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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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최인영 (崔仁榮 / Choi In-Young)'''
생년월일
1962년 3월 5일 (62세)
국적
[image] 대한민국
신체
182cm
포지션
골키퍼
출신학교
파주 신산초등학교
파주 광탄중학교
서울체육고등학교
서울시립대학교
선수경력
서울시청 축구단 (1981~1983)
국민은행 까치 (1983)
울산 현대 (1984~1996)
고양시민축구단 (2014)
국가대표
1981년 호주 세계청소년선수권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1994년 미국 월드컵'''
코치경력
울산 현대 골키퍼 코치 (1997~2003)
경일대학교 골키퍼 코치 (2005)
전북 현대 골키퍼 코치 (2006~2013)
고양시민축구단 플레잉 코치 (2014)
원삼중학교 골키퍼 코치 (2015)
신갈고등학교 골키퍼 코치 (2016~2019)
등번호
1번, 21번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유년시절과 축구
2.2. 프로리그 입문과정
2.3. 울산 현대맨 최인영
2.4. 국가대표 생활
3. 감독 경력
4. 재능기부와 선수로의 복귀
5. 평가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이자 칼럼니스트, 신갈고등학교 축구부 코치. 1990년대 초중반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골키퍼로 인정받으며 한국 축구계의 골키퍼 계보를 이어간 선수였다.[1] 1984년 아시안컵, 1990년 월드컵, 1990년 아시안 게임, 1994년 월드컵 총 4번의 메이저 대회에서 대표팀 주전 수문장으로 활약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고 1994년 월드컵에서는 주장 완장까지 차며 그를 두고 한국 및 해외 언론은 '''아시아 최고의 골키퍼'''라는 찬사를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A매치 마지막 경기였던 1994년 월드컵 독일전에서의 실책으로 평가가 180도 뒤바뀐 비운의 인물이다.

2. 선수 경력



2.1. 유년시절과 축구


파주 신산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배구 선수로 활동했던 그는 파주군 초등학교 종합체육대회를 앞두고 축구부 골키퍼가 부상을 당해 '땜방'으로 골키퍼 장갑을 처음 끼게 됐다. 이 대회 에서 축구와 배구 두 종목 우승 메달을 모두 거머쥔 그는 결국 이때부터 축구와 인연을 맺었다.
독특한 과정을 거쳐 축구의 세계로 넘어온 최인영은 광탄중학교에서 골키퍼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일반 학생들과 똑같이 수업을 모두 받고, 방과 후에 훈련을 하는 형태, 즉 지금의 유소년 클럽과 비슷한 생활을 했기에, 사실 이 때까지만 해도 최인영에게 축구는 취미 비슷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집안이 넉넉하지 않았고, 몸도 조금 약했다. 그래서 축구를 하고 훈련을 하는 과정에서 코피를 몇 번 쏟자, 집안의 반대로 3~4개월 동안 축구를 그만두기도 했다. 그러나 축구를 그만둬야 했던 이 몇 개월은 역설적으로 최인영에게 축구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던 기간이었다고 한다.

2.2. 프로리그 입문과정


광탄중과 서울체고를 거친 최인영은 곧바로 서울시청에 입단했다.[2] 당시 서울시청에는 박종환 감독이 있었고, 철저한 스파르타식 훈련 통해 최강팀으로 자리 잡았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참가하는 대회마다 좋은 성과를 올렸고, 최인영은 그 활약을 인정받아 1980년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U-19 청소년대표팀에 선발됐다.

그리고 1981년, 호주에서 열린 U-20 월드컵에 참가하면서 첫 국제 메이저 대회를 경험하게 된다. 당시 최인영은 주전 골키퍼였고, 최순호, 김석원, 곽성호, 김삼수, 김경호, 이경남 등의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탈리아, 루마니아, 브라질과 한 조에 속한 대한민국은 첫 경기였던 이탈리아전에서 4-1 대승을 거두면서 파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루마니아브라질에게 연패하면서 결국 1승 2패로 탈락하고 말았다.

호주 U-20 월드컵을 통해 경험을 쌓은 최인영은 1983년에 슈퍼리그에서 2경기를 소화하며 프로에 첫 발을 내딛었다. 당시 서울시립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그는 임대[3]를 통해 국민은행에서 2경기를 무실점으로 소화했다. 프로 선수로서 첫 기록이었다.

