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탄금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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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음력 4월 28일(양력 6월 7일)에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일본군과 탄금대(충청북도 충주)에서 싸운 전투. 임진왜란 개전 이후 최초의 대규모 야전이며 이 전투의 패배로 조선 조정은 몽진[2] 을 결심한다.
이름은 탄금대 전투지만 실상 전투는 중반까지 충주천 이남 달천 평야에서 벌어졌다. 전투 후반에 신립이 탄금대에서 최후를 맞이했기에 그 임팩트 탓인지 탄금대 전투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탓에 전투가 처음부터 끝까지 탄금대 인근에서만 벌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역사적인 패전이라는 점 외에도 주목받을 이유는 많다. 임진왜란 기간을 통틀어 보기 드물게 조선군이 큰 규모의 병력을 동원한 야전이었던 데다가 일정한 패턴의 공방을 주고 받는 공성전, 수성전과 달리 진법이 승부를 결정지었던 야전이기 때문. '''사실상 한일 전쟁사에 드문 정규군의 대규모 회전이다.''' 게다가 당시 조선 최고의 명장이라는 신립과 일본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대결이었으며 기병 vs 보병이라는 양측의 전혀 다른 병종 구성도 묘미다. 주력 무기 또한 활 대 조총으로 서로 달랐다. 여러 모로 전쟁사적 관점에서는 흥미로운 점이 많다.
2. 양측의 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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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의 주력이었던 기마병. 하지만 조선 초기까지 제법 있었던 근접 기병의 비율이 상당히 줄어들었기에 이 때의 조선군 기병은 대부분이 궁기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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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뎃포 아시가루(조총병).
조총 자체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조선군도 알던 무기이지만 조총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해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의 수량만이 사용되었을 뿐이였으며 전국 시대를 거치며 정교하게 정립된 일본군의 조총 운용법은 조선군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3][4][5] 특히나 탄금대 전투의 경우 초반에 일본군이 승기를 잡게 된 결정적 요인은 조총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제1군의 경우 처음 일본에서 끌고 온 병력 18,700명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 상륙 후 거친 부산진 전투, 동래성 전투, 상주 전투에서 입은 고니시 군의 피해는 경미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18,000명 안팎의 병력을 유지했을 것이다.
조선군의 경우 의견이 갈리는 편인데 8,000명 설과 16,000명 설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신립이 서울을 출발할 때 데리고 있던 직속 병력[6] 과 류성룡에게 인계받은 무사, 장정들을 합쳐 8,000여 명,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모집한 병력이 8,000여 명으로 도합 16,000명이라는 것과 단순히 충청도 일대 병력 8000명이 전부이고 도성에서는 극소수의 병력밖에 데리고 오지 못했다는 주장이 팽팽하다. 선조수정실록과 징비록의 기록이 상이해서 어느 쪽 기록을 더 신뢰하냐에 따라 군세가 달라진다. 그러나 유성룡이 직접 쓴 것으로 보이는 징비록 초본과 후손들이 군왕에 대한 서술 태도 등을 문제로 보아 수정한듯이 보이는 간본 간의 서술 차이가 심해(군세의 서술도 차이가 있다.) 징비록의 탄금대 기사 기록은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다. 애초에 징비록 초본에는 도성에서 이끌고 가는 군사, 이른바 경군의 병력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 등의 문제점이 있어 수정실록의 도성의 재관, 무사, 외사의 서류, 한량인으로 활 잘쏘는 자 수천 및 장사 8천, 방읍병 8천, 즉 16000명 이상이라는 서술이 신빙성을 얻는다.
조선에 중앙군이 많이 있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임진왜란 이전에 류성룡이 조선 중앙군이 보병과 기병을 합쳐 '''약 4만 명'''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 것이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저 병력 파견 기록들을 보면 '도성의 무사'나 '경군'으로 판별해 말하고 있어 신뢰도가 낮은 기록은 아니다. 즉 '''충분히 한 판 해볼만한 병력 규모'''였다고 할 수 있다. 질이 문제겠지만 기병 비율이 높고 정예병이 포함되어 있었던 걸로 보이며 완벽한 배수진 이 아니었던 탄금대에서 적에게 밀리는 와중에도 반나절 간 버텼던 걸 생각하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오합지졸은 아니었다.
원래 신립의 관직상 경군을 끌고 내려갈 수는 없으나 이때에는 특례로써 병력의 상당수를 차출할 수 있었다. 수정실록에 따르면 경군 8천여, 징비록에는 류성룡이 한성 주변에서 8천여[7] 를 모집했다가 이를 넘겼다고 하고 있고 정만록에는 경군 1만여를 차출해 신립에게 붙여줬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하지만 선조실록에는 이런 명시적인 기록이 없으며 징비록에도 정작 전투시에는 충주에서 8천여를 모았다고 하고 있고 나중 선조가 전쟁 지도 과정을 반성할 때도 신립군을 극히 소수로 다수의 적에게 무모하게 싸웠다고 하고 있어 아주 명확한 것은 아니다.
허나 류성룡이 말한 '''4만 명의 중앙군'''은 '''지방에서 올라온 상번군'''이었다. 세조가 군재를 바꾸면서 지방군을 좀 더 잘 다스리기 위해 지방군을 상경시켜 일정한 기간동안 오위로서 복무하게 했다. 더군다가 저 4만이 전부 복무하는 게 아니라 8번씩 나누어 교대로 상번을 하게 했다.
이들은 보병 1만 6천, 기병 2만 4천으로 이루어졌으며 각각 8번씩 한번에 보병 2천 기병 3천씩 복무했다고 한다.
한편 지방군이 아닌 중앙군은 갑사, 내금위, 별시위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약 7천 8백 명 정도가 복무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 4백은 왕을 호위하는 금군으로 직접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병사는 약 7천 4백 정도였다.
또한 선조는 비상 시국을 대비해 예비군을 뽑았는데 주로 하급관료나 궁궐의 중인 중 활을 잘 쏘는 사람(약 2천 명), 무사(군대에서 일정 이상 근무하면 관직을 얻나 아직 관직을 못 얻은 사람들)나 재관(하급 무관), 한량(무과에 합격했으나 관직이 없음)을 모아 정군(약 2천)으로 삼았다.
다만 당시 한양을 수성하던 이양원이 최소한 7천이 필요하다고 가져갔고 각 지방에 파견한 장군들에게 최소한의 군사는 나눠져야 했으니 실제로 끌고 간 군사는 적을 수밖에 없다. 이에 관해 윤일영 전 군사학과 교수는 신립군을 대략 4천으로 보고 기마병 또한 1천을 넘지 못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간혹 인구가 많으니 그냥 아무나 잡아서 군사로 만든다거나 수포대립제에서 면제된 사람을 군대로 보내면 된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건 당시 조선 군대를 이해하지 못한 발언이다. 당시 조선군은 복무 때 쓰는 무기나 기타 장비류를 국가에서 지급하지 않고 전부 자비로 구매해야 하다보니 이로 인한 근무자의 부담이 컸다. 이를 돕기 위해 정병에게는 정병을 돕는 보인을 3명씩 부쳤다. 이렇게 무기도 지불 못하는 상관에서 무조건 징병한다는 것은 조선판 국민방위군을 만드는 일일 것이다.
또한 김여물의 발언, "삼도의 군사가 모이지 않으니 패배할 수 밖에 없다"고 한 것을 보면 충청도 군사가 모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충주와 청주에는 약 4천 명의 군대가 있었고 민인백이 이종장에게 군사를 넘길때 '모든 군사들이 제 때 모였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듯하다. -탄금대 전투 시 신립 군의 병력 수<논문>에서 발췌
또한 기록된 신립의 병력 대부분이 1만(선조실록 1595 신충원), 8천(징비록, 선조수정실록 1657<김육>, 동서기언<허목>, 조야기문 <작가미상>, 승정원 일기 1680 <오두인>) 등 대부분 8천을 가리키고 있다.
즉 8천~1만 정도가 신립군의 병력이 아닌가 싶다.[8]
3. 전투 이전
북상하는 일본군을 저지하라는 명을 받고 도순변사로 임명된 신립이 충주에 도착한 것은 4월 26일. 김여물이 지형이 험한 조령에서 싸우기를 권했지만 신립은 기병을 활용할 수 있는 평원에서 싸워야 한다며 탄금대 남쪽 달천 평야 일대를 전장으로 삼을 결심을 굳힌다. 이일과 김여물이 강조한 조령이 바로 문경새재인데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지리상으로 천연의 요새로 불릴만큼 산세가 험하여 방어진으로 삼기에 최적인 곳이다. 반면 신립이 택한 달천 평야 일대는 길이 좁고 논밭이 펼쳐져 있는데다 장애물이 많아 신립이 믿고 있던 기병의 기동에 매우 불편한 지형이었다. 달천 평야가 기병 운용에 불편했다는 기술은 탄금대 전투에 참전했다 생환한 신흠의 상촌집, 류성룡이 최종적으로 다듬은 간본 징비록, 신립의 전기인 도순변사신공전 같이 서로 성향이 다른 조선측 기록에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전장 선정은 가장 큰 패착이 되고 말았다.
신립이 내려오기 전에 사전에 파견되었던 조방장 변기가 조령에서 고지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상주에서 패한 이일도 변기에게 합류했다는 기록도 있으므로 일부 병력을 험한 산길에 남겨놓아 지연전을 벌이면서 충청도와 강원도의 군사들을 제승방략으로 집결시켜서 군세를 더 키우고 일본군의 전력을 보다 상세히 파악하는 방법도 있었고 신립 주변의 제장들도 고지전을 요청했지만 신립은 전혀 듣지 않았다.
조령에만 집중하고 탄금대와 조령 사이 지형을 살펴보지 않으면 간과하기 쉬운데 '''조령을 넘어 탄금대까지 가는 길도 상당히 험하다.''' 조령을 넘으면 대안보(안부역)가 나오고 거기서 돌고개를 넘으면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 수안보를 지나 올라가면 충주 남쪽 10리 지점에 단월역이 나온다. 대안보는 조령과 하늘재에서 이어진 길이 만나는 지점으로 영남대로를 끼고 있는만큼 조선 시대 사람이면 모를 수가 없는데 하늘재와 조령에서 이어진 길이 만난다는 부분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곳 지형도 충분한 험지로 매복 장소가 여럿 있었다. 대안보와 수안보를 지나 단월역으로 접근하는 길목엔 강변을 낀 잔도까지 있다.
그러니 신립은 조령만 지키지 않은 게 아니다. 조령에서 대안보~단월역까지 이어지는 방어에 용이한 길목과 매복 지점, 단월역 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잔도까지 전부 방기한 채 평지에서 결전을 벌였다.
일본측 기록인 서정일기를 기술까지 감안하면 신립의 본진은 산에 있었다. 충주 북쪽 소나무 산에 진을 치고 있다가 달천 평야로 나아가 일본군을 상대했다. 달천 평야는 기마대가 기동력을 발휘하기 적합한 곳은 아니었다. 주변에는 논이 많았고 강변 인근에는 갈대밭이 우거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거의 습지에 가까운 질척질척한 상태였다.
