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1. 개요
2. 기원
3. 발전
4. 한국
5. 대중문화에서의 등장


1. 개요


, Beacon (Fire)
나라에 병란이나 사변이 있을 때 신호로 올리던 불. 눈에 잘 띄기 위해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한다. 낮의 연기를 따로 봉연이라 부르기도 한다.

2. 기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장거리 통신수단 중 하나로, 미국원주민이나 남아메리카원주민들도 자주 쓰던 통신수단이다. 가장 오래된 봉화의 기록은 중국으로, 사기에서는 주나라 때 이와 관련된 포사의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 이 봉화를 막 쓰다가 주나라가 멸망했다.

3. 발전


봉화자체는 기원전부터 쓰였지만 당시 봉화는 상당히 단순한 수준이여서, 무슨 일이 있으면 불을 밝혀 '무슨 일이 있다. 그러니 좀 와라' 하고 알리는 정도. 더 복잡해지고 체계화되는 것은 중국 후한 때부터의 일로, 이 때부터 봉화를 올리는 봉화대가 변방-수도 식의 릴레이 연결 체계가 잡혔고 적의 규모나 현재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5가지 정보 전달법이 생겨났다.
  • 1단계 - 10명 이하의 외적이 변경 밖에 출현. 낮에는 봉 1개를 올리고, 밤에는 거화 1개를 올린다.
  • 2단계 - 외적 10명 이상이 변경 밖에 출현하거나, 100~500명이 변경에 진입. 낮일 경우 봉 2개, 밤에는 거화 2개.
  • 3단계 - 외적 1,000명 이하 변경 진입, 혹은 500~1,000명이 봉화대 공격.낮에는 봉 3개, 밤에는 거화 2개.
  • 4단계 - 외적 1,000명 이상이 봉화대 공격. 낮에는 봉 3개, 밤에는 거화 3개.
  • 5단계 - 외적에게 봉화대를 포위당해 답이 없는 경우. 낮에는 무조건 되는 대로 봉을 높이 쌓고, 밤에는 거화를 계속 붙였다 떼었다 하여 멀리서 보면 불이 움직여 위험 상황인 것을 알림.
이외에도 암묵적으로 2가지 상황을 알릴 수 있었다.
또한 이 때의 봉화대는 한국과 달리 단순한 정보 전달소 외에도 둔전 관리와 국경 검문소 역할도 하였기에 행정 문서용 죽간도 만들어 사용했다. 법적으로 봉화대는 5~10리 마다 설치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법적인 얘기. 실제로는 제각각이어서 봉화대 간 거리가 1리도 안되는 곳이 있었는가 하면 20리나 되는 곳도 있었다.
서양에서도 쓰인 기록을 볼 수 있는데 그리스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기존봉화를 응용해서 알파벳을 보낼 수 있는 봉화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훗날 ADFGV 암호의 시초가 된다.
이후 대항해시대에 아프리카 희망봉에서는 매일 정오마다 대포를 쏘아서 그 소리나 연기로 항해사들이 크로노미터의 시간을 맞추도록 했다.

