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표성

 


1. 평산군 출신 독립운동가, 愼表晟
2. 논산시 출신 독립운동가, 愼杓晟


1. 평산군 출신 독립운동가, 愼表晟


성명
신표성(愼表晟)
본관
거창 신씨[1]
생몰
1897년 7월 21일 ~ ?
출생지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이리[2][3]
(현 황해북도 평산군 용궁리)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신표성(愼表晟)은 1897년 7월 21일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이리(현 황해북도 평산군 용궁리)의 평민 집안에서 아버지 신종은(愼宗殷)과 어머니 광산 김씨[4] 사이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금암면 한포리(현 평산군 한포리)로 이주하였다.# 그는 일찍이 서당에서 3년간 한문을 배우고 1919년 5월까지 약 2년간 평산군 금암면사무소의 서기로 근무하였으며, 이후에는 한포리에 사는 안해민(安海珉)[5]의 고용인으로 일했다.#
1920년 4, 5월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 참사(參事)로 평산군 서봉면 봉동에 사는 정의도는 신표성이 서기로 일하는 금암면사무소를 방문, 신표성에게 자신이 황해도 봉산군 사원면 손재흥(孫再興)의 집에서 가져온 독립신문 호외를 보여주면서, "미국 상원에서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였고, 결국 조선은 독립이 될 것이니 너도 독립운동에 진력하라."고 하자, 신표성은 "나는 고용되어 있는 신분이므로 그런 일은 할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이에 정의도는 상해임시정부프랑스 정부가 서로 특별 협약을 맺어 조선인으로서 1,000원을 프랑스 정부에 납부하면 7년간 옷과 식량을 무상 제공받으며 학업에 전념할 수 있다며 공부하러 가는건 어떤가하며 권유하였고 표성이 이에 승낙하자, 손재흥을 찾아가면 수속을 해줄 것이라고 하면서 돌아갔다.
이에 표성은 임시정부로 가기로 결심하고서, 일전에 1919년 1, 2월경에 밭을 팔아 얻은 돈 750원과 1920년 4, 5월경에 소를 팔아 얻은 돈 70원을 주인 안해민에게 맡겨둔 것을 비롯해, 그 밖에 13개월 치 월급을 받지 않고 맡겨 둔 195원에 1920년 6월 7일에 그 돈에 이자를 가산한 1,073원 18전을 주인 안해민에게 공부하러 가겠노라며 받아서 손재흥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해 6월 6일경 손재흥을 방문하여 정말 프랑스정부에 1,000원을 납부하면 7년간 공부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사리원 독립청년단 단장 손재흥은 상해에 가는 데에는 여비가 120원이므로 다만 1,000원만으로는 부족하므로 그 돈으로 차라리 상해임시정부에 금 500원을 기부하라고 했다. 신표성은 처음에는 기부할 수 없다고 거절했으나 손재흥이 상해임시정부 간부 손정도를 알고 있다며 그 분을 소개해주겠노라 하여 결국 돈을 기부하였다.
같은 해 7월 20일 손재흥과 함께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 석전리에 있는 김태용(金泰鏞)의 집으로 가서 김치은(金致殷) 등과 회합한 자리에서, 김태용·김치은과 함께 그동안 모집한 독립운동자금을 임시정부로 보내는 임무를 맡았다. 이를 위해 평안북도 의주군 위화면 북하동의 선착장에서 임시정부 파견원 최명식을 만나기로 했다. 같은 해 8월 1일 김태용·김치은과 함께 순안·숙천·박천·정주·선천 등지를 거쳐 의주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다음날인 8월 2일 임시정부 재무원 최명식을 기다리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에 1920년 8월 12일 해주지방법원 서흥지청 검사분국을 거쳐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예심이 청구되었다. 같은 해 1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이 종결되어, 이듬해인 1921년 5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 처벌령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에 산입)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같은 해 10월 29일 출옥하였다.
출옥 후 행적 및 사망년월일 등에 대해선 자료가 미비하여 알 수 없다.
201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논산시 출신 독립운동가, 愼杓晟


[image][6]
성명
신표성(愼杓晟)

