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호

 

''''''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서대문구 갑)'''
제16대
이성헌

제17대
'''우상호'''

제18대
이성헌
제18대
이성헌

'''제19~21대
우상호'''

현직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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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7 · 19 ~ 21대 국회의원
우상호
禹相虎 | Woo Sangho
'''
<colbgcolor=#004ea2> '''출생'''
1962년 12월 12일 (61세)
강원도 철원군
'''거주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 인왕산어울림아파트
'''본관'''
단양 우씨
'''종교'''
개신교 (예장통합)[1]
'''학력'''
용문고등학교 (졸업 / 29회)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 / 학사)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 석사)
'''병역'''
육군 병장 만기전역
'''가족'''
배우자 이현주, 아들 우종혁[2], 우종하[3],
우지수
'''신체'''
175cm
'''소속 정당'''

'''지역구'''
서울 서대문구 갑
'''의원 선수'''
'''4'''
'''의원 대수'''
17, 19, 20, 21
'''소속 위원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현직'''
제21대 국회의원
사단법인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
'''경력'''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동우회 회장
열린우리당 대변인
이한열추모사업회 사무국장
대통합민주신당 대변인
통합민주당 대변인
민주당 대변인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제19대 대통령선거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서명'''
[image]
'''SNS'''

[접속불가]
1. 개요
2. 생애
2.1. 민주화 운동
2.2. 정계 입문
2.3. 대변인
2.4.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2.5. 탄핵안 가결
2.6.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3. 저서
5. 여담
6. 소속 정당
7. 선거 이력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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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정치인이다. 1987년 6월항쟁 때에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서 대규모 시위를 이끈 운동권 출신이다#. 2004년부터 제17대, 제19대, 제20대,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
남북관계, 반값 등록금, 통신비 인하를 위해 노력해온 범진보 성향, 계파정치 혁신을 외쳤던 대변인 전문가로 '진보성'을 강조하는 의정활동에 앞장섰지만 대변인 활동을 하며 기타 86출신들과 달리 유연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강성파라기 보다 합리적인 중도파로 분류#되며 특정계파에 속하지 않은 행보를 걸어왔다는 차별점이 있다. #
학생운동 지도부에 당선되면서 폭력운동 중심의 문화를 바꾸기 시작한다. 화염병과 투석전 중심의 학생운동을 다수가 참여하는 온건한 운동으로 변화를 시도하다 강성 지하 서클에게 고초를 겪기도 한다. 한 예로 운동권 사람들과 전두환 이야기를 하다가 전두환도 잘한 점이 있다(...)고 주장하다가 동료에게 멱살을 잡히기도 했다.[4] 학생회장이 된 우상호가 비폭력 평화 운동으로 전환시키자 급격하게 학생들이 참여한다. 이를 바탕으로 체육관 선거를 규탄하다 결국은 6월항쟁의 주역이 된다. 이러한 균형감각이 향후 정치활동에 영향을 주었다.
제20대 국회에서 원내대표로 선출되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추적하는 지도부로 공헌했다. 이후 사상 최초 '현직 대통령탄핵가결결정을 이끌어 냈다.
2021년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선언했다#.

2. 생애


1962년 12월 12일, 우상호는 강원도 철원군에서 3남 1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후 서울로 상경하여 용문고등학교,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원래 우상호의 집안은 부유했다. 아버지는 지주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도쿄제대 체육학과 유학을 떠날 정도였다.[5] 하지만 38선이 그어진 후 우상호의 집안 재산은 공산당에게 빼앗긴다. 6.25 전쟁으로 국군이 철원의 일부 지역을 회복한 후에 우상호 집안은 일부 땅을 돌려받는다. 우상호의 아버지는 일부 되찾은 땅을 팔아 학교를 짓는 등 사회사업을 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고 몰락하고 만다. 형제들은 모두 성적이 좋았는데 진학을 포기한 것도 가난이 이유라고 밝혔다. 우상호도 대학에 들어가지만 등록금이 없어 대학시절 내내 고생을 했다. 우상호는 일찍부터 시인을 꿈꿨는데 집안의 기대와 달리 국문과로 진학하면서 갈등을 겪기도 했다. 재학시절 오월 문학상(5.18 문학상) 시 부문 당선, 윤동주 문학상을 수상한 이력을 감안하면 시 쓰는 여고 선생님이란 목표대로 진로가 흘러갔을 수도 있었다. #