2.3. 울산 현대맨 최인영


이듬해인 1984년, 마침내 최인영은 본격적으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울산 현대에서만 12년을 뛰며 '''울산 현대맨'''이라 불리는 등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확고히 자리잡았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지금은 상상할 수조차 없이 열악했던 프로 초창기의 모습부터 비교적 프로의 틀을 잡아갔던 199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 프로축구의 변천사를 몸소 체험했다.
물론 '''울산 현대맨 최인영'''에게도 고비는 있었다. 1985년 부상으로 4경기만 뛴 적이 있었는데, 1988년에 최인영은 단 4경기 출장에 그쳤다. 울산 현대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주전 골키퍼로 뛰었던 오연교유공에서 영입하면서 주전 자리를 내준 것이었다. 오연교의 영입으로 그는 트레이드 위기까지 몰렸다. 그러나 최인영은 울산 현대에서 뛰겠다는 확고한 의지로 트레이드를 거부했고, "죽어도 여기서 죽겠습니다. 연말까지 열심히 노력해서 내년에도 못 올라서면 유니폼을 벗겠습니다"라며 백의종군을 선언했다. 6개월 동안 팀 훈련 외에 새벽훈련과 저녁 훈련까지 하면서 신인의 마음으로 훈련에 임하여, 결국 시즌 말에 다시 주전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참고로 그는 프로 무대에서 '''전인미답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데뷔한 해인 1984년 7월 1일 부산 대우 로얄즈와의 경기에서 퇴장당하며, '''K리그 역사상 최초로 퇴장당한 골키퍼'''가 된 것이다. 당시 경기에서 양 팀 선수들의 치열한 몸싸움으로 전반 15분 현대의 허정무가 경고를 받고 대우의 장외룡이 퇴장당했다. 하지만 대우는 선수 한명이 적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전반 29분 이태호의 헤딩슛으로 선취골을 뽑아냈고, 당시 경기 전반이 끝나갈 무렵 볼을 손에 넣은 현대의 골키퍼 최인영이 1명이 더 많은 유리한 상황을 이용하기 위해 가능한 빨리 공격진에게 볼을 연결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앞을 향해 뛰어나가는 순간 마침 앞에 있던 대우의 공격수 이천흥이 최인영을 붙잡고 늘어졌고, 덕분에 볼을 놓친 최인영은 선제골을 내줘 가뜩이나 심기가 편치 않았던 터라 '''이천흥을 향해 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아이쿠 이래서는 안 되지 싶었던 최인영은 '''얼른 발을 거두었지만''' 이 장면을 놓치지 않고 '''지켜 본 주심'''이 달려와 '''레드카드'''를 뽑아 들었던 것이다.
현대는 퇴장당한 최인영 대신 '''미드필더 추종호에게 잠시 골문을 맡겼다가''' 곧바로 팀 내 후보 골키퍼 김황호를 투입했다. 결국 경기는 현대의 0-1 패배로 끝났다. 최인영은 2게임 출전 정지라는 공식적인 징계와 함께 구단으로부터 30만원의 벌금을 부과 받고, '''K리그 골키퍼 퇴장 1호'''라는 불명예를 낙인처럼 남기게 되었다. 참고로 최인영이 퇴장 후 3년이 지난 1987년 8월15일 럭키금성 김현태유공과의 경기에서 퇴장 2호를 기록할 정도로, 사실 축구 경기에서 골키퍼의 퇴장은 흔한 일이 아니다.

2.4. 국가대표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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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호주 U-20 월드컵을 갔다온 이후 최인영은 본격적으로 대표팀에도 합류하기 시작했다. 1982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한 한국 대표팀에 선발되면서 처음으로 대표팀에 합류했고, 1983년 한일정기전을 시작으로 1994년 미국 월드컵까지 대표팀의 수문장으로 활약했다.

