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와 기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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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78대 총리. '''55년 체제의 마지막 총리이다.'''
2. 활동
도쿄에서 태어났다. 본적지는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1] 아버지는 야마가타 기선에서 근무하고 있었지만, 정계 진출을 꿈꾸면서 고향에 텃밭을 다져놓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42년 대장성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누마즈 세무서장을 거쳐서 전쟁이 끝났을때는 대장성 본청에서 전쟁보험 업무를 담당했다.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내각에서 오히라 마사요시와 함께 츠시마 주이치 대장대신의 비서를 지냈고 1949년에는 이케다 하야토 대장대신 밑에서 비서관으로 있으면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준비 교섭을 맡았다.
그런데 이케다가 1952년, "중소기업은 망하는게 낫다"(...)라는 실언 때문에 파문을 일으켜 대신직을 사임하자 미야자와도 따라서 대장성을 사직했다. 미야자와 본인은 이르다고 생각했지만 이케다가 적극 정계진출을 권함에 따라 본적이 있는 히로시마 현 선거구에 출마해 정계에 입문했다.[2]
이케다 내각에서 경제기획청 장관으로 입각해 경제성장 플랜의 구성에 참여했고, TV 토론회에 자민당 대표로 자주 얼굴을 내밀어 자민당의 떠오르는 신진 정치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후 통상산업대신, 외무대신, 자민당 총무회장등의 요직을 두루 거친다.
자민당에서는 이케다의 직계로서 이케다의 파벌을 물려받아 일찍부터 총리 후보로 꼽혔다. 다나카 가쿠에이가 사임한 후 후임 총리로 하마평이 떴고 오히라 마사요시 사후에도 후보에 올랐지만 다나카와 사이가 썩 좋지 않은 탓에 대신 자파의 2인자였던 스즈키 젠코에게 양보해야 했다. 대신 스즈키 젠코는 미야자와에게 관방장관직을 맡겼다. 이때 아베 신타로, 다케시타 노보루와 함께 자민당내의 뉴리더로 불리며 세 사람의 동맹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 대까지 유지되었다.
코우치카이(宏池会) 내에서 미야자와를 밀어내려는 다나카 로쿠스케와 소위 '''"1.6 전쟁"'''[3] 이라는 후계전쟁을 치루기도 했다. 그러나 다나카 로쿠스케가 당뇨병이 악화되 사망하게 되면서 미야자와가 코우치카이의 새 회장이 되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울며 겨자먹기로 서방국가들과 플라자 합의를 하면서 엔화의 가치가 치솟는 엔고현상이 일어났고 이는 일본 경제, 특히 수출에 악영향을 미쳤다. 나카소네의 경제정책을 비판해오던 미야자와에게 나카소네는 '''"그럼 당신이 해보셈"''' 하면서 재무장관 취임을 요청했고 미야자와는 재무장관으로 취임해 엔고잡기에 나섰다. 하지만 미국과의 빈번한 협의와 전폭적인 시장개입에도 불구하고 엔고는 멈출줄을 몰랐다.
이런 가운데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총리에서 물러나자 뉴리더들간의 동맹이 깨지면서 아베 신타로, 타케시타 노보루와 총리직을 놓고 승부를 벌였다. 그러나 나카소네가 껄끄러운 미야자와 대신 타케시타의 손을 들어주어 미야자와의 총리 꿈은 다시 멀어졌다(...).
타케시타 노보루 총리하에서는 부총리겸 재정부 장관으로 취임해 재정건전화 차원에서 소비세 도입을 추진했지만 리크루트 사건이 터지면서 미공개주식의 양도문제로 인한 비리혐의로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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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가이후 토시키가 물러나면서 마침내 소원하던 총리 취임을 이루게 되었다. 무려 71세의 나이였다. 자민당내 주요파벌인 코우치카이의 영수이자 재무전문가이면서 국제통이기도 했기 때문에 미야자와 내각에 대한 기대는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타케시타 노보루가 배후에서 실권을 행사하는 탓에 미야자와가 맘대로 할수 있는건 별로 없었다.
총리 재임시 자위대의 유엔평화유지군 참가를 공식적으로 추진했다. 이는 평화헌법의 적용을 놓고 논란을 일으켰고, 하필이면 파견된 자위대 병사가 죽었는데 미야자와는 '''"이는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발언해서 어그로를 끌었다.(...)
그의 임기는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되는 차였다. 경제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잃어버린 10년을 막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긴 했다. 당시 거품경제가 붕괴할 조짐을 보이면서 일본은 주가나 부동산 가격이 급락하기 시작했는데, 미야자와는 이런 현상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공적자금을 투입해 불량채권을 조기에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의 정계는 물론이고 재계 및 금융계까지 공적자금 투입을 반대해서 결국 미야자와도 공적자금 투입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일본에서는 공적자금 투입이 하나의 금기가 되어서 '''부실채권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도 손놓고 그걸 바라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각에서는 이때 재빨리 공적자금을 투입해 불량채권을 정리했다면 버블 붕괴에 따른 잃어버린 10년의 충격이 덜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결국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못 막게 생긴 것.
또한 리쿠르트 사건으로 인해 정치개혁을 추진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타케시타의 입김때문에 스스로 포기해버려서 결국 1993년 내각 불신임안에 제출되었고 자민당은 분열해 내각이 총사퇴하고 의회가 해산되었다.