2.1. 민주화 운동


우상호는 원래 민주화운동을 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국민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모두 글을 쓰는 문예반에 들어갔다. 그리고 군대제대 후에는 운동권과 멀어지면서 취업을 준비하는게 일반적인 운동권 대학생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우상호는 다른 운동권 학생들과는 이례적으로 군 복무 중에 학생운동을 결심하고 제대 후 사회과학 세미나에 참여한다. 문학 친구였던 인권운동가 박래군이 먼저 학생운동에 뛰어들면서 우상호에게도 영향이 갔다고 한다. 등록금이 없어 입대한 후 나온 휴가에서 박래군이 강제징집 당한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우상호는 '84 국문과 강타'라는 가명으로 3년 후배들과 함께 조를 짜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후배들과도 격의없이 지내는 계기가 된다. 당시 학생운동은 선후배 관계가 엄격한 것에 반해 매우 특이한 케이스로 평소 성품을 알 수 있다.
10.28 건국대학교 항쟁이 터진 후 특유의 인망으로 인해 학생회장을 권유받는 원인으로 발전한다. 당시 학생운동은 경찰과 충돌이 격화되면서 천여 명이 구속되고 내부에서도 갈등이 심화되었다. 기존 학생운동 참여자 중 절반 가량이 잡혀간 상황으로, 집회와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비운동권 학생들을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운동권의 시각이 있었다. 한편 비운동권 학생들 역시 자기방어 차원에서 운동권의 투쟁 양식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6]
우상호는 자신을 추천한 대학 내 학생운동 지도부에게 내방식대로 맡겨달라고 요구한다. 우상호가 출마한 87년 연대 학생회 선거는 약 500명이 모였는데, 지원 유세에 문화제 방식의 선거운동이 가미 되자 약 2천여 명까지 불어났다. 비폭력주의 집회의 일환으로 등장한 문화제 형식 선거운동은 다른 대학에 퍼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학내 운동권 서클은 화염병과 돌을 던지는 기존 시위방식이 달라지자 불만을 가졌다. 우상호는 공개토론을 열어 비폭력 집회 방침을 관철한다.[7] 늦은 참여로 인해 비운동권 학생들 역시 나름의 고민을 갖고 있음을 이해한 우상호는 자신의 노선을 이렇게 표현한다. '한 사람의 열걸음 보다 열사람의 한걸음이 중요' 이런 사고방식은 이후의 정치활동과도 이어진다.[8]
전두환 정권이 체육관 대통령을 뽑는 기존 헌법을 유지하겠다고 하자[9] 야당, 시민사회, 학생운동 세력은 강경해진다. 그 와중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폭로가 터지면서 정국이 발칵 뒤집힌다. 서울의 학생운동 진영은 민정당 대통령 후보 선출대회에 맞춰 대규모 집회를 추진했다. 이들은 집회 전날인 87년 6월 9일 예비집회를 열었는데, 이전보다 다수가 참여한 집회 규모에 당황한 경찰들이 최루탄을 직사로 쏘기 시작하고 여기서 우상호의 대학 후배인 이한열이 사망한다.
6월 항쟁이 발발하며 국민적 저항에 견디다 못한 전두환 정부는 결국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겠다는 6.29 선언으로 항복을 하기에 이르렀다. 4.13 호헌조치가 전두환 정권의 명줄을 재촉한 자충수가 되어 버렸던 셈이다. 당시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은 이한열 열사의 상을 찾아갔고, 상주인 우상호에게 학생들 덕에 풀려났다며 울먹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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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청년이 우상호이다. 사진 오른쪽 태극기를 들고있는 사람은 배우 우현이다. 연세대학교 앞 경의선 신촌철교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장소는 현재의 연세로이다. 위 사진은 장례식이 아니라 연세대학교 안에서 연 49재 행사 때다. 총학생회장이던 우상호 의원이 한열이 영정을 들고 교문 밖으로 나가다 경찰에 연행됐다. 잡아갈 줄 알면서 독재에 그렇게 항거했다. 그렇게 6월 항쟁이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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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이한열 추모사업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이한열 군의 어머니 배은심 씨는 우상호를 친아들처럼 생각한다고 하였다. 이 때문인지 "나는 이한열 군의 가족이 싫어하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이 당시의 인연으로 배우 우현안내상과는 사적으로 친한 사이라고 하며, 20대 총선과 21대 총선 유세 때 두 사람이 우상호를 지원하기도 했다.
박종철 열사에 대한 죽음의 진실을 밝힌 최환 공안부장 검사에 대해서는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 전 공안검사시절 자신의 선배들을 많이 잡아갔기 때문에 미운 감정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친구인 이한열 열사가 많이 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2.2. 정계 입문


우상호는 1988년 총선에서 평민당에 영입제안을 받는다. 즉 김대중에게 직접 영입제안을 받았다. 양김분열로 노태우가 당선된 후 김대중은 새 인물을 영입해 서울에서 출마시킬 계획을 세웠는데 이때 영입된 인사가 이해찬이다. 김근태는 투옥 상황이고 송영길은 노동조합운동을 하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다음으로 우상호에게 국회의원 제의가 갔다.
김영삼노무현을 영입한 시기도 88년이기에 우상호가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이해찬, 노무현과 같은 시기에 국회의원을 할 가능성도 있었고 당시 나이도 만 25세 4개월이어서 민주화 이후 통틀어 역대 국회의원 최연소로 당선된 김영삼(당시 만 26세 5개월)의 기록도 깼을 것이다. 하지만 우상호는 이 제의를 거절하는데 1987년 대선에서 양김 단일화를 요구하다 실패한 책임감을 이유로 들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6.10 항쟁을 촉발한 학생운동 지도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는데, 우상호는 결국 88년 검문에 의해 검거되어 국가모독죄를 이유로 수감되고 발이 묶였다. 언론계와 출판사업에 종사하던 우상호는 95년 민주당의 서울시장 선거를 지지하며 정치입문 단계를 밟는다. 5년 후 우상호가 출마를 준비한 서대문구 갑 지역구는 김상현 의원이 당선되던 지역구로, 김상현은 이례적으로 정치신인인 우상호의 출마도 환영하며 경선을 요구한다.
# [10] 당시 새천년민주당 지도부는 여론조사로 경선을 실시했는데 그 결과 우상호가 승리한다.
제 16대 국회의원 선거(2000년)은 총선시민연대가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새천년민주당 진영에선 한보에게 돈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걸린 김상현이 낙선명단에 오른 부분이 발목을 잡았다.
김상현은 불공정 여론조사를 이유로 탈당한다.(...) #


