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1. 개요
2. 목록
2.1.1. 신라의 일본정벌 관련기록들(명석포 침공과 서일본 침공)
2.1.1.1. 의문점
2.2.1. 백제유민의 미야자키 현 점거 및 신라의 미야자키 현 침공 기록
2.2.2. 통일신라의 서일본 침공 기록
3. 신라의 일본 침공 루트는?
4. 기타 기록들
4.1. 실성 마립간 시기 신라의 대마도 공격시도와 왜병 격퇴
4.2. 성덕왕 시기 신라의 일본군 격퇴
5. 여담
6. 같이 보기


1. 개요


보통 신라왜구들한테 시달렸다고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일본역사서들에서는 '''신라가 일본을 침공한 기록'''들도 꽤나 많이 나오는 편이다.
다만 신라가 왜국을 침공하였다는 기록들은 일본 측의 기록들은 대부분이 한국 측 사서인 삼국사기 등에서는 확인이 되지 않고 한국 측 기록에서는 거의 조선시대 이후 기록[1]부터 등장하기 때문에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현재로서는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다수이다.
하지만 일본 측 사서들에서 꾸준히 확인이 되므로, 아직까지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삼국사기가 삼국통일로부터 500여년이 지난 시대인 고려시대 중기 1145년에 편찬된 역사서이다보니 설령 그런 사건이 실제로 있었더라도 그 사이 오랜 세월 동안 소실되어 기록이 남지 않은 부분이 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 측 기록에서 누락된 부분이 일본 측 기록에서 증명된 경우도 고당회의, 사비회의, 백제 성왕의 최후 등 몇몇 사례는 이미 증명되기도 했다.[2]

2. 목록



2.1. 삼국시대



2.1.1. 신라의 일본정벌 관련기록들(명석포 침공과 서일본 침공)


을묘년 신라 유례왕 12년, 고구려 봉상왕 4년, 백제 책계왕 10년(진 혜제 원강 5년, 서기 295년)

봄 계림이 왜를 정벌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신라 왕이, 왜인이 자주 침범하고 백성을 편안히 살지 못하게 함을 분히 여겨, 백제와 함께 동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에 들어가 칠 것을 도모하니, 서불한(舒弗邯) 홍권(弘權)이 간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하여 험난을 무릅쓰고 원정(遠征)하면 생각지 않은 위험이 있을까 두려운데, 하물며 백제는 속임수가 많고 항상 병탄할 욕심을 가지고 있음에리까? 더불어 도모할 수 없습니다.”하니, 왕이 좋은 말로 여겼다.

【안】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해사록(海槎錄)》에는,

“일본은 극동에 멀리 떨어져 있고 사면이 큰 바다로 둘려 있어, 외국의 군사가 들어갈 수가 없다. 단지 그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 응신(應神) 22년에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명석포대판(大阪)에서 겨우 1백 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의 동쪽에 한 구롱(丘隴)이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이것이 백마(白馬墳)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쳐들어오니,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 주기를 청하여 백마(白馬)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다 묻었다.’ 한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응신 12년[22년] 신해가 바로 유례왕 8년에 해당되니, 이 해와는 조금 차이가 있으나 대개 같은 때의 사건인데, 東史(동사)에는 보이지 않는 것은 글이 빠진 것이다.

– 유례왕 8년 신해는 서력 291년임, 신해년은 응신 22년임

안정복 동사강목 제2상

계묘년 신라 진평왕 5년, 고구려 평원왕 25년, 백제 위덕왕 30년(진(陳) 후주(後主) 지덕(至德) 원년, 583)

2월 신라가 왜(倭)의 서변(西邊)을 토벌하였다. 왜사에서 보충

【안】 《해동기(海東記)》에는,

“왜황(倭皇) 민달(敏達) 12년 계묘(癸卯)에 신라가 서변을 토벌하였다.” – (진평왕 5년, 서력으로 583년임)

