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왜 전쟁

 


'''신라-왜 전쟁'''(삼한정벌)[1]
新羅・倭戰爭(三韓征伐(さんかんせいばつ) | Silla–Wa War

[image]
'''기간'''
364년 음력 4월 - 404년(407년?)
'''장소'''
한반도 중・남부[2]
'''원인'''
백제왜국(야마토 정권)신라 복속 시도[3][4]
'''교전국'''
[image] '''신라'''
[image] '''고구려'''
[image] '''일본'''
[image] '''백제'''
'''가야'''(?)
'''지휘관'''
[image] 내물 마립간
[image] 고국양왕
[image] 광개토대왕

<^|1>[image] 닌토쿠 덴노
[image] 리추 덴노
[주의]
'''병력'''
병력 불명
,광개토대왕의 신라 원군 5만여 명,
병력 불명

'''결과'''
고구려-신라군의 왜군 격퇴
'''영향'''
신라의 대고구려 의존도 심화[5]
1. 개요
2. 내용
4. 관련문서

[clearfix]

1. 개요


'''신라-왜 전쟁''', '''광개토대왕의 신라 구원''' 또는 '''신라의 왜군 격퇴''' 사건은 4세기 중엽 - 5세기 초에 연쇄적・다발적으로 일어난 고대 일본의 한반도 침공을 이른다. 외세와의 교류가 드물었던 일본에서는 이 당시의 사건이 고쿠후 문화(国風文化)[6] 시기부터 임진왜란, 제국주의기에 이르기까지 야마토 민족의 민족주의적 구심점으로 작용[7]하였기에, 《일본서기》의 내용을 반영한 '삼한정벌(三韓征伐(さんかんせいばつ)' 등의 호칭으로 부르고 있다(위키백과 일본어판의 기술).
다만, 일본에서 '삼한정벌'을 이야기할 때는 역사적 사실로서의 왜군의 침공을 이야기하면서도 중간중간 《일본서기》에만 존재하는 '신화적 내용'을 가미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교차검증되지 않은 픽션으로 사료가 오염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특히 '삼한'이라 하면 마한, 변한, 진한으로 대표되는 한반도 남부를 모두 일컫지만, 실제로 당시 일본이 간접적으로 협력 관계에 있던 백제를 침공했다고 보기는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측면이 있으며, 이 밖의 다른 지역을 복속했다는 명확한 증거도 없다. 이에 현대 일본 학자들 가운데서는 '삼한정벌' 대신 '신라 정벌' 또는 '신라 토벌'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8].
신라-왜 전쟁은 당시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나타내는 한 단면이기에, 임나일본부설, 한반도 남부의 전방후원분의 분포 논쟁,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조 해석 논쟁, 일본으로의 질자(質子;볼모) 논란이나 칠지도 논란 등 '''다른 많은 고대사 논쟁과 얽히고 설킨 관계에 있다'''. 심지어는 이것이 한일관계 악연의 근원이라는 해석도 간혹 존재한다. 따라서 올바른 역사 연구를 위해서는 미디어 리터러시, 즉 여러가지 정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2. 내용


삼국 시대 중기 이후의 역사는 많은 사료가 소실되어, 삼국사기, 삼국유사일본서기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학자들은 사료 이외에 고고학, 금석학 유물을 조사하여 4세기 한반도와 일본의 역사를 유추했다. 이와 관련된 증거로는 대표적으로 《광개토대왕릉비》, 《호우명 그릇》 등이 있다.
그래도 관련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4세기 후반에(내물 마랍간 재위기) 왜의 잦은 침공이 있었으며[9], 이 왜는 백제와의 공동전선을 폈고, 힘에 부친 신라는 고구려에게 조공을 하면서 까지 고구려의 지원을 받았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10].
광개토대왕릉비 의 내용은 당시 왜의 신라 공격 상황과 고구려의 구원병력 5만의 출동 및 신라 이사금으로 하여금 직접 고구려를 방문하여 조공케 했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영락 10년 경자년(서기 400년), (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경주)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도착하자마자 왜적이 퇴각하여 그 뒤를 지체없이 쫓아 임나가라의 종발성[11]

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이에) 신라인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다.(관군이) 신라성, □성을 왜구가 크게 무너지니 성(城)……[12]……. ▨▨▨ 신라인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다. 과거 신라의 매금(이사금)은 직접 와서 여쭈지 않았는데,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직접 와서 여쭈고 조공하였다.''' (원문 :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 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新羅城□城 倭寇大潰 城▨▨▨盡□□□安羅人戍兵新□□□□其□□□□□□□言□□□□□□□□□□□□□□□□□□□□□□□□□□辭□□□□□□□□□□□□□潰□▨▨▨ 安羅人戍兵.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 □□□□ 寐錦□□僕 勾□□□□朝貢.)

