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석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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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 박원순 시정 '''
15대
기동민

''' 16대
임종석 '''

17대
하승창

'''민주통합당 사무총장'''
2대
최규성

'''3대
임종석'''

4대
박선숙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성동구)'''
''선거구 통합''
이세기[14]
김학원[15]

'''제16대
임종석'''

''선거구 분리''
최재천[16]
'''임종석'''[17]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성동구 을)'''
''선거구 분리''
'''임종석'''[18]

'''제17대
임종석'''

제18대
김동성

'''대한민국 제35대 대통령비서실장
임종석
任鍾晳 | Lim Jong-Seok
'''
<colbgcolor=#082e59><colcolor=#fff> '''출생'''
1966년 4월 24일 (57세)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신기리[1]
'''신체'''
176cm, A형
'''본관'''
장흥 임씨[2]
'''거주'''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은평뉴타운 마고정아파트
'''학력'''
용문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무기재료공학 / 학사)
'''병역'''
면제(수형)
'''종교'''
천주교 (세례명: 프란치스코)
'''소속 정당'''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6''', '''17'''
'''가족 관계'''
아내 김소희, 딸 임동아[3]
'''현직'''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특별보좌관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이사장
'''약력'''
한양대학교 총학생회장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3기 의장
청년정보문화센터 소장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원
제16대 국회의원(서울 성동구)
열린우리당 원내대변인
제17대 국회의원(서울 성동구 을)
민주통합당 사무총장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이사장
제16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박원순 시정)
제3차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위원장
제35대 대통령비서실장(문재인 정부)
대통령비서실 외교특별보좌관 (UAE 특임)
'''별명'''
림종석[4]
'''SNS'''

1. 개요
2. 생애
2.1. 정치 입문
2.2.1.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위원장
2.3. 정계 은퇴, 그 이후
3. 약력
5. 소속 정당
6. 선거 이력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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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정치인.
전대협 학생 운동권 출신으로, 대한민국의 제16대 ~ 17대 국회의원을 지낸 바 있으며, 줄곧 민주당계 정당에서 활동해오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기간 동안에는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밑에서 정무부시장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19대 대선 당시 문재인 캠프에 후보 비서실장으로 합류했고, 뒤이어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문재인 대통령의 첫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
대통령비서실장에서 퇴임한뒤 바로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 남요원 전 문화비서관, 권혁기 전 춘추관장 등 문재인 정부 1기 참모진들과 함께 2019년 2월 18일,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했다.

2. 생애


1966년 4월 24일생으로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신기리가 고향이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서울용문고등학교(33회)를 졸업하였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특히 국회의원쯤 되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왔거나(예: 문재인, 이재명, 홍준표) 특정 분야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기고 정치에 뛰어들거나(예: 이회창, 이명박, 안철수) 언론인 등 정치와 관련 있는 일을 해온(예: 노웅래, 최문순, 민경욱)경우가 많지만, 임종석은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과거를 가지고 있다.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무기재료공학과 1학년 때, 노래패에 가담하면서부터 운동권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져 있고, 1988년 한양대 총학생회장이 되어 1989년 한총련의 전신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일명 전대협 3기 의장을 맡으면서 학생 운동권의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 당시 주도한 것이 바로 임수경의 불법방북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따른 경찰 수배에서 갖은 방법으로 도망치다가 결국 1989년 말 체포, 5년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김영삼 정부때인 1993년 특별사면되어 3년 반만에 석방되었다. 당시 임종석은 1년 가까이 수배를 따돌리며 도망쳤고, 전국에 10만 장의 수배 사진이 붙었으며, 임종석 담당 형사(청량리 경찰서 신중현)가 과로로 사망할 정도였다는 후문이 있다. 변장 등 생각치도 못한 방법으로 수배망을 따돌리던 임종석은 '임길동'이라 불렸다.
1990년 12월 26일 대법원에서 임수경의 밀입북을 몰래 도와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 판결을 받게되는데,# 유죄판결에 따른 실형으로 인해 공식적 병역사항은 미필이 되었다. 1993년 5월 원주교도소에서 출소한 이후 8월에 한양대 4학년에 복학하게 되고, 1995년 8월 대입 10년 만에 졸업을 하였는데 졸업식에서 총동문회장상과 공로상을 수여받기도 했다.

