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충(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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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관료이자 임종 직전까지 오로지 백제만을 생각했던 충신. 정충(淨忠)이라고도 하며 일본 등씨가전에서는 선중(善仲)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는 백제의 당시 최고 관직이었던 좌평이었던 것으로 나온다. 656년 봄 3월 의자왕이 정사는 멀리한 채 사치 및 향락에 빠지자 적극적으로 말렸으며 이에 의자왕이 분노해 끝내 투옥되면서 조정에서 의자왕에게 충언을 하는 자가 사라졌다.
28일 동안 단식했고 끝내 옥중에서 숨을 거두게 되는데 사망하기 직전 자신의 피로 의자왕에게 마지막 간언을 지어 올리게 된다.
당시 일본의 역사서 등씨가전(藤氏家傳)에서 등장한 평가를 보자면 '신라에는 김유신, 백제에는 성충, 고구려에는 연개소문, 당나라에는 위징과 더불어 당대의 준걸로서 이름을 만리에 진동시켰다'라는 언급이 있다. 계백 등 유명한 다른 장수를 넘어 성충이 백제 최고의 장수로 기억되었다는 것. 다만 장수로서의 활약은 별로 보여주지 못한 위징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장수로서가 아닌 정치가로서 유명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 비교적 묻혀서 그렇지 당대 네임드와 어깨를 견주는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성충은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夫餘氏)로 윤충이 그의 동생이라고 한다. 연개소문에게 편지를 보내 설득시켜 김춘추를 난처하게 하는 등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지만 이후 임자의 참소를 받아 의자왕에게 박대당해 뜻을 펴지 못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조선상고사에는 이 사건을 어느 서적에서 인용했는지 자세히 기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곧이 곧대로 믿을 수는 없는 것이 팩트다. 다만 신채호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사료들(그 시절 범람하던 가짜 사료 내지는 검증 안된 사료)을 보고 별 비판없이 출전도 제대로 안달고 인용한 것이 몇몇 곳에서 보이고 있어 그런 사료들에서 인용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기본적으로 신채호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을 각각 사대적이고 부정확하다며 불신하는 자세를 보인 인물이라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조선 말 청구영언에서 성충의 시조 2수가 나오지만 후대의 위작이라는 견해가 많다.
김동인은 성충에 대한 단편 소설인 좌평 성충을 저술했으며 현대에는 충청남도 부여군의 부소산에 있는 사당인 삼충사에서 흥수, 계백 등과 함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모셔지고 있다.
그가 막아야한다고 충언하였던 기벌포에서 신라가 당나라를 물리쳤다. 그의 작전이 맞았던 셈.
백제 최후에 활약한 신하이자 마지막 충신다운 모습을 보이고 사망했기에 당대를 그린 작품에는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
성충이 미디어에 최초로 등장한 때는 90년대 중반, KBS 사극인 삼국기에서였다. 김갑수가 지금보다 유명해지기 전, 신들린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여기서도 당대 귀족답게 칼을 잘 쓸줄 알면서도 백제의 지략가 역할을 잘 표현했고, 연개소문과 직접 만나 여제동맹을 성사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김유신이 준비한 미인계와 이간책에 당하며 감옥에서 숨을 거두는 것으로으로 묘사된다. 극 후반에 성충이 투옥된 것을 확인하고 군사를 몰고 오려는 계백(유동근)을 말리는 충신의 모습을 보였으며, 그가 옥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의자왕(길용우)이 무척 슬퍼하는 장면이 등장한다.[4]
사극 대왕의 꿈에서도 성충이 김춘추와 연개소문의 회담에서 등장했지만 이 사료에서 보여준 조목조목 단점을 지적해 연개소문이 신라와 결렬시키는 것은 안 나오고 먼저와서 동맹 이야기를 선수를 했지만 말빨이 뛰어난 김춘추에게 정면승부에선 밀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밝혀진 사실과도 많은 괴리가 있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선 드라마 삼국기와는 다른 모습.
드라마 계백에서는 전노민이 역할을 맡았으며, 극중 비중도 꽤 되는 편이다. 가잠성의 신라군에게 포로가 되어 있던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사택가문과 맞서는 의자왕 친위 그룹의 역할을 감당했으며, 주변 인물들간의 충돌을 잘 조율하는 진중한 성품으로 등장한다. 은고의 세작 혐의를 조사하던 중, 그녀가 반역을 도모했다는 것을 밝혀냈으나, 이를 의자왕에게 고하기 전에 살해당하며 퇴장한다. 첫 등장부터 퇴장까지 MBC 사극답게 실제 역사적 고증과는 거리가 멀다.
대체역사물 백제의 이름을 잇다에서는 역시나 무시당하고 사망하는 건 똑같으나 주인공이 신라 당과의 1차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2차 전쟁에서 그의 계책을 채택, 당 수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면서 죽어서나마 그 뜻을 이루게 되었다.[5]
1. 개요
백제의 관료이자 임종 직전까지 오로지 백제만을 생각했던 충신. 정충(淨忠)이라고도 하며 일본 등씨가전에서는 선중(善仲)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2. 생애
기록에는 백제의 당시 최고 관직이었던 좌평이었던 것으로 나온다. 656년 봄 3월 의자왕이 정사는 멀리한 채 사치 및 향락에 빠지자 적극적으로 말렸으며 이에 의자왕이 분노해 끝내 투옥되면서 조정에서 의자왕에게 충언을 하는 자가 사라졌다.
28일 동안 단식했고 끝내 옥중에서 숨을 거두게 되는데 사망하기 직전 자신의 피로 의자왕에게 마지막 간언을 지어 올리게 된다.
