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톤월 항쟁
영어: Stonewall riots, Stonewall uprising, Stonewall rebellion
1. 개요
1969년 6월 28일 새벽 1시 20분, 뉴욕의 그리니치 빌 크리스토퍼 가에 위치한 스톤월 인(Stonewall Inn)이라는 술집을 경찰이 '주류 판매허가증 없이 술을 판다는' 명목으로 단속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성소수자 인권 운동의 양상은 크게 바뀌었으며, 성소수자들은 이를 기념하기 위한 프라이드 퍼레이드를 1970년부터 매년 6월에 열고 있다. 더 자세한 것은 위키백과 스톤월 항쟁 항목에서 볼 수 있으니 자세히 알아보려면 거기를 참고하자. 다만 번역체가 심한 부분도 있으니 위키백과 영문판 버전도 같이 참고하길 바란다.
2. 항쟁 그 이전
관련 항목에서 보다시피, 성소수자들의 대표적인 상징 중의 하나인 핑크 트라이앵글은 원래 1930년대 이후 성해방 운동이 실패하고 암흑기에 들어섰을 때 나치 독일이 성소수자들을 집단 수용소에 가둘 때 사용한 낙인에서 유래했다. 나치는 1928년 “남자 간 또는 여자 간의 사랑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우리의 적이다”라고 단언하고, 성해방 운동의 성과로 만들어진 성과학연구소를 파괴하였으며 모든 자료를 불태웠다. 그리고 수만 명에 달하는 성소수자들을 집단학살과 의학실험의 대상으로 삼았다.[1]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에서도 전쟁 전 상태로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여러 노력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하필이면 '''매카시즘'''이었다. 매카시즘의 창시자 조셉 매카시는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 그밖에 미국인으로 간주되지 않은 사람들은 미국의 안정을 해칠 위험 인물이다"라는 주장을 했는데, 매카시가 언급한 '미국인으로 간주되지 않은 사람들' 중에는 성 소수자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당시 매카시즘 신봉자들 曰, "성도착자들은 대부분 감정이 불안정하고 윤리의식이 부족해 간첩의 회유나 협박에 넘어가기 쉽다".
당시 전쟁 전의 질서의 회복을 당연하게 여기던 사람들로 인해 공직사회에서 공산당원이나 아나키스트 등을 색출하기 시작했고 “동성애자는 공산주의자만큼 위험하다”라는 말이 퍼져나갈 정도로 그 피해는 성소수자들에게도 급격히 확산되었다. 1952년에는 동성애가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에 '반사회성 성격장애와 품행장애'로 등재되었고, 1955년까지 8천명 이상이 위험인물이라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그 중 600명 이상이 성도착자[2] 라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또 동성애자 치료를 목적으로 한 치료법들이 다양하게 소개된 시기이기도 한데, 최면술, 전기 충격 요법, 구토제, 수술 등이 있었고 레즈비언같은 경우에는 호르몬 투여나 음핵절제술을 받아야 했다.
그렇지만 그 당시의 살벌한 인권 수준 속에서도, 억압이 거세지면서 이에 대항하는 운동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공산당원이었던 해리 헤이(Harry Hay)라는 사람이 공산당이 동성애를 “불건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만들어진 불건전한 생활방식”으로 간주한 상황에서 사람들을 모아 메타친 소사이어티(Mattachine Society)를 설립하였고 함정수사로 인해 희생양이 된 동성애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동성애자들을 교정하여 윤리적으로 올바른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게끔 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스톤월 인 창문에 "우리 동성애자들은 우리 마을 거리에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행동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길 바란다"라고 썼을 정도다. 메타친 소사이어티가 등장한 시기와 비슷하게 빌리티스의 딸들(Daughters of Bilitis)[3] 이라는 조직도 등장하였는데, 이념에선 큰 차이가 없었다. 그들이 펴낸 잡지 <래더>(Ladder)는 회원들에게 ‘사회에 대한 반항심을 키우지 말 것’과 ‘표면적인 준수’를 내보일 것을 주장했다. 이런 한계로 인해 몇년이 지나도 단체가 크게 성장할 수 없었다. 심지어 단체 대표급인 해리 헤이가 반미활동에 관한 청문회에 끌려갔을 때는 그 자신이 설립한 조직에서 추방당하기도 했다.