고 적혔으나 신라와 백제가 왜와 접경하여 그 환(患)을 자주 입었는데 교빙과 정벌에 대하여는 사적(史籍)에 드물어서, 바다를 건너서 왜국을 정벌하였다는 일은 듣지 못하였다. 왜사(倭史) 《연대기(年代記)》에는, “응신천황(應神天皇)이 신라의 유례왕(儒禮王) 때를 당하여,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와서 흰 말을 죽여 맹서를 받아 간 일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나라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백마총(白馬塚)이 있다.” 하고, 또 “신라가 토벌하여 온 일이 두어 곳이[번] 있었다.” 적혔으나, 우리 역사에는 전하여지지 않는다. 지금 동래(東萊)의 절영도(絶影島)에 태종대(太宗臺)가 있는데 속전(俗傳)하기를 ‘신라의 태종(太宗)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할 때 주필(駐蹕)하였던 곳’이라 한다. 신라는 조그마한 한 구석진 땅이로되, 육지로는 능히 고구려와 백제에 대적하고, 바다로는 왜국을 정벌하였으니, 그 병력의 웅대함이 삼국을 통일할 만한 것임을 생각할 수 있겠다. 후세에 해동의 온 땅덩어리가 섬나라 오랑캐[島夷]들에게 곤욕을 당한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위정자(爲政者)들은 의당 그 방어책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안정복 동사강목 제3상

정사년(광해 9, 1617) 10월 18일(기묘)

일본은 아득하게 하늘 동쪽에 있어 사방이 큰 바다이므로 외국 군사가 들어가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연대기’를 보니, 소위 ‘응신천황(應神天皇) 22년[서력 291년]에 신국(新國) 군사가 왔다.’ 하였고, 딴 본(本)에도,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 했다. 명석포는 대판까지 겨우 1백여 리다.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구롱(丘壟) 하나가 있는데, 왜인들이 가리키면서, ‘이것이 백마분(白馬墳)이라는 것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들어왔으므로 일본 사람이 화친하기를 청하여 백마를 잡아 맹세하고 말을 여기에다 묻은 까닭이다.’ 하였다. 이세(李稅)의 일을 추적(追跡)해 알았으나 밀교(密敎 임금의 비밀 전교(傳敎))에 관계된 것이므로 별도로 계초(啓草 계본(啓本)의 초고)를 만들고 여기에다 다시 갖추어 기재하지 않는다.

日本邈在天東。四面大海。外兵不入。但見其年代記。其所謂應神之二十二年。新國兵軍來。一本則曰。新羅兵入明石浦。石浦距大坂纔百有餘里。赤間關之東有一丘壟。倭人指之曰。此是白馬墳。新羅兵深入日本。日本人請和解兵。刑白馬以盟。埋馬於此故云。跟尋李稅之事。係是密敎。故別具啓草。不復具載於此。

부상록(扶桑錄)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 (조선 광해 9년에 에도막부를 방문한 통사관 이경직이 당시 열람한 일본 비장 도서의 하나인 '일본연대기'를 부상록에 옮김)

시(詩)

우리 역사를 보다가 느낌이 있어 악부체를 본떠 읊다[觀東史有感 效樂府體]

백마총행(白馬塚行)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사상록(槎上錄)에 이르기를, “일본의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倭皇) 응신(應神) 22년에 신라 군대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오니 대판(大阪)과의 거리가 겨우 1백 리 정도였다.’라 하였다.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무덤이 하나 있는데 왜인들이 그 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기가 바로 백마(白馬)의 무덤인데, 신라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일본 사람들이 화의를 청하여 군대를 풀고 백마를 잡아 맹약한 후 그 말을 저 곳에 묻었다.’고 한다.” 하였고,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의하면, 응신 22년은 신라 유리왕(儒理王) 8년[유례왕 8년이 맞음]에 해당하고, 중국으로는 진(晉)의 혜제(惠帝) 원강(元康) 원년이 되는 해[서력 291년]인데, 그 사실이 동사(東史)에는 실려 있지 않다. 해동기(海東記)에 의하면, 달민천황(達敏天皇) 계묘년[서력 583년]에 신라가 서비(西鄙)를 쳐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그 해는 신라 진평왕 5년에 해당하고, 또 원정천황(元正天皇) 경신년에도 신라가 서비를 쳐들어왔다고 했는데, 그 때는 신라 성덕왕 19년[서력 720년]이지만 그 사실이 이 동사에는 다 빠지고 없다. 지금 동래(東萊) 바다 절영도(絶影島)에 옛 진지가 있는데, 세상에 전해 오는 말로 신라 태종이 왜국을 정벌할 때 쌓은 것이라 하여, 이에 태종대(太宗臺)라고 불린다.