이후 우상호는 같은 학교 선후배인 이상헌과 지긋지긋한 6번째 데스매치를 시작한다. [11] 이성헌은 연대 학도호국단장. 우상호는 연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같은 학번이다. 첫 맞대결은 이성헌이 약 2% 차이로 이기지만 제17대 국회의원 선거(2004년)에서 우상호가 승리한다. #
우상호는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당시 지역위원장들의 대세인 이인제 전 의원 대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한다. # 소수의 86그룹 정치인은 대세론 대신 고 김근태 전 의원을 도왔는데 우상호는 정통운동권 출신이 아닌 노무현을 지지한 것도 특이한 결정이다. 우상호의 결정은 일부 사람들에게 대세 이인제 또는 선배 김근태를지지 하지 않는다고 비난 받는다.
그러나 우상호는 노무현의 비전을 보고 지지했다고 밝힌다. 우상호는 평소에 국민의정부 시기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했던 노무현에게 많은 호감이 있었고 지역위원장 중에서는 유일하게 초청하여 강의를 진행한바 있었다[2]
[image]
이 과정에서 노무현은 우상호에게
" 우리는 87년 동지들입니다. 그러니 386들이 힘을 합해서 정치를 뒤집어봐야 하는거 아뇨?"
라는 내용을 말했다고 술회했다. 당시 2001년 국민참여경선은 지역을 순회하며 경선하는 방식을 채택했고, 제주, 울산, 광주에서 이긴 노무현을 대전과 충남에서 이긴 이인제가 대세론의 위상을 되찾는 상황이었다.
분수령인 6번째 지역경선에서 강원도 득표를 책임진 우상호로 인해 노무현이 신승하고 김중권이 사퇴하며 영남후보론의 선택지를 하나로 좁힌 결과로 이어졌다.
이인제의 다른 텃밭인 경기 경선이 시작되기 전 호남과 영남 경선에서 잇달아 노무현이 완승하자
이인제 역시 외압을 핑계로 후보를 사퇴한다.
노무현의 대선후보 지지율이 하락하고 후단협이 노무현을 흔들자 우상호는 국민참여운동본부 부본부장을 맡았다.
당시 비노/반노로 분류된 34명의 의원들은 한화갑대표에게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였고
2002년 10월 4일 이른바 후단협, 독자세력화를 추진하였다.
같은날 한영애 전 의원이 "성실하고 꾸밈없는 정치인 정몽준을 지지하기 위해 탈당을 결심했다"며 탈당을 선언하며 갈등은 더욱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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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우상호를 비롯한 이인영 등 수도권 30대 40대 원외 위원장과 이종걸, 임종석등 현역 의원들은
비노/반노의원들의 탈당 움직임을 '해당행위'로 비난하며 국민경선으로 선출된 후보로 뭉칠때임을 강조했다#.
노무현이 이길거라 생각하지 않은 동교동계는 이인제를 후원하는 과정에서 민주당에 입금된 중앙당 후원금을 다 써버리고 만다.
대선후보에 따로 대선자금을 모아오라고 요구하던 민주당 지도부와 중앙당 후원금으로 당이 대선주자를 지원하길 원한 노무현 캠프는 격하게 대립했다.
이 앙금이 민주당의 보수적 영입인사들과 결합해 현대가 출신 정몽준을 지지하는 후단협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우상호, 정동영, 추미애 등은 국민참여본부를 설립해 희망돼지 저금통 모금 방식으로 노무현에 협력했다. 애초에 중앙당 정치자금이 증발한 상태기에 기업에게 정치자금을 받은 이상수, 이광재, 안희정이 검찰 수사를 받게 되었지만(...) 우상호는 결국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지대한 공을 세우게 된다.


