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군

 


  • 5.18 민주화 운동 이외의 일반적인 뜻: 민병대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암흑시대의 기본 보병: 검병

1. 개요
2. 설립
3. 전개
4. 지휘관
5. 무장
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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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5.18 민주화운동 당시 반란군의 헌정질서 파괴와 이로 인한 저항권 발동으로 인해 광주광역시에서 조직된 무장 항쟁세력이다. 사실 원래부터 이렇게 지어진 이름이 아니라 광주 시민들이 부른 애칭에서 유래된 것이다.

2.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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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에 있던 반란군의 도청[1] 앞 집단발포로 인해 분노한 광주 시민들이 저항권을 발동하면서 조직되었다. 이 말인즉 5월 21일 오전까지만 해도 시민'''군'''이라는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고 '''시위대'''만 있었다는 얘기이다.
아무튼 무장면에서 총기를 구하기 어려웠던지라 부득이 광주시내의 경찰서, 파출소, 광주세무서와 아세아자동차 등 공공기관과 기업체의 직장인 예비군 동대에 있던 총기와 실탄, 대한석탄공사 화순 광업소에 있던 다이너마이트들을[2] 탈취해 무장을 했고 경찰서에 있던 시위진압복방석모로 방어구를 갖췄다.

3. 전개


5.18 민주화운동/전개 문서 참고.

4. 지휘관


  • 위원장 김종배(항쟁당시 26세) - 업무총괄
  • 내무담당 부위원장 허규정(항쟁당시 26세) - 도청 내부문제, 대민, 장례업무
  • 외무담당 부위원장 정상용(항쟁당시 30세) - 계엄사와의 협상업무
  • 대변인 윤상원(항쟁당시 29세) - 기자회견 및 지도부 공식 발표업무
  • 상황실장 박남선(항쟁당시 26세) - 시민군 조직 등 군사업무
- 기동타격대장 윤석루(항쟁당시 24세)[3]
- 기동타격대 부대장 이재호(항쟁당시 33세)
  • 기획실장 김영철(항쟁 당시 32세) - 제반 업무 및 기획
-기획위원 이양현(항쟁당시 30세)
-기획위원 윤강옥(항쟁당시 29세)
  • 홍보부장 박효선(항쟁당시 26세) - 궐기대회 및 제반 홍보업무
  • 민원실장 정해직(항쟁당시 29세) - 제반 대민, 장례업무
  • 조사부장 김준봉(항쟁당시 21세) - 치안업무(치안질서 위배 조사)
  • 보급부장 구성주(항쟁당시 25세) -식량 조달및 식사업무

5. 무장


시민군의 소화기의 경우 대부분은 M1 카빈 / M2 카빈과 반자동 소총인 M1 개런드로 무장했지만 일부의 경우 자동화기로 M1918 BAR이나 M16A1도 운용했고 기관총으로는 LMG의 경우 M1919, M60을 HMG의 경우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을 운용했다. 이외에도 M1911 권총 등의 무기도 사용되기도 했다.
기갑차량의 경우 KM900 장갑차를 제외하면 없다보니 주로 군용 차량이나 현대 포니 등의 민수용 차를 사용했다. KM900 장갑차의 경우 시민군이 4대를 탈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게 가능했던 원인으로 광주에 아시아자동차 공장이 있었고 차륜형 장갑차인 KM900의 조종이 화물차 운전과 비슷하기 때문에 가능했다.[4] 물론 차량의 경우 시위에도 큰 도움이 된만큼 차량은 총기와 함께 주요관리 대상이였다. 그래서 주로 수송용으로 사용됐으며, 일부 차량 중에서는 특수기동대의 경우 철판을 덧댄 테크니컬도 있었다.

6. 평가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유일하게 무장 저항권을 행사한 단체이자 그이후 모든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체이다. 그들의 무장상태는 반란군에 비해서는 빈약했지만 고대부터 중앙집권이였던 대한민국에서 시민들이 자체무장까지 하고 반란군하고 맞서자 반란군은 엄청나게 당황한다. 반란군은 어린이(청소년)/여성/노인/장애인등을 가라지 않고 학살하면서까지 겨우 시민군들을 제압했다.
그리고 이 시민군들은 나중에 6월항쟁 그리고 먼 훗날 있었던 촛불혁명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빈약한 무기로 강력했던 반란군하고 싸웠던 27일날 마지막 항쟁은 대학생들을 각성시킨 기폭재가 되었다. 1980년대 대학생들중 대다수가 27밤의 항쟁을 듣고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으며 박종철, 이한열 열사등 수많은 대학생들은 '''광주는 죽지않았다''' 그리고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등을 외치면서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36년후에 있었던 촛불혁명도 지대한 영양을 끼쳤다. 시민군들이 마지막까지 보여줬던 민주주의가 촛불로 다시 태어나서 저 부패한 대통령을 끌어내렸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정신적 지주이자 지금의 대한민국 민주주의을 탄생시킨 고마운 분들이다.

[1] 1980년에는 전라남도 광주시로 전라남도 도청이 존재했었다. 광주광역시로 승격된 시기는 1986년이다. 자세한 내용은 광역시 문서를 참고.[2] 이 다이너마이트 수량을 톤 단위로 크게 부풀려 비난 소재로 활용하는 사람들도 있다.[3] 19세의 청소년이었다는 증언도 있다.[4] 다만 정호용 장군의 진술 실수로 인한 트롤짓으로 인해 편의대가 주도한 일들도 꽤나 있는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