일본 지역에 백마총이 있는데 / 白馬塚在日域

왜인들이 대를 이어 그 무덤을 손질하며 하는 말이 / 倭人世世勤封築

옛날에 신라 왕이 쳐들어 올 때 / 謂昔羅王憤侵軼

수만 명 정병이 바다에 떠 밀려오니 / 精兵數萬浮海伐

물귀신도 뒤로 주춤 해신(海神)도 길을 비켜 / 馮夷淪易海若奔

큰 바다 동쪽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네 / 大海以東無涯藩

용 깃발을 휘날리고 타고를 울리면서 / 揚龍旆擊鼉鼓

선발대가 곧바로 명석포를 공격하니 / 前茅直擣明石浦

왜왕이 겁에 질려 화친을 청하고는 / 倭王失色事和親

짐승 잡아 맹세 쓰고 신명께 고하였네 / 刑牲載書告明神

그 후로는 오랜 기간 바다가 조용했고 / 從此鯨波久不涌

천고의 유적으로 저 무덤이 남았다네 / 千古勝蹟留遺塚

그 옛날 진터가 절영도에도 있는데 / 絶影又有古壘寨

이것이 태종대라고 뒷사람들 말을 하지 / 後人說是太宗臺

총알만한 신라 땅 한쪽에 있었으면서 / 彈丸羅地在一隅

장하여라 병력이 어찌 그리 강했던가 / 猗歟兵力何壯哉

어쩌다가 후세 들어 옛날과는 정반대로 / 歸來後世事反古

우리 나라 전역이 적의 침략 늘 당하고 / 大東全地受侵侮

지금도 해상에는 허구 많은 공갈배가 / 至今海上多虛喝

제 욕심 채우려고 해마다 손 벌린다네 / 穀帛年年充其欲

생각하면 그리 된 것 까닭이 왜 없겠는가 / 靜思其故豈無因

서생이 부질없이 국경을 안정시킬 계책 짜본다네 / 書生謾有安邊策

안정복 / 순암선생문집 제1권

변어전고(邊圉典故) /서쪽 변방[西邊]

○ 보충. 일본 신응(神應) 22년[서력 291년]에 신라의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가니, 대판(大板)과의 거리가 1백 리라,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달라고 애걸하며 흰 말을 잡아서 맹서하였다. 호원(胡元)이 크게 군사를 동원하였으나 겨우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러 마침내 크게 패했으니, 역대로 깊이 쳐들어가 왜인에게 이긴 나라는 오직 신라뿐이었다. - 신경준(申景濬) 《여암고(旅菴藁)》

이긍익 / 연려실기술 별집 제18권

병전 兵戰 /여몽정벌(麗蒙征伐)

응신 22년(291)에 신라의 군사가 대판(大阪 오오사까)에서 1백 리 떨어진 명석포(明石浦 아까시[明石])까지 깊이 들어오니, 일본이 강화하고 적간관(赤間關) 동쪽 땅에서 백마(白馬)를 죽여 맹약(盟約)하였는데, 지금도 그 백마총(白馬塚)이 있다. 흠명(欽命 540~571)[3]

때에 신라가 일본을 치고 임나를 멸망시켰다.

이덕무 / 《청장관전서》 제65권 1793년 저.

일본은 멀리 하늘 동쪽에 있고, 사면이 큰 바다이므로, 다른 나라의 군사가 침입하지 못한다. 다만 그들의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이른바 응신(應神 응신천황을 일컬음) 22년[4]

에 신라(新羅)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 하였는데, 명석포는 대판(大坂)에서 겨우 1백 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 동편에 큰 무덤 하나가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말하기를, ‘이는 백마분(白馬墳)인데, 신라 군사가 깊이 들어오니, 일본 사람이 화호(和好)를 청하여 군사를 해산하고, 흰 말을 베어서 맹세하고, 여기에 말을 묻었다.’ 한다.

