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기 신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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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 신도시 위치와 교통망 계획도(1989년).
노랗게 칠해진 곳이 1기 신도시 부지이며, 교통망의 경우는 자세히 보면 현재와는 약간 다른 계획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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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 신도시 개발 당시의 신문기사. 매일경제신문 부동산 특집.
1. 개요
2. 상세
3. 문제점
4. 비수도권
5. 둘러보기


1. 개요


제6공화국 노태우 정부 시절, 주택 부족 해결을 위해 '''주택 200만 호 건설'''[1]이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주택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 그 일환으로 지은 신도시이다.
1기 5대 신도시에 건설된 물량은 약 30만 호였다(분당 97,500호, 일산 69,000호, 중동·평촌·산본 각 42,500호). 나머지 170만여 호는 인천 연수, 대전 둔산 등의 지방 거점 신도시 및 전국 각지의 택지지구 사업들을 통해 물량을 채웠다.
1기 신도시를 기폭제로 대한민국에서 본격적으로 아파트 위주의 주거 환경이 정착했다. 반대로 단독주택은 인기를 잃고 서서히 슬럼화되기 시작했다.

2. 상세


1기 신도시 계획 자체는 노태우의 선거 공약 가운데 하나에서 출발했다. 처음에 관계자(김보근 전 건설부 주택국장)가 선거 공약을 내놓을 때에는 '150만호 건설'이었지만 노태우 후보측에서는 150만호는 애매하다고 보고 관계자와 상의도 없이 200만호로 제멋대로 바꾸어 놓았다.[2] 하지만 당시에는 5년만에 한국 건설업게 능력상 아파트 200만호를 건설하는 것이 무리라는 지적이 많았고, 처음에 1기 신도시 계획을 내놓았던 관계자도, 심지어 당시 후보로 나선 노태우도 처음에는 아파트 200만호 건설을 단순히 선거용 구호로 여겼던 듯 하다.
그러나 때마침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시중자금이 부동산으로 대거 몰리면서 집값이 급속히 오르기 시작하더니, 올림픽이 끝난 이후로도 투기가 횡행하여 집값과 전월세비가 폭등하면서 엄청난 사회 문제가 되어버렸다. 거기에 5공 청문회로 5공 당시의 충격적인 일들이 속속 드러나며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노태우 정부의 지지율은 급속히 하락했다. 이 때문에 물가 안정과 정권 유지를 위해서라도 대규모 주택건설 사업은 필수불가결한 과제가 되었고 1989년 초에 중동, 평촌, 산본에 주택단지를 대거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오히려 근교 지역 땅값이 급속히 오르는 결과를 낳자 1989년 4월 27일에 분당과 일산을 추가적인 신도시로 지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주택건설 사업은 그야말로 속전속결로 진행되어 1989년 46만호, 1990년에는 75만호가 준공되었고 1991년 8월에 신도시 건설이 완료되면서 계획이 조기 달성되었다. 뭐 그 만큼 졸속으로 진행되었기도 했다는 말도 되지만, 어쨌든 1기 신도시 건설 자체는 노태우가 애착을 가지면서 진행했던 사업이었다고 한다.
서울 시내의 강남, 목동, 상계동 등 대단위 주거단지 개발 이후, 서울 외곽 근교의 허허벌판 농촌을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도배한다는 계획이 실현된 셈이다. 논이나 밭을 매입하여 개발하면 비용도 절감되고 도시 조성에 별다른 제약이 없으므로 최적의 조건이다. 또한 기존 주택지를 밀고 개발해야 하는 뉴타운이나 재개발보다 공사 기간도 짧은 편이다.
또한 서울 시가지의 연담화와 서울 편입 요구를 억제하기 위해 서울에서 충분히 이격된 지역에 건설되었다는 특징도 있다.[3] 따라서 1기 신도시 계획 당시에 이들 지역의 서울 편입은 하나도 고려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또한 이들 지역의 서울 통화권(지역번호 02) 편입도 처음에는 살짝 고려되다가 국번 번경에 따른 혼동, 서울통화권 편입에 따른 기술적 비용 문제, 타 근교 지역[4]과의 형평성, 타 경기도 지역의 서울 전화 연쇄 편입 요구 우려 등 여러 문제 때문에 일찌감치 포기하고 서울 통화권 편입 절대 불가 방침으로 선회하였다.