2.3. 대변인


우상호는 이례적으로 대변인을 8번이나 했다. 대변인은 언론 노출도가 올라가는 장점이 있으나 높은 업무강도[12]로 인해 여러 번 하는 경우가 드물다. 거기다 지역구 국회의원이 여러 번 맡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덕분에 당을 위해 희생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대변인을 자주 하면서 우상호는 다른 86그룹 정치인들과 선명성을 강조하는 의정활동을 하지만 다른 정치인과 달리 유연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86 운동권 중에서 언론과 폭넓게 소통하는 몇 안되는 인사이다.
오랜 대변인 생활로 주옥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이언주는 경유형 철새, 영도는 철새 도래지가 아니다"라며 이언주에게 묵직한 돌직구를 날린 적도 있다.[13]"김문수, 대구에서 뼈 묻겠다더니 살만 올라왔나?"라며 김문수에게도 돌직구를 날린 적이 있다. 유인촌 장관의 임명 당시도 돌직구를 날린 적이 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청문회에서 청와대가 ‘유인촌 장관은 전북 완주 출신’이라고 발표했는데 유인촌 장관이 “서류상 출생지는 전북이지만 나는 56년간 서울에 산 서울 사람”이라고 해명하자 우상호는 “그러면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이 대통령은 일본 사람이냐.”라고 맞받아쳤다.
박근혜 정부 시기에도 박근혜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세월호 참사 당일 관저에서 정상적으로 집무를 봤다는 소명자료를 낸 것에 대해 우상호는 “이 정권을 재택근무 정권이라고 규정하겠다.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라는 카피가 화제를 일으킨 적이 있다. 박근혜 정권 들어서 침대는 집무실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게 됐다.”라고 했다. 최양희 미래부 후보자 인사청문회 때는 최 후보자의 농지법 위반 의혹을 제기하며 “최양희 미래부 후보자의 전원주택 잔디밭에 고추가 심겨져 있다. 잔디가 채소인가? 최 후보자는 잔디를 먹을 수 있나? 농지에는 잔디를 심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한편 같은 진보 진영으로 평가받는 유시민에게도 돌직구를 날린 적이 있다. 유시민 의원이 대통합민주신당 탈당 및 진보정당 창당을 하자 “당이라고 하는 곳은 일시적인 사랑으로 들르는 러브호텔이 아니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끌고 가야 할 가정 같은 곳이다.”라고 돌직구를 날렸다.