김세렴(金世濂)[5]

/ 《해사록(海槎錄)》/문견잡록(聞見雜錄)

일본 응신천황 22년(서기 291년), 신라 군사가 아카시노우라(明石浦)에 들어가니 대판(大阪:오사카)과의 거리가 백 리였으므로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 달라고 액러하여 백마를 잡아서 맹세하였다. 호원이 크게 군대를 일으켰으나 겨우 일기도(一岐島:이키시마)에 이르러 마침내 크게 패하였으니 역대로 깊이 쳐들어가 왜인에게 이긴 나라는 오직 신라뿐이었다.

昔百濟臨政太子。乘舟入日本。都周防州。號大內殿。傳四十七世而絶。其從者之裔。代襲其土。都安藝州。卽秀吉驍將輝元之祖也。余竊以臨政爲王子豐。豊甞質於日本。百濟亡。百濟宗室。迎立爲王。豐乞師於日本以拒唐。及敗不知所之。是必與倭俱東也。方蘓烈以十三萬兵。杖鉞而來合新羅。共滅百濟。而豊以覆巢餘卵。嬰孤城而號咷。其亡不日。誰肯與之同其禍乎。然而白江之敗。血戰四合。海水盡赤。倭船焚者。四百餘艘。其不焚而逃者。不知幾艘。其致兵何其多也。其得死心。又何以至此也。百濟六百五十年之間。倭寇史無一見。至其亡救不得。則以王子歸。分土存祀。此不可謂只以利結也。新羅昔于老。儐倭使言曰。早晩以汝王爲塩奴。王妃爲爨婢。此戱耳。而侮之則深也。于老以是爲倭所焚。而于老之妻。又焚殺倭使以復讎。羅人之易倭可知。日本神應之二十二年。新羅兵入明石浦。浦距大阪纔百里。日本人乞和解兵。刑白馬以盟。今赤間關之東。有白馬墳云。日本環以重溟。外兵莫加。胡元大擧。廑至日歧島而卒大敗。歷代能深入取勝者。惟新羅而已。

신경준/旅菴遺稿(여암유고)卷之三/ 序 /送使之日本序(송사지일본서)

일본 에도 막부 초기에 쓰여진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진 원강 원년 신라병이 일본을 공격하매[여], 깊이 명석포에 들어왔다."

- 元康원년은 서력 291년, 신라 유례왕 8년, 일본 응신 22년이다.

1617년 2차 조선통신사였던 이경직이 확인한 일본의 역사서(기록)인 '연대기(年代記)'[6]일본 국학의 시조격인 ‘마쓰시타 겐린(松下見林)’이 저술한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7] 그리고 1471년에 그 당시 일본에서 전래된 문헌들을 참고하여 신숙주가 간행한 해동기(海東記)와 1636년 4차 조선통신사였던 김세렴이 저술한 해사록, 또 그 해사록을 인용한 동사강목(東史綱目) 등에는 유례 이사금 시절 신라가 왜국의 대판(大阪) 근방인 명석포까지 공격 하였으며, 그 이후 진평왕 시절에도 일본의 서쪽 변방을 공격하였고 또한 태종 무열왕 시절에는 신라가 일본의 대마도를 공격 하였으며 마지막으로 남북국시대인 성덕왕 시절에 또 다시 현재의 미야자키 현과 일본의 서쪽 변방을 신라가 718년과 720년에 각각 한 번씩 총 두 차례 공격 하였다는 기록들이 나온다.
이들 기록을 보면 조선이 고대일본에 대해 갖고 있었던 인식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는 주장도 일부 있다. 즉, 과거 한반도 국가들이 고대일본에 대해 우월적인 위치를 가졌던 것으로 상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학자들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일본부설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으며 (정확히는 일본측의 기록에 등장하니 아예 근거가 없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태도였다.) 위에 등장하는 신라의 일본 침공 기록들도 과거 한반도 국가들이 고대일본에 대해 우월적인 위치를 가졌다는 태도 보다는 단순히 일본측에서 등장하는 기록이니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단순 인용만 하였을 뿐이다. 딱히 해당 기록들만을 통해서 당대 조선 지식인들이 과거 한반도 국가들이 고대일본에 대해 우월적인 위치를 가졌다고 인식하는 태도는 확인되지 않는다.[8]

즉위 12년(295년)에 유례왕은 왜국 원정을 결심하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왜인들이 자주 우리의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없으니 내 생각엔 백제와 더불어 일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어떠한가?"

