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직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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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총무처 장관'''
<color=#373a3c> '''제5공화국'''
제18대
박찬긍

'''제19대
박세직'''

제20대
정관용#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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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9월 18일~2009년 7월 27일 (향년 75세)
1. 소개
2. 군인 시절
3. 군 전역 이후
4. 선거이력
5. 기타


1. 소개


朴世直
대한민국군인 출신 정치인.
1933년 9월 18일, 경상북도 선산군(現 구미시)에서 태어났다. 종교개신교(침례회)다. 가족관계로는 아내 홍숙자 여사와 슬하 2남 1녀가 있다.
부산사범학교, 육군사관학교 제12기 출신이다. 박희도[1], 박준병[2]과 함께 하나회 회원이었다. 그리고 박희도, 박준병, 박세직 등을 가리켜 '''쓰리 박'''이라고 하였다.
외국어에 능통했으며, 영어를 비롯해 불어일어에 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2. 군인 시절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채명신 초대 파월사령관이 미군들과 파병 관련 한국 지원 및 작전 구역 설정, 그리고 지휘체계 설정 협상하는 과정을 지원하며 활약하였다. 이후 1976년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을 지냈고, 1979년 군사정보 참모를 지냈다. 하나회였음에도 12.12 군사반란 시점에 철원에 3사단장으로 나가있었고, 직후의 논공행상에서도 보직이동을 하지 않는 바람에[3] 박희도나 박준병과는 달리 12.125.17에 가담하지 않아 김영삼 정권 때 화를 겪지 않았다.
1980년 그 해 8월 전두환이 국군보안사령관에서 예편하여 대통령이 되고 제8대 수도경비사령관이던 노태우가 국군보안사령관이 되자 노태우의 뒤를 이어 제9대 수도경비사령관(현 수도방위사령관)을 지냈다. 이 때까지는 잘 나가는 듯 하였다.
그러나, 1981년 8월 '''박세직 사건'''으로 소장 계급으로 예편하였다. 겉으로는 박세직이 육군사관학교 동기의 사업을 도와 준다면서 비리를 저질렀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두환과 허화평, 허삼수 등 측근 세력이 '하나회 출신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권력을 넘보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본보기를 보여 주려고 박세직을 내쳤다는 썰이 있다. 이 사건은 1973년 일어난 윤필용 사건에서처럼 수도경비사령관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이 보안사령관인 상태에서 보안사령관이 동기생을 수사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당시 박세직은 박준병 국군보안사령관에 의해 조사를 받고 예편하였다. 후에 박준병은 조사 결과 박세직이 여기저기 “차기 대통령은 나”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밝혔다.

3. 군 전역 이후


그러나 곧 다시 전두환에게 중용되어 1982년 한국전력공사 부사장을 지냈다. 그러다가 1983년 국가안전기획부 제2차장에 임명되어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을 보좌하였다. 그러면서 노신영과 함께 그 해 5월에 일어난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을 해결하였다.
1985년 2월 노신영 내각이 출범하자 총무처(현 행정자치부) 장관 등을 지냈다. 1986년 제4대 체육부 장관으로 취임하고 '''제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장 겸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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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조직위원장으로서 환영사를 낭독하는 박세직. 왼쪽은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당시 IOC 위원장
1988년 12월 배명인의 뒤를 이어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으로 임명되어 1989년 7월까지 재임하였다. 1990년 서울특별시장으로 임명되었으나 1991년 2월에 사직하여, 2개월의 단명시장에 그쳤다. 이것도 1991년 일어난 한보그룹수서비리 사건과 관련하여 여러 모로 루머가 많았는데, 한보그룹이 당시 대통령인 노태우에 150억을 들여가며 로비했던것에 대항해 원리원칙으로 저항한 전임시장 고건이 잘리고 그 자리에 바로 들어와서 일사천리로 강남 분양건에 대하여 사인했기에 세간에 심증은 굉장히 많았으나, 특별히 언론을 통해 어째서 무주택자 배급용 택지를 특별분양으로 시장에 다 풀어버리게 사인했는지[4] 외부에 노출된 건이 없어서 문제가 불거지지는 않았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후부터, 민주정의당 내에서는 대권주자로 발돋움 할 뻔 했으나 조직을 모으는데 서툴렀기 때문에 3당 합당 이후에는 더이상 정치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1992년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전국구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6년 신한국당 공천후보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구미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자유민주연합 박재홍 후보를 꺾고 재선되었다.
그러다가 김대중 정권이 출범하자 국회정치를 떠나기 위해 1998년 4월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여 부총재가 되었다. 이후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월드컵조직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2006년 재향군인회 회장이 되었다. 재향군인회 회장으로 있던 중 2009년, 급성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4.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구미)

'''59,098(72.89%)'''
'''당선 (1위)'''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구미 갑)

'''30,415(45.47%)'''
'''당선 (1위)'''


5. 기타


본의 아니게 2017년 10월 10일, 다시 큰 관심을 끌게 되었는데, 박세직의 손녀와 수영선수 박태환의 교제 사실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려졌기 때문. 축하한다는 반응도 많지만, 교제 상대의 조부가 하나회 출신 주요 인사라는 것이 주목받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한기호아내 최미란이 박세직의 조카딸이다. 고로 한기호는 박세직의 조카사위다.

[1] 1979년 12월 12.12 군사반란 당시 제1공수여단장이었으며, 1985년 12월부터 1988년 6월까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였다.[2] 1979년 12월 12.12 군사반란 당시 제20기계화보병사단장이었으며, 이후 국군보안사령관과 국회의원(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자유민주연합 소속)을 지냈다.[3] 이와 반대로 전두환의 하나회 동기인 정호용은 대구에서 50사단장으로 복무중이라 반란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12.12 직후 특전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강경 진압에 앞장섰다.[4] 이후에 고건을 자르고 박세직을 꽂은게 당시 노태우 청와대가 범인으로 지목되면서 거의 확실시 되었다. 한참 늦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