4. 한국


우리나라에 봉화 제도가 도입된 것은 정확하지 않으며,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봉화 관련 기록이 나와 그때부터 봉화의 체계가 존재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삼국시대의 봉화로는 전북 장수군, 완주군 등지의 전북 동부지역에 분포하는 가야의 봉화대가 있다. 이러한 봉수대들의 존재는 소위 전북가야 또는 장수가야라고 하는 전북지역에 존재하였던 가야를 상정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1]
그 밖에도 완연한 봉수는 아니지만 경기도 북부에 밀집하여 분포하는 고구려아차산 보루군, 양주분지 보루군 등이나 김해 금관가야의 나전리 보루군 등의 소규모 성곽들이 참고된다. 유기적으로 운영되었을 보루들이 아마 봉화와 유사한 방식 등의 초보적인 봉화 시스템을 적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삼국시대의 여러 산성이나 소형 보루들은 잠시 사용이 중단되었다가 고려시대조선시대에 들어서 봉화대로 재활용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정부차원에서 폐성이된 삼국시대, 고려시대의 산성들을 파악하고 있었으며[2] 봉화대를 지을 때 경제적 효율 및 전략적 가치를 고려하여 기존의 삼국시대 성곽을 활용하였다. 일례로 최근에 발굴된 대가야고령 봉화산성이 있다.
봉화가 체계적으로 정비되는 것은 고려 의종 때부터이며, 이후로 갈수록 봉수제도가 더 복잡하게 정비된다.
  •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정보를 전달한다.
  • 평상시에는 불/연기를 1번만 올린다. 2급 상황에는 2개, 3급 상황에는 3개, 4급 상황에는 4개를 올린다.
  • 각 봉화대마다 봉수업을 맡은 군인인 방정 2명과 고려 시대의 평민인 백정 30명을 배치하고, 평전 1결을 지급한다.
  • 봉화대은 연기 말고도 붉은 천, 혹은 흰 천을 덮어씌운 장대 끝에 걸고 올려서 정보를 전달했다.
이후 이대로 죽 내려오다가, 세종대왕대에 와서 더 체계적으로 정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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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봉수 제도
이때부터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 봉수대인 서울 목멱산 경봉수, 해안/국경 변방에 설치된 연변봉수,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내지봉수의 체계가 잡혔다. 이 외에 기간선로상의 핵심 봉수부대인 직선봉수(직봉), 이를 보조하는 간선봉수(간봉), 직위/지역별 봉수대의 관장 책임을 가진 직위와 봉수대에 배치되는 봉수군의 수 등이 결정되었다.
이때에는 현재 우리가 흔히 보는 봉수대의 모습으로, 주로 불과 연기의 수로 정보를 전달했다.
  • 평상시에는 1거
  • 적이 해상이나 국경에 나타나면 2거
  • 해안이나 변경에 접근하면 3거
  • 아군 군함과 전투가 벌어지거나 국경을 침범하면 4거
  • 적이 상륙하거나 국경에 침범한 적과 교전이 벌어지면 5거를 올렸다.
  • 만일 바람, 안개 등으로 불과 연기로는 잘 전달되지 않을 경우 나팔로 큰 소리를 내거나 조선시대에 개발된 신호용 포인 신포를 쏘며, 조선 후기에는 호준포를 쏜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직접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죽어라 달려가 소식을 전달하였다.
평온한 상태에서도 불을 피운다. 봉수대가 적에게 점령당하여 불을 피우지 못할 상황을 가정한 것. 만약 불을 피우지 않는 것을 평온한 상태로 설정한다면, 불이 피어오르지 않을 때 진짜로 평온해서 불을 안 피우는 건지 봉수대가 적에게 점령당해서 못 피우는 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오늘도 이 봉수대는 평화롭습니다라는 뜻으로 불 하나를 피우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항상 신호를 보내어 신호가 끊겼을 때 문제임을 알 수 있는 것을 공학에서는 피동 안전(Passive security)이라고 부른다. 적이 봉수대를 차지하고 봉화를 하나만 피우면 어쩌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제만 해도 봉화를 여러 개 피우던 봉수대가 다음 날 하나만 피우는 것을 보면 눈치를 챌 수밖에 없다.
봉수대의 간격은 변방 지역에는 10~15리 이하, 내륙지역은 상대적으로 멀어 서울에서 먼 곳은 20~30리, 서울과 가까운 곳은 40~50리 간격이었다. 하지만 종종 70리 간격도 있었다고 한다. 봉수대에 일이 생겨 다음 봉수대로 뛰어가야 할 봉수군들은 그런 경우 아주 죽어났다.
이렇게 봉수대를 관리하는 봉수군은 주로 봉수대 근처 지역부민이 선발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봉화 전달이 제대로 안되면 다음 봉수대까지 몇십리길을 뛰어가는 등 험악한 사태가 종종 발생하며, 봉수대가 보통 전망이 좋은 산꼭대기 같은 곳에 있기 때문에 평소에도 지형이 험악하고 기후환경이 열악한 곳에서 장시간 감시활동을 해야 한다. 그리고 봉수대가 불을 크게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장작[3]이나 불쏘시개, 불씨 등을 현지까지 잘 운반해서 적재한 다음, 항시 잘 관리하고 유지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봉수군이 되면 생업 따위는 포기하고 이 일에 전념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이 힘들고 어려워서 칠반천역 중 하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봉화를 운영하는 효과는 확실하게 나왔다. 이론적으로 최상의 상황을 가정하고 실험했을 때, 부산 부산진에서 한양까지 약 2시간만에 변고를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물론 현실은 시궁창이라 임진왜란 등의 사태에 실제로는 시간이 훨씬 더 걸렸지만 그래도 말이 달리거나 사람이 걷는 것 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를 기대할 수 있었다.
참고로 TV방송 초창기, 먼저 국영방송 TV신호 송신탑을 건설한 바 있는 일본에다 기술협력을 요구하고 거금을 내어준 바 있다. 한국에서는 무슨 대단한 첨단장비가 들어올 것으로 기대했지만, 일본 기술진이 가져온 것은 흔한 측량장비와 조선 봉수대 지도 하나. 불빛과 연기가 눈으로 보이는 거리+봉수대를 지어올릴만한 터+가장 경제적인 설치 개수 등 여러 부분에서 전파탑과 요구사항이 비슷했던 것. 마찬가지로 TV전파탑인 N서울타워역시 봉수대 터에 설치되어 있다.
현재 남아있는 대표적인 봉수대로 수원화성봉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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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육군 통신병과 병과장은 날개 달린 통신탑 꼭대기에 횃불이 그려진 디자인인데 이 횃불이 봉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5. 대중문화에서의 등장