2.4.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3선에 성공하였다.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출마를 선언했다. # 그리고 원내대표 선거 결과 결선 투표로 가는 접전 끝에 상대적으로 진보성향인 우원식 의원을 이기고 원내대표가 되었다.
당시 원내대표 선거는 한석차이로라도 원내 1당이 된 민주당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선거였다. 당초 언론과 여론조사의 예상을 깨고 122석 밖에 얻지 못한 여당을 눌렀고 호남과 비례에서 돌풍을 일으킨 국민의 당과 6석을 거둔 정의당과 함께 거야가 출현됐기 때문에 정국의 주도권이 제 1야당인 민주당과 국민의 당이 주도하게 되었고 국회의장을 비롯한 상원이라고 불렸던 법제사법위원회장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
우상호는 상대적인 진보성향이었던 우원식보다 밀리는 상황이었고 1차 투표에서 2등이 되었으나 비교적 계파색이 엷어 비주류를 포함한 당내 주류 계파까지 고르게 지지를 확보했다는 후문이 있다# 자칭 타칭 정치구단으로 불리는 박지원은 남들이 우원식의 우세를 말할때 본인은 우상호가 당선될 것이라 예측했다면서 그 이유를 '친문이 밀어서'로 분석했다. 우상호가 다른 후보들과 달리 16대 대선 당시 노무현을 일찍이 지지했고 후단협사태를 끊임없이 비판해 왔기 때문이다. 2012년 문재인 대선캠프 관계자는 당시 안철수와의 단일화이슈에 시달리며 공조직이 마비되었던 상황속에서 우상호만이 달랐다고 평가한다.#
20대 국회 개원 협상은 첫번째 큰 고비였다. 한 석차이지만 무소속으로 나가있는 의원들을 더하면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에게 원내 1당을 내줘야 하는 상황임에도 국회의장을 가져와야 했고 지지자들의 요구사항인 법제사법위원장 사수와 청와대와 권력기관 감시가 가능한 국회운영위원회장을 가져와야 했다. 하지만 집권 중후반부를 달리던 박근혜 정권의 새누리당은 레임덕을 원하지 않았고 운영위원회 사수에 총력을 기울였다. 지난한 협상 속에서 국회의장과 예산과 결산을 책임지는 예산결산특위를 민주당이, 운영위원회와 법사위원장은 새누리당이 가져 갔다#. 이런 협상 결과에 당내에 많은 비판이 있었지만 호남없이 총선에서 이긴 민주당과 호남과 중도층에서 인기몰이한 국민의당, 양당 중심 거야의 출범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선 국회의장 확보가 필수였고 그 덕분에 후에 촉발된 국정농단 사태를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교두보가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우상호 원내지도부의 특징으로는 의원책임제를 꼽는다. 통상 3선 이상은 원내대표,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재선은 상임위원회 간사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입법 우선순위를 정하는 재량권이 주어진다. 그에 반해 초선의원들은 당내 중진과 계파, 당론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어 '거수기'역할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래서 선수에 상관 없이 대정부 질의나 국감에서 나온 주제 법안을 이끌어갈 대표의원을 배당해 활약할 여지를 '의원책임제'로 마련해주기로 한다.#. 결국 20대 국회에서만 더불어민주당내 초선 53명에 달할 정도로 많은 의원들이 자발성을 갖고 참여한 성과가 나온다. 주요 TF나 국정조사에서도 초선 의원들이 활약할 수 있게 되었다. 대정부 질문이나 국정감사에서 고민한 부분을 입법하라고 권장했기에 법안의 완성도가 올라간 것도 긍정적인 변화라 한다.
우상호 원내지도부는 2016년 20대 국회 개원후 8월 중순부터 비공개로 최순실 태스크포스를 꾸린다#. 조응천,손혜원,도종환의원등이 멤버로, 각자 제보받은 정보를 모아 TF 차원에서 국정농단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민주당은 김재수,농림수산식품부장관 해임건의안을 내놓으며 새누리당에 대적하기 시작한다. 38석을 거머쥔 제 3당 국민의당을 끌어들인 원내지도부는 박근혜청와대를 효과적으로 압박하고 이에 반발한 새누리당은 보이콧을 선언한다. 비공개 TF의 활약 덕택에 매일 주요 언론 1면에 최순실보도가 실리게 되었고 박근혜청와대는 친박 핵심 이정현과 범 친박으로 분류된 정진석으로 구성된 새누리 지도부에 국감을 파행시키기 위한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추미애와 우상호 투톱으로 이뤄진 민주당 지도부는 단독 국감을 밀어 붙였고 이정현대표는 이를 허가한 정세균 의장에게 단식으로 맞섰다#.
새누리당의 국감 보이콧과 이정현의 단식으로 최순실의 증인채택을 막는 효과를 보였지만, 며칠만에 혼수상태로 단식이 종료가 되자 갖은 조롱이 쏟아지게 되고 조선일보,한겨레 두 언론사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최순실 사태의 논란이 붉어지자 결국 여론에 못이겨 박근혜청와대가 국감 실행을 최종적으로 굴복하게 된다. 이후 새누리도 국감에 참여하면서 완결한 형태의 국정감사가 진행되는 줄 알았으나 JTBC의 태블릿 PC 보도가 나면서 상황은 급반전하게 되고 정국은 더 큰 혼동에 빠지게 되었다#.
2016년 6월 12일 정부가 이동통신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려고 하자, 당 회의에서 “(폐지되면 보조금 경쟁으로) 통신 시장이 다시 정글로 바뀔 수 있다. 신중해야 한다”며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이에 대해서는 수많은 네티즌들이 "휴대폰 직접 사본 적 없나?" "민생을 위한다고 입으로만 얘기할 뿐, 현실 감각이 전혀 없다" 등의 비판을 퍼부었다.
2016년 6월 14일 "정경분리 원칙에 따라 개성공단 가동과 금강산 관광을 전향적으로 재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6년 6월 이후 당 소속 의원들[14]의 비리나 실수에 대한 단호한 조치보다 두둔하는 데에만 주력하고 있어 이 같은 온정주의가 오히려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국민 눈높이와 맞지 않는 '제식구 감싸기'란 비판이다. 특히 더민주 소속의 전직 의원은 "우 원내대표가 자를 것은 잘라내는 결단을 보여야 하는데 강단 없이 유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지나친 온정주의에 빠져 있다는 인상을 계속 준다면 결국 그것이 부메랑이 돼 당 전체의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일침을 놓았다. #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통과 이후 취지는 동감하면서도 제한을 완화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물가 인상을 감안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국민 여론은 대단히 안 좋다.
추가적으로,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한자도 안 고친다고 발언한 사람이 단 하루 만에 시행령을 개정하자는 말을 하였다.#
당대표인 추미애와 함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정국-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제19대 대통령 선거라는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당을 별 잡음 없이 안정적으로 이끌었으며 19대 대선의 승리와 함께 명예롭게 임기를 마쳤다. 원내대표를 성공적으로 마친 공이 있어서인지 문재인 정부의 통일부 장관 후보로도 거론되었으나 부인했고 차기 총선의 역할이 있어 국회 일에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통일부 장관으로는 조명균이 내정되었다. 이후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특별시장 당내 후보군 중 하나로도 거론되고 있다. 1기 전대협 의장이었던 이인영도 우상호와 같이 시장 출마후보군 중 1명으로 거론되었으나 이인영은 당내에서의 역할을 고민하고 있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는 걸 봐선 상호 간에 교통 정리를 하면서 우상호가 86그룹을 대표해서 나가는 쪽으로 정리되었다.
[image]
이 짤방의 장면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직후인 2016년 10월 31일 정국 해결을 위해 여야 교섭단체(새누리당,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의 원내대표들과 정세균 국회의장이 회의를 열었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당시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가 퇴장해버리자 비꼬는 장면이다. # 이 영상을 보면 정진석 당시 원내대표가 먼저 자리를 박찬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상호 원내대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에 정진석도 바로 자리를 일어났지만, 정세균 국회의장이 우상호의 퇴장을 손으로 막아서, 우상호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이 짤방은 흔히 ''' '저러니까 망하지' '''로 알려져 있다. 이 짤방은 이후 더불어민주당이 집권을 한 뒤, 야권이 자책골을 넣어서 손해를 볼 때 사용하는 짤방이 되었다. 탄핵 서술은 아래에 자세히 되어있다.
박근혜 탄핵으로 인해 조기대선이 치러지고 우상호는 취약지역, 소외지역 전문 유세단 봄봄유세단을 지휘한다. 보통 대선 일정이 12월이던 시절은 대선 레이스가 약 반년전에 결정되고, 선출된 후보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한 번 씩은 지역을 방문하고 지역의 전통적인 조직과 지지층을 결속한다. 그러나 2012 대선에서 민주당은 안철수와의 단일화 이슈로 인해 공조직이 정지된 시절이 길었다. 당시 공보단장이었던 우상호는 조기대선으로 인해 다시 민주당이 유세일정에 제한을 받자 대선후보자 선거 유세단과는 따로 초재선 중심의 유세단을 만든다.