2.1. 정치 입문


1994년 말부터 비정부기구 쪽에서 활동하였다. 가까운 동료들과 만든 청년활동단체인 청년정보문화센터 부소장직을 맡았다.
1995년 모래시계 세대 정계진출 관련 기사들이 많이 나오던 때부터 정계진출 유력 후보로 자주 거론되었다. 그러나 1996년 총선에는 당시 자격이 되지 않아 출마하지 못했고, 이후 1999년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대규모 사면복권 당시 복권이 돼서야 출마 자격을 얻게 되었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한창 386 운동권 출신 영입이 활발할 때 새천년민주당에 입당, 서울 성동구 지역구에 출마하여[5] 당시 상대후보였던 4선의 이세기 한나라당 의원을 누르고 당선되면서 정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다만, 임종석 자신은 의외로 전대협 의장 출신이라는 화려한 경력 비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의원은 되지는 못하였는데, 이후 2004년 17대 총선에서도 당선되고, 열린우리당 대변인도 했다지만, 당내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거나 거물급 의원으로는 성장하지 못했다.
정계 입문 후 임종석의 의정활동은 국가보안법 폐지, 북한인권법 제정 반대, 대북 교류사업 등에 주로 초점이 맞춰진다. 초선 의원 시절인 2000년 7월 임종석은 국보법 관련 국회 토론회에 참석해 이 같은 발언을 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보완책으로 간첩죄에 대해 형법상 처벌을 강화하면서 대북 접촉, 통신교류에 대해선 남북교류협력법을 통해 규제하면 된다.” 또 2004년 7월에는 의원실 주최로 ‘국보법 폐지를 위한 간담회’를 열었고, 같은 해 8월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 국보법 폐지 입법추진위원모임에서는 “국가보안법은 위헌적이며 반(反)민주악법의 상징이기에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2004년 12월에는 국보법 연내 폐지를 촉구하는 의원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참여 정부 당시 대북송금 특검수사에도 적극 반대했는데, 대북송금 사건은 김대중 정권 때인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에 5억 달러를 불법송금한 사건을 말한다. 2003년 3월, 임종석 등 당시 민주당 소장파 의원이 주축이 된 모임인 ‘정치를 바꾸는 젊은 희망’은 대북송금 특검 수사 반대성명을 냈다. 같은 해 6월에는 민주당·개혁당(대표 유시민) 소속 의원 61명과 함께 대북송금 특검 수사 마무리를 촉구하는 성명서에도 이름을 올렸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뉴타운 열풍에 밀리면서 한나라당 김동성 후보에 밀려 낙선하게 되고, 이후 당내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재기를 노렸다. 그리고 민주통합당 출범 당시 당 사무총장에 임명되면서 처음으로 비중있는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 문제는 이 당시 임종석이 정치자금법 문제로 재판에 걸려 있었다는 점. 결국 19대 총선 직전 나온 1심 판결에서 유죄가 선고되면서 총선 출마가 좌절되었다. 사실 출마 자체는 할 수도 있었지만, 재판 문제로 인해 공격을 받을 것 같자 결국 포기한 것. 한명숙 당시 대표가 끝까지 만류했다고 하는데 결국 그는 사퇴를 선택하고 말았다. 여기에는 사무총장으로서 공천권과 관련하여 소위 노이사 공천(친노-이대-486 위주 공천)을 주도했다는 공세도 한몫 했다. 성동구 을 지역구는 그의 친구인 홍익표 교수에게 넘어갔고, 그는 사무총장직도 내놓게 되었다. 그의 사퇴 원인이 된 정치자금법 문제는 2심에서 무죄로 뒤집히면서 최종적으로 무죄 선고가 났다.
2014년 '(사)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해당 재단은 남측 방송을 대리하여 대한민국 내 북한 저작물 이용의 저작권료를 북한에 지불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6]
그리고 2014년 지방선거에서 박원순 시장 캠프에서 활약하면서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에 임명되어 2015년까지 재직하였고, 때문에 박원순계의 대표주자 정치인으로 분류되었다.
2014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중도를 지향해야 한다는 뜻이냐"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임종석은 당시 야당이던 새정치민주연합이 "노선이나 정책이 상당히 치우쳐있다"며 "과도하게 사회, 정치적 문제에 집착하고, 국가 운영과 관련된 의지에는 소홀하다"고 지적했다.*
이윽고 2016년 제20대 총선 출마를 위해 정무부시장 직을 내려놓은 후 은평구 을 지역출마를 선언하고, 정계의 거물이었던 이재오와 겨뤄서 정치적인 재기를 모색하였는데, 그만 당내 경선에서 무명의 신인이었지만 이미 은평구 내에서 기반을 착실하게 만들고 있었던 강병원 후보에게 패하면서 아예 출마 자체를 하지 못했다. 전대협 의장 출신으로 많은 기대를 받으며 정치에 입문했지만, 18대 총선부터 20대 총선까지 세 번의 선거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시면서 10년 넘게 원외에 남게 되었다. 임종석과 함께 국회의원 자리에 도전한 다른 박원순계 정치인들도 기동민을 제외하면 경선과 본선 과정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물 간 정치인으로 잊혀지는 줄 알았지만...

