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홍기
1. 소개
일격필살의 태클과 왕성한 활동량으로 K리그 90년대 좌측면을 장악한 풀백.
내가 본 최고의 선수 중 하나.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어릴적 동네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큰 형이 축구하는 모습을 보며 축구를 처음 알고, 즐기게 되었다. 신홍기의 형제는 삼형제인데, 특히 큰 형이 정말 축구를 잘했다고 한다. 어릴적 축구를 하던 모습을 보고 초등학교 5학년 때 마산의 학교에서 스카우트를 해갔다고 한다.
다만 전학간 학교에서 나선 첫 경기에서 패배했는데, 그 당시 상대편 학교에서 또 스카우트를 하려고 했다고... 그래서 어릴적에는 이곳 저곳을 떠돌면서 축구를 했다. 그리고 전국 초등학교 시도 대항대회가 열리자, 당시 학교의 선수로 출전해서 경남 지역 우승을 차지하고, 전국대회로 나서게 된다.
이 때, 부모님은 신홍기가 축구에 깊게 빠지는 걸 우려했지만, 신홍기는 진로를 축구선수로 잡았고, 신홍기의 큰 형도 그런 그의 선택을 존중해 부모님을 같이 설득했다. 아버지가 전국 대회에서 골을 넣으면 축구를 계속 해도 된다는 말에 시합에서 결국 골을 넣었고, 그렇게 축구선수의 진로를 정하게 되었다. 이 당시 포지션은 공격수였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 때 6개월만에 키가 30cm나 자라면서 공격수를 맡게 되었고, 신홍기도 그런 골을 넣을 수 있던 것이 좋았다고 한다.
1986년 마산공고 3학년 재학 당시 신홍기는 청룡기 전국 고교대회 베스트 11에 선정되며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이 당시 사춘기가 온 건지 숙소를 나온 적도 있었는데, 그 당시 함께한 인물이 이흥실이었다. 마산공고를 졸업하고 진학한 곳은 축구 명문으로 불리는 한양대학교였다. 그 당시 명지대에 동향 선수가 있었는데, 그 선수가 대통령배에서 결승골을 넣어서 활약했고, 여러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춘계연맹전을 앞두고 주전 공격수가 부상당하자, 신홍기가 주전으로 뛰게 된다. 4게임 연속 5골을 넣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그 때가 1학년이었다. 그리고 감투상을 받게 되며, 갑작스러운 주목을 받게 된다.
2.2. 울산 현대
한양대에서 신홍기가 주목받고 신홍기는 K리그 드래프트에 참가하게 된다. 1991년 K리그 드래프트에서 울산 현대에 지명을 받게 되고, 차범근 감독의 권유로 좌측 수비수로 부임하게 된다. 신홍기의 지구력과 기술을 보고 그런 듯하다며 본인이 회고했다. 당시 울산의 선발이 변병주, 최강희인 것도 한 몫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비수로 전향한 뒤 처음으로 그가 맞상대한 선수가 최순호였다. 차범근의 주문도 최순호의 마크맨이었고, 이후 주전 수비수로 낙점받는다.
신인으로서 데뷔 해부터 시즌 39경기에 출전하며 울산의 좌측을 책임지기 시작했다. 그의 태클이 인상적이었는지, 면도날 같은 태클과 마라톤 선수 못지 않은 지구력으로 저승사자로 불렸다고 한다. 지고싶지 않다는 그의 성향도 수비수에 도움이 되었고, 허슬 넘치는 거친 플레이에 독종, 악바리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이상윤은 그 당시 신홍기를 떠올리면 아직도 손시레를 칠 정도.
성공적인 포지션 변경을 마친 그를 김호 감독이 국가대표팀으로 차출했고, 이후 1993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세계 올스타전에 출전하게 된다. 홍명보의 부상으로 인한 대체 선발이었지만, 당시 신인이던 그가 뽑힐 정도로 맹활약하던 점을 알 수 있다.
신홍기는 1991년 39경기 1골 4도움, 1992년 39경기 8골 6도움, 1993년 2골 1도움, 1994년 1골 2도움, 1995년 4월 6도움, 1996년 39경기 4골 8도움, 1997년 2골 6도움을 기록하며, 리그를 대표하는 좌측 수비수로 활약한다. 특히 1996년은 울산 현대의 리그 우승이 기여하기까지 했다.
2.3. 수원 삼성 블루윙즈
1997시즌을 끝나고, 수원 삼성으로 이경수에 3천만원을 더한 트레이드가 성립된다. 사실 수원은 이미 이전부터 신홍기를 원하고 있었는데, 김호 감독이 수원으로 부임하면서, 1996년 당시 수원에게 주어졌던 선발 권한으로 신홍기를 지명한 것이다. 문제는, 그 지명이 핵심 선수, 즉 베스트 11이 아닌 경우에 보내주는 것이었고, 신홍기는 주전 선수였다. 이 일로 인해 울산 현대의 프런트는 반발했고, 선수와도 갈등이 생겼다. 신홍기도 대표팀 감독이었던 김호와 함께 뛰길 원했다.
그리고 1998년, 수원 삼성은 첫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1998년 챔피언 결정전의 상대는 얄궂게도 울산 현대였다. 그리고 그 경기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프리킥을 차게 된다. 당시 키커는 왼발의 달인으로 이름 높으며, K리그의 트로이카 중 하나로 꼽히던 고종수였는데, 신홍기는 고종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본인이 직접 찼다. 그리고 그 골은 결승골이 되어, 수원의 우승을 결정짓는다.