1983년 한일 정기전을 통해 대표팀에서도 자리잡은 최인영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참가에 대한 강한 의지를 불태웠고, 실제로 월드컵 아시아 예선 말레이시아전까지 대표팀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관문이었던 일본과의 경기를 앞두고 햄스트링(허벅지 뒷근육) 부상을 당하면서 월드컵의 꿈을 접어야 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의 기회를 부상으로 날려 버리긴 했으나, 이후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부상으로 인해 기회를 얻게 된다. 사실 이탈리아 월드컵 최종 예선까지는 김풍주가 전 경기에 주전으로 출전하며 단 1실점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본선에서도 당연히 주전을 굳히는가 했으나, 본선 벨기에전을 앞두고 다리부상을 당하여 벤치를 지켜야 했고, 정기동 역시 최인영과의 경쟁에서 밀려나 결국 최인영이 주전으로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활약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 때 아직 제대로 된 준비가 되지 않아 대회 이후 이회택 감독으로부터 16강 탈락의 최대 원인으로 지목되며 맹비난을 받는 등 고초를 겪지만,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 3경기를 풀 타임으로 출장하면서 한 단계 성장한 골키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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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벨기에와의 첫 경기에서 후반에 2골을 내주면서 좌절을 맛봐야 했다.[5] 2차전 스페인전에서도 미첼에게 해트트릭을 내주며 1-3으로 졌고, 우루과이와의 3차전에서는 선전을 펼쳤지만 후반 종료 직전에 폰세카에게 1골을 내주며 0-1로 패했다. '''3전 전패로 월드컵을 마감'''하여 대중들의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최인영 본인은 이탈리아 월드컵을 통해 대한민국 축구의 현실이 정말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아무래도 지금처럼 과학적인 훈련이 갖춰지지 못했고, 상대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었던 것이 당시의 대표팀 현실이었다. 다른 축구인들도 이 실책은 인정했다. 이탈리아 월드컵을 통해 최인영은 최고 레벨의 세계 축구를 경험하게 되며, 그에게 축구의 재미를 다시 느끼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월드컵을 통해 그는 축구에 눈을 떴다.
한 번의 월드컵을 경험한 최인영은 더욱 노련한 골키퍼가 되어 대표팀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 대표팀에 들락날락할 때에도 최인영만큼은 엔트리에서 빠지는 법이 없었다. 항상 최인영을 소개하는 TV 캐스터와 해설자는 버릇처럼 최인영의 '동물적인 반사 신경'을 치켜세웠다. 그는 비록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이지는 않았지만 안정적으로 골문을 지켰고 1992년 다이너스티컵 결승전에서는 일본과의 승부차기에 키커로 나와 골을 성공시키는 인상적인 모습을 선보이기도 했다.