2.5. 탄핵안 가결


촛불집회가 시작되고 민주당 추미애 지도부는 당의 노선을 3단계로 정리한다. 1단계 박근혜 대통령 2선 후퇴 2단계 하야 요구 3단계 탄핵당론 확정이다. 해당 과정에서 한 번이라도 박근혜 청와대가 동의했다면 탄핵안 가결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박근혜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타협을 거부하면서 정권을 나락으로 몰고 간다. 우상호는 이 과정에서 새누리 비박계를 분리해 탄핵안 가결로 끌고 오는 지대한 공을 세웠다.
당시 민주당은 추미애 당대표보다 우상호가 더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보수진영 시민도 납득할 만한 절충안을 계속 제시하자는 전략인 셈이다. 우상호는 문재인 전대표에게도 이를 납득시켰기에 문재인 역시 신중한 행보를 보였다.
초반부터 진영간 대결로 가면 보수진영의 시민도 결집하고 탄핵소추안에 필요한 새누리당내 40석이 넘어올리 없다는 우상호의 판단은 현실적이었다. 절충안을 계속 제시하는 우상호의 전술은 촛불집회와 맞물려 시너지를 낸다. 문재인 전대표가 제안한 거국 내각이 거부되자 촛불집회는 100만명으로 추산되는 규모로 갈수록 불어났다. 새누리당 비박계는 이에 공포를 느껴 우상호와 협상했는데, 여기에서 도출된 절충안인 조기하야 요구를 박근혜 청와대가 거부하자 민주당은 결국 탄핵안을 당론으로 채택한다.
비박계는 그동안 탄핵에 부담을 느껴왔으나 자진사퇴 요구가 거부되자 당내 생존을 위해서라도 탄핵 찬성에 대한 유혹을 받았다. 김무성계, 유승민계 등으로 분류되는 비박계는 '여당내 야당' 행위를 강하게 보복해온 친박세력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국정농단의 책임까지 공유하기도 싫었다.[15] 우상호는 이들과 협상해 비박계의 활동 공간을 열어주며 보수진영 내 비박 지지층의 이탈을 유도한다.
한편 새누리당 지지층이 붕괴하자 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간 대통령 박근혜 탄핵소추안 가결을 둘러싼 주도권다툼이 일어났다. 대선주자와 정당 지지율이 민주당에 못 미쳤던 국민의 당은 탄핵소추안 상정 시기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당대표간 회동에서 박지원은 12월 9일을, 추미애는 12월 2일을 주장했다.[16] 광장의 민심을 고려하지 않은 국민의 당이 비판을 받자 박지원은 JTBC에 출연해 "국민 70~80%가 개헌에 찬성하고 있다” 는 주장을 펼치며 자충수를 던진다. 탄핵으로 조기 대선이 일어나면 민주당, 그리고 문재인에 유리한 선거국면이 형성된다고 판단하며 그랬던 것이다. 박지원은 비박계를 빌미삼아 원포인트 내각제 개헌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박영선, 박병석등이 토론회에 참여하는 등 내각제에 지지를 보냈다. 국민의 당의 이상돈 또한 내각제 개헌 주장을 했다.
그러나 시민들이 가만히 둘리가 없다. 이런 계산에 분노한 시민들이 비박계와 국민의 당에 수백만개의 문자행동(폭탄)을 시전하며 원포인트 내각제 개헌 계획은 실패했다. 결국 12월 2일 상정이 불발된 다음날 232만명이 촛불집회에 나오며 무시무시한 민심을 보여주었다. 그 덕에 민주당 원내지도부의 설득과 박근혜 청와대의 표단속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비박계는 굴복하게 된다. 절충안을 제시해온 우상호도 시민들에게 비박계와 같은 취급을 받았지만 오히려 비박계, 국민의당과 공감대를 갖는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표단속을 이어나간다.
우상호는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두고 중요한 역할을 타 정당에 대부분 양보했다. 국회 탄핵소추안 제안설명은 국민의 당 김관영이 맡고 헌법재판소를 담당할 탄핵소추위원단장은 비박계인 권성동이 맡겠다는 주장을 인정한다. 탄핵의 정치적 장면을 타당에 넘겨주는 대신 표 계산에 집중했다. 우상호는 국회 의결 당일 당 지도부에 222표에서 226표가 확보되었다고 보고한다. 11월 말에도 우상호와 표계산이 달랐던 친박계는 12월 9일에도 이탈표가 25표에 불과해 부결될 것으로 예측했다. 우상호는 친박계가 오판한 이유를 '국회에서 벌어지는 일인데도 새누리당보다 국정원, 우병우 라인의 보고서를 더 신뢰했기 때문' 으로 추정했다. #
그렇게 모두가 불가능할 것[17] 이라고 말한 탄핵을 결국 광장의 시민들과 우상호 전략의 결합으로 성공시킨다. # 우상호 의원은 자신이 6월 민주항쟁의 주역이 됨과 동시에 박근혜 탄핵의 주역이 될 수 있어서 기뻤으며, 운명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image]
탄핵 직후 방청석을 향해 손을 흔드는 우상호 원내대표의 모습이다.왼쪽은 당시 추미애 당대표이다.
그 날, 인터넷에서는 한 장의 사진이 화제가 됐다.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 국회 본회의장을 나서던 우 전 원내대표가 한 손을 들어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네는 장면이었다. 인사의 대상이 방청석에 있던 세월호 유가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화제가 된다. 상징적인 장면으로 알려졌다.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고, 제대로 위로받지 못한 채 거리로 나앉았던 유가족을 방청석에 앉히고 그 순간을 선물하고자 한 건 우상호의 아이디어였다.