2.2. 문재인 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장


2017년 문재인 캠프의 비서실장으로 영입되었다. 임 실장은 19대 대선 국면 동안 안정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재인 당시 민주당 전 대표가 삼고초려 끝에 영입을 했다고 알려졌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대선 후보 경선 때 문재인 당시 후보를 상대로 극단적인 네거티브 공세를 퍼부었던 이유를 여기서 찾기도 한다. 다만 유시민 작가는 썰전에서 임종석을 박원순계로 분류하는 이 같은 시선에 대해서는 꼭 그런 식으로 분류할 수 있는 건 아니라면서 '편견이다'라고 비판했다.
이윽고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문재인 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 2017년 11월, 국회 국감장에서 당시 자유한국당전희경 의원과 충돌하게 되었는데, 전희경 의원은 "주사파 · 전대협이 청와대를 장악했다"면서 "전대협의 강령과 회칙을 보면 미국을 반대하고 모든 외세에 부당하다고 본다. 회칙을 보면 민족과 민중의 근거한 진보적 민주주의 구현을 밝히고 있다. 지금 청와대에 있는 전대협 인사들이 이런 사고에서 벗어났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고 임종석 실장을 비판하였는다. 이에 임종석은 실장 이에 대해 "전희경 의원님 말씀에 매우 모욕감을 느끼고, 아주 강력한 유감의 뜻을 표합니다. 제5, 제6공화국정치군인들광주를 짓밟고 민주주의를 유린할 때 전 의원님이 어떻게 살았는지 제가 살펴보진 않았습니다.[7] 그러나 지금 의원님께서 거론하신 대부분의 그 사람들이 인생을 걸고 삶을 걸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의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로 부끄럽게 살지 않았습니다."며 발끈했다.#
'비서실장 자리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고, 박근혜 정부 시절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왕실장'으로 군림하며 대통령 참모 그 이상의 과도한 권력을 행사한다는 이유로 '기춘대원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는데 임종석 또한 이를 반복하고 있다는 부정적 평가가 있다. 이는 아래에 있는 대통령비서실 권한 관련 문단 참조. 반면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함께 인수위 기간 없이 시작된 문재인 정부의 초기를 안정적으로 이끌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의 내각 구성을 끝나고 청와대가 본격적으로 활약하면서, 자연스럽게 청와대 비서실의 리더인 임 실장이 보폭이 커졌다. 그 덕에 청와대에 머물지 않고 대외적으로 다방면으로 활약하는 해결사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문재인 대통령의 오른팔로서, 추미애 여당 대표를 예방한 자리에서 장미꽃을 선물하며 당청 불화설을 일축하였고, 추경 통과를 위해 추미애 대표의 '머리 자르기 발언'에 대한 사과를 요구한 국민의당 박주선 비대위원장에게 대통령 대리인으로서 사과하면서 막힌 정국을 해결해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또한, UAE에 특사로 파견되어 양국의 외교적 갈등 봉합에 핵심 역할을 했다. UAE는 UAE 논란으로 야당과 언론에 뭇매를 맞고 있는데도 침묵을 지킨 임 실장을 보고 신뢰를 느꼈다고 한다. #
1년차가 되면서 제왕적 비서실 및 자기 정치로 비판을 받았으며, 음주운전, 음주폭행 등의 공직기강 해이가 청와대에서 일어나는데 비서들은 SNS에 집중하고 있다, 겉멋만 들었다는 지적이 여당에서도 나온다. 또한 통신사고가 일어났는데도 관심밖이 었다.#
이렇게 이번 정권의 실질적 2인자으로 활약하면서 민주당의 차기 대권 주자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차기 대권 주자로 부상하면서 야권에서 행적 하나하나를 비판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 한편 임 실장에 대한 여론은 긍정평가 48.9% VS 부정평가 38.7%로 드러났다. 긍정평가가 부정평가보다 높긴 하지만, 자기 정치 논란이 일면서 과거에 비해 지지율이 약 10%p 하락했다. 또한 매우 잘 한다, 매우 못한다 등으로 여론이 극과 극으로 갈리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기사
2019년 1월 청와대 인사 개편안을 발표하고 퇴임하였다. 후임 비서실장은 노영민 주중대사.