2.5. 미국 월드컵의 악몽


최인영과 라이벌이었던 골키퍼 김풍주김호 감독으로부터 1994년 미국 월드컵 국가대표팀의 주전 골키퍼로 먼저 발탁되었으나, 예선전에 들어가기 직전 부상을 입는 바람에 출전이 불가능해지면서 최인영이 후발주자로 발탁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2회 연속 발탁된 월드컵 국가대표 골키퍼'''[6]가 될 예정이었으나, 이미 그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운 좋게 라이벌 동료들을 제치고서 출전한 경험이 있었고 대표팀의 수문장으로서 막중한 부담을 다시 한 번 견뎌 내기에는 너무 지치고 부담스러운 상황이었기에, 이번 월드컵 대표팀의 기회를 동료나 후배 골키퍼들에게 주고 싶어서 '''사실 미국 월드컵 예선 전부터 이미 대표팀에서 은퇴를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자신을 대표팀에 발탁한 김호 감독에게 직접 찾아가서 대표선수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으나, 그는 김호 감독에게 '''"선수가 은퇴한다 만다 하는 게 어딨냐, 뽑히면 국가대표 하는 거지 네가 뭔데 건방지게 그만둔다고 하냐"'''며 제대로 핀잔을 듣고 결국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국가대표팀에 합류한다.
1990년대 초반 당시에는 지금보다 축구계의 고질적인 문제인 상명하복의 군대식 문화가 더욱 강력히 자리잡고 있었고, 특히 선배도 아닌 감독 중의 최고라 불리는 국가대표팀 감독에게 야단을 맞고 난 상황에서 선수로서 자신의 의견을 계속 피력하기란 더욱 불가능했다. 그리고 당시에 최인영의 성격 또한 무관하지 않았던것이 10년 이상의 프로 무대에서 몸싸움이나 시비를 일으킨 적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한 편이라 자신의 의견에 대한 강력한 의지나 고집을 세우지 않는 편이었다. 덕분에 현역 은퇴 후에도 코치로 활동하면서 그가 몸담았던 구단과 꾸준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었다. 어쨌든, 1994 월드컵 예선을 앞둔 당시에 최인영은 외적인 기록으로는 최정점에 서 있었을지 몰라도, '''내적으로 엄청난 부담과 압박에 상당히 지쳐 가고 있었던 상황'''에서 국가대표 선수로 참가한 셈이다. 최인영이 월드컵 본선에서 '''본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몸이 많이 얼어 있었던 것'''은 이런 심리적인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당시 국가대표 감독이었던 김호 감독 입장을 보자면, 최인영에게 대하는 방식이 다소 강압적이고 과격하긴 했어도 그 당시에는 감독으로서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견해도 있다. 애초에 월드컵 대표팀 주전 골키퍼로 선발된 김풍주가 부상으로 대회를 포기한 데다,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김풍주, 최인영과 경쟁했던 정기동은 이미 1991년에 선수로서 은퇴한 뒤라 당시 최고의 상승세를 구가하던 최인영을 대체할 만한 신뢰성 있는 골키퍼가 국내에 없던 상황이었는데 최인영의 일방적인 은퇴 의사는 대표팀 감독 입장에서 상당히 무책임하고 실망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당시에 김병지이운재를 발탁했으면 되는거 아니냐 하는 의견도 있는데, 사실 이 당시 김병지는 1992년 울산 현대에 갓 입단하여 최인영의 코칭을 받고 있던 햇병아리 선수로 대표팀은 꿈도 못 꾸던 시기였고, 이운재는 1994년 미국 월드컵 국가대표팀에 합류하긴 했으나,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국가대표 경력 외에는 아직 프로 리그도 진출하지 않은 대학생 선수 수준에 지나지 않았기에 당시에 최인영을 대신해서 이들이 월드컵 대표팀 주전으로의 선발이 고려되는 것 조차 사실상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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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에 열린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그는 다행히도 안정된 모습을 보여 주면서 '''아시아 최고의 골키퍼'''라는 칭호를 받으며 팀의 '''주장'''으로서 대표팀을 잘 이끌어 간다. 이미 2번째 월드컵 출전과 33세의 베테랑으로서의 경험은 한국 대표팀에게 큰 힘이 되고도 남았다. 은퇴를 결심하는 최인영에게 쓴소리를 하긴 했어도 김호 감독은 그만큼 최인영을 대표팀의 기둥으로서 절대적으로 아끼고 신임하고 있었고 , 결국 대표팀이 도하의 기적을 이루어 내며 본선 진출권을 따내면서 최인영은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다시 한 번 대한민국 골문을 지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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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첫 월드컵 때보다 플레이가 훨씬 안정되고 좋았고, 주장으로서 선수들에게도 항상 질 때 지더라도 자신있게 하자고 주문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회를 앞두고 주장으로서 김호 감독과 대화를 많이 했는데, 스페인과 비기고, 볼리비아에 이겨서 1승 1무 1패로 16강에 간다는 목표를 세웠다고 한다. 실제로 스페인과 2-2로 비기면서 실현이 되는 듯 보였으나 볼리비아전에서 몇 차례 완벽한 득점 기회를 놓치면서 계획이 틀어지더니 마지막 독일전에서 선전을 펼쳤지만, 3-2로 아쉽게 패하면서 16강의 꿈은 좌절되었다.
다만 볼리비아전에서도 소소한 삽질이 있었는데, 후반 4분 골킥 상황에서 뜬금없이 상대 공격수 방향으로 공을 차서 그대로 실점할 뻔했다.