분당신도시(성남시), 일산신도시(고양시), 중동신도시(부천시), 평촌신도시(안양시), 산본신도시(군포시)의 이른바 '''5대 신도시'''가 대표적이다. 이 중 분당과 일산은 기존 시가지와는 완전히 분리된 광활한 허허벌판에 조성된 진정한 의미의 신도시이며, 중동, 평촌, 산본은 기존 시가지의 미개발지를 활용하여 신·구도시의 연계를 꾀했다. 또한 분당과 일산은 광활한 대지에 조성된 만큼 아파트 배치가 널찍하고 녹지도 충분히 확보하였으며 계획 인구밀도를 낮게 잡은 데 비해, 중동, 평촌, 산본은 기존 시가지의 미개발지에 조성되어 좁은 구역에 많은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아파트 배치가 빽빽하고 계획 인구밀도를 높게 잡았다. 때문에 분당이나 일산에서 거주하던 사람이 중동, 평촌, 산본으로 이사가게 되면 답답함을 느끼는 반면, 그 반대의 경우라면 쾌적함을 느낄 수 있다.
서울특별시목동, 상계동 같은 경우는 이들보다 앞서(1980년대) 개발되었기 때문에 (공식용어는 아니지만 편의상) '''0기 신도시'''라 부른다. 또한 앞의 5개 신도시 인근의 택지지구 또는 동시기에 개발된 전국 각지의 택지지구[5]는 엄밀히 말하면 국가 주도의 신도시가 아니지만, 편의상 신도시라 부르기도 한다. 특히 고양시 덕양구의 화정, 행신동은 토지이용계획에 따르면 산본보다 더 넓은 면적에 1단지부터 24단지까지 연담하여 체계적으로 개발한 곳이다. 언론에서도 화정신도시, 행신신도시라는 표현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1기 신도시 계획 때 같이 들어간 대규모 택지지구 개발계획이 또 있는데, 인천광역시 연수지구대전광역시 둔산이 있다.
여하튼 건설 당시에 투기 자금이 대거 1기 신도시 예정지역으로 몰려들면서 부동산값이 폭등한 건 여전했지만, 1991년부터 1기 신도시 공급 물량이 풀리기 시작하자 그 해를 기점으로 부동산 가격도 떨어지기 시작했고, 주택 보급률도 1990년에는 63%였지만 1기 신도시 개발이 끝나는 1997년에는 82%로 높아졌다. 토지공개념 3법, 부동산 거래 실명제 등의 정책과 겹쳐 투기수요가 진정되면서 1990년대 집값 안정에 기여했다.
그러나 1기 신도시의 후광을 따라 조성된 인근 중소규모 택지지구들이 상권 및 교통을 고려하지 않고 아파트 짓는 데만 도시설계를 집중해서 난개발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낳기도 했다. 특히 분당신도시의 영향을 받은 용인시난개발이 너무나도 심각하여 영동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의 만성정체를 만들기도 했고 분당선이 개통된 지 10년이 지나서야 분당차량기지 부근의 보정역이 신설되기도 했다.
다만 중동의 경우에는 경인고속도로, 경인로, 경인선 등 주요 간선 교통망이 이미 갖추어져 있어 교통 인프라 문제가 조금이나마 해결이 되었지만[6], 덕분에 이들 도로나 철도는 상습정체, 용량포화 상태에 이르고 있다. 안그래도 1970~80년대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으면서 서울-인천간 교통량은 폭발적인 수준이었는데 그 중간에 대규모 신도시까지 들어섰으니...
분당이나 산본을 제외하면 상업, 업무지구의 조성이 매우 늦었는데[7], 특히 중동의 경우 위브더스테이트, 리첸시아 중동 등의 주상복합 아파트가 2000~2010년대에 들어서야 완공되며 완성을 보았고[8], 일산은 중앙로 이남 지역이 2000년대에 들어서야 개발이 본격화되었고(라페스타웨스턴돔을 중심으로 하는 장항동 상권이 확립된 것도 이 시기)[9] , 특히 고양종합터미널일산 와이시티 구역이 '''거의 끝까지'''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그나마 고양종합터미널은 완공되었다.), 평촌은 터미널 부지가 미개발중. 산본도 능안공원에 위치한 병원 부지가 미개발중이다.