2.2.1.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위원장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확정된 뒤인 2018년 3월 9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4월 27일로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할 준비위원회를 꾸리라는 지시를 내렸고 임종석 비서실장이 위원장직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북정상회담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게끔 준비위원회가 구성된다고 발표되었고, 3월 16일 첫 전체회의를 개최했다.
남북정상회담 준비위는 중요 사항을 결정할 전체회의를 매주 또는 격주에 한 차례 열기로 했다. 준비위 전체회의와 별개로, 실무 논의는 위원장과 총괄간사, 3명의 분과장이 참석하는 분과장 회의에서 논의하며, 이 회의는 주 3∼4회 열기로 했다.
2018년 4월 28일, 서훈 국정원장과 함께 오전 남북정상회담장에 자리했다. 서 원장이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의 카운터 파트였다면, 임 실장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가장 곁에서 보좌한 김여정 제1부부장의 카운터 파트로 나선 것으로 보인다.
임 실장은 1달 동안 준비위원장을 맡으면서 회담의 밑그림을 그렸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동안 북측과 꾸준히 사전 의제 조율 작업을 벌여 한반도 비핵화를 뺀 나머지 의제들에 대해선 회담 전에 상당부분을 남북이 합의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러한 임 실장의 역할에 주목해 1989년 전대협 3기 의장을 맡아 임수경 전 의원의 방북을 주도하는 등 학생운동 시절부터 그가 거쳐온 인생역정을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최룡해와 함께 북한의 사실상 2인자로 평가 받고 있는 김여정 제1부부장과 호흡을 맞춘 것이 임 실장이 현재 문재인 정부에서 가지고 있는 위치를 보여준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2018년 9월, 임종석은 국회의장단과 외통위원장, 여야 5당 대표 등 총 9명을 제3차 정상회담에 초청했다. 그러나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은 "애초 불참의사를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회담 며칠 전 언론을 통해 일방적 재초청을 공표한건 정략적 행위"라고 주장하며 불참 의사를 밝혔다. 문희상 국회의장과 이주영, 주승용 국회부의장은 정기국회와 국제회의 등의 일정으로 불참한다고 했다.#

2.3. 정계 은퇴, 그 이후


21대 총선에서 종로 출마설이 1월 비서실장 퇴임 이후 수면 위로 계속 대두되면서, 점점 기정사실화가 되기도 했는데,# 6월에는 종로구 평창동에 전세를 얻었다. 다만 현역 지역구 의원인 정세균 전 의장과의 교통정리가 관건이었다.#
그러나 2019년 11월 17일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총선 불출마 및 정계 은퇴를 암시하며, 민간 부문에서 통일 운동을 해나갈 것이라고 발표하였다.[8]#
21대 총선 기간에는 고민정, 이수진 등 각 지역구 민주당 후보 지원 유세에 참여했다.
2020년 6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으로 김연철 통일부장관이 사의를 표한 이후, 차기 통일부장관으로 유력하다는 보도가 있었다. 우상호 의원과 이인영 전 원내대표도 차기 통일부장관으로 유력하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우 의원은 임종석이 적임자라고 평가했다.## #
2020년 7월 1일 기준, 서훈을 뒤이은 차기 국정원장으로 거론되었지만, 이틀 뒤 박지원 전 의원이 내정자로 밝혀지고 본인은 외교안보특보로 임명되었다. 북한은 7월 14일 대남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를 통해 이번 외교안보라인 교체와 관련, "이인영, 임종석 두 사람에게 거는 기대도 많다"고 반응했다. #