'''무엇보다 독일전은 최인영에게 잊을 수 없는 경기다.''' 이 경기에서 그는 '''전반에만 3골을 허용'''했고, '''마지막 3번째 골'''은 그야말로 골키퍼로서 놓치지 말아야 할 '''쉬운 볼'''[7]인데도 불구하고 놓친 것으로 해석되면서 대중과 언론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아야 했다.[8] 그리고 후반전 시작과 함께 당시 대학생이자 후보 선수였던 이운재로 전격 교체[9]되기까지 했는데, 사실 이 교체는 전반전 종료 후 최인영 본인이 먼저 직접 요구한 것이었고 김호 감독 또한 노장의 마지막을 배려한다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10] 하지만 실제 최인영이 교체된 후 후반전에는 대표팀의 '''추가 실점도 없었고''' 거기에다 황선홍홍명보가 각각 1골씩 넣으며 '''독일을 압박하는 역전된 상황'''[11]으로 이끌었으나 아쉽게도 석패하는 결과가 나왔다. 더구나 독일전 후 한국팀이 조 3위 상위 4개팀에 주어지는 16강 티켓 경쟁에서 골득실 1점 차로 매우 아슬아슬하게 탈락한 것이 알려지면서, 자연스레 바로 앞 경기에서 독일에게 3골이나 허용하고 거기에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골을 먹게 만들어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16강 진출의 희망을 결정타로 날려버린 장본인이 된 최인영에게 국내 축구 팬들의 비난의 화살이 마구 날아오기 시작한다.[12]
덕분에 '''최인영 때문에 월드컵 16강에 진출하지 못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올 정도로 그의 실책에 대한 당시 대중들의 평가는 '''역적 행위'''에 가까웠으며, 축구 팬들 사이에서 그의 실책은 엄청나게 입에 오르내린다. 그냥 굴러오는 볼을 못 잡고 실점했다거나, 슛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볼을 다리 사이로 흘려버리는 '''알까기'''로 실점했다고 하거나, 혹은 봉산탈춤 추면서 뻘짓하다가 실점했다는 등 그의 실책은 축구 팬들의 입소문을 타고 여러가지의 형태로 변형되며 왜곡되어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등, 인터넷 문화가 발달된 요즘이었다면 '''수십만개의 악플도 모자랄 수준의 엄청난 가쉽거리'''였다.
최인영의 독일전에서의 실책은 이런 식으로 여론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며 그동안 축구선수로서 쌓아온 명성과 건실한 이미지를 단칼에 깎아먹으며 '''평가절하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본인이 이미 미국 월드컵 전부터 원하고 있었던 '''국가대표팀에서의 은퇴 발표'''는 월드컵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에 사실상 '''경질에 가까울 정도의 따가운 시선과 불명예스런 분위기''' 속에서 안타깝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최인영은 당시 이미 심적으로 지쳐가는 상황에서 '''미국 월드컵의 악몽'''까지 겪게 되면서,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현역 선수로서의 생명력과 에너지를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이어서 열린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는 차상광이 '''알까기'''라는 희대의 실수를 한 번 더 시전했다.

3. 감독 경력


1992년까지 최인영은 울산 현대의 주전 수문장으로서 활약했으나 코칭스태프와 마찰로 인해 이듬 해인 1993년부터 서서히 출장 기회를 잃었고 주장까지 반납하는 상황에 이른다. 덕분에 구단 측에서는 당시 신입으로 입단해 골키퍼로서 소질과 성장 가능성이 보이는 김병지를 주전으로 키우기로 마음먹었고, 최인영은 후보로 밀리는 상황이 되며 주전 자리를 김병지가 대체하기 시작한다.
1994년부터는 미국 월드컵 대표팀 합류로 인해, 그리고 월드컵을 마치고서는 이미지가 워낙 안 좋아진 탓에 한 해 동안 프로리그에서 6게임을 뛰는데 그치고, 1995년에는 겨우 1경기 출장, 마지막 해인 1996년에는 아예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13] 사실 이 무렵부터 최인영은 선수보다 '''플레잉 코치'''의 개념에 가까워서, 본인이 경기를 뛰는 것보다는 김병지를 비롯한 후배 골키퍼들을 조련하는데 더 큰 비중을 두며, 본인이 실질적으로 바라고 있었던 후배들의 길을 터 주는데 주력하게 된다. 덕분에 김병지는 같은 구단 직속 대선배인 최인영으로부터 골키퍼에 대한 노하우와 전문적인 지도를 아낌없이 전수받으며 국내 최고의 골키퍼로 성장하게 되고, 울산 현대를 '''"골키퍼 명가"'''로 발돋움하게 한다. 그래서 미국 월드컵 전후로 약 3~4년 간의 마지막 현역 활동 기간은 최인영에게 흑역사라기 보다는 이미 그 전부터 은퇴를 고려하고 지도자의 길을 미리 준비하던 그에게 '''지도자가 되기 위한 사전 준비 기간'''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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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정식으로 은퇴한 최인영은 그대로 울산 현대에서 골키퍼 코치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당시 울산 현대에는 전문적인 골키퍼 코치가 없었기에 구단측에서는 골키퍼로서 화려한 경력과 풍부한 경험을 가진 최인영을 적격자로 꼽았던 것이다. 2003년까지 울산에서 골키퍼 코치 생활을 했던 그는 2004년에 브라질과 잉글랜드에서 6개월씩, 총 1년간 지도자 연수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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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경일대학교에서 수석코치 겸 골키퍼 코치로 활동하던 최인영은 2006년, 최강희 감독의 러브콜을 받아 전북 현대 모터스의 골키퍼 코치를 맡게 됐다. 프로팀의 코치로 복귀한 그이지만, 언젠가는 어린 골키퍼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그만큼 자신이 현역 시절에 골키퍼 코치 없이 힘들게 성장해 왔기 때문에, 어린 선수들에게는 제대로 된 교육을 시켜주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그러나 2013년 계약 만료 후 해임되며 코치직도 그만두게 된다.