4월 28일 새벽까지 문경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28일 인각(3~5시)에 문경을 출발해 조령을 넘어 진각(7~9시)에 안보[9] 를 통과, 오각(11~13시)에 충주에 도착해 월강 북단에 있는 단월역(현재 건국대 글로컬 캠퍼스 인근)에 이르렀다. 6시간에서 최대 10시간에 걸쳐 좁고 험한 비포장 산길을 행군해 체력 소모가 상당했을 법 하지만 고니시는 침착하게 군을 나누어 자신의 본대는 중앙을 맡아 계속 진군하였고 소 요시토시의 좌군은 달천 강변을 따라 서쪽으로, 마츠우라 시게노부의 우군은 산자락을 타고 동쪽으로 조심스럽게 이동시킨다. 또한 아리마 하루노부 등이 이끄는 병력은 별동대를 맡아 뒤를 따르고 있었다. 조선군은 조령~충주 사이 험로를 모두 비워놓았고 신립이 정찰나간 군관을 참한 다음 후속 조치를 실시하지 않아 일본군의 접근을 까맣게 모르다 갑작스럽게 교전에 들어가게 되었다.28일. 적이 민가의 집에 불을 질렀다. 그런 뒤에야 우리 군사들이 적이 이미 영(嶺)을 넘어온 것을 알고 놀라고 두려워하여 간담이 떨어지지 아니한 이가 없었다. 조금 있다가 적의 무리가 큰 길을 따라 산을 두루 내려오는데 칼이 햇빛에 번득 빛났다. 신립이 군사를 모아 나아가서 탄금대(彈琴臺) 앞에 진을 쳤다. 탄금대는 두 물 사이에 있는데 그 물은 이름이 달천(㺚川)이었다. 군사가 모두 물을 등지고 진을 쳤다. - 신경, 재조번방지
4. 전투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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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돌입 시의 포진. 조선군 기마대는 고니시의 본대를 포위하려는 형태로 반월진을 갖췄으나 고니시는 좌군과 우군을 양쪽으로 은밀히 넓게 벌려 놓고 있었다.
본 항목에는 오랫동안 조선군이 3차례에 걸쳐 돌격을 했다고 설명하며 상세한 전투 묘사까지 곁들였는데 해당 주장은 사료적 근거가 희박하다. 조선군 3회 돌격설은 60년대 저작인 이형석의 임진전란사가 시초인데 임진전란사는 주장을 하면서도 출처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임진전란사가 밝힌 조선측 사료인 실록, 상촌집, 은봉전서, 재조번방지 등에선 막연히 몇 차례 돌격을 했다는 점만 알 수 있을 뿐 자세한 전투 경과는 남아있지 않다. 일본측 기록도 마찬가지다. 고니시가 도쿠가와에게 반기를 들었다 참수당해 가문이 몰락했기 때문에 가전문서들이 많이 소실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1차 사료인 서정일기나 간접적으로 묘사한 프로이스의 일본사는 전투에 대한 상세한 기술은 들어있지 않다.
현재 남아있는 사료를 바탕으로 전투를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낙양에서 온 장군이 수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충주부 북쪽 반리쯤 되는 소나무 산에 진을 쳤다. 관군이 기치를 들고 말을 달려 공격하니 소나무 산에 진치고 있던 조선군이 패주했다. 종의지와 소서행장 군의 병사들이 이를 추격하여 목을 벤 것이 3천여 급이고 포로로 한 것이 수백명이었다. 대장 신입석(신립의 오기)이 사망했다. - 덴케이, 서정일기, 4월 27일(조선력 4월 28일) 기록
4월 26일 충주(忠州)에 도착했을 때 병력이 겨우 수천 명밖에 안 되었는데 이 군사로 단월역(丹月驛) 근방의 언덕에 진을 쳤다. (중략) 28일에 적이 민가를 불태운 뒤에야 적이 이미 조령을 넘어왔다는 것을 우리 군사가 알고는 간담이 떨어지도록 모두 경악하며 두려워하였다. 이윽고 바라보니 왜적들이 조령의 큰 길을 통해 산을 뒤덮으며 내려오는데 칼빛이 번쩍번쩍하였다. 신립이 군사들을 지휘하여 차례로 진격시켰으나 마을 길이 비좁은데다 논밭이 많아 말을 치달리기에 불편하여 머뭇거릴 즈음에 적이 우리 군사의 좌측으로 돌아 나와 동쪽과 서쪽에서 끼고 공격해 오는 바람에 우리 군대가 크게 어지러워지면서 적에게 난도질을 당한 결과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군자(軍資)와 군기(軍器)가 일시에 모두 결딴나고 말았다. - 신흠, 상촌집, 여러 장사들이 왜란 초에 무너져 패한 기록(諸將士難初陷敗志)
조선측과 일본측 참전자들은 공통적으로 조선군이 고지에 진을 쳤다고 적었다. 조령을 버린 점과 논밭과 장애물이 많아 기병을 운용하기 불편했다는 기록이 강조되어 조선군이 아예 평지에 진을 친 채 적을 맞았다고 오인하기 쉬우나 신립의 본진은 탄금대 우측 산자락에 있었고 전투 당일 조령을 넘어온 일본군이 민가에 방화를 저지른 후에야 적의 위치를 파악하고 기병들이 평지로 나가 적진에 돌격했다. 조선군이 기병 위주로 전투에 나선 점은 상촌집에 남은 신립 본인의 증언과 신립전기, 프로이스의 일본사가 공통적으로 증언하고 있다.그 지역은 촌락의 거리가 좁고 좌우에 논이 많아서 물과 풀이 섞여서 말을 달리기에 불편하였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적이 우리 군사의 좌우를 포위해 나오는데 세력이 풍우(風雨)와 같았다. - 신경, 재조번방지
그러니까 신립은 일본의 좌우군은 감안하지 못하고 중앙의 고니시군만 신경쓰며 '''보병은 후방에 둔 채 기병대만 좁고 장애물이 많으며 논밭이 많아 기동에 불리한 평지로 돌격'''시켜 일본군을 포위하려 했다.[10]
27일 일본군이 조령을 넘었다는 군관의 보고를 받은 신립은 직접 정찰에 나서 일본군이 아직 조령을 넘지 않았음을 알고는 허위 보고했다며 군관을 참했다. 그리고 일본군이 조령을 넘지 않았다는 장계를 올린 다음 추가 정찰은 하지 않아 일본군의 진격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상주 전투의 이일이야 거느린 군사가 기초적인 제식 훈련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한 오합지졸들이라 정찰을 보낼 상황이 아니었지만 중앙군이 다수 포함된 신립군이 과연 척후를 추가적으로 보내지 못할 상황이었을까? 조령부터 단월역까지 이어지는 험지를 모두 포기하여 적의 진격을 지연시키지도 않았고 정찰 미비로 적군을 바로 파악하지도 못한 상태로 전투에 돌입해서는 회전에 필수적인 기병과 보병의 연계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아무튼 신립은 고전적인 좌중우 삼군 형태의 진형이 아니라 기병 돌격 위주 진형을 꾸렸다. 반면 일본군은 양익에 기병이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간단하면서도 검증된 고전 진법을 따랐다.
신립의 전장 선택은 얼핏 강을 통한 기동 차단을 고려한 정석으로 보이나 포위하기에는 상대의 병력이 너무 많고, 정면 돌파하자니 조선 전기에도 충격력을 활용한 돌격 전술을 사용한 기록이 없는 조선 기병이 특성상 충격력이 부족했으며 강 때문에 신립이 그렇게 강조한 기병의 기동이 제한받았다. 도순변사신공전에서 조선군 기병대의 돌격을 중기병 돌격을 의미하는 치돌(馳突)이 아닌 치사(馳射)를 했다고 기록했다. 치사란 궁기병의 승마 사격을 의미한다. 궁기병이 정비된 보병 방진에 유효한 타격을 입히려면 기동력을 활용한 측후방 타격이 필요한데 후방과 우측면으로 강이 흐르고 논밭이 많아 우회 타격이 극도로 제한받아 조총 사격을 몸으로 받아가며 정면 돌격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 동쪽의 충주성은 수비 병력도 없고 적을 막을 방어 시설도 여의치 않는 폐성이나 마찬가지로 조선군에게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다. 여기에서 조령과 탄금대라는 전장 선정 문제를 따지기 전에 우선해야 될 문제점, 신립의 형편없는 야전 지휘 능력이 드러난다.
일본군은 소 요시토시의 좌군, 고니시 유키나가의 중군, 마츠우라 시게노부의 우군으로 나뉘어 정석적인 양익 배치를 통해 적의 우회 기동에 대비하고 한편 돌격해온 조선군을 포위 섬멸하려 했다. 산지에 숨은 마츠라의 병력은 충주성에서 주둔군이 기습 출격하여 포위를 시도할 가능성도 염두한 듯하다. 충주성에서 조선군이 출격해 나온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고지에 자리잡은 마츠라 병력이 이를 붙잡을 수 있고 기병 우회 시도가 있을 경우 즉시 차단이 가능했다. 기병 우회를 저지하다 충주성에서 출격한 병력에 협공당할 우려는 있으나 일본군 본대 뒤쪽에 대기중인 예비대가 마츠라가 있던 고지로 올라가 농성하면 완전한 구축은 매우 어려워지게 된다. 결국 지형적으로 일본군이 손해보는 상황이 아니었고 설사 충주성에 조선군 병력이 따로 있었더라도 그 존재는 그리 큰 의미를 두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실제론 주둔군이 있지도 않았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조선군의 돌격이 3차례 걸쳐 이뤄졌다거나,상세한 전투 묘사를 담은 사료는 아직 발표된 바 없다. 돌격한 조선 기병의 숫자까지 상세히 적은 임진전란사의 기술은 저자조차 명확한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조일 양측 기록을 종합해 정리하면 이렇다.
북쪽 산지에 진영을 꾸린 조선군은 기병을 전진시켜 달 모양의 진형을 펼쳐서 고니시의 중군을 포위 섬멸하려 했다. 정확한 횟수는 불명이나 몇 차례 기병 돌격이 이뤄졌고 일본군의 의도와 좌우군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신립이 고른 전장은 기병에게 극히 불리했고 일본의 좌우군이 양쪽에서 조선군을 역으로 포위해 조총 사격을 퍼부었다. 조선군 좌익 방면으로 먼저 공세가 시작되었고 이내 좌우에서 동시에 협공을 가해 중군과 함께 밀고 들어오자 조선군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와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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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은 충주천 북쪽 탄금대로 몰려 김여물과 함께 남은 전력을 이끌고 최후의 결사 항전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만회하긴 역부족. 결국 이일을 비롯한 일부 병력이 간신히 빠져나갔지만 김여물은 전사하고 신립도 손수 활을 쏘고 칼을 휘둘러 일본군 수십 명을 죽였으나 중과부적이 되자 자결했다.
일본군은 3천급의 수급과 100여명의 포로를 획득했다. 보병 위주인 일본군 특성상 추격 섬멸 능력이 떨어져 산줄기를 타고 동쪽으로 빠져나간 병력이나 물에 익숙해 수영으로 빠져나간 병력이 적게 잡으면 수백, 많이 잡으면 천 명 이상 있었겠지만 패잔병을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 반면 고니시 군의 경우 전투 직후 곧바로 한양을 향해 쾌속 진군을 시작한 것으로 미루어 '''손실이 경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군으로서는 (비록 패전이라 할지라도) 고니시뿐 아니라 일본군 전체의 예봉을 꺾어 한양 방어의 시간을 벌겠다는 최소한의 전략적 목표조차 달성하지 못한 참담한 결과이다.