2.6.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 2018년 1월 21일 서울특별시장 도전 의사를 공식 표명했다. 출마 결심의 배경은,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도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현역시장이자 같은 당의 박원순 시장과의 경쟁이 예견된다. 출마선언 첫날부터 박원순 시장의 미세먼지 관련 행정에 비판을 가하면서 경쟁에 불을 붙혔다. #
  • 2018년 3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의 외교적 성과를 칭찬하는 "우상호는 망했다"라는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려 화제가 되었다. # 물론 '망했다'라는 표현은 반어적인 표현으로, 우상호 본인조차 예상하기 힘들 정도로 문재인 대통령이 외교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는 의미의 칭찬이다.
  • 2018년 3월 10일 탄핵 1주년을 맞아. 당시 원내대표였던 우상호의 역할과 활약이 재조명되고 있다. #
  • 2019년 1월, 손금주, 이용호의 입당을 불허한다는 더불어민주당의 결정의 대해 "순혈주의"라고 비판하면서, 당의 문호를 개방하고 민주평화당 및 정의당과의 협력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보수정당이 자유한국당 전당대회를 계기로 결집하고 오세훈, 황교안 두 사람을 받아들여 반문연대를 주창하고 있다"며 "지금은 반문연대에 맞서기 위해 범진보진영의 개혁전선을 정립하고 확대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 비슷한 시기에 우상호뿐만 아니라 송영길, 박영선 등 비문계 의원들이 잇따라 당의 입장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상황이다. 송영길은 신한울 3, 4호기 건설 재개를 주장했고, 박영선 또한 우상호와 유사한 주장을 하였다. 이를 두고 더불어민주당 내 친문과 비문 간 갈등이 심화되는 거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
  • 2019년 2~3월에 문재인 정부에 입각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있었지만, 예상과 달리 개각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실제 우 의원은 인사 검증 대상에 올랐다는 보도 이후부터 일체의 외부 활동을 접고 인사청문회 준비를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해식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이해찬 대표의 만류가 있었다"며 "차기 총선에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설명했으며,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여러가지 고려가 됐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당의 요청"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인사 발표 직전에 개각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이 의문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당의 필요로 만류했다면 그보다 일찍 개각 대상에서 빠졌어야 한다는 것. 인사 검증 과정에서 문제가 돼 제외됐다는 추측도 있고, 또 2018년 지방선거에서 함께 당내 서울시장 경선에 출마했던 박영선 의원이 중소벤처기업부장관에 내정된 점을 감안하면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 이후 6월 2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인터뷰 도중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입각준비를 실제로 했었다고 자폭했다.
  • 21대 총선에서는 당에서 공천을 받고 예비후보로 등록하면서 4선에 도전한다. 경선 없이 단수공천으로 후보에 확정되었다. 본선거에서는 또 출마한 이성헌을 상대로 10,458표차, 11.6%포인트차로 여유있게 이겼다. 윤미향을 지지 선언한 15인 중 1명이다.# 일각에서는 박원순 이후의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한다. 이미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박원순과 맞붙기도 했고, 현재 민주당 내에서 차후 서울시장 후보로 나갈 만한 인물로 거론되는 편이기도 하다. 차후 서울시장이 된다면 대권주자로 성장하는것도 가능할것으로 보인다.[18] 박원순 이후의 서울시장이 된다면 20대 대선 이후론 민주당내 새로운 유력한 대권주자급 거물로 급부상 하게 될 확률이 높다.[19]
  • 2020년 12월 13일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서울시장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2월 초반 기준으로 박영선에 비해 지지율이 낮은 편이나 박영선과 달리 친문이라는 강점이 있는 편.[20]

3. 저서


  • 세상의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면 (시아출판사, 2016)
  • 촌놈 (두물머리, 2004)

4. 논란




5. 여담


  • 우상호는 1991년 연세대 야외극장에서 결혼한 유일한 사람이다. 현재는 동문회관이 지어져서 그 곳에서 결혼식이 진행된다.

  • 우상호는 결혼 이후 우현, 안내상과 약 3년간 같이 생활을 하였다. 몇달 정도만 같이 생활할 줄 알았지만 당대의 배고픈 연극배우들이 늘 그렇듯 한동안 더부살이하며 식구처럼 같이 살았다는 후문이다.
  • 유튜브에 '우상호TV'라는 채널을 개설해서 홍보 영상을 올리고 있다. #, #
  • 국회 초반부터 안경을 썼지만, 18대 총선부터 안경을 벗었다. 다만, 의원실에서 업무 볼 때만은 안경을 착용한다고. 이것은 정치 초기에 안경을 썼다 우상호랑 똑같이 18대 총선부터 안경을 벗은 남경필도 마찬가지.[21]