4. 재능기부와 선수로의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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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현대 모터스를 떠나 경기도 일산의 자택에서 휴식기를 보내던 최인영은 새 일을 찾는 동안 자신의 고향인 파주시에서 유소년 인재 양성의 꿈을 실천하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구상 중이었다. 때마침 김진옥 前 할렐루야 선수가 고양시에서 챌린저스리그 시민 축구단 감독을 맡았다는 얘기를 듣고서 곧장 찾아가게 되었는데, 구단에는 등록금이 부담돼 휴학한 대학 선수 출신도 많았음에도 아마추어 구단인지라 재정 상태도 좋지 않아서 전문적인 골키퍼가 없이 훈련하는 실정이었다. 구단의 이런 열악한 사정을 알게 된 최인영은 자신이 30년 간 선수와 코치로 활동하며 재정 관리를 해 온 덕분에 1년쯤은 연봉 없이도 충분히 살 만하다면서, 2014년 1년 간은 대한민국 축구를 위해 봉사하는 해로 마음을 새기고 '''재능기부의 형식으로 팀에서 활동'''하겠다며 '''무보수로 팀에서 코치로 일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고양 시민축구단에는 전문 골키퍼가 1명뿐인 데다가, 나머지 한 명은 비선수 출신이어서 믿을만한 전력이 못 되는지라 챌린저스리그 일정을 모두 소화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결국 코치 활동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최인영은 '''53세의 나이로 선수 등록을 결심'''하고 '''선수를 겸하는 플레잉 코치'''로 활동 중이다. 이는 과거에 현역 시절 선수로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경기를 뛰기보다 코치로서 후배 골키퍼 양성에 주력했던 울산 현대에서의 말년 시절의 모습이 떠오르는데, 이 당시 최인영의 교육과 기술 전수를 받고 세계적인 골키퍼로 성장한 후배 선수가 다름아닌 김병지였기에 앞으로 최인영의 지도자로서의 또 다른 활약이 기대된다.
2015년 용인시축구센터의 중등부인 원삼중학교 골키처 코치로 부임하였으며, 2016년부터는 용인시축구센터의 고등부인 신갈고등학교 축구부의 코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5. 평가


1994년 미국 월드컵이 끝난지 몇 년이 지난 1990년대 중반에 '''최인영의 딸이 겪었던 실화'''이다. 최인영의 딸은 당시 큰 고민이 있었는데, 학교에서 친구들이 아버지인 최인영이 월드컵에서의 실책을 한 것을 가지고서 일부러 자기 앞에서 놀려대는 것 때문이었다.

"야! 느그 아빠가 '''알까기'''해서 우리나라 16강 못갔다 아이가!!"

"내가 골키퍼라도 그런건 막겠다" 등등

아버지인 최인영 선수의 알까기를 놀려댔다.

이런 장난이 점점 견디기 힘들어진 딸은 결국 아버지인 최인영에게 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 딸의 고민을 듣고 분노한 최인영은 직접 학교로 찾아가 방과후 놀림을 일삼던 아이들을 운동장에 집합시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실수해서 골을 먹은 것은 맞지만 내 딸은 놀리지 마라. 너희들이 PK 10개차서 내가 다 막으면 다시는 딸 애를 놀리지 말거라!! 대신!! 한 골이라도 내가 실점할 경우엔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

친히 준비해 온 골키퍼 장갑을 주섬주섬 착용하며 아이들과의 PK에 들어간 그는 결국 뻔한 결과대로 무실점 완봉하고, '''거기있던 아이들 모두를 피자집으로 데려가서 크게 한턱 쏘고 난 후에 모두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다고...''' 그 후로 최인영의 딸은 더 이상 놀림을 받지 않았지만 그의 대인배스러운 피자셔틀은 모두 잊혀진 채 '''최인영의 아이들과의 PK 대결''' 부분만 뒷이야기로 전해지며 최근까지도 축구 팬들 사이의 술안주거리로 씹히고 있는 현실이라고...