한편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가토 기요마사의 군 또한 근처에 있었는데 전투 현장을 우회해서 지나갔는지 아니면 뒤에서 관망했는지는 불확실하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의하면 가토는 고니시가 전투하는 것을 보고 고니시 군대의 용맹에 감탄을 보냈다고 하며 자신도 전장의 명예를 원해 고니시에게 전장 참여를 요청했지만 고니시가 거절했다고 한다.
5. 전투의 영향
탄금대 전투의 패배와 명장으로 칭송받던 신립의 죽음은 조선 조정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고[12]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일본군에게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전까지는 일본군의 진격에도 불구하고 신립이 있기 때문에 괜찮다는 믿음이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까지 절망적이지는 않았으나 제승방략으로 대표되는 당시 방위 체제의 근본적인 허점이 제대로 찔린 결과 중차대한 전투가 패전으로 끝나고 말았다. 공포에 휩싸인 선조는 명나라로 망명할 뜻을 밝히고 조정은 그런 선조를 말리기는 하나 한양을 포기하고 의주까지 몽진한다.
그 외에도 해당 전투에서 패한 소식이 점차 알려지고 뒤이어 조정에서도 파천의 뜻이 기정사실화되면서 그로 인한 혼란과 공포의 여파로 인해 한양 뿐 아니라 지방에 상주하고 있던 관료들, 장수들까지도 크게 동요하게 되었다.
6. 왜 탄금대인가?
몸으로 조령의 지형을 체험해야 했던 조선 시대 사람들은 신립의 언행에서 이유를 찾는 대신 자기가 보기에 합리적인 원인을 만들어내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기록에 남은 신립이 직접 밝힌 이유는 적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기 때문이다였고 조선 후기에 배수진 활용성이 거론되다가 1960년대 임진전란사를 기점으로 갖가지 주장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6.1. 기병 활용설
'''신립이 직접 한 말이고 당대 기록에서 확인되는 유일한 이유다.''' 그러나 신립이 전장으로 선택한 탄금대는 논과 밭 등의 장애물이 많아서 기병의 기동력을 활용하는 데 제약이 많은 곳이었다. 즉, 신립은 조선군에 만연했던 기병만능론에 빠져 지형에 대한 고려를 전혀 하지 않았다. 신립이 군관을 참한 다음 직접 정찰에 나선것을 근거로 지형에 무지하지 않았다고 억지를 쓰는 주장이 있는데 일본군이 조령 넘었다는 보고를 확인하러 갔을 뿐이고 전장 선정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 문제는 여말선초부터 조선 중기까지 이어진 對 왜구 교리와 신립의 성향을 살펴봐야 한다. 북방 여진족과 왜구와의 한정적인 경험만을 기억한 조선군은 지형, 숫적 열세조차 무시하는 기병(궁기병)만능, 공세만능주의가 심각했다.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전투가 탄금대 전투와 함경도에서 가토 기요마사 군과 한극함의 기병대 사이에 벌어진 해정창 전투로 해정창 전투에선 창고 뒤에 단단히 엄폐하고 있는 다수의 조총병들을 상대로 막무가내로 궁기병대를 돌격시켰다가 아군을 궤멸시켰고 탄금대 전투에선 논밭과 장애물이 많은 곳에서 단단한 방진을 구축한 일본군 정면으로 궁기병대를 돌격시켜 훨씬 큰 규모로 참패했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부터 조선 중기 왜변의 교전 양상을 살펴보면 수군만이 아닌 지상전, 특히 기병의 역할을 강조하며 대 왜구전 주력 병종으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성계의 가장 큰 전공인 황산 대첩의 선봉에 선 군대가 고려인과 여진인들로 구성된 기병부대 가별초였고 최영과 이성계 등이 수차례 격전 끝에 도출해낸 정답도 '1차로 바다에서 수군으로 막고 상륙 병력은 기동력이 우수한 기병으로 친다'였다. 중종대 삼포왜란, 명종대 을묘왜변도 지상전에서 승부가 갈렸다. 을묘왜변때 활약한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는 소수의 정예 돌격대로 말을 타고 적진에 돌격해 개인 전술로 싸워 공을 세웠다.
자꾸 신립의 발언, 배경, 기록에 남은 그의 전투 성향은 무시한 채 결론을 내리니 고니시군 이외의 일본군의 존재를 의식한 기록 자체가 없음에도 신립이 가토, 구로다군을 의식해 빠른 결전을 의도했다 혹은 빨리 격파하라는 조정의 압박을 받았다는 주장이 나오는데 고려말부터 이어진 조선군의 대 왜구 전술 자체가 지상전, 기병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으며 사실상 남조 정규군이었던 고려말 왜구의 준동이 대마도 정벌로 막을 내리고 조직화되지 않은 약탈만 이어지게 되면서 기병이나 석전군 같은 소수의 정예 병력을 활용해 상당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신립이 북방에서 여진족을 상대할 때도 일관되게 여진족보다 적은 병력을 거느리고 무예와 과감함을 발휘해 전과를 올렸다는 점을 더하고 신립의 우리는 기병이다 발언을 살펴보면 신립은 수천의 군대를 거느리고 회전을 벌이는 상황에서도 과거의 왜구 토벌과 다르게 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은 더 이상 과거의 규모도 작고 조직화되지 못한 왜구가 아니라 일본의 정규군이었고 신립보다 먼저 일본군을 상대한 이일이 이 점을 분명히 강조했음에도 신립이 무시한 데 있다.
징비록 초본에 상주 전투에서 패하고 겨우 빠져나온 이일이 길에서 만난 어떤 사람이 일본군의 기세를 물으니 명군이라도 당해내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류성룡은 최선을 다한 이일에 대한 지나친 폄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간본에선 해당 발언을 삭제했는데 이일이 겁쟁이여서 그랬다고 단순하게 이해하면 곤란하고 교감 해설 징비록을 발간한 김시덕 교수의 말마따나 200년간 정규전 없이 평화를 누린 군대가 100년간 전쟁만 벌인 외국 정규군을 상대한 뒤에 받은 충격이 그만큼 거대했다고 여겨야 한다.신립이 왜적의 정세가 어떤가를 물으니 이일이 대답하기를, “이 적은 경오년(1570년, 선조 3년)과 을묘년의 그것과는 견줄 게 아니며 또 북쪽 오랑캐 같이 쉽사리 제압되지도 않습니다. 이제 '''험준한 데를 점거하여 적의 길을 끊지 못하였으니 만약 넓은 들판에서 교전한다면 당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후퇴하여 서울이나 지키십시오.” -난중잡록
난중잡록의 언급 등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이일은 이들이 명확한 전략적 목표나 조직력을 갖추지 못한 왜구나 니탕개의 난 당시 여진족들고는 명백히 다른 군대임을 강조했고 그들에게 했던 전술이 통하지 않을 거라(북방 오랑캐 같이 쉽사리 제압되지도 않습니다) 단언한다. 신립보다 더 오래 군문에 있었고 북방에서 제승방략을 정리하며 식견을 쌓았던 장군답게 처참하게 무너진 와중에도 요점을 놓치지 않았던 것인데 신립은 그냥 무시하고 똑같이 했다.
기병전의 문제를 지적할 때 탄금대의 뻘밭과 궁기병의 충격력 부족을 흔히들 거론하지만 조선군이 이런 대규모 회전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대규모 기동훈련인 대열(大閱)과 강무(講武)는 조선 전기에도 연 단위로 행해지던 훈련이었다. 대열(大閱)은 군사들이 진법 훈련을 한 후 왕이 이들을 사열하는 훈련이고 강무는 왕이 특정 지역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간 다음 그곳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실질적인 기동 훈련인데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니 비용 소요도 높고 농사일을 하던 백성들을 끌어모아야 하고 사냥(기동 훈련)을 겸할 경우 해당 지역은 낟알이 여물었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조기 추수에 들어가서 백성들의 그 해 농사에 큰 지장을 주기 때문에 민폐가 심했다.
특히 사냥을 광적으로 좋아했던 연산군이 강무를 핑계로 수시로 사냥에 나가 논밭을 망가뜨리고 백성들의 집을 빼앗은 탓에 연산군 이후의 왕들은 연산군의 재래 소리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냥을 자제해야 했다. 이로 인해 선조 시대 조선군은 수성전, 사격전 역량이나 소수 정예 위주의 각개전투 기술은 꾸준히 배양했지만 대규모 기동전 역량은 전무한 상태였다. 조선 전기의 창기병들도 여진족과의 비정규전에서 1대1로 싸우는 상황만을 상정한 것으로 보이며 정규전에서 기병 돌격으로 보병 대열을 무너뜨리는 개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료는 없다. 이러니 탄금대가 기병 운용에 아주 유리한 지형이었다고 해도 승리에 필수적인(그리고 실전에서 전혀 이뤄지지 못한) 기병-보병간의 연계와 일본군의 우회 기동에 대한 대비가 되었을지 의문이다.
즉 사료상의 신립은 먼저 일본군을 상대한 지휘관에게 이전의 도적떼와 다르다는 조언을 받고 자기가 청해서 데려온 부관도 이에 동조했음에도 무시하고 그렇다고 일부 병력을 인근의 험지에 파견해 적의 실태를 파악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상대는 왜구일 뿐이라고 믿으며 정규군과의 정면 대결에 불리한 병력을 회전에 몰아넣었다가 와해시켰다.
신립에게 뭔가 다른 의도가 있었다는 주장을 따르자면 북방에서 지휘 경력을 쌓을 때는 저돌적인 치사, 돌격 외의 전술을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고 전투 전엔 조총이 쏘면 무조건 맞느냐 같은 발언을 하던 사람이 이 때 갑자기 다른 전략에 눈을 떠서 그런 기록이 전혀 없지만 어쨌든 일본군 1, 2, 3군의 전체 진격 상황을 모두 염두에 두고 기병 운용을 신속한 격파를 위해 안부역~단월역 사이의 매복 가능 지점까지 전부 방기하고 뻘밭이 포함되어 있는 평지에 전군을 모아 결전을 벌였는데 정작 전투에선 일방적인 야전 능력 열세를 드러내 전멸하는 괴상한 그림이 나온다.
종합하자면 이 주장은 맨 아래의 신립 자질 부족설과 연계된다. 깜냥이 기병대장에나 어울릴 인물이어서 그저 용맹히 싸워 이기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정면 대결을 택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궁기병의 화살 발사 사거리는 보병이 땅 위에서 쏘는 것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다. 사거리가 짧다는 조총도 정작 조선군 교리를 보면 되려 궁시보다 사거리가 길었고 갑옷 파괴력은 월등했는데 궁기병의 마상 사격의 사거리는 보병보다 더 짧다. 신립이 설사 마상 궁술로 이름을 날렸던 유목민족 궁기병대처럼 능숙하게 병력을 운용했다 하더라도 조총의 사거리 안에서 사격전을 벌여야 했는데 기병 저지력을 충실히 갖춘 보병이 조총으로 화망을 펼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는 병자호란때 김화 전투가 잘 보여준 바 있다.