5대 신도시의 교통대책으로 수도권 전철이 증설되었다.
분당신도시의 경우 분당선이 1차 개통 당시 서울 외곽인 수서역까지만 다녔다가 2차 개통[10]을 앞두고 강남에서 치맛바람을 받아(...) 너무 많이 역을 만들어서[11] 접근시간이 느려지는 폐단을 낳고 말았다. 결국 바로 옆에 2기 신도시판교신도시의 개발과 함께 분당선의 대체·보완 수단으로 신분당선이 계획된 것.
일산신도시의 경우 경의선을 전철화하지 않고 3호선을 연장(일산선)했는데, 3호선이 여러 가지 이유로 중간에 굴곡이 많아져서[12] 도심 접근성이 떨어졌고, 덕분에 자유로가 혼잡해진 것은 물론 경의선과 비슷하게 달리는 버스가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경의선이 통근열차였고, 광역버스도 명성운수 1xxx번 시리즈만 있던 시절에는 경의선도 터지고 버스도 터졌었고, 지금은 경의선이 증차되고 M버스를 위시한 광역버스 노선도 많이 확충되어 혼잡함에 있어서는 좀 낫다. [13]
따라서 분당과 일산은 전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이러한 이유로 인해, 광역버스 노선이 다른 신도시들에 비해 극도로 발달하게 되었다. 반면 아래의 중동·평촌·산본은 전철이 비교적 제 역할을 다하고 있으며, 서울 도심이나 강남권으로 가는 광역버스 노선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일단 부천(중동), 안양권(평촌, 산본)은 전통적으로 철도 강세 지역이었으며, 기존 시가지가 이미 발달되어 있어 구도로를 통한 서울시내 진입이 가능하지만 교차로와 신호, 교통량이 이미 많아 빠르지 않다. 특히, 평촌과 산본의 경우 기존 국도가 서울 서남권과 사당쪽과 연결되어 있으나 교통체증이 심한 편이고, 봉담과천로를 이용하여 서초(우면산터널), 양재동 쪽으로의 접근은 용이하긴 하다. 중동의 경우 경인고속도로와 경인로는 이미 상습정체도로였고, 길주로와 봉오대로가 새로 개설되긴 했지만 서울 도심이나 강남권으로 직접 연계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분당과 일산은 (개발 당시) 서울과의 사이에 기존 시가지가 거의 없었고, 서울과의 직결 도로망(분당은 기존 경부고속도로뿐만 아니라 분당내곡간도시고속화도로, 분당수서간도시고속화도로 등을 새로 건설. 일산은 자유로, 중앙로 등을 새로 건설)을 신도시 건설 과정에서 함께 대대적으로 확보했기 때문에 도로교통을 통한 서울 진입이 상대적으로 용이하게 되었다.
분당, 일산이 철도보다 광역버스 노선이 극도로 발달하게 된 데에는 분당선, 일산선의 굴곡 및 빈약한 서울 도심 접근성뿐만 아니라, 이렇듯 신도시의 입지 자체 및 비교적 잘 닦인 도로망도 한 몫 했다.
중동신도시의 경우 경인선을 복복선으로 증설하여 급행열차를 운행하게 되었다. 다른 신도시들과는 달리 신도시 중앙을 관통하는 노선이 없었으나[14], 2012년 10월 7호선부평구청역까지 연장 개통되어 신도시 중앙을 관통하게 되었다.