위의 에피소드에 나오는 아이들과 같이 대부분의 국내 축구 팬들은 최인영의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의 어이없는 실책만을 기억하며 그의 골키퍼 능력을 폄하하곤 하지만, 그가 분명 골키퍼로서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 큰 획을 그었음을 부정 할 수는 없다. 최인영은 A매치 50경기에 출전해 40골만을 내주며 상당히 선방했고, K리그에서도 1983년부터 1996년 은퇴할 때까지 176경기에 나서 174점만을 허용, 경기당 1실점도 내주지 않는 훌륭한 기록을 세웠다.
한국이 볼리비아와의 경기에서 '''월드컵 출전사상 첫 무실점 경기'''를 치루는데 일조했다는 점, 최인영의 국가대표 은퇴 이후 1995년부터 김병지가 자리를 잡기 전까지 차상광, 신범철이 A매치에서 그의 공백을 제대로 메꾸지 못했다는 점과 1993년에 AP통신에서 '''세계 4대 골키퍼로 선정'''된 것은 1990년대 초반의 한국 축구계에서 그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설명해 준다. (만약 김병지가 당시 K리그에서 수많은 외국인 골키퍼들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혜성처럼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국가대표팀은 훨씬 더 오랜기간 골키퍼 부재로 애를 먹었을 것이다.) 비록 마지막이 된 미국 월드컵에서의 부진으로 인해 평가절하된다고 할지라도, 15년간의 골키퍼로서의 경력과 기록들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대한민국 축구계의 구세대'''[14]로서 전문적인 골키퍼 코치에게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골키퍼로서 좋은 기량을 발휘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둘 수도 있다. 한국축구 골키퍼 신세대로 대표되는 김병지의 경우만 해도 같은 프로팀 내의 선후배 관계로 조우하여 '''최인영이 전문적인 지도와 더불어 자신의 오랜 노하우들도 아낌없이 전수해 준 덕분'''에 한국 최고의 골키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최인영 본인도 만약 유청소년 시기부터 제대로된 골키퍼 교육을 받았다면 더 좋은 선수가 될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크다고. 그래서인지 해외 지도자 연수와 더불어 AFC에서 주최한 골키퍼 인스트럭터 코스를 이수하는 등, 훗날 여유가 되면 유소년 골키퍼 꿈나무들을 기초부터 잘 가르치고 싶다는 지도자로서의 포부와 꿈도 가지고 있는듯 하다.