대중문화에서는 잘 등장하지 않으며, 보통 영화게임에서 등장한다. 월트 디즈니의 극장판 만화 뮬란 1편에서 도입부에 만리장성에 훈족이 쳐들어오자 봉화를 올리는 모습이 보인다. 게임에서는 임진록 시리즈와 천년의 신화, 충무공전2에 등장한다.
임진록1에서는 조선/일본 양 진영에 모두 등장하며, 이 건물을 지어야 미니맵이 활성화된다.추가로 기갑부대를 양성하는 중무기제작소와 방어탑인 망루를 짓거나, 화승총병/조총병을 뽑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지어야 하는 건물. 조선군 시나리오 중에서 지정된 곳에 봉화대를 지어야 하는 임무가 있다.
임진록2 시리즈에서는 조선만 봉화대를 보유하며, 일본과 명은 관측소라는 건물이 이를 대신한다. 기능은 삼국 모두 같으며, 미니맵 활성화와 더불어 방어탑 건설 가능/업그레이드에 필수 건물이다.
천년의 신화에서는 고구려와 고려만 사용 가능. 여기서는 봉화대가 아닌 봉수대라는 이름이다. 임진록 시리즈와 달리 미니맵 활성화가 아니라, 역으로 검은 연기를 정기적으로 뿜어 건설된 지역 근처에 해당하는 부분의 적군의 미니맵을 블랙맵 상태로 되돌린다. 당연하지만, 아군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레드얼럿 시리즈의 갭 제너레이터와 같은 역할.
충무공전2에서는 조선군의 건물로 등장하며,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근데 기능이 그것뿐이라 거의 안쓴다.
반지의 제왕에서는 곤도르로한간의 비상연락망 용도로 등장한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몇 안되는 예. 원작에서는 모르도르의 군대에게 공격당할 위기에 처하자 곤도르가 알아서 봉화를 올리고 구원을 청하는 사신까지 로한에 보내지만, 영화에서는 간달프가 도착해서 위험을 경고해도 데네소르는 요지부동. 결국 페레그린이 몰래 불을 질러서 봉화가 올라간다. 영화에판에서도 묘사가 되는데 봉화들이 있는 장소들이 죄다 엄청나게 높은 설산의 정상에 위치해있다(...) 이런 장소에 소수의 인원들이 교대로 근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디아블로 3에서도 봉화를 올려 병사들에게 원군이 왔다고 알리는 임무가 3막 초반에 나온다. 정작 봉화를 받은 영주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치부해 방벽 수비대와 주인공 일행들만 고생한다.
드라마 허준에서 천양태가 구일서에게 봉화의 연기갯수에 뜻을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그 이야기를 들은 구일서가 목멱산에 봉화가 5개 올랐다고 이야기를 해주자 천양태는 기겁을 하고 이 사실을 허준에게 알린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곧 터진다.
드라마 상도에서 한양에서 한지를 팔려는 임상옥을 방해하기 위해 송상의 정치수가 봉화를 이용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한양은 과거 응시 기간이라 한지의 수요가 높았는데 전쟁이 나면 과거 일정이 모두 취소되는 점을 이용하여 가짜 봉화를 5단계 올리고[4] 전쟁이 난 것처럼 꾸며서 한지 가격을 폭락시킨다. 얼마안가 관청에서 봉화가 거짓임을 알고 과거가 예정대로 진행될 것임을 관리를 통해 한양 일대에 알리는데, 이미 임상옥은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헐값으로 판 이후였다. 덕분에 큰 손해를 본 임상옥은 이후 송상이 배후에 있음을 알고 그들의 다음 거래 목표가 어물매점이란 정보를 듣고 수송할 배를 미리 선점하여 복수를 한다.
오버 더 시리즈에도 나온다. 다만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오버 더 초이스부터. 일반적인 봉화와는 달리 연통이 6개이고, 봉화가 4개와 5개가 올라간 상황은 국가비상상황을 의미하며 군 병력이 출동하고 긴급피난과 범죄자들의 빠른 형 집행이 이뤄진다. 봉화가 6개인 이유를 티르는 지진 등으로 연통이 망가져 사용할 수 없을때 예비용으로 설치된 것이라 추측했다. [5] 이 외에도 이 작품에서 봉수대를 지키는 봉수지기는 세금을 내지 않고, 완벽한 세습직이며, 봉수대에 함부로 접근하는 사람을 사형시킬 수 있는 등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 중 하나로 취급된다.

