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경왕후

 


'''단경왕후(端敬王后)'''
'''시호'''
공소순열단경왕후(恭昭順烈端敬王后)
'''본관'''
거창(居昌)
'''배우자'''
중종(中宗)
'''아버지'''
익창부원군 신수근
'''어머니'''
청주부부인 한씨
'''생몰'''
'''기간'''
음력
1487년 1월 4일 ~ 1557년 12월 7일
양력
1487년 2월 7일 ~ 1557년 12월 27일
'''재위'''
'''기간'''
1506년 9월 18일 ~ 1506년 9월 25일
1. 소개
2. 일생
2.2. 폐비가 되다
2.3. 복위 논란
2.4. 야사
2.5. 죽음 이후
3. 기타


1. 소개


조선 중종의 첫 왕비. 익창부원군 신수근과 청원부부인 청주 한씨의 딸이다.
그녀의 고모가 바로 연산군의 정비인 폐비 신씨로, 할아버지 신승선은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사위이자 연산군의 장인이었으며, 아버지 신수근은 좌의정에다 연산군의 처남이었다. 작은아버지 둘은 모두 형조 판서를 역임했고, 작은어머니는 예종의 비 안순왕후의 여동생이다. 남편이었던 중종의 고조부와 단경왕후의 외고조부는 세종대왕으로 같으며, 중종과 단경왕후는 8촌 관계였다. 또 단경왕후의 외조부인 한충인은 중종의 할머니인 소혜왕후의 사촌이기도 하다.

2. 일생


13살이었던 연산군 5년(1499),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에게 시집갔다. 진성대군이 1살 연하였고, 결혼생활 7년 동안 자녀는 없었다고 한다.
고모 거창군부인 신씨가 연산군의 아내였으니, 거창군부인 신씨와 단경왕후 신씨는 고모-조카 사이이자 동서지간이 된다.

2.1. 중종반정 이후


중종반정이 성공하면서 진성대군이 왕이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신씨도 중전이 되었으나, 하필 아버지 신수근이 폐주 연산군의 처남이었던 터라 역적이 되었기 때문에 반정세력의 요구에 따라 고작 '''7일 만에 폐출'''당하고 만다.[1] 이는 조선의 역대 왕비 중 가장 짧은 재위 기간이다.
기록을 보면 중종은 신씨를 폐출하는 일에 별다른 망설임이나 반대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1506년 9월 9일 초저녁에 신씨가 궐 밖으로 나가자, 다음 날 9월 10일에 새 왕비를 책봉하는 일을 허락한다.
상당수 역사가들은 "단경왕후는 단 하루도 왕비였던 적이 없으며 추존왕비에 불과하다"는 의견을 낸다. 실제로도 정식으로 왕비가 되려면 책봉식을 치러야 하는데, 단경왕후는 중종반정 당일 바로 중종과 강제 별거되었다. 7일이란 기간은 단경왕후가 왕비로 지낸 시간이 아니라, 중종이 아내를 내치지 않으려고 버틴 시간이라 봐야 한다.

2.2. 폐비가 되다


“거사할 때 먼저 신수근을 제거한 것은 큰 일을 성취하고자 해서였습니다. 지금 수근의 친딸이 대내(大內)에 있습니다. 만약 궁곤(宮壼)으로 삼는다면 인심이 불안해지고 인심이 불안해지면 종사에 관계됨이 있으니, 은정(恩情)을 끊어 밖으로 내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아뢰는 바가 '''심히 마땅하지만, 그러나 조강지처(糟糠之妻)인데''' 어찌하랴?"하였다. 모두 아뢰기를, "신 등도 이미 요량하였지만, 종사의 대계(大計)로 볼 때 어쩌겠습니까? 머뭇거리지 마시고 쾌히 결단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종사가 지극히 중하니 어찌 사사로운 정을 생각하겠는가. 마땅히 여러 사람 의논을 좇아 밖으로 내치겠다.”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에서.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 9월 9일 을유 2번째기사)

반정으로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남편 중종과는 강제 이혼당하는 등, 중종반정의 가장 큰 피해자로 전락했다.