운곡(雲谷)
본관
거창 신씨[7]
생몰
1897년 3월 8일 ~ 1947년 10월 16일
출생지
충청남도 연산군 모촌면 남산리
(현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
추서
건국포장
신표성(愼杓晟)은 1897년 3월 8일 충청남도 연산군 모촌면 남산리(현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의 양반 집안[8]에서 아버지 신영흡(愼寧洽)[9]과 어머니 파평 윤씨 사이의 3남 2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 신채성(愼彩晟)[10]과 신기성(愼杞晟)[11]이 있었으며, 이후 가족이 모촌리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며 살았다.#
그는 일찍이 상경하여 경성고등보통학교 부설 교원양성소 제1부[12]에 입학, 1914년 졸업하였다. 같은 해 4월 1일, 공립보통학교 훈도에 임명되어# 전라북도 진산공립보통학교에 발령받은 것을 시작으로, 1917년부터 1918년까지 군산공립보통학교 훈도, 1919년 충청남도 연산공립보통학교 훈도, 1921년부터 1922년까지 강경공립보통학교 훈도를 역임하는 등 10여년간 교원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떠 교사직에서 은퇴하고 이후 서울청년회 및 경성노동회(京城勞動會) 등에 가입하여 대중운동과 사회운동을 통한 항일투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25년 1월 20일 군산청년회·군산노동연맹회·민중운동사가 연합 주최한 레닌 1주기 추도강연회[13]에서 '朝鮮(조선) 農村(농촌)에서 본 레닌'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같은 해 4월 전조선노농대회(全朝鮮勞農大會) 준비위원 및 자격심사위원이 되었고, 또 조선사회운동자동맹(朝鮮社會運動者同盟) 상무위원에 취임하였으며, 전진회(前進會) 및 국제청년의 날 기념협의회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이 무렵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갔다가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6년 2월 귀국하여, 같은 해 3월 조선공산당 대전 야체이카[14]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같은 해 7월 25일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10일부터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었으며#,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150일 통산)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image]
1928년 2월 1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1928년 9월 16일 출옥하였는데, 9월 18일 조선공산당 동지들이 당일 출옥한 20여 명의 출감자 환영회를 식도원(食道園)에서 개최하려다 금지당하는 일도 있었다.# 1930년 2월 3일, 동아일보사 논산지국에서 논산군 양촌면 인천리에 양촌분국을 설치하자 신표성은 고문에 임명되었다.#
1932년 5월경 논산군 양촌면 인천리에서 농민 70여명이 머슴계를 조직하고자 양촌주재소에 집회신청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흥분한 군중들이 적기를 흔들며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히 항쟁하였던, 이른바 적기 시위사건이 있었다. 이때 이들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그해 8월 30일 대전지검 강경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혐의불기소처분을 받고 곧 석방되었다.#
그는 1933년 9월 20일경에도 양촌면에서 소작계를 조직해 농민을 선동하고 의식화했다는 혐의로 강경경찰서에 또 다시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후 조용히 지내다가 1944년 여운형건국동맹에 참여하여 충청남·북도지부 책임자로 선정되어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해방 후 1946년 여운형·백남운 등과 함께 사회노동당 창당에 관여하여 그해 11월 12일 개최된 임시중앙위원회에서 상임중앙위원 선임을 위한 전형위원에 선출되었다.# 11월 15일에는 상임위원 및 농민부 책임위원에 선임되었으며#, 같은 날 개최된 제1회 상무위원회에서 공산당대회파 상임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정세상 사회노동당이 불리해지자 탈당하고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다. 1947년 10월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검거되어 취조 도중 병세가 악화되어 10월 16일 충청남도 도립의료원에서 별세하였다.#
200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 참판공파 30세손 '''성(晟)''', 성(珹) 항렬.[2] 1914년 이리의 일부를 분리하여 평산군 금암면 재궁리 신설됨.[3] 거창 신씨 집성촌이다.[4] 아버지 신종은의 재취(再娶)였다. 정실부인 여흥 민씨는 불임(不姙)이었다고 거창 신씨 족보에 기재되어 있다.[5]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유지로 추정된다. 1913년 6월 신계군 소방조에 제공하는 기구 구입비용에 쌀과 조 각각 5말씩 기부하여 1915년 3월 2일 조선총독부로부터 나무잔을 수여받았다.# 이후 1917년 4월 29일까지 누천(漏川)지방금융조합의 감사로 재직하였다.# 1918년 2월 1일 누천지방금융조합 감사에 재취임해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남천(南川)금융조합 감사로 있다가,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1921년 4월 24일 정기총회에서 중임하는 것으로 결정되어 재취임하였다.# 1923년 4월 24일 남천금융조합 감사에 재취임하였다.# 1925년 4월 25일 남천금융조합 감사에 재취임하였다.#[6] 1926년 8월 5일,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 체포되었을 때 종로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7] 참의공파 30세손 '''성(晟)''' 성(珹) 항렬.[8] 1928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출생지가 논산군 노성면, 신분이 '상민(常民)'으로 기재되어 있다.[9] 1908년 11월 16일 공립 은진보통학교 전과 부훈도에 제수되었다.# 1910년 3월 18일 사직하였다.#[10] 1879년 1월 6일생. 1909년 기호흥학회에서 세운 기호학교 특별과에 재학 중이었다.# 당시 기호흥학회에 금 1환을 의연하기도 했다.# 이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5월 충청남도 사립학교 교원시험에 합격하였다.# 1920년 10월 소학교 및 보통학교 교원 제3종 시험에 합격하여# 양촌공립보통학교에 발령받아 1921년부터 1922년까지 부훈도를, 1923년부터 1926년까지는 훈도를 역임하는 등# 10여년간 교원 생활을 하였다. 이후 대전시 인동(현 대전광역시 동구 인동) 이주하여 40년간 의원을 경영하였고 슬하에 4남을 두었다. 이후 충남의약협회장 및 한약종상 재교육 강사 촉탁 등을 역임하였다.#[11]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 근무하면서, 1911년부터 1913년까지 동 직장에서 측량과 기수로, 1914년 측지과 서기로, 1915년에는 측지과 기수, 1916년에는 측지과 기수보로 근무하였다.#[12] 3년 과정[13] 블라디미르 레닌은 1924년 1월 21일 사망하였다.[14] 세포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