6.2. 배수진 활용설
이것도 신립이 직접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발언도 논란의 여지가 다분한 게 훈련도가 낮은 병사들은 엄폐물이 없는 곳에서 적병과 마주칠 경우의 공포감에 더 쉽게 무너지며 오히려 산악 지형과 같이 지형의 이점이 있는 곳에서 상대적으로 더 잘 싸울 수 있고 장거리 투사 무기에 우위를 가지는 조선군이 백병전에 강점을 가지는 일본군에 대응하기 좋은 지형은 평야가 아닌 산악 지형임이 당연하고 실제 전훈도 그렇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임진왜란에서 권율과 황진, 정담 등이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을 저지한 웅치 전투, 이치 전투에선 숫적으로 압도적인 열세였던 조선군이 고갯길을 활용해 적을 저지해냈다. 물론 낮은 숙련도와 사기 문제는 남아있어 권율이 총지휘관 신분에 직접 선두에서 병사들을 독려하고 도망치거나 전투를 회피하는 병사들의 목을 치며 엄청나게 고생했다. 그러나 같은 병사들이 용인 전투에서 보인 모습과 비교하면 상대적인 우위는 분명하다. 즉 훈련도가 낮으니까 불리한 진영인 배수진에 몰아넣어서 정신력을 끌어내는 게 아니라 보다 유리한 지형에서 싸워서 낮은 훈련도를 보충하는 게 올바른 병법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립은 조정의 허락을 받아 저자에서 강제 징병을 하고 원래는 체찰사 류성룡이 끌고 가기로 되어있던 군대까지 넘겨받는 등 여러 수단을 동원해 서울에서 8천(수정 실록)~1만(정만록) 가량 모아 남하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도성의 무사', 즉 왕실의 친위대인 갑사까지 이 부대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즉 적보다 수도 적었고 지역 농민이 구성원이었던 권율보다 군대의 질이 낮았다고 단언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서는 엄폐물이 있는 곳이 더 유리하다."는 전술적인 상식이 "그러므로 신립이 병사들의 사기 때문에 탄금대를 택한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으로 직결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분명 그런 상식이 옳기는 한데 '''신립이 그걸 알고 있었는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신립은 그런 상식을 모르는 채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는답시고 탄금대를 택했으며 그것은 약속된 패배의 길이 되고 말았다"'''는 주장 역시 논리적으로 이상한 것은 없으며 이럴 경우 이 주장에 힘입어 하단의 '자질 부족설'을 뒷받침하는 것도 가능해지게 된다.
실제 배수진의 정석적인 운용은 다소 질이 낮은 보병으로 배수진을 쳐 적의 주력을 유인, 버티는 사이에 기동력을 갖춘 별동대로 적의 종심을 타격하는 데 있다. 한신이 배수진을 사용한 정형 전투가 바로 그 예이다. 즉 신립이 배수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탄금대 전투에서 기병은 저 위치가 아니라 남한강 북단이나 충주성 등에서 대기하다가 적의 측후면을 후려패며 등장해야 했지만 신립은 전투 내내 보병대 활용이 거의 없었고 그냥 궁기병으로 닥돌만 시전했을 뿐이다.[13] 애초에 승마한 상태에서 활을 쏘면 명중률이 낮아지기 때문에 정면으로 돌격을 하면 근접전을 강제로 할 수밖에 없다. 전쟁터에서 그 정도로 구른 양반이 병서 조금만 읽어도 나오는 그 정도 상식도 몰랐다면 분명 자질이 좋은 장수였다고 하기에는 힘들다. 특히 조선 시대에 장수로 밥 벌어먹으려면 병서 꽤나 파야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심각한 문제.
신립이 이 발언을 했다는 주장은 신뢰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선조수정실록이나 상촌집 등의 당대 기록에 남은 신립의 발언은 '이 곳에서는 기마병을 이용할 수 없으니 들판에서 싸워야 한다'는 발언뿐이다. 배수진에 관한 이야기는 후대의 일로 송시열이 신립의 묘비에 적은 것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후 배수진이 조령 대신 탄금대에 간 이유를 잘 설명했다고 생각했는지 많은 문인들이 배수진설을 택하였고 그 결과 탄금대 전투=배수진이라는 등식이 성립했다. 전장 지형을 살펴보면 탄금대는 배수진보다는 상대의 우회 기동을 방지하는 지형에 더 가깝다. 당대에 제일 유명한 전술이 배수진이니 사람들에게 그냥 그렇게 보였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6.3. 불가피설
말 그대로 탄금대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주장이다.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신빙성이 낮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평야에서 전투를 벌이더라도 그 전에 지형을 활용해 적의 예봉을 꺾거나 진격을 지연시킬 수 있었다. 신립이 충주에 도착한 것은 26일, 일본군이 조령을 통과해 탄금대에 돌입한 것은 28일로 이틀 정도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탄금대 전투의 시간대가 조선측 기록에서 조금씩 다르긴 하나 전투를 직접 지켜본 신흠의 상촌집과 일본측 기록을 교차 검증하면 일본군의 조령 돌파와 탄금대 전투는 모두 28일에 일어났다. 조선군은 이날 아침 조령을 통과하는 일본군의 무기가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이를 파악한 다음 탄금대에 진을 쳤다. 일본측의 기록을 따르면 새벽에 출발해서 오전에 조령을 통과, 오후에 탄금대로 돌입한다. 거의 다 보병인 일본군이 문경-조령-충주를 반나절만에 주파했는데 조선군이 그보다 짧은 충주-조령 구간에서 아무 일도 할 시간이 없었다고 보긴 힘들다.
급박한 전황 때문에 조선측에서 일본군의 진군을 적은 기록들은 징비록과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은 날짜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고 뭉그러뜨려 놓았고 난중잡록은 26일 신립이 충주에 도착해 27일 전투. 재조번방지는 26일 도착해 28일 전투, 국조보감은 신립의 충주 도착시점은 생략하고 27일 일본군이 조령을 넘어 28일 전투하는 식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심지어 신립과 김여물의 행장기류에서도 일본군의 진군, 조령 통과 시점에 대해선 적지 않았다. '''조선 기록들은 상촌집을 제외하면 전투 발발 날짜 외엔 잘 모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측 기록 한두개 긁어와서 일본군이 이미 통과해서 방어선을 펼칠 수 없었다고 주장하면 함정에 빠지기 쉽다.
조선측 참전자인 신흠은 26일에 단월역에 진을 치고 28일날 적을 맞아 싸웠다고 적었으며 가장 상세한 기록을 남긴 일본측은 4월 25일(일본측 날짜론 4월 24일) 이일을 패퇴시키고, 4월 28일(일본측 날짜론 4월 27일) 새벽에 문경에서 출발해 조령을 넘어 아침에 조령과 수안보 사이에 있는 대안보를 통과, 점심 나절에 신립군과 마주쳤다. 신립 본인이 일본군이 목격되지 않자 보고한 군관을 참했다는 기록까지 감안하면 일부 정찰 부대를 제외한 본대는 28일 통과가 확실하다.
무엇보다 조령을 포기해도 지형은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조령에만 매몰되어서 잊어먹는데 '''조령을 막지 않은 것만이 쟁점이 아니다. 조령을 지난다고 평탄한 지형이 나오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포장 도로 닦아놓은 지금 기준으로나 조령만 통과하면 될 거 같지 조선시대 기준으론 조령을 지나 신립이 진을 친 곳까지 가는 사이의 길도 험지다. 조령을 넘으면 대안보(안부역)가 나오고 거기서 돌고개를 넘으면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를 거쳐 북상하면 충주 남쪽 10리 지점인 단월역이다. 대안보는 조령과 하늘재에서 이어진 길이 만나는 지점으로 영남대로를 끼고 있는만큼 조선시대 사람이면 모를 수가 없는데 하늘재와 조령에서 이어진 길이 만난다는 부분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 곳 지형도 충분한 험지로 방어자 입장에서 활용할 매복 장소가 널려있었다. 그리고 대안보와 수안보를 지나 단월역으로 접근하는 길목엔 강변을 낀 잔도까지 있다. 이쪽은 신립군 바로 코앞에 있으니 절대 시간 없었다는 핑계는 댈 수 없다.
그러니까 신립은 조령만 지키지 않은 게 아니다. 궁병 몰빵 조선군 입장에서 가장 효과적인 매복-원거리 기습이라는 훌륭한 대안을 십분 수행할 수 있는 조령~대안보~단월역 코스의 험지와 단월역에서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에 있는 잔도까지 전부 방어 포기하고 내버려둔 채 '충격력이 떨어지는 궁기병'과 '그냥 병풍 취급한 보병대' 전체를 평지에 끌어모았다. 끌어모아놓고 지휘나 똑바로 했으면 모르겠는데 결국 저 귀중한 보병은 모루고 뭐고 아무런 역할도 없이 끝까지 병풍 노릇만 하다가 속절없이 학살당하는 것으로 끝나버렸다. 물론 상주 전투에서 조선군 병사들이 보여준 한심한 궁시 실력을 생각하면 신립 휘하 보병들이라고 일당백의 신궁들이었을 리는 없지만 적어도 창칼 근접전을 기대하는 것보다야 백배 현실적이었다.
여기에 경상좌방어사 변기가 신립이 오기 전에 조령에 배치되어 방어 준비를 하다가 신립의 명에 따라 철수했음을 생각하면 그 지형들을 전부 방치해야 할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측 기록에도 이일과 김여물같은 휘하 장수들이 험한 지형을 활용하자는 건의를 분명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립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립 본인의 확고한 의사에 의해 소수나마 있던 고갯길 방어 병력까지 전부 빼서 험한 길목들을 하나 남김없이 방기했음이 분명하며 신립이 명확히 밝힌 이유는 적어도 기록상으론 우리는 기병이라 밀어버리면 된다가 전부다.
이에 당시 조령에는 조령관문 같은 방어 시설이 설치되지 않아 방어전을 치르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런 논리면 신립군은 애초에 충주도 포기하고 남한산성에 진을 쳤어야 마땅할 것이다. 같은 타이밍에 죽령이나 추풍령은 얼마나 대단한 방어 시설이 있어서 효과적으로 적을 격퇴 내지 지연시켰단 말인가?
6.4. 훈련 부족설
북방 출신 기병들을 제외한 병사들이 오합지졸이거나 편제된지 너무 짧은 시간만이 지나 제대로 된 군대를 구성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설. 조선측의 상당수 기록에 사견의 개입이나 왜곡, 혹은 지나친 단순화가 가해졌다는 전제가 있어야 논리 전개가 되기 때문에 꽤 반발이 있다.
요약하자면 신립은 서울에서 모은 병사들의 훈련도나 결집력, 군기 등이 산악 지형에서 분산되어 전투를 벌이면 와해될 위험이 매우 높을 정도로 심각하다고 판단했으며 이에 따라 병사 통제가 용이한 지형(평야나 지나치게 울창하지 않은 고지, 가능하다면 요새)에서 전투를 벌이고자 했다는 것이다. 김여물의 건의와 신립의 거부는 기록 그대로가 아니라 전후에 훨씬 많은 논의가 있었으며 김여물조차도 이 병사들로 흩어져서 산악전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령의 지형으로 얻는 이점이 더 많다고 판단했다고 보는것이다.