이에 서불한 홍권(弘權)이 만류하였다.

"우리는 수전에 익숙지 못한데 모험을 무름쓰고 바다를 건너 원정하면 예기치 못한 변을 당할까 우려되며, 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를 삼키려는 마음이 있으니 백제와 일을 도모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이에 유례왕은 왜국 원정을 그만두었다.

삼국사기 유례 이사금

295년, 왜의 침략이 늘어나자 한 말. 하지만 물을 건너 멀리 가야 한다는 점과 백제가 배신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결국 포기한다.

반면 삼국사기에서의 기록은 위의 기록에서 처럼 유례왕이 왜국 원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만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신라가 침공을 시도한 시기도 295년으로 일본측에서 기록한 291년의 침공 시점과 약 4년 정도의 차이가 있으며 또한 진평왕과 태종 무열왕 그리고 남북국시대 성덕왕의 일본 공격에 대한 기록들이 나오지 않고 있어서 기록상 서로 차이가 있다. 물론 291년의 침공과 295년의 침공시도를 별개로 본다면 291년에는 어떤 상황인지 몰라도 실제 침공에 성공하였지만 295년의 침공시도는 여러 문제점들 때문에 결국 포기 했다고도 설명 할 수 있다. 하지만 관련 기록들이 너무 부족하여 정확한 상황은 파악 할 수가 없다.

엽전(葉田)의 위수궁(葦守宮)에서 머무름 / 어우별(御友別)의 형제자손에게 길비국을 나누어 줌

경인(10일)에 다시 엽전(葉田;하다노) [葉田은 하다(簸娜)라고 읽는다.]의 위수궁(葦守宮;아시모리노미야)으로 가서 머물렀다. 이때 어우별이 찾아와 그의 형제 자손으로 하여금 선부(膳夫;카시하데)로서 (천황)식사를 위해 봉사하도록 하였다. 천황은 어우별이 삼가 공손히 받드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길비국을 나눠서 그 자손 등에게 주었다. 즉 천도현(川嶋縣;카하시마노아가타)을 나눠서 큰 아들 도속별(稻速別;이나하야와케)에게 주었다. 그가 하도신(下道臣;시모츠미치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상도현(上道縣;가미츠미치노아가타)을 둘째 아들 중언(仲彥;나카츠히코)에게 주었다. 그가 상도신(上道臣;가미츠미치노오미)과 향옥신(香屋臣;카야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삼야현(三野縣;미노노아가타)을 제언(弟彥;오토히코)에게 주었다. 이가 삼야신(三野臣;미노노오미)의 시조다. 또 파구예현(波區藝縣;하쿠기노아가타)을 어우별의 동생 압별(鴨別;가모와케)에게 주었다. 이가 입신(笠臣;가사노오미)의 시조다. 그리고 원현(苑縣;소노노아가타)을 그의 형 포응별(浦凝別;우라코리와케)에게 주었다. 이가 원신(苑臣;소노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직부(織部;하토리베)를 형원(兄媛;에히메)에게 하사했다. 이로 인해 그 자손이 아직 길비국에 살고 있다. 이것이 그 연유이다.

(웅신 22년) 291년 9월 10일 원문

일본서기 응신(應神) 22년(서기 291년) 조에, 갑자기 등장한 어우별(御友別) 세력에게 응신왜왕이 여섯현을 떼어주었다는 기록이 유례 이사금 시절 신라가 일본을 침공했다는 기록과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