평촌신도시의 경우 4호선과 직결되는 과천선을 건설하였으며, 산본신도시는 개발 직전 개통된 안산선산본역 하나를 추가하여 그대로 활용했다.[15] 과천선과 안산선은 4호선과 직결이 되기 때문에 그대로 강북 도심으로도 갈 수 있고, 사당역에서 서울 지하철 2호선으로 환승하여 강남으로도 갈 수 있다. 최근(2018년 예정)에는 평촌신도시 동쪽을 따라 인덕원수원선이 예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 때 신설된 광역철도들은 대피선 등을 설치해서 급행을 돌릴 생각도 하지 않은 듯하고 일본의 어느 사철처럼 가감속능력을 향상시켜서 표정속도를 높일생각도 하지를 않았으니... 때문에 경의선 전철화[16], 신분당선[17], GTX 등의 중복 투자가 이루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경기도 주요 신도시의 집값은 서울의 웬만한 동네를 뺨칠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으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로 거품이 빠졌고, 수도권 부동산 트랜드도 경기도 신도시에서 인서울, 서울접경지역(구성남, 광명, 하남 등)으로 바뀌면서 분당, 평촌 같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예전같은 아성을 누리고 있진 못하다. 과거 부동산 규제에서 '버블세븐'에 포함되었던 용인시가 현재의 부동산 규제(6.19 부동산 대책 등)에서 제외된 것이 대표적인 예.

3. 문제점


신도시 자체는 교통망, 자족기능[18], 공공 기반시설 및 녹지(공원) 배치 등에 신경을 쓰는 등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개발되었지만, 그 근처에 중소규모 택지지구들을 난개발 식으로 조성하면서 교통 인프라 및 자족성을 키우지 않아 수많은 문제점을 양산했다.
2020년 기준으로 1991년부터 입주가 시작되어 현재 30년 가까이 된 아파트 단지들[19]도 있으며 대체로 연식이 25년을 넘긴 아파트들이 95%[20]이다. 그로 인해 낮지 않은 용적률의 대다수 1기 신도시의 재건축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분당신도시, 평촌신도시의 경우, 일부 단지에 한해 리모델링[21], 수직증축이 고려 중이지만 나머지 신도시들은 이마저도 경제성을 이유로 논의조차 되고 있지 않다. 그러한 이유들로 1기 신도시의 노후화를 우려하는 시선들이 많다.
가장 큰 문제는 1기 신도시 사업 등 노태우 정부 당시 이른바 "주택 200만호 건설사업"으로 지어진 아파트 가운데 상당수가 '''부실공사''', '''날림공사'''로 떡칠되어 있었으며, '''한창 건축 중에도 부실공사로 지적받는 실정이었다. ''' 수백만호에 달하는 아파트를 대규모로 지을려하다보니 당연히 자재 수요가 넘쳐났기 때문에 콘크리트와 모래, 유리값, 도배비용이 급속히 올랐고, 서울올림픽에 따른 인프라 건설의 여파가 있었던지라 인력난도 발생해서 일단 지을 수 있으면 짓는 식의 부실건축이 판을 쳤던 것이었다. 당장 분당신도시 아파트를 지을 때 강 모래가 부족하다고 바다 모래를 퍼다 쓰면서 '''제대로 된 세척을 하지 않고''' 지어서 염도가 기준치를 초과[22]한 부식 아파트들이 '''대거 준공승인'''을 받았고, 이외에도 상당수 아파트들이 아무 콘크리트나 사용하는 등의 문제점이 발생했다. 심지어 아파트 벽을 뜯어보니 온갖 건설자재 쓰레기가 가득하거나 또는 내부와 외부 벽 사이가 텅 비어있는 경우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아파트들은 20년을 넘어가면서 '''썩다리'''로 불리며 정말 내부에서부터 아파트가 썩어가는 모습을 24/7로 볼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제일 늦게 지어진 1995~96년 완공된 아파트들조차 지하주차장 같은 곳으로 들어가면 가관도 아닌 경우가 많다.
그래서 1기 신도시 아파트들은 사실 리모델링 '''따위'''가 아니라 '''전면적인 재건축'''을 통해 2000년대 이후의 새 건축기준에 맞는 새로운 아파트를 짓는 것이 옳으나, 어려운 실정이다.
