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충

 


允忠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3.1. 삼국기
3.2. 계백
4. 기타


1. 개요


백제장군으로 대야성 전투 당시 김춘추의 사위이자 이찬인 김품석을 죽인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642년 백제 의자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40여 개 성을 뺏은 뒤에 신라의 서쪽 방어선을 낙동강까지 밀어버리기 위해 윤충을 보내서 대야성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642년 8월 윤충이 1만으로 대야성을 공격해왔는데 당시 대야성주 김품석의 휘하에 있었던 부하 장수 검일은 김품석에게 자신의 아내를 빼앗긴 일에 원한을 품고 있다가 모척 등과 더불어 윤충과 밀통하여 성 안의 창고에 불을 질러버렸다. 김품석은 막료인 아찬 서천을 시켜 윤충과 협상하게 했는데 죽이지 않는다면 성을 바치고 항복하겠다는 서천의 말에 윤충은 하늘의 태양을 두고 살려주겠다 맹세했다. 이 말을 믿은 김품석은 부장인 죽죽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성문을 열어 장졸 일부를 나가게 했으나 맹세는 거짓이었고 성을 나간 장졸들은 모두 백제의 복병에게 살해당했다. 절망한 김품석은 아내 김고타소와 자식들을 죽이고 자살했고 성 안에 남은 신라군은 죽죽과 용석을 중심으로 서둘러 다시 성문을 닫는데 성공하고 처절하게 저항했으나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역전시키지는 못했다. 윤충은 김품석 가족의 목을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보냈고 대야성에서 사로잡은 남녀 1천 명을 백제의 서쪽 주현으로 이주시켰으며 군사를 두어 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의자왕은 포상으로 윤충에게 말 20필과 곡물 1천 석을 하사했다. 대야성은 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에야 다시 신라의 손에 돌아왔고 그 전까지 계속 신라의 방어선이 경주에서 멀지 않은 압독주(오늘날 경상북도 경산시)로 후퇴하는 결과를 낳았다. 김품석과 김고타소의 시신은 5년 뒤 김유신이 사로잡은 백제 장수 8명과 교환되었다.
윤충은 대야성 점령이라는 백제 입장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는 더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지만 모두가 야사이기 때문에 신뢰하기는 어렵다. 첫째는 조선상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누명을 쓰고 죽었다는 설이다. 조선상고사에서 윤충의 성은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이고 의자왕의 대신이었던 좌평 성충의 아우라고 나온다. 조선상고사에서 윤충은 당나라의 월주를 경략해서 그 지역을 점령하는데 신라의 사주를 받은 간신의 모함으로 백제로 불려갔고 이후 당나라가 월주 지역을 다시 점령하자 이에 울화로 인해 죽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 내용은 근거가 되는 기록이 없고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다. 둘째는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 지방에서 내려오는 전설인데 672년에 신라군의 공격으로 가림성에서 왕자들과 저항하다가 전사했다는 것이다. 다만 672년은 이미 백제가 멸망하다 못해 부여풍백제부흥운동까지 진압된지 한참 후로 신라와 당나라 간의 나당전쟁이 진행 중이던 시기이다. 물론 이후에도 옛 백제 땅에 백제 장수들이 모여있는 집단이 또 존재하기는 했었는데 당나라의 괴뢰국이였던 웅진도독부다. 삼국사기 기록상 신라는 웅진도독부를 '백제'라고 불렀다. 이는 당나라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옛 백제 땅에 욕심을 보이는 것을 비판하기 위한 신라 측의 프레이밍이기는 하지만 웅진도독부가 백제 땅에 설치된만큼 실제로 백제 유민이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많이 포함돼 있기는 했다. 이를 따르자면 윤충이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살아남아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이 도독으로 있던 당나라의 괴뢰국인 웅진도독부에서 일하다가 나당전쟁이 터지자 당나라의 하수인으로서 신라와 싸웠다는 이야기가 된다.
양쪽 모두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윤충은 신라에서 계속 영웅으로 숭배되었던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딸을 죽이고 그 목을 잘라 바친 장본인이었다. 실제로 김춘추는 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서 기둥을 붙잡은 채 주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고 김법민은 20년간 골수에 사무친 원한을 곱씹으며 복수의 칼을 갈았다. 백제를 멸망시킨 후 신라군이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윤충과 밀통하여 대야성을 무너뜨렸던 검일과 모척 등을 붙잡아 찢어 죽이는거였다. 김법민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이 항복해오자 부여융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네 아비가 나의 누이를 죽여 20년 동안 내 가슴과 머리를 아프게 했다"고 할 정도였다. 배신자인 검일과 모척, 총 책임자인 의자왕을 제외하고 남은 원수는 바로 거짓 맹세로 김품석을 기만하고 그들 가족의 목을 잘라 바치기까지 한 윤충이다. 만약 신라와의 전쟁에서 윤충이 전사했거나 백제를 점령한 신라 측이 어떤 식으로 든 자신들의 의도대로 윤충을 제거하였다면 그에 대한 기록이 빠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실제로는 백제가 멸망하기 전 혹은 그 뒤에도 신라가 제거하기 전에 평범하게 자연사했을 가능성도 높다. 대야성 전투 당시 윤충의 나이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중요한 전투의 지휘관이라면 너무 어리지는 않다 쳐서 642년에 40세 정도의 중년 장수였다 해도 660년 백제 멸망 시기에는 58세, 672년에는 70세로 이 정도면 의학 발달이 미진한 고대 인물의 평균 수명은 한참 지난지 오래다. 다만 기록이 너무 부족한 관계로 누락되었을 가능성도 크니 실체는 오리무중이다.

3. 대중매체에서



3.1. 삼국기


1992년작 KBS 드라마 삼국기에서는 유명한 사극 전문 배우인 김주영이 열연했다. 여기서는 평소 배우의 드라마 속 이미지답게 괄괄한 무장으로 등장하며 성충(김갑수)의 동생으로 등장한다. 백제의 주요 무장 중 한 명으로 등장하는데 이 드라마는 오히려 의직보다는 윤충의 비중이 더 높고 계백과 친하다. 의자왕김유신미인계에 넘어가 폭군이 될 때 계백과 함께 실권을 잃는 것으로 나왔고 사비성이 함락될 때 김유신의 간자였던 조미압(윤문식)을 직접 처단한다. 이후 부하들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한 고위층들을 암살하는 등의 활약을 하는 것으로 나왔으며 최후에는 금마저(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에 시찰을 나온 태종 무열왕시해하고[1] 자신은 할복 자살[2]로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때 암살하던 이들에게 하던 대사가 나름 간지 폭풍. 김주영 배우의 연기는 이 때도 이미 충분히 빛났다.

(칼을 조용히 암살 대상의 목에 들이댄다)

대상자 : 누, 누구냐?!

윤충 : '''백제의 넋이오...!'''-


3.2. 계백


2011년작 MBC 드라마 계백에서는 배우 정성모가 맡았다.

4. 기타


2007년 4월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었다.
[1] 실제로 금마저 일대에 전해지는 설화이나 신빙성은 낮다.[2] 이 드라마에서는 당시 야마토 정권이 백제와 매우 친밀할 뿐더러 백제의 속국 비슷하게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할복이라는 문화를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문화 정도로 생각하면서 이 장면을 집어넣은 듯하며 실제로 배를 가르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지만 손동작 등의 모습으로 할복 자살임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