2.1.1.1. 의문점

위의 사료에서는 명석포 침공 당시 백마의 목을 베어 화의한 대상이 신라로 되어있는데 반해 임수간의 동사일기에서는 백마의 목을 베어 화의한 대상이 백제라고 되어있고 조명체의 봉사일본시문견록에서는 고려로 되어있다. 이러한 기술로 미루어보아 전승에 혼란이 있었을 수 있고 봉사일본시문견록에서 신라가 아니라 고려로 되어있는 것이 주목되는데, 1274년부터 있었던 여몽연합군의 일본 침공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볼 수 있다.
백마(白馬墳)이 있었다는 지역에서 백마분이 현재 확인이되지 않으며 고대의 사서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들이 본 백마분의 실체가 무엇이였는 지는 현재로서는 불분명하다. 일단 ‘제2회 조선통신사‘ 오윤경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갔던 이경직은 자신의 책인 '부상록(扶桑錄)'에서 "그 말을 묻은 백마분을 아카마노세키(赤間關: 적간관) 동쪽의 구릉에 썼다"고 소개하였다. 어쩌면 '백마분'이 훗날에 손실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이경직이 살펴본 연대기라는 책(기록)에 대해 밝혀진 바가 없어 2차, 3차 사료에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이고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다. 백제삼서 처럼 원형을 잃거나 소실되어버린 기록일 수도 있고.
또 다른 해석으로는 통신사행록에서 신라군이 현재의 일본 효고현까지 도달했다는 것은 천일창(천지일모)과 관련된 집단의 도왜 사실이 '일본 침공'의 설화로 전승된 것이라는 관점도 있다.
문제는 《일본서기》에서 사로국 즉, 신라 출신의 왕자라고 주장하는 천일창(天日槍)의 경우 해당 문서를 보면 확인 할 수 있듯이 일본서기에서 11대 스이닌 덴노 시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맞으나 (《고사기》에서는 천지일모(天之日矛) 즉, '아메노히보코'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귀화 동기 등도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한국측 고서들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또한 가공의 인물인 신공왕후가 그의 후손이라는 기록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상 실존인물인지에 대해서 매우 논란이 많은터라 실제로 천일창이 도왜 했는지 부터가 또 다시 의문의 영역으로 남는다.
물론 풍전국풍토기의 기록은 설화에 불과하고 천일창에 대해서는 전승 상의 인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도왜인과 천일창과 관련된 집단과의 연관성에 있어서 주목을 받아왔기에 신라군이 효고현까지 들어왔다는 기록은 천일창과 관련된 도왜인 집단의 기록이 아닐까 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문제는 이 경우 앞서 말했듯이 천일창의 실존여부와 그 세력의 도왜 여부부터 먼저 입증해야만 사실관계를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료의 부족으로 신라군의 명석포 침공과 백마분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며 관련된 연구 또한 부족한 상태이기에, 이와 관련된 연구가 오랫동안 진행되고 의문점에 대한 공신력 있는 학설이 제기된다면 이 문제도 결국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2. 남북국시대



2.2.1. 백제유민의 미야자키 현 점거 및 신라의 미야자키 현 침공 기록


규슈(九州) 미야자키 현(宮崎県) 난고손(南鄕村)에 있는 미카도 신사(神門神社)에서 전해내려오는 전승에 의하면, 백제왕족인 정가왕(禎嘉王)은 나라 현에서 규슈 미야자키 현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했다고 한다. 그런데 반란군 혹은 '''신라군'''의 공격을 받아서 전사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이 사건이 해동제국기에서 언급된 신라의 720년 일본 서쪽 변방 공격과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2.2.2. 통일신라의 서일본 침공 기록


해동제국기에 따르면 720년에 신라가 서일본 변방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단,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전혀 없는 내용이다.

원정 천황(元正天皇) 4년(서기 720년, 성덕왕 14년)

4년 경신에 신라가 서쪽 변방을 와서 쳤다. (四年庚申。新羅來伐西鄙。)

해동제국기

또한 일본 육국사 중 하나인 일본삼대실록에 따르면 870년 2월 12일 대마도 사람 우라베노 오토쿠소마로(卜部乙屎麿呂)가 신라 바다 근처에 가마우지를 잡으러 갔다가 신라국에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 그가 살펴보니 당시 신라에서는 큰 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하고 있었고, 신라인에게 물어보니 신라가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한 준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겨우 탈옥해 일본 본국에 이 사실을 전하고 본국의 지원을 요청, 대비했다고 한다. 다만 개인이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라 당시 신라 경문왕 정권이 국가적으로 진지하게 대마도 정벌 준비를 했는지는 불확실하며, 원종과 애노의 난 발발까지 20년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럴 여력이 없었을 가능성도 높다. 혹은 당시 신라구 해적이 일본 연안을 약탈하는 일이 잦았다는 점이나 이후 점점 신라구의 규모가 수천 단위로 커진다는 점을 볼 때 오토쿠소마로가 붙잡혔고 봤던 것은 정식 신라 해군이 아닌 대규모 신라인 해적기지였을 수도 있다.