3. 약력



4. 논란 및 사건사고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2000 - 2003
창당
정계 입문

2003
열린우리당 창당을 위한 탈당

2003 - 2007
창당

2007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2007 - 2008
창당

2008
합당[9]

2008 - 2011
당명 변경

2011 - 2013
합당[10]

2013 - 2014
당명 변경

2014
합당[11]

2014 - 2015
공직 취임으로 인한 탈당

2015
복당

2015 - 2017
당명 변경

2017 - 2019
대통령 비서실장 임명

2019 -
복당

6.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동

'''68,481 (48.39%)'''
'''당선 (1위)'''
'''초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동 을

'''36,467 (49.61%)'''
'''재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26,718 (46.67%)
낙선 (2위)


7. 여담


  • 전국에 지명수배된 상황에서도 여장을 하는 등 신군부 정권의 추적을 교묘하게 따돌리면서, 당시 임길동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image]
추적을 피하기 위해 쓰인 수법 중에는 그와 비슷한 체구의 학생들이 클론처럼 돌아다니는 수법이 있었다고. 호감형 외모와 투사 이미지 그리고 신출귀몰한 행적, 전대협 의장이라는 신분 등으로 인해 당시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키며 여고생들이 주로 보는 하이틴 잡지에서 인기순위 1위를 차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 1996년에 결혼할때, 결혼식 기사가 경향신문에 나오기도 했다. 부인은 그가 교도소에 있을 때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알게 된 사이라 하며 슬하에 1녀를 두고 있다.
  • 한총련이 2003년 미군 훈련장 난입 사건 때 과격했다고 한총련을 깠다. 임종석은 위에서 봤듯이 임수경 방북 사건과 각종 사회 운동을 주도한 전대협 제3기 의장이었다. 한총련의 문제를 최소한 인식은 하고 있을 뿐 아니라, 80년대 전대협의 행보와 90년대 이후 한총련의 행보는 성향에 다소 차이가 있다 여겨진다.
  • 2005년에 디시인사이드에서 정사갤러들과 간담회를 가진 이후 '본인의 요청'으로 정치인으로는 최초로 임종석 갤러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2017년대의 디시 갤러리들은 우후죽순 마구 만들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만두 조공을 바치고 리플로 찬성 여론을 만들어도 겨우 될까 말까 한 갤러리 개설이 김유식과 임종석의 이해관계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 없이 손쉽게 그것도 정치인의 갤러리가 개설된 것에 대한 반발이 매우 심했다. 예를 들면 당시에 매우 인기있던 문근영, 이나영 등의 여배우들은 관련 팬덤들이 만두 조공도 바치고 각종 팬카페 및 디시 갤러리에서 이용자들의 동의 리플을 부탁하는 이른바 '화력 지원'을 거쳐 갤러리가 생기는 게 관례였는데 임종석은 이러한 과정도 없었고 정치적으로 딱히 거물급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갤러리 관리 또한 다른 곳과는 다르게 본인이 직접 했었는데 과도한 글 삭제와 필터링 때문에 말이 많았으며 나중엔 본인의 이름까지 금지어로 설정해 '금지어 갤러리'라고 조롱당하기도 했다. 관련이미지 이를 비꼬는 의미에서 "종석이 얼굴만 보면 고X가 커져요.", 영어로 줄여서 JGK :) 같은 뻘글성 꾸준글이 생기기도 하며 명맥을 잇기도 하였고, 후에 찌질열전을 통해 이런 일화들이 알려지게 되기도 했다.
  •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성덕선이 동생 성노을을 보호하려고 성노을의 여자친구와 여친의 친구들과 싸우다 파출소에 잡혀갔을 때 동생을 구하러 가는 장면에서 벽에 붙은 수배전단에 등장했다. 단순 소품이 아니라 작가가 일부러 옛날 자료를 구해서 재현하여 붙혔다고 한다. 지인의 제보로 임종석 본인도 찾아보고 크게 웃었는데 키를 170cm로 표기해서 섭섭하다고 트위터에 올렸고 이에 작가진은 옛날 자료라 인쇄상태가 나빠 176을 170으로 잘못 보고 적었다고 답글을 보냈다. #