사실 꼭 1년 전에도 미야자와의 총리직은 위태위태했다. 당시 위에서 언급된 자위대 유엔 평화유지군 참가와 사가와 규빈 사건이 겹쳐지면서 지지율이 폭락하는 바람에 총리자리를 내줄 위기에 처했지만, 당시 제1야당이었던 사회당이 1989년 참의원 선거 정국과 달리 여당 비판 표를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는데다가 PKO법을 둘러싸고 사회당과 공명-민사당이 잡음을 이르키면서 전선이 흐려지는 바람에 투표율이 크게[4] 저조해지면서 승리를 거둔 것. 그렇게 간신히 총리직을 지킨 상황이었지만, 행운의 여신은 이번에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이어 열린 1993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가이후 도시키의 신생당과 하토야마 유키오의 신당 사키가케, 일본신당등이 약진하면서 자민당은 과반이 붕괴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결국 대패하면서 야당 연립내각의 호소카와 모리히로에게 총리자리를 내주게 된다. 재미있게도 이때 미야자와가 자민당 제15대 총재였던 고로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인 15대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연결되어 "자민당의 도쿠가와 요시노부"로 불렸다(...).
이후 무라야마 토미이치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입각한 자민당 총재 고노 요헤이가 주미대사직을 제안했으나 거절했고 오부치 게이조 총리 취임 후 오부치 총리에 의해서 대장대신직을 제안받았다. 당초 미야자와는 거절했지만 오부치의 강력한 요청에 대장대신직을 수락해서 경제회복에 노력을 기울였다. 모리 요시로 내각에서도 대장대신을 유임했다.
이 당시 미야자와의 경제회복 정책은 대량의 감세와 그것을 메꿀 국채발행이 핵심이었다. 이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때 결실을 보아 잃어버린 10년을 잠시나마 극복하게 되는 요인이 되긴 했지만... 이 때 재정 건전화 대신 대량의 국채남발이 관행화 되어서 일본 경제를 위기로 모는 주범이 돼버렸다(...) 물론 도호쿠 대지진 이후 밝혀진 바로는 국채의 95%가 국내에서 사들여졌다고 할정도로 일본의 저축율이 엄청나게 높다고는 하지만... 현재 일본의 높은 국가부채가 바로 이 사람의 작품이라 그의 다소 친동아시아(한국.중국)적인 성향과 더불어 현재 일본에선 미친듯이 까이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미야자와에게 정계은퇴를 권했고 미야자와는 결국 재선을 포기하고 정계에서 물러갔다. 정계에서 물러난 뒤에는 2002 한일 월드컵 유치에 참여하기도 했고, 경제 부분에서 조언도 하다가 2007년 87세를 일기로 도쿄도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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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 전경.
3. 여담
대미관계를 중시하는 미국통이었다. 헌데 일본을 국빈 방문한 아버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겐 만찬 중 구토 세례를 받기도 했다.
영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다만 미야자와는 영어를 따로 배운게 아니라 독학으로 사전을 씹어먹으면서 공부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영어와 관련된 일화로는 어느날 국회에서 영자신문을 읽고 있는데 한 후배 국회의원이 "일본 국회의원이면 일본 신문이나 좀 읽으시죠"라고 말했는데, 미야자와가 "국회의원이면 영자 신문 정도는 읽어야지"라고 응수해서 되려 그 의원이 깨달음을 얻고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는 말도 있다.
대장대신 등 경제 분야에선 전문가로서 꽤 명성을 떨쳤지만 정치력에서는 그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기도 한다.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는 미야자와 기이치에 대해 "그는 일류 비서관은 되겠지만, 일류 정치인은 못 된다"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일본 극우 세력이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선 시종일관 반대했다.# 즉, 일본 자위대가 해외에서 무력을 쓸 수 있도록 하여 사실상 군국주의 부활을 도모하려는 움직임에 맞선 것. 자민당 출신치고는 꽤나 온건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를 시인하고 사과한 고노 담화가 그의 시대에 나온 것도 그런 성향과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나카소네 야스히로에 이은 두번째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5] 를 한 것도 1992년 11월 그의 재임 시절 일이라는 것은 아이러니.
크레용 신짱 연재 초기(단행본 3권)에 아빠 노하라 히로시가 읽는 신문에 '''미야자와 총리와 요다는 친척 사이''' 라는 기사가 나온다.(...)
마지막 제국대학 출신 총리이다. 정확히 말하면 '제국'을 지우고 신제 대학으로 개편하기 전 졸업한 총리로는 마지막이다. 신제 도쿄대학 출신 후배들 중 총리를 지낸 인물은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현재까지 유일하다.
여배우 미야자와 엠마의 외조부다.
[1] 지역구도 후쿠야마시를 관할하는 히로시마현 제7구였다.[2] 정계에 처음 입문했을 때는 참의원의원이었고,참의원으로 재선까지 지낸 직후에, 중의원의원으로 옮겼다.(1953년~1965년까지는 참의원으로 있었고, 1967년~2003년까지 중의원으로 있었다.) [3] 미야자와 기이치의 喜一에서 1, 다나카 로쿠스케의 六助에서 6이라서 1.6 전쟁이라 불렸다.[4] 1992년 참의원 선거에서 50.7%의 투표율이 나왔다. 참고로 1989년 참의원 선거 투표율은 65.8%[5] 다만 신사에 합사된 '일본 유족회'의 공약 관련 압력에 따른, 미리 알리지 않은 참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