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하라'''는 것, 2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말은 쉽지만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공부를 더 많이 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수면 리듬 깨가면서 자기 스케줄대로 공부하기, 밥 빨리 먹고 공부하기, T1T2 판단법을 통해 지금 당장 해야만 하는 것을 나중에도 할 수 있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식으로 공부 시간 늘리기, 7번 읽기 위해 책의 페이지 수를 계산한 다음 계획한 대로 공부하라는 것 등을 제시한다.
다만 이 공부 방법은 고시를 1년만에 붙고 재학 중에 고시 3관왕을 한 사람의 이야기이니 의지력이 고승덕 급이 아니라면 걸러들어야 한다.

4.2. 허위판결문에 대한 소신 발언 - “판사도 실수한다.”


서강대학교 기술경영전문대학원 측은 고승덕을 초청해 2016년 4월 15일 「꿈으로 돌파하라」라는 주제로 서강대학교 BW관에서 초청 강연을 실시했다. 고승덕은 자신의 강연이 끝난 직후 청중들과의 질의응답을 가졌다. 한 청중이 허위판결문(사법 비리)에 대한 견해와 허위판결문이 나오는 이유를 질문하자, 고승덕은 “판사도 실수할 수 있다.”며 판사의 실수를 인정했고 “허위판결문(사법 비리)에 대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법 비리를 아실 것이다. 판사가 돈 먹고 판결하는 것은 믿고 싶지가 않다.” 등의 의미심장한 발언을 내놓기도 했다. 청중-고승덕 질의응답 동영상

5. 이력


  • 1978 대학 3학년 재학 중 사법시험(20회) 최연소 합격
  • 1979 대학 4학년 재학 중 외무고시(13회) 차석 합격, 행정고시(23회) 수석 합격
  • 1980.3~1982.2 사법연수원 수료(12기) 및 한국 변호사 자격 취득
  • 1984 ~ 1986 수원지방법원 판사 재직
  • 1987~1989 미국 변호사 (뉴욕 주, 뉴저지 주, 일리노이 주, 워싱턴 D.C. 주) 자격 취득
  • 1989~1992 미국의 세계 최대 로펌인 '베이커 & 맥킨지' 뉴욕 사무소에서 재직
  • 1992 서울시 고문 변호사
  • 1992.01~2008.04 광림교회 상담선교회 무료법률상담위원
  • 1993 서울시 공무원교육원 행정소송실무 강사
  • 1997.9~1998.2 국민대학교 국제거래법 강사
  • 1999.5~2001.8 제주국제대학교 겸임 부교수
  • 2003 일반자산운용전문인력 (펀드매니저) 자격 취득
  • 2004 경향신문 경영자문위원 및 칼럼니스트
  • 2004 사법연수원 증권거래법 강사
  • 2005.9~2008.8 이화여자대학교 법과대학 겸임 교수
  • 2006.11~2007.11 투자자문사 (주)로드투자자문 대표
  • 2007.10~2010.10 청소년나비운동본부 대표
  • 2007.11~2007.12 이명박 대선 선거 캠프 전략 기획 팀장
  • 2008.5~2012.5 18대 국회의원(한나라당, 서초구 을)
  • 2008.06~2012.05 국회정무위원회 위원
  • 2009 청소년 행복 나눔 자원 봉사 대상 심사위원회 위원장
  • 2010.06~2010.12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 2010.09 한나라당 국제위원회 위원장
  • 2011~ 꿈을 키우는 사람들 드림 파머스 대표
  • 2011.09 국제민주연맹(IDU) 부의장
  • 2012.8~ 대안학교 '다애학교' 교사
  • 2012.12 한국청소년발전포럼 공동대표
  • 2014.01~ 서울사이버대학교 청소년 복지 전공 석좌 교수
  • 일자 불명: 한국청소년쉼터협의회 이사장

6. 논란



6.1. 용산구의 이촌파출소땅 매입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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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곡공파.[2] 무등중 시절에는 상위권이었으나 당대 최고 명문고였던 경기고에 가서 성적이 곤두박칠치고 서남 방언탓에 놀림을 받는 등 힘든 시기를 보내다가 노력으로 극복하여 고3때 결국 전교 1등이 됐다고 한다.[3] 고교 동기로 이종걸, 황교안, 노회찬, 김기준, 김용덕 대법관이 있다. 72회는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 시행 전 마지막 기수로 졸업 동기 720명 중 450여명이 서울대에 진학했다.[4] 이 당시만 해도 사법시험 합격인원은 수십명대였다. 뽑는 인원이 수백명 단위로 늘어난 80년대 이후 최연소 기록(우병우 등)과 비교할 수 없는 것.[5] 물론 부지 사용 제한 사항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다툴 문제이기 때문에 꼭 지켜야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고승덕이 이후 정치 행보를 한다면 크게 논란이 될 수 있겠지만...[6] 하지만 고승덕이 다시 정치로 들어올 확률은 희박한데 교육감 후보시절 정치인으로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엄청나게 깎아먹혔다.[7] 1948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전문부 졸업. 참고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가 서울대 의과대학으로 통합하면서 전문학교 출신은 전문부로 구분되었다.[8] 당시 김대중 정부는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의 공동정부여서, 자유민주연합 역시 공동여당이었다.[9] "고승덕이 과거 공직생활을 역임할 때 왜 폭로하지 않았느냐"는 의문에 대해 답하였는데, "다른 공직생활이면 상관이 없지만 교육에 관련된 공직이나 일은 전혀 맞지 않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