또한 신립이 원래 원했던 전장이 탄금대가 아니고 원본 선조실록에 나온 대로 단월역에서 싸우려고 했다고 본다. 이렇게 본다면 역시 고지 앞 평야가 진창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전술적 의미가 있는 포진이 된다. 그 뒤 단월역에서 패했든 다른 사고가 있었든 간에 탄금대로 밀려나서 그 곳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고 그 전투가 탄금대 전투로 알려졌다는 것. 이에 따르면 배수진 따위는 신립의 안중에 없었고 그냥 전투 경과에 따라 하필 그런 모양새가 된 것이다.
전투 경과나 관련 인물들의 판단 근거가 적당히 합리적으로 설명되지만 당대 조선측의 기록의 상당수가 사견의 개입이나 왜곡, 지나친 단순화가 가해졌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반발이 큰 편이다. 또한 신립과 징집병 간의 상호 신뢰 문제 또한 징집병이 좀 오합지졸이라 하더라도 당대 최고의 영웅으로 이름을 날린 신립이라는 존재가 왔음에도 뭔가 해보지도 않고 적전도주를 할 만큼이었는지, 또한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본인들이 북방에서 데려온 정예병과 부관들마저 신뢰할 수 없었을 리는 없다는 점[14] 등이 문제로 꼽힌다.
6.5. 고립 방지 및 전선 유지설
일본군의 진격로는 조령 한 군데가 아닌 2군인 가토 기요마사의 진격로와 3군인 구로다 나가마사의 진격로가 달랐으며[15] 3도순변사인 신립의 지위는 단순한 야전 사령관이 아닌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전군을 통솔하는 위치였고 신립의 임무가 수군이고 육군이고 모두 총동원해서 고착 방어가 아닌 섬멸이므로 다른 일본군 부대가 우회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신립이 조령에 붙들려 있으면 다른 일본군 부대에 의해 서울까지 그대로 뚫리고 본인도 포위돼서 전멸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위에서도 언급했듯 신립은 기존에 조령에 배치된 병력까지 모두 끌어모아 결전을 시도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신립군은 일본군과 한양 사이에 존재하는 조선의 유일한 야전군이며 일본군의 급속 진격에 헝클어진 남도 일대의 지상군을 수습할 권한과 역량이 있는 유일한 지휘부이다. '''유일한''' 야전군이란 점이 중요하다. 신립이 어느 한쪽 길에서 방어전을 편다고 해도 다른 길로 한성에 일본군이 들이닥치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상황이기 때문에 단기 결전 시도 자체는 타당성을 지닌다.
전략 전술의 한국사(이상훈 교수 저)에서는 탄금대가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다고 해석한다. 현재의 탄금대는 퇴적이 많이 진행되어 충주 시내와 육지로 이어져 있지만 식민지 시대에만 해도 충주 시가지와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육계도(모래 둔덕으로 육지와 연결된 섬)였으며 퇴적이 많이 진행되지 않았을 임란 당시에는 한쪽 길로만 진입이 가능한 지역이었으리라고 추정하였다. 탄금대 자체는 일본군이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지만 충주는 달랐다. 일본군이 한양까지 가기 위해서는 중간 중간 주요 도시를 거점으로 점령해 나아가야 했는데 충주도 그 주요 도시 중의 하나였다. 충주를 점령하지 않고서는 소백산맥 이북의 진군이 어려워지므로 충주를 점령하지 못하게 견제할 수 있는 요혜지로 의미가 있다는 것.
이상훈 교수의 주장은 "탄금대는 삼면이 강과 호수로 둘러싸여 있어 동쪽의 진입로만 막으면 됐고 봄철에 서풍이 강하게 불어 조선의 원거리 발사 무기에 유리했"으며 "또 가파른 조령에서는 조선의 주력인 '''기병을 제대로 활용하기 어려웠고''' 일본군에 의해 후방이 차단돼 고립될 가능성이 있었던만큼 탄금대가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이다.[16]
조선군이 일본군을 격파할 전력을 보유하고 있을 때에나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넘길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조선에서는 나름 정예였고 규모까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되며(최대 1만 6천) 기병의 비율이 절반이 넘어가는 조선군의 특성까지 고려하면 고니시 군과 신립 군의 전력은 최소 엇비슷한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애초에 일본군과 싸워본 경험이 없고 여진을 상대로 치사 전술(궁기병이 돌진하며 활을 쏘는 전술)로 전과를 올려왔던 신립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히려 아군의 전력이 압도적이라고 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굳이 신립의 입장이 아닐지라도 일본군이 우월한 전력이었다는 주장은 전투의 결과에서 유추한 결과론적 입장에 가깝다.
일본군이 조총 부대인 걸 몰라서 그랬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일본군 내에서 조총의 비율은 결코 높지 않았고 제국주의 시대 수준의 병종적 차이가 나지 않는 이상 병기적 우위는 결코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사실 이 시대 조총은 활보다 훈련 기간이 짧아서 애용되었을 뿐이지 딱히 활에 비해 우월한 점이 있는것도 아니었다. 하나 있다면 갑옷을 활보다 잘 뚫는다는 건데 조선군이 딱히 서양 기사들처럼 중장갑으로 떡칠한 병력을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집단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장점 역시 임진왜란에서는 생각보다 큰 차이는 없었다.
- 다만 총의 장점은 관통력뿐이고 조선에선 활과 비교해 별 차이 없는 장점이라는 말은 동북아에서의 갑옷과 조총의 위치를 너무 간과한 것으로 비록 동북아가 서양의 플레이트 아머 수준의 갑옷에는 이르지 못한건 사실이지만 동양의 갑옷도 화살에 대한 충분한 방호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비단 갑옷이 아니다 하더라도 방패나 하다 못해 차일(가리개)같은 간단한 방어책만 있어도 활의 살상력은 극히 저하되었다. 실록에도 갑옷입은 여진족 상대로 화살이 통하지 않았다거나 삼포왜란 당시 중무장한 왜구 장수에게 활을 수십발 쏴도 개의치 않아한다거나 군기시에서 실험을 했는데 갑옷을 뚫지 못했다거나 갑옷, 심지어 지갑과 같은 경량 갑옷이라도 있으면 활에 대해서 방호력을 지닐 수 있다 하는 기록들이 나온다. 태조 이성계가 아지발도를 저격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고 쌍령 전투 당시 조총대의 사격으로 후퇴했다가 다시 전진하는 청군을 보며 혼란에 빠진 조총수들 대신에 화살 수십 방을 쐈던 선세강도 나무 방패 하나 때문에 청군을 결국 저지시키지 못했다.
문제는 이 쪽이 얼핏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당대인들의 증언은 무시했으며 정작 신립 자신이 이런 말을 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일단 이 주장이 성립되려면 신립이 일본군 1군, 2군, 3군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한데 당시 조선의 조정과 장수들이 이러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료적 근거는 없다. 조선 측 어느 기록을 봐도 신립이나 다른 장수들이 당장 눈 앞에 있는 고니시 군 이외에는 신경쓴 흔적이 없으며 '''신립은 정찰을 제대로 하지 않아 일본군이 조령을 언제 넘었는지조차 몰랐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신립에게 이같은 복안이 있다면 반대 주장에 대해서 상기의 이유를 들어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게 마땅하지만 신립은 기병으로 밀어버리면 된다고만 했지 그런 말은 한 적이 없다.
신립이 일본 1군, 2군, 3군의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치면 애초에 다른 진격 루트의 적에 대한 추가 요격 시도는 명백히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있어야 한다. 하늘재, 조령을 넘어오는 고니시의 1군은 신립 군과 거의 동수지만 고니시의 바로 뒤에서는 그와 비슷한 규모의 가토 군이 역시 조령으로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위에서 검토했듯이 실제로 신립군이 1만6천으로 고니시군과 동수일 가능성도 낮고 애초부터 고니시군보다는 적은 병력일 가능성이 높게 제기된다. 즉 '''충주에서 상대할 일본군이 조선군보다 우월한 전력이라는 사실은 결과론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신립은
- 1군과 2군을 합쳐 3만 6천에 달하는 적을 자신이 가진 최대 1만여 병력으로 1일 ~ 2일만에 요격해내고
- 여기서 소모된 병력을 보충, 재편성할 새도 없이 내달려 추풍령으로 진군하는 적을 저지한다.
특히 일본 3군에 대한 요격까지 염두에 두었다면 신립 군의 목표는 절대로 '''구축'''이 될 수 없고 반드시 충주 방면의 적을 '''격멸'''시켜야만 하는데 신립 스스로도 보병 전력에 대해서 크게 기대를 가지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도저히 앞뒤가 안 맞는다. 여기에 중기병 전력이 없는 신립군이 조총을 보유하고 단병 접전에 능한 일본군을 상대로 이런 전략을 짜는 것 자체가 부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경상도 전역에서 수차례 전투가 벌어졌고 신립 군에는 상주에서 일본군과 정면으로 교전해본 이일이 있었기 때문에 상대가 기존 왜구와 완전히 다른 군대라는 사실을 파악할 틈이 없었다는 변명은 성립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1군, 2군, 3군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을 때'''의 이야기. 신립이 고니시군 외의 부대를 신경쓴 기록이 없다. 신립 옹호론자들은 반박하는 사료를 내놓지 못한 채 말을 돌리고만 있다. 신립의 적정 파악에 대한 기록은 27일 친한 군관이 적이 조령을 넘었다고 보고하자 자신이 다시 나가 정찰하고 적이 보이지 않자 허위 보고를 이유로 참했다는 기록이 끝이다. 신립은 일본군이 조령을 넘지 않았다고 장계를 올렸을 뿐 척후를 다수 운용하거나 일부 병력을 차출해 탐색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일제시대 지형을 근거로 탄금대가 신립측에 유리한 지형이었다는 이상훈 교수의 주장은 완전히 논점이 빗나간 주장이다. '''신립이 선택한 전장이 정작 신립이 강조한 기병 운용에 불리한 지형이었다는 기록은 16세기를 살다간 조선인 모두의 공통된 증언이다.''' '도보로 진입이 어려운 육계도는 신립에게 유리했다'라는 명제가 참이려면 신립이 조선 각궁의 긴 사정거리를 살려 우주방어 니가와를 시전했어야 하지만 신립은 어디까지나 '기병으로 쓸어버리는' 것을 추구했는데 대체 발이 푹푹 빠지는 육계도 일대의 사주 지형이 어딜 봐서 신립에게 유리하다는 것인가? 신립의 행동에 합리적인 근거를 부여하려다보니 정작 신립의 실제 발언과 행동은 너무나 가볍게,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우회론자들이 쉽게 간과하는 것 중 하나가 방어측뿐만 아니라 공격측 역시 전선의 유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조령에서 일본 1, 2군이 막혀있는데 3군만이 홀로 추풍령을 돌파해 유유자적 북상한다면 당연히 측면이 위험해지고 진격 속도를 조정할 수밖에 없다. 한국전쟁 당시에 인민군도 춘천전투로 중부 전선의 진격에 차질이 생기자 쾌조의 진격을 멈추고 하릴없이 한강 건너편만 바라봐야 했으며 UN군 역시 무질서한 북진 끝에 전선 곳곳이 뚫려 청천강 전투와 1.4 후퇴라는 대참사를 맞이했다. 오히려 신립은 충격력은 약하지만 기동성은 확실한 자신의 기병을 동원하여 적의 우회를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상대의 병력 규모 및 진격로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이 도박과도 같은 일전 하나에 모든 가능성을 날려먹고 말았다[18] .