2.2.3. 신라구(신라 해적)의 일본 약탈


9세기 초부터 신라 출신 해적들의 일본에 대한 여러 차례의 대규모 침략들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신라구 문서를 참조. 어쩌면 신라의 일본 침공 기록들이 모두 다 사실이라고 가정 할 시에 신라가 일본을 자주 침공하였기 때문에 이 신라구들 역시 일본의 지리에 대해서 자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그 덕분에 일본 여러 지역들을 자유롭게 침략한 것일지도 모른다.

3. 신라의 일본 침공 루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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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출처
만약 실제로 신라가 왜국을 침공하였다면 신라는 어떻게 일본을 공격했을까? 일단 침공 루트는 세가지 경로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첫번째'''는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를 지나, 하관(시모노세키)를 거쳐 명석포를 다다르는 첫번째 방법과 '''두번째'''는 주고쿠 지방(규슈 옆에 있는 섬)을 통해 육지에 상륙해서 명석포로 가는 방법, '''세번째'''는 대마도 서남부로 우회해 큐슈 남부를 지나 시코구 지방의 남부 지역을 지나는 방법이 있었다. 어떤 방법이든 위험한 방법이었지만, 신라는 그 세개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명석포까지 공략한 다음 일본측의 요청으로 화친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1만리 길의 거대한 파도를 넘어 명석(明石)에 뛰어난 병사들을 주둔시키고 백마를 잡아 적관(赤關)의 맹세를 받았다"는 동사강목의 기록을 참고한다면 당시 신라는 세토내해를 통해 명석포를 공격한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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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세토내해조선통신사들이 일본을 방문할 때에도 부산에서 배를 이용하여 오사카에 도착할수 있는 수로였으며 고대 한일간의 주요 해상교통로 역할을 했다. 백제 패망후에도 신라의 침공을 두려워한 일본이 세도내해 주변에 20여개의 방어성을 쌓고 대비를 할 정도로 중요한 해상 접근로이기도 하다. 크기는 동서로 450km, 남북으로 15~55km 정도이며 평균 깊이는 37.3m로 얕은 바다로서 약 3,000개의 섬이 존재하는 일본판 지중해이다.
이렇듯 신라의 왜국 침공은 만약 사실이라고 가정 할 경우 신라는 당시 일본의 중심지인 나니와(難波) 근방의 아카시노우라(明石浦)를 공격하기까지 했고 이로인해 한동안 왜구의 침입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고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4. 기타 기록들



4.1. 실성 마립간 시기 신라의 대마도 공격시도와 왜병 격퇴


은 왜인이 쓰시마 섬(對馬島)에 병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 두고서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들이 일을 일으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예군사를 뽑아 적의 진영을 격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불감 벼슬에 있는 '''미사품'''은,

"신이 들으니 병사는 흉기요, 싸움은 위험한 일이라 하였습니다. 하물며 넓은 바다를 건너 남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험한 곳에 요새를 설치하고,''' 적이 쳐들어오면 막아서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 싶사옵니다. 만약 우리 쪽이 이로우면 나아가서 적을 사로잡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남을 유인하는 것은 좋지만, 남에게 유인당하는 것은 가장 나쁘다는 교훈으로 가장 좋은 계책인가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옳다 하였다.

14년(서기 415년) 7월, 왕이 친히 혈성원에서 군사들을 열병하고 또 금성 남문에 나아가서 군사들이 활 쏘는 모습을 보았다. '''이 해 8월에 풍도에서 왜병과 싸워 이겼다.'''

삼국사기 실성 마립간

유례 이사금 때와 비슷하게 왜국에 대한 선제 공격 이야기가 실성 마립간 시기에도 있었는데, 비록 미사품의 반대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이러한 기록들을 볼 때 신라측에서의 일본 침공 시도들은 아주 오래전 부터 주기적으로 논의되던 사안이었던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후 풍도에서 왜군을 격파하면서 왜구들의 침략이 소강 상태에 들어간 듯하다.