[1] 조병득 이후, 김병지 이전에 대표팀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였다.[2] 당시 서울시립대학교 선수들은 서울시청 축구단의 선수이기도 했다. 축구뿐만 아니라 배구의 경우에도 서울시립대학교 선수들이 서울시청 선수로 대통령배 배구대회에 출전했다.[3] 당시에는 대학교 4학년생이 임대로 뛰는 것이 가능했다고 한다. 특히 최인영이 국민은행 감독님과의 친분 덕분에 2경기를 뛰었다고 한다.[4] 최순호, 정용환, 김주성, 박경훈 등 당시 한국 축구계의 최고의 선수들도 있지만, 유난히도 가운데에 앉아 있는 최강희 감독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최강희 감독의 왼쪽의 선수는 이영진이며, 최인영 골키퍼 오른쪽에 있는 선수들이 이후 12년 동안 대한민국 축구를 이끌어 나가게 될 홍명보황선홍이다.[5] 그러나 이 경기에서 오히려 최인영의 활약이 빛났다. 이 경기에서 대한민국은 미드필드 지역에서 계속 공을 뺏기며 말 그대로 일방적인 졸전을 했다. 그나마 최인영의 선방으로 2:0에서 끝난 거다. 1998 월드컵 네덜란드전의 김병지와 비슷한 활약을 했다고 보면 된다.[6] 이 기록은 12년 뒤 그와 같이 미국 월드컵에 출전했던 이운재가 유일하게 이어받았을 정도로, 그 이전까진 대한민국 축구계에서는 독보적인 기록이었다.[7] 위의 동영상을 보면 사실 위르겐 클린스만이 발리 킥으로 시도한 슛이라 방향이 전혀 예상되기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슛 자체가 그라운드에 바운드하며 그닥 강력하지도 않았고, 중요한 건 최인영이 위치한 방향으로 오던 볼인데도 최소한 펀칭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놓친 것은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8] 당시 MBC 중계를 도맡아 하시던 신문선 해설은 월드컵 이후 이 경기를 리뷰하며 '''세번째 골은 100% 최인영 골키퍼의 어이없는 실수입니다.'''라고 친히 설명해 주셨다.[9] 일반적으로 축구 경기 중에 부상이나 퇴장 등으로 경기 운영이 불가능한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웬만하면 골키퍼는 교체를 잘 안 시킨다.[10] 사실 최인영은 볼리비아전 후 연습 도중 부상까지 입은 상태였다. 그래서 김호 감독이 컨디션이 좋았던 후보선수 이운재를 주전으로 쓸려고 했지만 대학생 선수로 아직 검증되지 않은 햇병아리를 월드컵 대표 주전으로 발탁하기에는 리스크가 많이 따랐고, 결국 김호 감독은 오랜 경력과 노하우를 생각해서 최인영을 끝까지 주전으로 기용한 것이었다.[11] 후반전의 경우 추가 시간 5분만 주어졌어도 대한민국이 최소한 독일과 비겼고 오히려 이길 가능성도 충분했을 거란 분석까지 나올 정도로 엄청난 상승세였다. 위르겐 클린스만도 실제로 이런 말을 했다. 그리고 24년 후 클린스만이 했던 말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12] 사실 독일전의 최인영의 실책보다 볼리비아전에서 공격수들이 수많은 골 득점 기회를 놓친 게 대표팀의 16강 진출 실패의 주요 원인으로 분석된다. 거기에 독일전 역시 후반전에서의 추가 득점을 못 낸 것이 너무 아쉬운 경우였다. 덕분에 당시 대표팀 주전 스트라이커였던 황선홍은 독일전에서 골을 넣고도 웃음 한 번 내보일 수 없었을 정도로, 이미 볼리비아전 이후부터 최인영보다 먼저 역적에 가까운 비난의 화살을 받고 있었다. 그나마 막판에 최인영의 실책 덕분에 그에게 집중되었던 비난의 화살이 분산된 셈이다.[13] 사실 그는 이미 1995년에 은퇴를 결심했으나, 주전 김병지는 국가대표로, 신인 골키퍼 서동명은 올림픽대표로 발탁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자 구단과 고재욱 당시 감독이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은퇴를 미뤄달라고 부탁해 1996년까지 선수등록을 했다고 한다.[14] '''구세대'''란 단어가 뜻하는, 그 당시 낙후된 한국 축구 수준을 실감하지 못하는 팬들도 있을 것이다. 1986년 32년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던 멕시코 월드컵에선 현지에서 '''연습상대를 구하지 못해''' 자체 청백전으로 실전감각을 끌어올리는 삽질을 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선 경기 시작 1주일 전에 입국해서 선수들이 시차 적응이나 현지기후, 음식 적응같은 건 변변히 못한 상태로 시합을 치뤄야 했다. 당시에 명색이 월드컵 대표팀인데도 변변한 지원인력이 없어서 팀 막내인 황선홍, 홍명보가 매일 밤 늦게까지 직접 팀원 유니폼을 빨고 야식을 준비하고 새벽에 일어나서 축구화를 챙겼다. 1990년 월드컵 감독이었던 이회택의 회고를 첨가하면,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상대 선수들이 중원에서 숫적우위로 강하게 압박하는거였다. 우리 선수들은 패스는 커녕 볼 키핑도 제대로 하기 힘들었다. 솔직히 평생 축구를 해왔지만 그런 축구는 보지도 못했다.' 이미 유럽에선 보편화된 토탈사커, 압박축구였다. 우리는 세계 축구의 흐름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축구 감독들이 다투어서 집에 파라볼라 안테나를 달고 위성방송을 통해서 해외축구를 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야 우물안 개구리라는 걸 알게되고 1990년에는 대한민국 축구 사상 최초의 외국인 감독인 데트마어 크라머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선임했다. 그런데 축구계에서 척사양이 수준으로 배척을 당하고 채 뜻을 펴 보지 못하고 쫓겨났다. 반면 당시 선수들은 크라머 감독을 굉장히 높이 평가했다. 크라머의 지휘를 받아 올림픽 본선에 나간다면 세계를 깜짝 놀래킬 '사고'를 쳤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특히 서정원이 크라머를 좋아한다고 한다. 이후 1992년 구 소련 출신 GK 신의손이 K리그에서 뛰기 시작했고 약 3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신의손을 능가했다 평가되는 한국인 GK가 이운재를 포함해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의손이 귀화했을 때 괜히 축빠들이 온갖 설레발을 떤 게 아니다. 구 소련 제도권 축구를 배운 엘리트의 노하우가 고스란히 대한민국으로 유출된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