1960년대 들어서며 메타친 소사이어티와 DOB와 다른 새로운 ‘호모필 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워싱턴 D.C.에 설립된 메타친의 설립자인 프랭크 카메니의 활동이 주목할 만한데,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직장이었던 Army Map Service에서 해고되어 복직을 위해 투쟁했는데, 동성애자는 이성애자와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했고 메타친 소사이어티 회원들과도 논쟁을 하기도 했다. 당시 공민권 운동의 영향을 받은 그는 1965년 백악관같은 정부기관 앞에서의 피켓 시위를 조직했다. 당시 보수적이었던 대부분의 게이 커뮤니티는 그에 놀라워 했고, 메타친 소사이어티와 DOB 측은 굉장히 당황했다. 사회에 대한 반항심은 키우지 말고 단지 올바른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는 게 목표였던 그들의 눈엔 카메니의 행동은 굉장히 위험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미국정신의학회가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지정해놓았는데, 이 회의장에 들어가 정신과 치료가 게이와 레즈비언들의 삶에 끼치는 피해에 대해 토론했다.
당시에는 벽장 속에 갇혀 있던 게이와 레즈비언들이 공민권 운동, 여성운동,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이 당하는 억압을 참을 수 없게 된 급진적인 새로운 세대가 갓 형성되었다. ‘검은 것이 아름답다’나 ‘블랙 파워’와 같은 구호들을 급진적 운동의 용어로 만든 블랙파워의 영향을 받은 1968년 호모필 운동은 ‘동성애자는 아름답다’와 ‘게이 파워’를 자신들의 구호로 채택할 정도였다.
1966년 샌프란시스코 텐더로 지역의 한 카페테리아(Compton's Cafeteria)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일리노이 주를 제외한 1960년대 미국에서 동성애는 여전히 불법이었고 뉴욕의 경우 자신의 성에 맞는 의상 품목을 3가지 이하로 착용한 사람들을 체포하기도 했다. 카페매니저는 카페 손님 가운데 트랜스젠더, 트랜스베스타이트, 드랙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자 경찰을 불렀고, 카페로 온 경찰은 그 중 한 명을 체포하려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들은 유리창을 깨고 신문판매점을 불태웠고, 그로 인해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다음 날 더 많은 사람들이 카페테리아 앞으로 모였고, 피켓시위를 벌였다. 이 항쟁은 스톤월 항쟁과 함께 성소수자 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후에 '진 컴튼스 카페테리아 항쟁(Gene Compton's Cafeteria riot)'으로 이름이 알려진 이 사건은 특히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트랜스젠더 운동의 시작으로 기록되어 있다.
3. 우리는 극복하리라
뉴욕 주에서는 '''공공시설에서 동성애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행위를 법적으로 금지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뉴욕에서 성소수자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이 마피아가 주류 판매허가증 없이 운영하는 술집 '스톤월 인' 정도였다. 스톤월 인은 당시 게이 커뮤니티에서조차 버림받은 트랜스젠더, 10대 가출청소년, 드랙퀸 등의 손님들이 주를 이루는 열악한 게이바였다. 바 두 개와 주크박스가 있었고 드랙퀸들, 집 없는 게이들, 상대를 찾는 남자들이 뒤섞인 무리 속에 레즈비언들이 간간히 눈에 띄는 어두운 장소였다고 한다. 불법적으로 운영되던 곳이라 시설이 열악해서, 흐르는 물이 없어 사용한 잔을 고여 있는 물통에 대충 헹군 후(!) 다시 잔을 채우고 또 다른 손님에게 내어졌다. 손님들 사이에 간염이 돈 적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니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 곳이었겠는가.[4]
하지만 그나마도 경찰이 급습하는 일이 잦아서, 경찰들이 예고 없이 들이닥칠 때 늘 하얀 경고등이 켜졌고, 바에 있던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춤을 추거나 서로 몸을 더듬던 행동을 멈춰야 했다. 경찰이 들이닥치면 그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손님과 종업원 몇 명이 체포된 뒤 상황이 종료되는게 일상이었다고 한다. 그랬기에 1969년 6월 28일 새벽 1시 20분에 있었던 단속 역시 늘 있었던 일처럼 지나갈 수도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한 레즈비언이 경찰의 단속에 맞서 격렬히 저항했고, 그 주변에 있던 성소수자들이 이에 자극을 받아 경찰의 단속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한 트랜스여성이 자신이 신고 있던 하이힐을 벗어 던진 것을 시작으로[5] , 동전과 술병, 보도블록 파편 등을 경찰들에게 던지면서 성소수자들이 강력하게 맞서는 등 사태가 다소 심화되자 결국 경찰들은 그 수를 늘려 성소수자들의 저항에 맞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짓눌려있던 성소수자들의 저항을 막기에는 무장한 정예부대도 역부족이었고, 경찰과 성소수자들 간의 사태는 새벽 4시가 넘어서 진정되었다.