정리하자면 신립이 취한 전술은 위에 나온 반론을 적용시켜도 정당성이 없었다. 적의 진군로와 군세를 파악하고 1, 2, 3군을 모두 상대하기로 했다면 조령이 아니더라도 조령 이후에 충주까지 이어지는 험준한 지형들을 활용해서 최대한 시간을 끌고 적세를 탐색했어야 한다. 정작 추풍령 쪽은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도 5월초까지 버텨 한 번 싸움에 전멸한 신립보다 긴 시간을 벌어줬다.[19]
6.6. 조령 무용론
위의 전선 유지설과 비슷하지만 약간은 다른 이론. 역사학자 이희진이 주장하고 있는데 근거가 부족하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조령에만 길이 있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충주로 향하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었다. 계립령(하늘재)과 이화령은 조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는데 계립령은 비록 고갯길이라고는 하나 삼국 시대부터 내려온 군사적 요충지였다. 게다가 고니시가 위치한 문경새재는 여러 곳으로 통하는 나들목 같은 곳으로 여차하면 이화령 - 괴산으로 충주를 거치지 않고 넘어갈 위험이 있었다. 단순히 조령만 막기에는 조선 측에 큰 위험 부담이 있었다는 것이 조령 무용론의 주장이다. 만약 신립이 조령을 막고 일본군이 조령으로 쳐들어온다고 해도 일본군이 다른 길로 우회해버리면 조령은 포위가 되는 형국이 된다.[20] 방어에는 유리할지 몰라도 여러모로 불리할 수 밖에 없다는 주장.
허나 이와같이 각개 격파나 우회를 염려했다는 주장은 조령, 하늘재, 이화령 같은 영남대로 전면의 고개길의 험준함을 과소 평가하고 조선군의 방어 체계를 무시하면서 오직 신립에게만 집착하고 있다. 그냥 당시 지도 분석과 현지 답사를 제대로 안 했고 조정에서 파견한 다른 경장들의 활동에 무지하다는 소리다.
조령이 그나마 통과하기 편한 길이고 다른 샛길들은 모두 일렬로 행군하지 않으면 통과도 힘든 첩첩산중 외길이다. 하늘재와 이화령은 조선 시대에 들어 사용빈도가 크게 떨어졌는데 그 말인즉슨 조선 시대 도로 사정을 감안해도 특히나 좁고 정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1만 이상의 대군이 치중 물자까지 끌고 기동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당대 조선인의 지리 관념을 감안하면 외국인인 고니시 군이 즉시 파악하고 있었을 통로도 아니고 조령과 거리가 멀지 않아서 조령과 별도로 병력 배치가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길이 워낙 좁으니 병력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고.
조령 외에 대군이 기동할 수 있는 길목은 보다 먼 서쪽의 추풍령과 동쪽의 죽령인데 추풍령은 방어사 조경이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지원군과 함께 5월 3일까지 버티다 전라도 지원병이 근왕을 위해 빠져버리면서 구로다 군에게 무너졌고 죽령 방면은 방어사 유극량이 진치고 지키는 동안 죽령을 넘어 경상좌로 고을 병력을 배속받은 경상좌방어사 성응길이 가토와의 섣부른 전면전을 피하면서도 지속적인 견제와 안동 풍산에 진입한 선발대를 안동 석전꾼들을 징발해 물리치는 기지를 발휘해 결국 몸이 달은 가토가 죽령을 포기하고 조령으로 우회하게 만들었다.
죽령은 신립처럼 무식하게 들이받는 일 없이 성공적으로 견제해 3일 가량의 시간을 더 벌어주었고 추풍령은 지원 병력 빠져서 중과부적으로 무너졌는데 전라도군이 근왕을 위해 시급히 빠지게 만든 원인제공자가 누구?
차 타고 다니는 현대에나 우회하면 간단할거 같아 보이는 거지 전근대시대, 그것도 교통과 수레 발달이 낙후된 조선에선 우회 자체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문경새재를 지나도 충주까진 계속 산길이 이어지기 때문에 박진이 밀양 황산 잔도에서 당한 것같은 산악 우회 기동은 조령 주위에선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산길 다 버리고 (원래 있던 변기의 병력까지 빼버리고) 중기병도 아닌 궁기병으로 논과 밭, 그리고 기병이 기동하기 힘든 물가인 탄금대에 진을 쳤다. 기병대를 이끌고 물가에 진을 치고 논과 밭을 끼고 싸웠다는 것 자체가 병법에 문외한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더욱이 탄금대에서 일본군이 우회하여 충주성을 점령할 것조차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조령에서 일본군의 우회를 예상했을 리는 더욱더 만무하다. 일본군의 우회 가능성에 그렇게 신경을 쓴 사람이 일본군이 충주성에 근접했다고 따로 보고한 군관을 왜 죽여버렸을까? 또한 일본군의 고니시와 가토는 산길이어서 매복의 위험이 있는 조령을 우회하기는커녕 신속한 한양 점령을 위해 조령을 통과하여 충주에 도달했다.
무엇보다 조령에서 막아야 했다는 주장은 '''신립이 전군을 조령에 때려박아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조정은 신립, 이일과 별도로 방어사 변기(조령), 조경(추풍령), 유극량(죽령), 성응길(경상좌로) 등을 내려보냈다. 상주에서 패한 이일과 변기가 조령에서 방어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그들에게 병력 충원을 해주면 되고 크게 패한 직후인 그들이 못미덥다면 자기 병력 일부로 넘겨받아 수행하면 된다. 전술했듯 조령을 지나서도 매복 가능한 험준한 지형이 계속 이어지니 조령이 아슬아슬하면 그곳을 활용할 수 있다. 기병만 있는 것도 아니고 기병이 하마 전투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탄금대에서 싸우기로 작정했더라도 산길에서 매복을 통한 견제, 탐색을 시행해 보는 건 상식적인 범주다.
목책을 겹겹이 쌓아서 경상도에서 벌어주지 못한 시간을 하루라도 더 벌어서 조정이 대비할 시간을 줘야 하는데 탄금대 전투 한 번에 병력을 다 날려버려서 전혀 그러지 못했다.
6.7. 신립의 자질 부족설
신립이 전술적 안배로 조령~충주 사이 산길을 다 버렸다 치자. 그래서 탄금대에선 제대로 지휘를 했나? 옹호론자들이 전장 선택에만 집중하느라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하는데 '''신립의 전투지휘는 엉망이었다.''' 적에게 어느 정도 유의미한 피해를 입혔다면 전술적 사고에 아쉬움은 있으나 야전에서 저돌적인 지휘 능력은 뛰어났다고 다른 부분에서 고평가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어떠했는가?
기병 지휘에 좋다면서 선정한 전장인 달천변의 사주 지형은 서쪽의 강과 논밭, 좁은 진격로와 각종 장애물 때문에 기병의 기동을 극히 제한시켰고 바로 앞에 보이는 고니시의 중군에만 집중하느라 충주성 방면으로 우회하는 일본군은 전혀 신경쓰지 못했으며 수적으로 더 많았던 보병대는 후방에 처져 있고 기동력을 제한당한 기병대만 홀로 적진에 돌격하다 일거에 밀려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 회전에서 기본인 보병과 기병의 연계가 전혀 이뤄지지 못했고 충주성에 방어 병력도 변변한 시설도 없음을 모르지 않았을 사람이 역시 우선적으로 대비해야 할 적의 우회기동 여부도 무시했다. 전장 선정 문제를 제쳐놓고 당일의 전투양상만 살펴봐도 '''결함투성이''' 아닌가.
대부분 사람들조차도 인정할 정도로 북방에서 화려한 전공을 세우고 조선 최고의 무장으로 우대받은 신립이지만 실상 지휘관으로서 능력은 죽을 때까지 검증된 바 없었다. 일단 명성에 비해 기록도 적고 제승방략과 조선왕조실록에서 보여지는 신립의 전공은 철저히 신립 개인의 무예와 용맹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그의 지휘 능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은 없다. 신립의 무명을 있게 한 1583년 니탕개의 난 토벌 기록조차 그렇다.
1583년 초 안원보 전투에선 도망병 1명을 참수하고 혼란에 빠진 군사들을 재정비하긴 했으나 여진족의 약탈 자체를 막진 못했다. 이 해 봄에 벌어진 경원진 전투에선 백마를 탄 적장을 한 방에 사살해 적을 물러가게 했으나 그 외에는 죽을 힘을 대해 싸웠다는 대목뿐이다. 신립이 가장 빛났던 전투는 역시 봄에 벌어진 훈융진 전투인데 여진 기병 1만에게 포위된 아군을 구하기 위해 적진에 뛰어들어 추장 1명을 사살하고 후퇴하는 여진족을 추적해 70명을 사살했다. 문제는 기록상 신립이 천하의 명궁에 기마술이 대단했다는 건 알 수 있어도 전술적인 능력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여름에 치뤄진 종성진 전투에선 여진 기병 주력이 이미 철수한 상황에서 구원병으로 도착해 적 2명을 참수한 게 전부다.
탄금대 전투에서도 강물에 뛰어들기 전까지 김여물과 함께 적 수십 명을 쳐죽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정말 싸움은 엄청 잘했던 거 같지만 전략 전술적 역량은 전혀 검증된 바 없다. 전근대 동양 전쟁 기록이 동시기 서양에 비해 축약이 심해 '몇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어디를 쳐서 크게 승리했다' 식의 기록이 전부라 기록만으로 신립의 역량을 알 수 없다는 주장이 있는데 '''신립은 예외다.''' 이일이 정리한 제승방략에서 신립의 대 여진 전투를 전훈으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함경도 북방의 진보와 주둔 병력, 편제, 지형지물들을 모두 상세히 적은 이 책은 후대에 참고할 수 있도록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를 비롯한 전투 수십 개를 당시 동양 기준으로 상당히 상세하게 기록했다.[21] 오늘날 우리가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에 대해서 한 눈에 알 수 있는 것도 이 기록 덕분인데 그건 참조하면서 신립의 기록은 간략해서 믿을 수 없다는 건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신립은 이일이 상세하게 남겨준 덕분에 사료 유실이 극심했던 임진왜란기 지휘관 중에 난중일기, 임진장초, 장계별책이 남아 있는 이순신 다음으로 기록이 풍부한 지휘관이다. '''신립의 전술이나 성향을 살피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패전하고 죽은 지휘관은 아군이 전멸해 기록이 제대로 남지 못한 경우도 많은데 신립은 마지막 전투인 탄금대 전투 기록도 상당히 풍부하다. 고니시가 세키가하라에서 몰락해 그의 가문에 남아있던 임진왜란 참전 기록이 유실되는 와중에도 일본측 기록인 서정일기가 남았고 전투 참전자로 조선군이 무너지는 걸 직접 보았을 신흠이 빠져나와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기록에서 신립은 일신의 용맹 외의 전술적 역량을 보여준 바 없다.
니탕개의 난 때 준동한 여진족은 규모는 상당했지만 어디까지나 약탈을 위해 움직였다. 최대 1만~2만 정도로 뭉쳐 소규모로 분산 배치된 조선군의 방어 진지를 공격해 무너뜨리고 약탈을 자행한 후 돌아갔다. 약탈을 하지 못해도 조선군 지원 병력이 도착하거나 조선군의 저항이 완강하면 큰 고민없이 물러났다. 즉 내부 통일을 이뤄 국가 단위로 성장한 누르하치 시절과 비교하면 수준이 현격히 낮았다.
