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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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의 인물. 자는 경지(敬之) 또는 근중(勤仲, 勤中), 호는 소한당(所閑堂). 단경왕후의 아버지이자 연산군의 아내인 폐비 신씨의 오빠이다.
2. 생애
신수근은 1450년 경상도 진주목 거창현(현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영의정으로 거창부원군에 봉해진 아버지 신승선(愼承善)과 임영대군의 딸인 어머니 중모현주(中牟縣主) 전주 이씨 사이의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종 때 1475년에 수조관을 지내고 1484년에 음서로 통훈대부 행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으며, 1492년에는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 통정대부 좌부승지,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통정대부 호조참의를 지냈고 1493년에 귀의 종기를 치료했다.
연산군 때 1495년에 좌부승지를 지냈고 공이 없는데도 외척이라 중직에 등용되었다는 상소가 올라오기도 했으며, 1496년에는 우승지, 1497년에는 가선대부 좌승지, 승정원 도승지, 자헌대부 행 승정원 도승지를 지냈다.
1498년에 숭정 이조판서에 임명되었고 1500년에 병으로 사직했다가 판돈녕부사, 우찬성을 지냈다. 1506년에 훗날 중종이 되는 신수근의 사위인 진성대군을 옹립하는 반정을 일으키자는 박원종의 제의[4] 를 "세자가 총명하니 믿어보자."라고 거절했다가 중종반정이 일어나 3형제가 유자광(柳子光) 일파에게 살해되었다.
사후 영조 때 딸인 단경왕후가 왕후로 복위 되면서 익창부원군에 추증된다.
3. 평가
신수근에 대한 평가는 연산군일기 및 중종실록에는 매우 부정적이나, 영조실록과 국조인물고에는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가 남아있다.
연산군일기에는 도승지가 되자 시기심이 있어 남을 해치는 일이 많고 세력을 빙자해 제 뜻대로 행동해 겉으로는 부드럽게 말하면서도 자기를 좋지 않게 하는 사람에게는 암암리에 중상하고 도승지가 돼서는 승정원의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해서 동렬의 사람들이 그가 하는 짓을 비웃었다고 한다. 중종실록에는 중전 신씨의 오빠로 총애를 받고 상당한 뇌물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영조실록에는 영조가 신수근에 대해 "신수근의 마음은 괴로왔고 신수근의 뜻은 확고하였다. 훈척에 연연하지 않고 섬기는 바를 바꾸지 않으며 순박하고 강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았으니, 만약 포장(褒奬)하지 않으면 어떻게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다운 도리를 바루겠는가? 대신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라고 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영조실록 125권, 영조 51년 8월 24일 기해 2번째기사에서 영조가 "신수근은 '''포은'''과 함께 충의가 같다"며 그 정몽주에 신수근을 비견한 발언을 한 기록도 남아 있다. 비록 정몽주가 고려의 충신이라도 조선왕조에서 그가 받았던 대우나 입지를 생각하면 엄청난 찬사다. 또 국조인물고에는 신수근이 외척임에도 재산이 없어 노비 수도 매우 적었다고 적고 있다.
중종반정을 일으킨 세력이 연산군일기와 중종실록을 편찬한 것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후대의 평가가 더 객관적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게다가 중종반정에 참여한 공신 중 상당수가 오히려 연산군에게 총애를 입었던 자들[5] 인데 반해 신수근의 행동은 좀 더 신의가 있는 편. 굳이 비판을 하자면 왕실과 매우 가까운 외척이자 힘있는 관료이면서도 연산군에게 간언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하지만 당시 신수근이 제대로 간언했어도 연산군이 이를 들었을지는 미지수. 차라리 반정군 측에 붙었다면 누이 신씨의 폐위까지는 어쩔 수 없었겠지만, 딸인 단경왕후는 폐위되는 일 없이 왕의 외척이자 부원군으로써 목숨을 지키고 부귀영화도 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줄 잘못 서서 파멸한 전형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