2.3. 복위 논란


삼훈[2]

은 (중종을) 추대한 공이 비록 크나, 왕비를 위협하여 폐한 죄는 만세(萬世)에 벗어나기 어렵다. 만약 삼훈을 저승에서 일으켜 이 상소[3]를 보이고 물으면, 또한 반드시 목을 움츠리고 부끄러워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다. 대간이 모두 무식한 사람이라서 권민수와 이행의 말만을 믿고 바람에 쏠리듯 좇았으니, 애석하다.[4]
- 중종실록 중종 10년 8월 11일 기사에서의 사관의 논평

장경왕후 윤씨가 인종을 낳은 후 사망하자 중종 10년(1515년) 8월 8일 담양부사 박상, 순창군수 김정 등이 "신씨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상소문을 중종에게 올리는 등 일부 대신들의 신씨를 복위시키자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중종이 태클을 걸었다.
이때는 단경왕후의 폐출을 주장했던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유자광 등이 모두 죽은 뒤라서 중종의 의지만 있었다면 신씨의 복위가 가능했지만, 장경왕후 윤씨가 세자를 낳고 죽은 바람에, 만약 신씨가 복위되어 아들을 낳을 경우 중종의 첫 번째 부인인 단경왕후 신씨에게서 얻은 아들을 적장자로 봐야 하느냐, 아니면 후처인 장경왕후 윤씨가 낳은 중종첫 번째 아들을 적장자로 봐야 하느냐는 논란의 씨앗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이 있고 14년 뒤인 중종 24년(1529년) 9월 13일에는 충청남도 부여에 사는 김식이라는 인물이 중종에게 상소를 올렸는데, 내용을 보면 "신씨를 폐한 죄목은 무엇입니까? 공자는 얼룩소의 새끼라도 빛깔이 붉고 뿔이 똑바로 났으면 버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신씨의 덕은 얼룩소만도 못하단 말씀입니까?"라며 중종이 신씨에게 보여주었던 태도에 대해 항의하는 대목이 있다. 이 상소를 읽어 본 중종은 "입밖에 낼 수 없는 말들이 많아 지극히 경악스럽다. 평상시라면 처벌하겠으나, (내가) 구언[5]을 해달라고 해서 한 말이니까 처벌하면 신하들이 바른 말을 못할 것이다"라며, 격분했지만 김식을 처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 나중에 대간들도 김식의 상소에 대하여 처벌하기를 주청했으나 중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어찌됐든, 결국 단경왕후 신씨의 생전 복위는 물거품이 되었다. 신씨는 사가에 거처하면서 독수공방하다가 중종이 죽은 지 13년이 지난 명종 12년(1557년)에 71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신씨의 사인은 아마 낙상 후유증인 듯하다.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상당히 장수한 셈인데, 20대에 폐비되어 거처 밖을 함부로 나가지도 못하고 반세기를 혼자 살았음을 생각하면, 장수한들 별로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친정이 빵빵했다면 또 모르지만, 역적이 되어 풍비박산나고 본인은 왕비였던 탓에 목숨만 건진 것이기 때문에.
그 불행한 인생사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안타까움을 샀던지, 중종의 뒤를 이은 두 들이 단경왕후를 자주 챙겨줬다는 기록이 있다.

2.4. 야사


중종실록 중종 39년 11월 15일 기사에 따르면, 중종이 승하하기 전 한 여인이 은밀히 궁으로 들어갔는데, 세간에서는 "그 여인은 폐비 신씨이다. 왕이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전처의 얼굴이나 한 번 보려고 부른 게 틀림없다."고 수군거렸다. 마침 이 날이 바로 중종이 사망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관에 따르면 사실은 중종의 쾌유를 빌기 위한 여승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 팩션 드라마 7일의 왕비에서도 이 일화를 채택해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을 아역 배우들의 모습을 빌려 연출했고, 채널A천일야사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이 두 부분을 접합하여 신씨가 여승으로 변장해 중종과 마지막으로 만난 것으로 그리기도 했다.
인왕산의 치마바위 전설이 단경왕후 신씨와 관계가 있다. 야사에 따르면 중종은 비록 반정공신들의 압박을 못 이겨 신씨를 내쫓고 후계 문제 때문에 신씨를 복위시키진 못했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매우 그리워해서 신씨가 폐출되어 나와 있던 사가 방향을 자주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 사실을 전해듣고 신씨는 자기 치마를 인왕산의 바위 위에 중종이 볼 수 있도록 걸어놨다고 한다.
실록에서는 명확한 발언은 없지만, 중종 11년 강론을 보면, <고려사>에서 "명종최충수가 딸을 태자에게 시집보내려고 이미 있던 태자비를 폐출하게 만들고 이에 궁의 사람들이 모두 울었다"는 기록을 들을 때, 한숨을 쉬며 감정을 드러냈다는 언급이 있다. 이를 두고 사관은 "박원종을 포함한 반정공신들이 강압과 협박으로 신씨를 폐출할것을 요구한 것을 (신하들, 반정공신에 의해 추대된 직후인 탓에) 왕권이 약했던 중종이 이런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신씨를 폐출한 것을 후회한 것"이라는 논평을 달아두었다.기사
이렇게 야사에선 꽤나 아내를 그리워한 애처가의 모습이 보이는 중종이지만, 정사인 중종실록엔 그다지 부합하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오히려 장경왕후가 사망한 이후 단경왕후를 다시 부르기는커녕, 새장가 들 생각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2.5. 죽음 이후