  • 문 대통령이 초청하는 만찬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가 오면 국무총리가 가서 인사를 나누고 임 실장이 곁에서 지킨다고 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천명한 문재인 정부이지만 대통령이 귀빈 여러 사람들을 영접해야 하다보니 위안부 할머니를 세심히 챙길 수 없어서 대통령비서실장이 곁에 가서 무슨 말을 하는지 다 듣고 알려달라고 해서 이루어지게 됐다.
  • 정치성향 내지는 진영상 반대편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12] 배우 정준호와 친하다. 임종석이 2016년 2월 은평구 을에 예비후보로 출마했을 때, 정준호가 선거사무소로 찾아와서 응원해주는 장면이 찍혔다. 홍익표 의원 블로그에 의하면, 정준호와 임종석은 서로 형동생 하는 관계라고 하며, 정준호가 사무소에서 "임종석 후보가 꼭 국회에 들어가셔서 대한민국을 위해 더 큰일을 해주셔야 한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
  • 젊은 시절 모습이 트위치 스트리머 오킹과 상당히 닮았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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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참고로 그 무인시대에 나오는 고려 의종, 명종, 신종의 모후이자 인종의 왕후인 공예태후 임씨의 집안이다.[3] 시카고예술대학(SAIC)에 재학중이다. 사립예술학교로서 일년학비가 1억가량 든다고 알려져 있다. 참고로 임종석의 재산은 2019년 기준으로 6억 5천만원이다.[4] 해당 별명이 붙은 이유는 하위 문서 참조. 다만 맞춤법상으로는 틀린 표현이다. 任씨는 두음법칙 적용과 관계가 없어 항상 '임'으로 발음하기 때문. 북한처럼 두음법칙 적용을 받아 '림'씨가 되려면 林씨여야 한다. 북한에서도 림종석이 아닌 임종석이라고 부른다. #. 그런데 북한에서도 헷갈리는지 림종석으로 부른 사례가 있는 듯하다. # 반대로 림수경이라고 까이는 임수경은 林씨이기 때문에 제대로 읽으면 림수경이 맞다. 2007년에 대법원은 성이 사람의 혈통을 표시하는 고유명사로, 일상생활에서 본래 소리 나는 대로 사용해 온 사람에게까지 두음법칙을 강제해 기존에 쓰던 표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헌법상 기본권인 인격권 또는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판단해 예규를 개정했다.[5] 그의 모교인 한양대학교가 있는 지역이다. 임종석 외에도 지역구 출신이 아니지만 자신이 나온 대학교나 일했던 공장 소재지 지역구에서 당선된 의원이 있는데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 출신인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노동자 출신인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우 의원의 지역구인 서대문구 갑 지역에 연세대학교가, 홍 의원의 지역구인 부평구 을 지역에 한국GM 부평공장이 있다.[6] 그러나 북한은 국가간 저작권을 존중하는 베른 협약에 가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타 국가의 저작권물 이용에 관해서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고 있고,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형평성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7] 굳이 설명하자면, 전희경은 1975년생으로 당시 6월 민주항쟁 때 불과 12살이었던 반면 임종석은 6월 항쟁에서 운동권으로서 시위에 앞장선 대학생이었다.[8] 여담으로 같은 날 자유한국당의 3선 의원이었던 부산 금정의 김세연 또한 불출마를 선언하게 된다.[9] 민주당과 신설 합당[10]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11]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12] 정준호는 선거 때마다 자유한국당(및 그 전신) 소속으로 충남권에서 선거출마설이 나온다. 최근의 2018년 재보선에도 천안의 3곳 중 2곳이 재보선 대상이 되자, 천안 출마설이 있었다.[13]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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