4.2. 성덕왕 시기 신라의 일본군 격퇴


성덕왕(聖德王) 30년(서기 731년)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日本國兵船三百?,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 삼국사기 성덕왕

731년, 일본에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지휘 아래 '''300척'''의 군함을 이끌고 쳐들어왔으나 곧바로 격퇴하였다.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의 원인이 된 '왕성국 사건'도 734년인 이 때 벌어졌는데, 일본에 보낸 신라 사신이 스스로 '''왕성국(王城國)'''에서 왔다고 말한 것이다. 왕성국의 의미는 서경, 주례등 옛 유교 경전에서 말한 세계관에서는 '''왕성(수도 궁성) - 왕기(수도 근처) - 6복(지방 = 9주 5소경) - 번국(외부 이민족 제후국)의 순서로 주종관계의 체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신라가 왕성국이라면 일본은 번국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컸다.''' 이에 분노한 일본은 무례하다고 사신을 쫓아 버렸다. 왕성국 사건은 앞서 신라가 일본의 침공을 손쉽게 격퇴했다는 자부심 때문으로 보인다.
만약 718년과 720년의 신라의 일본 침공이 사실이라면 731년의 일본 병선 300척의 공격은 그에 대한 보복 공격일 수도 있다.

5. 여담


서쪽에 살고 있는 비열하고 천박한 신라인들, 하늘을 거역하고 우리가 베푼 은혜를 저버리고 우리 관가를 부수고 우리 백성을 독살하고 우리 군현의 사람들을 씨를 말려 죽이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소름이 끼치게 간을 꺼내고 웃으면서 다리를 잘라내고 시체를 태운다.(『日本書紀』「欽明天皇」)

킨메이(欽明) 천황(509~571)이 내린 조서의 일부에 있는 내용

위의 본문은 일본서기 킨메이 천황조에 실린 내용이다. 보기만 해도 신라에 대한 일본인들의 감정이 굉장히 나빴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현재 일본에서 혐한으로 분출되고 있는 한반도에 대한 일본인들의 부정적인 감정이 그 유래가 일본서기로 올라갈 만큼 상당히 오래되었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6. 같이 보기


[1] 대부분은 일본 측의 기록을 접한 후 그 내용을 전한 것이다.[2] 당장 김부식부터가 삼국사기 본문에서 사론을 통해 남은 기록이 너무 없다고 계속 한탄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아니면 견훤경애왕을 죽였던 '서라벌 침공' 당시 견훤이 이끌던 후백제군이 경주를 약탈하고 방화를 저질러 화려했던 신라의 보물들과 문화재들이 안타깝게도 다수 손실되었는데 이 때에 신라측이 보관하던 사서들도 상당수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3] 흠명 23년(서기 562년)[4] 291년[5] 1593-1646[6] ‘임진왜란’ 이후 ‘제2차 조선통신사‘ 오윤경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갔던 ’이경직‘이 확인한 일본측의 역사서(기록)이다. 서기 1617년 막부(幕府)관리의 소개로 '일본연대기(日本年代記)' 내의 기록을 보고 현장답사까지 확인 한 후에 자신의 저서인 부상록(扶桑錄)에 해당 기록을 인용하였다.[7] 1688년(겐로쿠 원년)에, 에도시대의 국학자 마쓰시타 겐린(松下見林)이 쓴 역사 연구서이다. 상권 3책・중권 8책・하권 4책으로 되어 있다. 30년간에 걸쳐 중국, 한국의 계 126종류의 서적 중에서, 일본에 관계되는 기사를 뽑아, 의문 제기와 비판 등을 더하여 편찬하였다. 이 책은 당시 조선에도 반입되어, '한치윤'이 편찬한 '해동역사'의 권41 '통일본시말(通日本始末)'편에 내용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8] 조선 통신사 기록에서도 일본 에도시대의 몇몇 악습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조금 보이지만 에도 시대의 화려한 모습에 대해서는 칭찬하고 있다. 즉 조선인들은 자신들이 일본에 비해 상국이라는 인식은 있었지만 일본서기 수준의 우월감을 가지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