무예 이외의 다른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는 기록도 없는데 성격은 또 '''굉장히 거칠고 오만했다.''' 신립이 난폭하고 아랫사람을 함부로 다룬 것은 징비록, 상촌집, 기재사초, 난중잡록, 계갑일록 등 여러 사료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선조수정실록에선 탄금대 전투를 앞두고 일본군이 조령을 넘었다고 보고한 군관을 미친 소리 한다며 죽여버렸다는 기록도 나온다. 정식 보고 절차도 없이 동네방네 일본군이 온다는 말을 퍼뜨리던 농민을 하루 기다려 처형한 이일은 어쨌든 그 농민이 장담한 하루의 시간 동안은 기다려주었고 당시 이일 군이 처한 열악한 상황과 엄격한 전근대 군법을 감안하면 있을 법한 일이지만 신립에게 죽은 군관은 정식으로 보고 절차를 거쳤음이 분명하기에 어떻게 변호할 여지가 없다. 또한 그는 일본군을 대놓고 얕잡아 보았고 군 경력으로 선배이자 상주에서 일본군의 전술과 규모를 파악했던 이일의 조언을 대놓고 무시했다. 이일이 북도 제승방략을 정리한 인물이자 신립처럼 여진 기병과의 전투에서 무명을 쌓은 인물이란 점을 고려하면 그의 말은 결코 무시해도 되는 게 아니었다.
이일은 북도 제승방략을 체계화하며 군사 이론가로서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고 왜란 당시에도 일본군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었거나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적을 맞았다. 이에 반해 신립은 할 수 있는 최대의 지원을 받아 병력도 비교적 충실했고 조령이란 험지를 방어 거점으로 활용할 시간이 이틀이나 주어져 있었다. 게다가 이일에게서 일본군의 전투 방식에 대한 정보까진 전해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모든 이점을 무시했다. 험준한 조령을 포기하고 기병을 운용하기 힘든 탄금대를 회전 장소로 골랐고 이일과 김여물의 조언도 무시했다. 전투 직전 일본군의 동향에 대해 보고한 장교를 보고 내용이 마음에 안 든다고 죽여버린 데서 알 수 있듯 신립은 용맹하긴 하나 이성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군대가 한양과 일본군 사이의 '''유일한 야전군'''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이 얼마나 신중치 못한 행동이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종합해보면 신립은 일신의 무예 외에 제대로 된 지휘 능력을 보여줬다는 기록은 신립을 호의적으로 적은 사료에서조차 존재하지 않으며 인격면에선 안하무인에 부하들에겐 막되먹은 상관이었다. 여기에 왕의 사돈('''당시까지 계승이 유력하던''' 신성군의 장인)이 된 데다가 상방검까지 받자 눈에 보이는 게 없어졌다고 하면 일본군을 깔보고 탄금대를 선택한 이유와도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조선 시대 내내 지속된 신립에 대한 비판은 실전을 모르는 유생들의 입놀림이 아니었다. 당시는 철도, 고속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영남과 서울을 오갈 때 자연스럽게 조령의 험준한 고갯길을 '''직접 체험'''해야 했다. 이 험한 고갯길을 넘어가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탄금대보다 조령 고갯길이 방어하기 훨씬 좋은 지형이라는 건 몸으로도 느낄 수 있는 사실이었다. 위에서 충주가 요충지라 했는데 신립은 충주성조차 버렸다.[22] 반면 이보다 3개월여 뒤에 벌어진 이치 전투에서는 험한 지형 요건을 활용하여 연대급도 안 되는 병력으로 사단급 병력의 침공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으니 어느 쪽이 더 가치있는 행위인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신립이 탄금대에 진을 친 것을 다른 쪽으로 해석한다면 탄금대 자체를 선택한 이유는 당연히 기병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의미를 가지며 또한 적이 한양으로 도달하는 시간을 늦추기만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애시당초 신립이 탄금대 전투를 앞두고 의기양양해 일본군의 전력 자체를 무시 내지 충분히 야전에서 돌파 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가정한다면 전라도 방면의 근왕군 또한 생각의 범위 내에 있었을 것이고 탄금대에서의 전투를 어떻게든 승리로 이끌고 나서 전라도 근왕군과 합세한 이후를 상정한 작전이었을 가능성도 매우 적으나 있을 수 있다. 즉 신립이 탄금대 전투를 어떻게든 이기고 나서 전라도 근왕군과 합세 이후 도달하는 일본군[23] 을 상대하거나 하는 전략을 세운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첫째로 전라도 근왕군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는지도 명확하지 않으며 둘째로 자신이 직접 거느린 보병마저도 아무 기대없이 활용을 포기하고 기병에만 의지해버린 위인이 '''전라군의 북상을 알았다고 한들 유의미한 전력으로 계산을 했을지도 의문'''이다.
조경남이 전쟁 중 자신이 접한 모든 기록과 증언을 모아 저술한 난중잡록과 이를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수정실록에는 신립이 이일의 패배 소식에 "적의 기세가 강하니 후퇴해 한양에서 지키도록 하소서."라는 장계를 올렸다는 기사가 있는데 탄금대 전투 생존자인 신흠의 상촌집을 비롯해 거의 모든 조선 측 사료에서 신립은 전투 의지 만만에 적을 얕보고 있기에 서로 충돌한다. 하지만 한양은 방어에 용이한 요새같은 게 아니고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읍이기 때문에 무언가 착오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외방의 군사는 모이지 않고 도성에는 전후하여 대부분의 장정들이 거의 징발되었으므로 도원수(김명원(金命元)을 말한다) 역시 군사가 없었다. 상주에서 (이일이) 패배한 보고가 이르고 '''신립(申砬) 또한 비밀히 아뢰기를 ‘적의 기세가 매우 드세니 도성으로 후퇴하여 지키도록 하소서.’ 하였다.'''.
7. 여담
- 총포가 최초로 활약했다는 점에서 이보다 반 세기 앞서 유럽에서 벌어졌던 파비아 전투와 유사하다. 이때도 풀 플레이트 아머로 무장한 8천여기의 프랑스 정예 중장기사단이 돌진 중 3천명의 스페인 총병대의 화승총 세례를 받아 저항조차 제대로 못한채 모두 학살당했고 결국 최종 사상자 15000명 vs 500명의 신화를 썼다.
-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의하면 고위 장수 1명이 생포되었는데 스스로 죽기를 원하여 죽게 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일은 달아났고 신립과 김여물은 투신했으므로 이종장이나 이희립일 가능성이 높다. 의외로 김여물일 가능성도 있다. 회본태합기에서는 김여물이 피칠갑을 하고 도끼를 휘두르면서 "김여물이 여기 있다!"라고 외치면서 일본군 8명, 9명을 베고 말에서 끌어내려져 참수되었다고 한다. 김여물이 투신했다는 조선과는 기록이 상충되는 내용이다.
- 이형석 장군의 《임진전란사》에서는 신립이 기병 돌격을 세 차례 하여 여러 번 일본군을 물리쳤다고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는 불확실하다. 단지 여러 차례 돌격을 시도하다가 번번이 실패했다는 점만이 여러 1차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참조할 만한 글
- 신립의 행동이 너무나 이해가 안 된 탓에 조선 시대에는 '신립이 귀신에 홀렸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임진록의 어떤 판본에서는 신립이 이전에 죽인 자의 원혼이 양민으로 가장하여 신립에게 거짓 정보를 고한 탓에 탄금대를 결전장으로 택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온다. 또 어느 야담(野談)에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전한다. 신립을 사모하던 처녀가 집에 불을 지르고 분신 자살한 후 원혼이 되어 따라다니는 것을 장인인 권율이 유리병에 봉인해 호신부(護身符)로 지니고 다니라고 주었다. 그러나 결전 직전의 작전 회의 중 이 유리병의 마개가 뽑히며 "탄금대로, 탄금대로." 하고 원혼의 목소리가 울렸는데 신립이 이를 하늘의 뜻으로 오해하여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쳐 장렬히 전사했다는 이야기다(이우혁의 왜란종결자도 이 쪽이다.). 조령을 지키는 관문인 문경새재가 있는 경상북도 문경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토착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임진왜란 종전 이후 나온 소설 달천몽유록에선 많은 군졸을 개죽음시킨 졸장 신립을 명장이랍시고 기린다며 귀신들이 한탄하는 묘사까지 나올 정도였다. 조선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신립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증거라 하겠다.
- 2015년에 드라마 징비록이 방영된 영향인지 탄금대 전투에 시비를 거는 국까들이 많아지고 징비록 갤에서도 난리를 폈다. 심지어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탄금대 전투 문서가 반달당하기까지 했다. 링크나 정황으로 봐서 반달의 장본인은 책사풍후임이 확실시되고 있다. 탄금대 전투에 가열차게 시비를 거는 역갤러라면 특히 책사풍후가 두드러지기 때문. 탄금대 전투의 패배가 뼈아프긴 하지만 8천이 맞건 1만 6천이 맞건 비록 정예 기병 부대이긴 했어도 여러 정황상 조선 측이 불리했던 전쟁은 맞다고 봐야 한다. 조선군 수를 8만(...)으로 뻥튀기하는 주장은 순 헛소리니 믿지 말자.
- 정유재란 당시에 일어난 직산 전투와는 적잖은 공통점이 있는 전투로 당시 임진, 정유란 초기 단계에 각각 부산진 전투와 동래성 전투, 상주 전투(임진왜란), 남원 전투(정유재란)에서 승리를 거둔 후 압도적인 기세로 북상하는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한 전략적 목표를 가진 전투라는 점, 평야 지대에서 (아군이) 다수의 기병대를 운용하여 벌인 일대 회전이라는 점 등이 같다 하겠다. 차이점이라면 아군으로서 전투의 주체가 각각 신립의 조선군과 해생의 명나라 군대라는 점과 무엇보다 신립은 일본군의 북상 저지라는 목적 달성에 실패하였고 해생은 성공했다는 점이다.
8. 대중 매체
전쟁 초, 조선군 최정예 부대의 괴멸과 함께 보병과 기병, 조총과 활이라는 세기의 대결답게 중요하게 다룬다.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에는 12화에 나온다. 신립이 원래 조령을 방어하려고 했는데 탈영병이 많아서 달아날 곳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는 설정을 사용했다. 소 요시토시가 부상입은 포로들을 풀어주어서 포로들이 퍼뜨린 소문이 공포로 변하며 신립 수하의 병사들이 대거 탈영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직접적인 전투 장면은 안 나오고 현소가 궤멸된 조선군의 시체를 보며 불경을 읊조리는 장면만 나오며 홀로 남은 신립(김영인 분)은 절벽끝에서 오열하면서 배에 스스로 칼을 꽂은 채 비장하게 자결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8.1.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
출정식부터 신립의 투구가 땅에 떨어지는 불길한 징조가 있었다는 징비록의 기록이 소개된다.
이동 중에는 제승방략 체제의 문제 등으로 하루에 100여명씩 도망병이 발생했던 것으로 묘사된다. 나레이터 겸 사회자인 신승수 감독이 한 조선군 보조 출연자를 붙잡고 '수염은 왜 이따위로 붙였어?' 등으로 갈구자 보조 출연자가 '나 안 할래요!' 하고 툴툴거리며 가버리는 제4의 벽 묘사가 포인트.