그러나 의자왕은 이조차 듣지 않았고 충신 흥수도 옥중에서 비슷한 간언을 했지만 이 또한 의자왕이 듣지 않아[3] 결국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험한 지형에서 방어하는 대신 벌판에서 막으려다 끝내 패배했고 의자왕은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후회스럽다고 탄식했다.'''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말씀 아뢰고 죽겠습니다. 신이 항상 형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는데 반드시 전쟁은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서는 반드시 지형을 잘 살펴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다른 나라 병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야만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일본의 역사서 등씨가전(藤氏家傳)에서 등장한 평가를 보자면 '신라에는 김유신, 백제에는 성충, 고구려에는 연개소문, 당나라에는 위징과 더불어 당대의 준걸로서 이름을 만리에 진동시켰다'라는 언급이 있다. 계백 등 유명한 다른 장수를 넘어 성충이 백제 최고의 장수로 기억되었다는 것. 다만 장수로서의 활약은 별로 보여주지 못한 위징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장수로서가 아닌 정치가로서 유명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 비교적 묻혀서 그렇지 당대 네임드와 어깨를 견주는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 기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성충은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夫餘氏)로 윤충이 그의 동생이라고 한다. 연개소문에게 편지를 보내 설득시켜 김춘추를 난처하게 하는 등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지만 이후 임자의 참소를 받아 의자왕에게 박대당해 뜻을 펴지 못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조선상고사에는 이 사건을 어느 서적에서 인용했는지 자세히 기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곧이 곧대로 믿을 수는 없는 것이 팩트다. 다만 신채호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사료들(그 시절 범람하던 가짜 사료 내지는 검증 안된 사료)을 보고 별 비판없이 출전도 제대로 안달고 인용한 것이 몇몇 곳에서 보이고 있어 그런 사료들에서 인용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기본적으로 신채호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을 각각 사대적이고 부정확하다며 불신하는 자세를 보인 인물이라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조선 말 청구영언에서 성충의 시조 2수가 나오지만 후대의 위작이라는 견해가 많다.
김동인은 성충에 대한 단편 소설인 좌평 성충을 저술했으며 현대에는 충청남도 부여군의 부소산에 있는 사당인 삼충사에서 흥수, 계백 등과 함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모셔지고 있다.
그가 막아야한다고 충언하였던 기벌포에서 신라가 당나라를 물리쳤다. 그의 작전이 맞았던 셈.
4. 미디어
백제 최후에 활약한 신하이자 마지막 충신다운 모습을 보이고 사망했기에 당대를 그린 작품에는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
성충이 미디어에 최초로 등장한 때는 90년대 중반, KBS 사극인 삼국기에서였다. 김갑수가 지금보다 유명해지기 전, 신들린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여기서도 당대 귀족답게 칼을 잘 쓸줄 알면서도 백제의 지략가 역할을 잘 표현했고, 연개소문과 직접 만나 여제동맹을 성사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김유신이 준비한 미인계와 이간책에 당하며 감옥에서 숨을 거두는 것으로으로 묘사된다. 극 후반에 성충이 투옥된 것을 확인하고 군사를 몰고 오려는 계백(유동근)을 말리는 충신의 모습을 보였으며, 그가 옥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의자왕(길용우)이 무척 슬퍼하는 장면이 등장한다.[4]
사극 대왕의 꿈에서도 성충이 김춘추와 연개소문의 회담에서 등장했지만 이 사료에서 보여준 조목조목 단점을 지적해 연개소문이 신라와 결렬시키는 것은 안 나오고 먼저와서 동맹 이야기를 선수를 했지만 말빨이 뛰어난 김춘추에게 정면승부에선 밀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밝혀진 사실과도 많은 괴리가 있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선 드라마 삼국기와는 다른 모습.
드라마 계백에서는 전노민이 역할을 맡았으며, 극중 비중도 꽤 되는 편이다. 가잠성의 신라군에게 포로가 되어 있던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사택가문과 맞서는 의자왕 친위 그룹의 역할을 감당했으며, 주변 인물들간의 충돌을 잘 조율하는 진중한 성품으로 등장한다. 은고의 세작 혐의를 조사하던 중, 그녀가 반역을 도모했다는 것을 밝혀냈으나, 이를 의자왕에게 고하기 전에 살해당하며 퇴장한다. 첫 등장부터 퇴장까지 MBC 사극답게 실제 역사적 고증과는 거리가 멀다.
대체역사물 백제의 이름을 잇다에서는 역시나 무시당하고 사망하는 건 똑같으나 주인공이 신라 당과의 1차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2차 전쟁에서 그의 계책을 채택, 당 수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면서 죽어서나마 그 뜻을 이루게 되었다.[5]
[1] 일본 등씨가전의 기록.[2]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는 백제 왕족과 같은 부여씨로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사료와 교차되지 않는 부분이라 불명. 다만 좌평에 오른 점을 볼 때, 왕족 혹은 대성팔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3] 완전히 무시했다기보다는 투옥되어 나라에 앙심을 품은 자의 의견이라 믿을 수 없다는 다른 대신들의 상소 때문에 결정을 내리는게 늦어져서 저렇게 되었다는 추측이 있다. 실제 사료에서 흥수가 간언을 하자 무시하기는커녕 성충과 똑같은 얘기 아니냐면서 빨리 저대로 해야하는 것 아니냐고 의자왕이 다급해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자기 나라에서 손꼽히는 브레인이자 충신 2명이 제시한 작전을 결국 못 써먹었다는 거다.[4] 의자왕 역의 길용우와 성충 역의 김갑수는 현재 같은 후너스엔터테인먼트 소속이다.[5] 언급을 보면 몇년 동안의 수위나 장마로 인한 변수까지 싹 다 고려한 철두철미한 방어 계획이었다. 권력 불안이라는 이유로 채택 안한 의자왕과 당시 왕당파들이 한심해 보일 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