그 뒤로 계속 폐비 신씨로 불리다가[6] 영조 때에 복위되어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받게 되었고, 양주 장흥에 있던 신씨의 무덤 역시 이때 온릉(溫陵)으로 승격되어 새로 왕비의 격식에 맞게 조성되었다. 온릉의 경우에는 교통도 좋지 않고, 주변에 코렁코렁한 시설이 있는 관계로 비공개 능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다 2019년 11월에 공개 능역으로 전환되었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신씨가 죽은 뒤 182년이 지난 후인 영조 15년(1739년)에 유생 김태남이 영조에게 신씨를 복위시킬 것을 주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헌데 영조는 예전부터 마음속으로 신씨를 복위시키기로 결심한 상태였던 모양이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영조는 김태남의 상소가 올라오기 전에 신하들에게 신씨 복위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몇몇 신하들이 "처음부터 책봉하지 않았고 사제(私第)에 나가 있었으니 복위를 논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여 그대로 두고 다시 묻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영조실록을 집필한 사관들은 "이 당시 이미 왕의 의지는 결정돼 있었다"고 적었고, "얼마 안 있어 신씨가 복위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장안에 퍼졌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에 때마침 김태남이 영조의 속마음을 그대로 담은 상소문을 올리자, 영조는 기뻐하면서 "얼른 이 문제에 관한 조정의 의견을 모으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영조 15년 3월 11일 기사

3. 기타


  • 연산군의 정실인 폐비 신씨신수근의 여동생이기 때문에, 단경왕후 신씨는 폐비 신씨의 조카딸이 된다. 고모와 조카가 나란히 폐비가 된 것이다.
  • 애니메이션인 장금이의 꿈에서도 등장. 성우한수림. 장금이, 연생이, 창이가 단경왕후의 치마를 치마바위 위에 걸어놓았다.
  •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초반에 폐출당한 후 단역이나 회상으로 가끔 등장한다. 김희정이 역을 담당. 중종반정 후의 상황이라 비중은 많지 않다.
  • 대체역사소설 대군으로 살어리랏다의 진성대군의 빙의한 주인공의 아내로 등장. 바뀐 미래로 중종반정이 일어나지 않아 헤어지지 않게 되었고 이후 딸을 1명 출산하게 된다. 후일 연산군이 진성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되자 왕후가 되며, 온행을 같이 간 진성대군이 어떻게든 함께 온천에 들어가려고 전전긍긍하고 결국은 받아들인다... 결말 끝에 현대의 환생해서 주인공과 재회


[1] 참고로 야사에서는 박원종 등 반정세력이 그를 회유할 때 "그대는 누이(거창군부인 신씨)와 딸(단경왕후 신씨) 중에 누가 더 중요합니까?"라고 묻자 신수근은 "세자가 총명하니 믿어봅시다."라고 대답해, 반정세력은 신수근이 자신들과 함께 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신수근을 죽였다고 한다.[2] 중종반정을 이끌었던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3]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이 신씨의 복위를 주청하며 올린 상소를 뜻한다.[4] 대간들이 박상과 김정의 주장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들을 탄핵해야 한다고 주장한 대사헌 권민수와 이행에게 휩쓸리듯 동조한 것을 비판하는 글로 보인다.[5] 나라에 재앙이 있을 때, 혹은 국정에 필요할 경우, 임금의 정치의 잘잘못에 대하여 널리 신하로부터 비판의 말을 구하던 일.[6] 당대 기록에선 단경왕후도 고모 거창군부인 신씨처럼 '폐비 신씨'라고 불렸기 때문에 헷갈리기 쉽다. 차이가 있긴 했는데, 고모와 달리 단경왕후는 '성+비'로 된 명칭인 신비(愼妃)로도 호칭하는 경우가 많은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