삼국사기 에는 해당 기록이 나와 있지 않다. 서기 363년 내물 마립간(이사금)이 토함산에서 왜군을 격파한 기록이나 393년에 왜군이 금성을 닷새간 포위한 기록등이 나오지만 같은 내물 마립간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해당 400년(혹은 399년) 고구려군대가 지원을 한 전쟁에 대한 기록은 없다 [13].

3. 신라 측의 공격



보통 신라왜구들한테 시달렸다고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일본역사서들에서는 '''신라가 일본을 침공한 기록'''들도 꽤나 많이 나오는 편이다.
물론 신라가 왜국을 침공하였다는 일본측의 기록들은 한국측 사서인 삼국사기에서는 확인이되지 않기 때문에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현재로서는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다수이다.
하지만 일본측 사서들에서 꾸준히 확인되는 신라의 일본 침공 기록들을 무턱대고 부정만 할 수는 없으므로 아직까지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14]
만약 일본측 사서들에서 나오는 신라의 왜 침공 기록들이 전부 다 사실이라면 신라와 왜는 서로간의 무수한 침공을 주고받는 치열한 전쟁을 무려 수백년 동안 계속 이어온 셈이 된다. 더 자세한 내용들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를 참조.

4. 관련문서


[1] 일본 학계에서 사용하는 키워드. 일본 『국사대사전(国史大辞典)』에는 '신라정토'로 기술하기도 함.[2]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왜군이 고구려의 옛 대방군(현 황해도) 지역을 공격하여 수군을 동원하여 섬멸했다고 기술되어 있다.[3] 일본서기 주해, 村井(1999).[4] 사실 일본서기 원문에서는 진구 황후가 하늘의 계시를 받고 신라에 물난리를 일으켜 항복시켰다는 신화가 나온다. 이는 당시 신라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싶었던 일본인들의 욕망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주의] 이주갑인상에 따른 일본서기의 창・변작으로 사료되고 있음.[5] "三十七年 春正月 高句麗遣使 王以高句麗强盛 送伊湌大西知子實聖爲質。"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3권.[6] 국풍 문화. 당나라가 쇠퇴하자 일본이 견당사의 파견을 중지하고 일본 내부의 독자적 발전에 집중하기 시작한 10세기-12세기 경의 문화를 의미한다.[7] 「八幡愚童訓」『日本大百科全書』小学館。[8] 다만 신라의 정벌에도 실패했다(...)[9] 삼국사기, 일본서기, 광개토대왕릉비 등.[10] 광개토대왕릉비 등[11] 금관가야 지역의 성이다.[12] 이 부분 71자는 글자 훼손 때문에 판독 불명.… 대체로 고구려가 신라와 임나가라 지역의 왜(倭)-백제 연합세력을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한 내용일 것으로 추정.[13] 393년의 침공에 관한 기록은 1~2년 정도의 오차가 있는 점을 제외하면 삼국사기의 기록과 얼추 맞는다. 물론 이 전투에서 고구려가 도왔가는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없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의 해당 기록은 훼손 및 표기의 해석에 따라 여러 주장을 낳았고 그 중 하나가 임나일본부설이다[14] 삼국사기고려시대 편찬된 역사서이고 김부식이 유학자의 입장에서 썼으므로 신라의 기록이 있었더라도 이를 무시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견훤경애왕을 죽였던 '서라벌 침공' 당시 견훤이 이끌던 후백제군이 경주를 약탈하고 방화를 저질러 화려했던 신라의 보물들과 문화재들이 안타깝게도 다수 손실되었는데 이 때에 신라측이 보관하던 사서들도 상당수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