1999년에는 수퍼컵, 대한화재컵, 아디다스 코리아컵, 바이코리아컵, 리그 우승까지 쓸어담을 수 있는 우승컵을 모두 들어올린, 그야말로 최강 수원의 모습을 보이게 되고, 신홍기는 그런 수원에서 구단 최초로 2년 연속 주장을 맡으며 팀을 이끌었다. 갓 창단하던 팀이라 융화가 안되었던 팀을 신홍기를 주장으로 삼으면서, 팀의 위계를 잡아나갔다.
하지만 2001년 치명적인 다리 부상[1] 을 입으며, 신홍기의 선수 생활은 끝나고 만다. 당시 통산 336경기[2] 35골 42도움을 기록하던 그였기에 아쉬움이 컸다. 선수 본인도 더 하고 싶었지만, 수술 결과를 받아들이며 은퇴를 선언했다.
수원에서 1998년 26경기 5골 3도움, 1999년 39경기 3골 5도움, 2000년 4골 1도움, 2001년 30경기 1골을 기록했다. 2002년은 선수 등록은 했지만, 출전하지 않았다. 그렇게 왼쪽의 지배자는 선수 생활을 마쳤다.
2.4. 국가대표 경력
김호 감독에 의해 1991년 세대 교체의 일환으로 처음 차출되었다. 그 당시 함께 뽑힌 선수들이 최문식 정재권, 조진호였다.
이후 1994년 미국 월드컵의 대표선수로 선발되었다. 하지만 스페인전 살리나스에게 실점을 제공하는 패스미스를 범하는 등,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하는 무대였다. 이후에 볼리비아 전과 독일 전에도 선발 출전했지만, 결국 벽에 부딪히고 만다. 스페인 전 당시의 실점 빌미를 제공한 점 때문에, 마음 고생도 꽤나 심했다고 한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에는 전 소속팀과의 갈등으로 인한 폼 저하 등 악재가 겹쳐서 선발되지 못했다.
3. 플레이 스타일
학창 시절에 공격수를 봤을 정도로 공격력이 좋았다. 수비수로 전향했지만, 공격적인 성향이 꽤나 강했다. 특히 킥이 좋아서, 세트피스 상황에서도 유용한 자원이었다. 이 능력을 적절히 활용해 1998년 수원 삼성의 우승을 결정짓는 프리킥 골을 넣기도 했으며, 35골, 42도움을 기록하며 30-30 클럽에 가입했을 정도로 공격 기여도도 높은 선수이다.
수비수로서 태클 실력도 꽤나 수준 높았다. 날카롭게 들어가는 그의 태클을 보고 면도날 태클이라고 불렀으며, 지구력이 좋아서, 시즌 전체를 소화할 만큼 팀에 기여 또한 높았다. 그래서 그에게 붙은 별명이 저승사자.
또한 당시 고정운과 더불어 에너자이저급 강철 체력으로 유명해서 경기 내내 활동량이 아주 많았다. 신홍기가 출전하는 경기때마다 캐스터와 해설이 '신홍기 = 체력' 법칙을 늘 말했을정도
4. 지도자 경력
2003년이 끝나기 전 삼일공고의 축구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삼일공고 축구부는 그 때가 처음 창단이었는데,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2006년에는 함께 울산 현대에서 선수생활을 함께 하고 수원 삼성에서는 코치로 만났던 최강희의 러브콜을 받고 전북 현대의 코치로 부임했다. 부임과 동시에 AFC의 P급 라이센스 코스를 시작했다.
2006년 5월 6일 전북과 경남 FC와의 경기에서 심판판정에 불만을 품은 신홍기 코치와 최인영 코치가 항의하다 동반 퇴장당했다. 최강희는 이미 성남전에서 심판 판정에 항의를 하다가 퇴장당한 상태였고, 이번에는 최인영과 신홍기가 퇴장당하면서, 벤치에는 이흥실 코치만이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게 되었다.
2012년에는 국가대표팀 코치로 부임했는데, 당시 대표팀 감독을 맡은 최강희를 보좌하기 위해서로 보인다. 그리고 2013년에 다시 전북 현대의 코치로 돌아왔고, 최강희가 돌아오기 전에 감독 대행을 맡게 되었다.
2013년 6월 26일 수원과의 경기에 4-5 석패했다. 대표팀 코치에서 전북으로 돌아온 뒤 맡은 첫 경기였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전북과 재계약을 맺고 2016년까지 재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2014년 5월에 전북을 떠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스카우트로 보직을 변경했다는 구단의 해명이 있었지만, 이는 변명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신홍기는 임금 체불 문제를 법정으로 가지고 갈 것으로 보인다.
5. 기타
선수생활을 돌아보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나의 선수시절20) 그라운드를 호령한 왼쪽의 지배자 신홍기
P지급 지도자 자격증을 소유하고 있다. 차분히 준비한 후 언젠간 감독이 되고 싶다고 한다. 그러면에서 신태용 전 성남 감독이 부럽기도 했다는 소감을 밝혔다.
2017년 1990년대 한일 축구 레전드 경기에 출전하게 되었다. 신홍기의 포지션은 왼쪽 풀백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