2010년대 후반에 와서는 아파트의 노후화와 함께 거주민들의 노령화[23] 도 대두되기 시작하고 있다. 조선일보 부동산(땅집고) 191128 기사

4. 비수도권


비수도권의 거점 대도시에서도 이에 맞추어 동 시기에 국가 주도로 대규모 신도시를 조성하였는데, 이들 역시 노태우 정권의 주택 200만호 건설 계획에 따라 건설된 곳으로 1기 신도시로 분류하기도 한다.[24] 대표적으로 대전의 둔산, 인천의 연수, 광주의 하남, 대구의 수성(시지, 범물),칠곡, 부산의 해운대구 등이 있다. 특히 둔산의 경우 다른 1기 지방 신도시와 달리 규모부터가 5만여호에 20만명 수용하는 수도권 1기 신도시 규모로 건설되었으며 정부대전청사, 대전광역시청을 비롯한 각종 중앙 행정 기관과 지방 행정 기관, 기업들이 이전하여, 단순한 베드타운 역할이 아닌 행정도시와 대전의 핵심도심 역할을 하고 있다. 신도시의 목적과 성과를 성공적으로 달성한 몇 안되는 케이스이다.
이러한 광역시뿐만 아니라 비광역시 지역에도 신도시가 동시대에 상당한 규모로 조성되었는데 경남 창원시 상남동, 전북 전주시 서신동, 효자동, 충북 청주시 용암동, 가경동, 전남 순천시 조례동, 연향동, 충남 계룡시가 동시대에 조성되었다. 물론 전체적 풍경도 1기 신도시와 비슷하다.

5. 둘러보기





[1] 참고로 이전의 제5공화국 전두환 정부는 무려 '''500만 호''' 프로젝트를 기획했으나(그 일환으로 목동, 상계동 등이 건설되었다), 수치가 수치인 만큼 완벽히 실현되진 못했고, 176만 호를 건설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또한 노태우의 대선 공약이었던 본 '200만 호' 역시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실현 불가능한 수치'라는 반론이 제기된 바 있다. 뭣보다 5공 때의 500만 호 프로젝트가 사실상 88올림픽 유치용 홍보이였음이 드러난지 한참이거니와, 그마저도 목동은 서민들을 위한 아파트라 홍보해놓고 실상은 강남아파트급 프리미엄으로 지어버리며, 투기꾼들과 담합까지 하는 짓을 저지르며, 서민들의 뒷통수를 쳤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2] 당시 노태우가 "'100만' 아니면 '200만'이어야지, '150만'이란 숫자는 어중간해 보인다", "'공약은 '그렇게 꼭 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등의 말을 하며 200만 호를 강행했다고 한다.[3] 반대로 돌려서 말하자면, 서울 시가지와의 연담화 및 서울 편입을 고려하여 1기 신도시를 계획했더라면 그 입지는 지금의 고양 향동지구, 하남 미사강변도시, 위례신도시, 광명 소하지구, 남양주 별내신도시나 지금의 3기 신도시 위치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4] 특히 분당에 비해서 서울과 더 가까운 구성남과, 일산에 비해서 서울과 더 가까운 고양 원당 읍내.[5] 서울특별시의 중계·가양·수서지구 등, 용인시수지구, 부천시상동, 고양시의 탄현·중산·화정·행신, 수원시의 영통·매탄 등.[6] 중동신도시 건설 시기와 맞물려 경인고속도로는 왕복 8차로로 확장되고, 경인선은 복복선으로 증설되어 급행열차를 도입하게 되었다.[7] 애초에 산본은 1기 신도시들 중 상업·업무지구의 비중이 가장 낮았다. 때문에 '신도시'라기보다는 주거 위주의 택지지구 성격이 더 강하다.[8] 1기 신도시들 중 상업·업무지구의 비중이 3번째로 높았다. 그 이유는 중동신도시 항목 참조. 최고로 높은 곳은 분당 40%, 두번째는 일산 33%, 중동은 30%였다. 분당은 아예 벤처기업들까지 몰려들었으니...[9] 일산신도시는 1996년 12월에 완공되었는데, 당시 1994년에 개장한 이마트 일산점하고 1996년 4월에 개장한 뉴코아백화점이 일산 상권의 전부였다. 나머지는 그냥 황무지였다고. 그 후 1999년 11월 롯데백화점, 2003년 라페스타, 2005년 KINTEX, 2007년 웨스턴돔이 들어서게 된다.