결국 신립은 조령을 포기하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기병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전투 당일, 하필이면 기병에게 불리한 비가 내렸다. 일본군은 오다 노부나가가 개발한 3단 철포 사격 방식을 이 전투에서 채용해 말 그대로 기병들을 도륙했다. 기존의 사극에서 조총을 마치 현대의 소총 사격하듯 막 사격하는 방식이 아니라 탄약을 장전하고 심지를 꽂은 후 불을 붙이는, 사극에서는 추노 정도에서야 보여준 정식으로 조총 사격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내용은 일본군들이 조선 기병을 사냥하는 것이라서 그런지 낙마하는 기병 장수들만 주야장천 나온다.
이 컷의 엔딩은 신립을 포함한 조선 기병들의 시체가 금강에 둥둥 떠 있는 장면인데 이 때 조선 기병들이 흘린 피로 탄금대 강물의 색깔이 갈색에 가까운 빨간색으로 물들었다. 이 광경을 지켜 본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 이제 조선 최고의 명장 신립이 전사했다. 이제 우리의 앞을 막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 자 북쪽으로 진격하자. 북진!"이라고 외치며 행군을 시작한다. 그리고 선조는 신립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도망친다.
8.2. 불멸의 이순신
탄금대 전투는 57화 중반부터 다루어진다. 김여물을 포함하여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마군이 보병보다 더 큰 우위에 있음을 상기해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전투를 치를 것을 결정하고 군관 이운룡이 이를 끝까지 반대하자 명령 불복종으로 곤장형을 내린다. 그날 밤에 이운룡에게 절반이 오합지졸이란 점과 함께 배수의 진을 치는 이유에 대해 말한다. “승리가 아니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야.”라고 신립이 언급하는데 최후에 대한 복선이었다.소 요시토시 : (조령이 텅 비었다는 척후병의 보고를 듣고) "다시 가서 제대로 살펴! 그 같은 천혜의 요새를 버릴 바보 멍청이가 어디 있단 말이냐?"
(장면이 바뀌자마자)
신립 : "'''조령은, 버린다.'''"
신립이 조령을 버렸다는 소식에 고니시는 이제 한양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며 좋아하고 신립군과 대치한다.
돌격하는 일본군 선봉대를 활로 무찌른 후 100보 앞까지만 진격하란 명을 받고 돌격하는 두 번째 일본군 부대를 향해 기병대가 나선다. 그러나 이는 조선의 기병을 끌어내기 위한 유인책이었다.
기병들은 곧 늪을 만났고 말들이 늪에 빠지면서 기병은 조총의 표적이 되어 허무하게 리타이어. 이를 본 신립은 나머지 병사들을 이끌고 돌격하나 이들 역시 조총 사격으로 괴멸당한다. 이어진 일본군의 총 공격으로 나머지 조선군도 이내 무너진다.
신립은 생포하려는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강을 향해 달려가는 장면으로 비장한 최후를 맞이하며, 신립을 생포하라고 명을 내린 고니시가 소 요시토시에게 '''"조선의 명장을 사무라이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지."'''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마지막으로 신립의 최후와 피로 물든 전장을 보여주는 장면은 비장한 느낌을 주는 OST와 더불어 연출적으로도 굉장히 비장미가 넘치게 다루어졌다.
8.3. 징비록(드라마)
'''드라마에 대한 평가를 크게 후퇴시킨 최악의 묘사 중 하나.''' 괜찮은 퀄리티를 유지하며 시청자들의 기대를 받고 있던 징비록은 탄금대 전투 씬을 기점으로 이전의 평가를 회복하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무능한 주제에 이름만 높은 졸장 취급받던 신립을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재해석해보고자 이런저런 시도를 했지만 결국 그 재해석이 실제 역사의 영역까지 건드려 역사 왜곡을 일으킨데다 연출의 부실함까지 겹쳐 폭망해버린 케이스다.
징비록(드라마)에서 14화의 말미와 15화에 걸쳐 다룬다. 14화 말미에서 상주에서 패한 이일은 신립에 합류하며 조령에서 충주로 진을 옮긴 이유를 묻는다. 이에 신립은 처음엔 조령에서 진을 쳤으나 상주의 패전 소식을 접하고 충주로 진을 옮겼다고 한다.
이런 결정에 대해서 이일이 조총의 위력을 말했지만 신립은 활이 가지고 있는 사거리의 우위와 조총의 장전 시간을 지적하며 승산이 충분하다고 반박한다. 이에 이일은 장전 시간을 상회하는 일본군의 전술 운용을 언급하면서 조령으로 다시 진을 옮기자고 권유한다. 이에 신립의 부장인 김여물도 이일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러나 신립은 거기에 추가적으로 남하하면서 모은 지방군의 열악한 훈련 상태, 다시 조령으로 진군할 시의 시간적 문제, 적이 조령을 우회하여 한양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 등을 고려하면 한양으로 반드시 거치는 길목인 탄금대에서의 야전 결전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가히 설명충 스피드왜건의 수준이다(...).
그리고 마침내 조선군과 일본군은 탄금대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이에 맞서는 고니시는 이제야 제대로 된 전투를 한다며 좋아하면서 병력을 나눠 중앙과 좌우에서 협공을 하기로 한다. 한편 신립은 이를 예상하며 말의 간격을 최대한 벌려 조총 사격으로 날라오는 총탄을 최대한 피하며 전진한 뒤 조총의 유효 사거리 밖에서 화살을 쏘아 적의 전열을 더욱 분산시켜 공격을 한다는 계획과 함께 일본군의 기세를 꺾고 조선 전체의 사기 향상을 위해 한 바탕 결전이 필요하다며 탄금대를 전장으로 정한 이유를 추가로 말하고 패전을 할지라도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혀 한강 방어선 정비의 시간을 벌 수 있다고 한다.[24] 마침내 전투가 시작되고 고니시 군이 돌격하기 시작하자 기병들과 모든 군사들을 이끌고 고니시 군을 향해 돌격한다. 그러나 측면에 대기하던 요시토시 군의 조총 사격이 시작되었고...
그 다음 장면은 조선군이 전멸하고 신립과 김여물만 남아 강변 절벽으로 몰린 장면이다. 수십 명의 일본군들을 베어버리던 신립은 자신을 지켜보는 고니시를 향해 정정당당하게 장수들끼리 싸우자고 하지만 고니시는 아무 말 없이 비웃기만 하며 조총대에 사격을 명한다. 결국 신립과 김여물은 조총이 발사되기 직전 절벽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평가를 하자면 '''불멸의 이순신 이후 10년 만에 임진왜란을 다룬다는 대하 드라마로서의 이름값이 아까운 총체적 난국 묘사''' 다소 불안하긴 했지만 일정 수준을 이어가던 드라마의 평가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결정적인 장면으로 임진왜란의 전개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전투인데도 퀄리티나 고증이나 모두 엉망이다.
징비록에서의 전투 묘사는 불멸의 이순신에 비해 매우 빈약하였다. 들판에 모인 양측 병사들의 규모는 잘 묘사되었는데 '''비장한 돌격을 시작하며 다음 장면이 곧바로 전멸 장면'''이니(...). 사실 2회 앞서 묘사된 '''부산진 전투'''의 연출[25] 이 매우 훌륭한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탄금대 전투에 시청자들이 거는 기대가 은근히 컸기에 실망감이 더 커진 면도 있다. 물론 <불멸의 이순신>에 비해 반의 반도 안 되는 예산(110여 억 원)이 제일 큰 한계였지만[26] 각 전투별 퀄리티 배분을 못 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사실 이것보다 '''훨씬 더 큰 문제는 역사 왜곡 문제'''에 있다. 전투 직후의 전장을 비추면서 내레이션을 통해 탄금대 전투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고니시 군의 절반이 죽거나 다쳤다'''는 설명을 넣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고니시("이기긴 했으나 손실이 너무 컸어.")와 가토(고니시 군의 손실을 비웃는다.)의 대사를 통해 이를 확인해 주기까지 한다. 무비판적으로 시청할 경우 낚이기 쉬운 연출이다.
내레이션을 통해 고니시의 군이 탄금대 전투를 통해 많은 손실이 있었기에 한양까지 진군한 후 주저하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어불성설이다. 고대 ~ 현대를 막론하고 부대원의 '''30% 이상이 사상자가 되어 버리면 그 부대는 전멸'''이다.[27] 하물며 내레이션대로 사상자가 태반에 이르렀다면 고니시 군은 충주에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고니시와 가토의 한양 쟁탈 속도전 같은 정치적 배경 이전에 물리적으로 더 이상의 진군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의 고니시 군은 '''탄금대 전투 직후 쾌속 진군'''을 개시하였고 이는 '''탄금대 전투에서의 손실이 경미하거나 거의 없었음을 의미'''한다. 참고로 고니시 군의 병력이 처음의 절반 이하인 8000여 명으로 줄어드는 건 그 다음 해인 1593년, 조명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에서 쫓겨난 후의 이야기이다.
또한 신립이 적의 병력이 우리보다 더 우세하니 병력을 나눌 것이고 그게 우리한테 유리할 것이라고 얘기하는데 실제 역사상의 전투에서는 적이 병력을 나눈 것을 몰랐을 확률이 높다. 실제로 신립이 대패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적 본대를 상대하던 중 갑툭튀한 일본 좌우군의 조총 연사다. 징비록의 신립은 적이 철포를 가지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고 적의 본대가 나뉘었을 거라고 돌아가는 모든 전황을 상세히 다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유 없이 발리는 격. 또한 탄금대에서 네 차례에 걸쳐 일본군의 돌격을 모두 격퇴했다는 내용도 실제 기록상으로는 없다.
무엇보다 압권은 이 작품의 제목이 자그마치 '''징비록'''이라는 것. 신립에 대해서 일관적으로 부정적이었던 류성룡의 시각과 기록과는 전혀 다른 탄금대 전투를 창조해버렸다. 차라리 그대로 불멸의 이순신 묘사를 복붙했다면 최근의 시각을 반영하진 않았어도 적어도 징비록의 취지에는 확연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14화의 막바지에 고니시의 일본군 제 1군과 신립의 조선군이 대치하는 장면에서 징비록의 오프닝 ost가 거의 풀버전으로 나온다.
9. 전설
탄금대 전투 후 살아남은 병사들이 물에서 신립을 건져내자 신립의 두 눈은 부릅뜬 상태에다가 두 주먹을 꽉 쥐고 호령할 듯한 기세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나라를 지키겠다는 충성심이 죽어서도 나타난 것이다. 나중에 신립을 장사를 지내게 되자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신대리에 묻혔는데 이곳에 묘가 생기자 말이 못 움직여서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가야만 했다. 언젠가 한 지나가던 선비가 이곳을 지나다 말이 못 움직이자 선비는 "아무리 장군의 원통함이 크다 할지라도 무고한 행인들을 불편하게 함은 온당치 못하다."고 호통을 치자 뇌성벽력과 함께 바위 위에 벼락이 내리쳐 바위 윗부분이 없어지고 그 옆에 큰 연못이 생겼다고 한다. 그 후로는 괴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이 바위가 훗날 곤지암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