7월 3일까지 지속된 이 항쟁에는 수천 명의 인파가 참여했는데, 누군가는 하이힐을 신고 행진을 했으며, 누군가는 경찰차를 파괴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시위대 중에는 이성애자도 있었는데, 이를 통해 스톤월 항쟁이 단순히 성소수자들만의 저항이 아닌 당시 정부의 묵인 하에 행해진 억압 그 자체에 대한 반란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리고 스톤월 항쟁 이후 경찰, 그리고 사회의 차별과 멸시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성소수자들 사이에는 '''과거와 다른 기류가 흐르게 된다.'''
4. 이후
스톤월 항쟁 이전에는 성소수자가 차별을 당해도 숨어서 각자 설움을 삭였지만 이때부터는 당당히 나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기존 단체의 소극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끼던 성소수자들은 스톤월 항쟁을 계기로 GLF(Gay Liberation Front), GAA(Gay Activists Alliance) 등의 단체를 결성해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투쟁의 결과로 1973년, 미국정신의학회의 DSM에서 동성애가 삭제된다.
2019년 6월에는 스톤월 항쟁 50주년을 맞아 NYPD에서 성소수자 커뮤니티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다.
5. 기타
스톤월 인은 항쟁 이후 문을 닫았다가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폐업했다. 그 후 원래 스톤월 인 자리에는 다른 여러 업장들이 들어왔다가, 2007년 스톤월 항쟁을 기념하며 다시금 주점이 문을 열었다. 물론 지금은 합법적인 업장이므로 60년대처럼 위생 상태 개차반으로 굴러가는 곳이 아니고, 대신 중대한 성소수자 증오범죄 사건이 터지면 앞에 추모 물결과 꽂다발이 장사진을 이루는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성지'''가 되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 의해 2016년 6월 24일, 미국의 국가기념물로 지정되었다.스톤월 국가 기념관 2015년의 동성결혼 합헌 판결 이후에는 경찰들이 성소수자들을 잡아가던 바로 그 곳, 스톤월 인에서 이젠 종종 동성 결혼식의 피로연이 열리곤 한다니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작은 증거가 될 수 있겠다.
6. 각종 미디어에서
2015년에는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 "스톤월"이 이 사건을 주제로 제작되고 개봉했는데, 실제 항쟁을 이끌었던 흑인, 히스패닉 등의 유색인종과 트랜스젠더들에게 주목하지 않고 가공의 백인 시스젠더 게이 남성을 중심으로 사건이 다뤄진 것에 대해 상당한 논란이 일었다. 할리우드 영화 특유의 표백질이 이런 영화에까지 나타난 것에 대해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실망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결국 쫄딱 망해 사라졌다. 평도 극악이라 로튼 토마토에선 겨우 9% 점수를 받았다.
모바일 게임 심시티 빌드잇에서는 2019년 6월, 스톤월 시위 50주년을 맞아 당시 술집 이름을 딴 스톤월 인 이라는 랜드마크를 지급하는 이벤트를 벌였다.
7. 출처
8. 관련 문서
[1] 그래서 현재까지도 성소수자들은 나치즘에 희생된 성소수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또 반전(反戰)의 대표적인 구호로서 핑크 트라이앵글을 사용하고 있다. 80년대 후반에 등장한 대표적인 에이즈 운동단체 액트업(ACT-UP)은 '침묵은 곧 죽음(SILENCE = DEATH)'이라는 구호와 함께 저항의 의미를 담은 분홍색 정삼각형을 사용하고 있다.[2] 현재는 '성도착자'라는 말을 페도필리아 등 이상성욕을 느끼는 자로 쓰이지만, 당시에는 '성소수자'를 '성도착자'라고 불렀다. 즉 현재는 이런 뜻으로 '성도착자'라는 말을 쓰면 호모포비아 취급받으니까 쓰지 마라. '성적 끌림을 어떤 젠더에게 느끼는가'에 대한 개념을 성적 취향에서 성적 지향으로 고쳐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3] 2011년 8월 7일 방영된 KBS 드라마 스페셜에서 '클럽 빌리티스의 딸들'이라는 제목의 단막극이 여기서 이름을 따온 거다.[4] 영화감독 비토 루소 왈, “너무 어리고, 너무 가난하고, 또는 너무 심해서 다른 어떤 곳에도 들어갈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한 술집이었다.”[5] 이때 처음 하이힐을 벗어 던진 사람이 누구냐로 논쟁이 있는데, 흔히 흑인 트랜스여성이자 게이해방전선 창립 멤버로 활동한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인 마샤 P. 존슨(Marsha P. Johnson)이 그 주인공으로 추정되지만 그녀 본인이 부정하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기도 해서 정확히는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존슨과 같은 유색인종 드랙퀸 및 트랜스젠더 운동가들이 왕성한 활동을 펼친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마샤 P. 존슨은 스톤월 항쟁의 상징적인 인물로 손꼽히고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