6. 대한민국 육군 제55보병사단 봉화부대




[1] 다만 장수가야, 전북가야 등의 표현은 비교적 지역사적인 관점에서의 견해라고 보는 편이며 더 크게는 대가야에 소속된 지역으로 보거나 별도의 ㅇㅇ가야라고 보기는 다소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이러한 소위 전북가야라는 개념의 근거로 가야의 봉수유적들이 거론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봉수 유적들이 가야와 관련된 유물이 비교적 잘 출토되지 않는 편이다. 또 조선시대의 봉수와는 구조적으로 다르다고해서 그것이 가야의 것이라는 반증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전북가야와 가야의 봉수"라는 연결고리는 학술적으로 약점이 많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2] 혹여 있을 반란군의 거점으로 활용되는 것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해당 성곽을 완전히 폐기시키거나 별도로 관리하였다.[3] 나무장작을 쓰지만 그 외에 야생동물의 배설물 등을 주워다 쓰기도 했다.[4] 진짜로 봉화를 올린건 아니고 봉화가 있는 산의 중턱정도에 불을 질러 진짜로 봉화가 올라간것처럼 꾸몄다. 어찌됐든 들키는 순간 기군망상으로 사형감인건 마찬가지다. 왕에게 들어갈 보고를 주작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그만큼 위험한 행위라 송상 내부에서도 우려가 나오기도 했고 임상옥도 송상이 이런 리스크가 큰 행위를 벌일 것이라는 것을 예측못했다.[5] 실제로는 휴스트라넬과 페르다이할을 소환하는 용도이다. 두 용은 동극과 서극에 있기 때문에 둘이 반드시 만나야 하더라도 둘은 그 상황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제국의 봉화를 통해 둘이 만나야 하는 상황을 알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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