  • 나름 연예인 친척들이 많다고 한다. 배우 안성기이종사촌 누나의 남편(매형)이고 박병호가 외삼촌이고 외삼촌 전부인(외숙모)이 배우 정혜선이였지만 1975년 시점에 이혼한 상태라고 한다.
  • 연세대 선배인 이성헌과 6번 맞붙었다. 즉 국회의원 선거 나갈때마다 이성헌 전 국회의원과 대결한 셈인 것이다. 전적은 6전 4승 2패로 앞서고 있다.[22]
  • 20대 국회 때 민주당 원내대표를 맡으면서 새누리당을 향해 "저런 식으로 하니까 망하지"라고 했던 장면이 짤방으로 쓰이고 있다.
  • 반려견을 키운다.
  • 배우 우현과 친하다. 대학때부터 우현과 알고 지내서 인지 우현이 무한도전 못·친·소 페스티벌 시즌 2에 출연해서 심지어 1등까지 하자[23], "얘가 못생겼나?"하고 굉장히 충격받았다는 듯하다. 단 한 번도 못생겼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 2020년 12월 31일 뜬금없이 루리웹 정치유머 게시판에 인증글을 남겼다. # 한 달 뒤 2021년 1월 30일에는 클리앙에도 인증글을 남겼다. 30일 글쓰기 제한 때문에 늦게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

6.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96 - 2000
정계 입문

2000 - 2003
합당[24]

2003
열린우리당 창당을 위한 탈당

2003 - 2007
창당

2007 - 2008
열린우리당 탈당후 입당

2008
합당[25]

2008 - 2011
당명 변경

2011 - 2013
합당[26]

2013 - 2014
당명 변경

2014 - 2015
합당[27]

2015 -
당명 변경

7.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대문 갑

33,259 (45.16%)
낙선 (2위)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38,795 (46.06%)'''
'''당선 (1위)'''
'''초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28,185 (43.49%)
낙선 (2위)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40,481 (54.36%)'''
'''당선 (1위)'''
'''재선'''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42,972 (54.88%)'''
'''3선'''
2020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47,980 (53.24%)'''
'''4선'''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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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둘러보기








''''''
[1] 서울 연희동교회 집사이다.[2] A B 당시 노무현은 20여명도 안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타운홀 미팅 처럼 얘기할 줄 알았는데, 50명이 넘게 와서 당황했다는 후문이 있다#.[3] 차남이다.[접속불가] 2021년 2월 10일 기준.[4] 세상의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면 222p [5] 마라톤 선수로 국가대표 수준이었다고 한다. 손기정 선수와 함께 뛰기도 했다. 세상의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면 97p [6] 촌놈 214p[7] 촌놈 216p[8] 열의걸음은 이한열 열사의 추모곡 제목이기도 하며, 30년이 지난 후 연세대학교 이한열학생위원회의 이름이 되기도 한다.[9] 일명 4.13호헌 조치[10] 당시 모든 정당은 당원이 지구당위원장을 선출할 권한이 없었다. 지구당위원장이 대의원을 뽑고 대의원이 지구당위원장을 선출하는 순환출자 구조였다. 하지만 김상현이 경선을 선언(!) 했던 것이다. 매우 개혁적인 결단이다. 그러나 김상현이 한보그룹으로부터 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재판중이었던걸 감안하면 개혁이 진심인지는 알 수 없다...[11] 자세한 것은 서대문구 갑 문서 참조[12] 조간신문을 내기 전에 대변인에게 해당 사안에 대한 발언을 요청하는데 이때 사안 숙지가 안 되어 있으면 대형사고가 발생하기 때문이다.[13] 사실 철새 도래지 드립은 그녀가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했을 때 정청래"당은 이익 따라 움직이는 철새 도래지가 아냐"라고 먼저 쳤다. 참고로 정청래는 20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했음에도 잔류 의지를 밝힌 바 있었고 21대 총선에서 국회에 복귀하면서 그의 선택은 긍정적으로 작용한 바 있다.[14] 예를 들어 서영교, 안민석 등이다.[15] 누가 좋아할 리가 없다...[16] 우상호는 1년후에 12월 2일 상정은 비박계의 찬성표를 확보하기엔 상당히 아슬아슬했음을 술회한다.[17] 당시 민주당 의석은 121석이고 탄핵을 위해서는 200석 정도가 필요했다.[18] 대표적인 경쟁자로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있지만 민주당내에서도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인물이고, 우상호의원은 친문,비문할꺼 없이 대체로 원만하게 지내고 있어 다른 후보들보다는 다소 가능성은 높다.[19] 하지만 박원순 시장이 불미스런 일로 목숨을 끊은 상황에서 룸 살롱에서 여성 접대부를 끼고 여성 정치인에게 폭언을 한 바 있는 우상호의 출마로 인해 역풍이 불 수도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20] 박영선이 친문인가에 대해선 이견이 있는 편이다.[21] 우상호와 달리, 남경필은 자택에 있을 때 안경 착용[22] 비슷한 관계로 부산 북구·강서구 갑전재수 VS 박민식 라이벌 구도가 있다. 여기선 4전 2승 2패로 동률이다.[23] 다만 못친소2는 못생긴 걸로 1등을 주는게 아니라 못생겼지만 매력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방식이다. 못생긴 걸로 1등 한 게 아니다. [24]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25] 민주당과 신설 합당[26]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27]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