[10] 애당초 분당선은 선릉'''따위'''로 가는 계획이 아니었다. 일산선처럼 계획이 마구잡이로 바뀌었는데, 초창기 분당선 계획은 현재 서울 지하철 8호선 노선대로 따라가다 모란역부터 현재 분당선 선형이었다. 즉, 잠실 ~ 수서 ~ 구성남 ~ 분당이었던 것. 잠실 이북은 왕십리역이 아니라 성수역을 거쳐서 청량리역까지 연장하는 것이었다.[11] 철도 동호인 사이에서는 강남리 3역이라 부른다.[12] 애초에 구파발, 연신내 일대로 돌아서 가는데다가, 원당 주민들이 원당역 설치를 주장해 소요시간이 더 늘어나게 되었다. 당초 계획은 원당역 따위는 없고 바로 삼송역까지 직통하는 노선이었다.[13] 현재 양쪽 다 최대 혼잡도 150% 정도... 2000년대 시절까지만 해도 버스나 통근열차나 최대 혼잡도 200%를 찍었다고 한다. 버스같은 경우에는 사람들을 문앞 계단까지 그득그득 쌓고 갔다나 뭐라나... 통근열차는 그렇게까진 혼잡하지 않았고, CDC 디젤동차라는 물건이 원래는 지방 농어촌지역같은 데서 쓰라고 있는 물건이라 입석을 별로 고려하지 않아서(객차 중앙부를 빼교는 2*2배열 크로스시트다!! 애초에 동차형 통일호였으니...) 정원 자체가 적게 표기되어 있어서 그렇고, 200% 혼잡도로 정원을 2배 초과해서 우겨넣어도 수도권 전철 전동차의 200% 수준으로 빡빡하진 않았다.[14] 계획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당시 3기 지하철 계획의 하나였던 11호선을 신정동에서 중동~상동~부평으로 연장하는 방안도 검토되었고, 인천 지하철 3호선을 (현재의 서울 지하철 7호선 연장선과 동일한 구간으로) 온수역까지 연장하자는 방안도 있었다. 그러나 IMF로 전부 백지화되었다.[15] 이후 수리산역도 하나 더 추가되었다.[16] 물론 신도시 개발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했어야 할 과업이었다.[17] 물론 신분당선은 2기 신도시인 판교신도시, 광교신도시 및 난개발로 교통이 혼잡한 용인시 수지구를 커버하기 위한 목적도 있으며, 수원시의 또다른 택지지구인 수원 호매실지구의 교통을 보조하려는 목적도 있다.[18] 물론 자족기능은 거의 실현되지 못하고 대부분 베드타운 역할로 전락하였다. 그나마 몇몇 기업의 본사가 들어간 분당신도시, 문화방송 등의 방송국이 위치한 일산신도시(SBS 탄현제작소와 MBC 드림센터가 이 곳에 위치한다. MBC 예능국은 일산 드림센터에 있다가 2014년 9월 상암동 신사옥 완공과 함께 이전.), 주변에 공단이 있는 평촌신도시(신도시가 조성되기 전에 먼저 조성되었다.) 정도가 자족기능을 어느 정도 실현하긴 했다.[19] 분당 시범단지의 경우 한양, 삼성, 한신아파트는 1991년 9월, 현대아파트는 1992년 6월에 입주했다. 일산신도시의 경우 시범단지 격인 백송마을 5단지가 1992년 8월, 강촌마을 3단지가 1992년 10월에 입주했다.[20] 1기 신도시에서 제일 늦게 입주한 아파트들이 대부분 1996년에 입주했는데, 2021년 현재 26년차가 되었다.[21] 포스코건설과 쌍용건설은 1994년에 입주한 분당 한솔마을 5단지 리모델링을 수주했다.[22] 바닷모래로 아파트를 지을 때는 적어도 5번은 세척해야 염분이 충분히 제거된다. 1999년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발표한 '해사 사용시 염화물이 콘크리트 내구성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기준치 이상의 염분이 포함된 콘크리트를 사용한 경우 10년이 지나면 내부 철근이 녹슬기 시작한다고 한다. #[23] 사업 종료시기인 1995~96년 당시 30대 중후반의 젊은 가장은 2020년 현재 60대가 되었다.[24] 건설 방식이나 생활환경이 수도권 5대 신도시와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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