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용모
1. 소개
前 야구선수. 언암초(1981년 졸업), 태안중(1984년 졸업), 북일고(1984~1987년 졸업), 동아대(1987학번~1991년 졸업)를 졸업하고 1991년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하여 빙그레 이글스,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SK 와이번스에서 활약했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포수였지만, 수비력이 좋은 편은 아니라서 눈에 띄게 활약한 적은 없다. 그러다가 발이 빠른 것에 착안해 외야수를 본 적도 있다. 도루 개수도 제법 많은 편.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멀티 포지션 개념을 처음으로 보여준 선수로 평가받는다. 특히 1993시즌 빙그레 이글스가 주전 선수들의 줄부상으로 선수층이 많이 얕았는데, 이 때 양용모가 포수와 외야수, 1루수를 종횡무진 오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경기 도중에 포지션을 변경한 경우도 잦았으며 실제로 이때 양용모의 장비 가방엔 포수 미트, 내야수 글러브, 외야수 글러브 등 글러브가 종류별로 가득해 글러브 수집가라는 우스갯소리를 듣기도 했다. 해태 타이거즈에서도 정회열이 그즈음 포수로 나오면서 간간이 우익수를 봤지만, 포수가 멀티 포지션을 하면서 도루도 심심치 않게 하는 건 KBO 역사상 없던 케이스이다.
2. 선수 시절
1991년 빙그레 이글스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했지만, 1993년 부상으로 출전 기회가 줄어든 이정훈 대신 진상봉과 중견수를 번갈아 맡은 걸 빼면 주로 백업으로 나왔고 눈에 띄는 활약은 보이지 못했다. 1993시즌 후 빙그레를 퇴단해 현역병으로 복무하고 1996년 입단 테스트를 받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삼성 라이온즈에서도 백업으로 출장하다 1998년 말 쌍방울 레이더스에 트레이드되었다.(현금 20억+양용모+이계성↔김기태+김현욱) 2001년에는 SK 와이번스에서 주장을 맡았고 2002시즌 후 은퇴했다.
그가 보유했던 이색 기록으로, 시즌 '''최소 홈런 삼진왕'''(...)이 있다. 1993년 84개의 삼진을 먹으면서 홈런을 달랑 두 개만 쳤기 때문. 이 기록은 이후 4반세기가 넘게 지나도록 그의 손에 있다가, 2019년 110개의 삼진을 적립하는 동안 무려 '''0개'''의 홈런을 때려낸 임병욱에게 돌아갔다.
3. 지도자 시절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삼성에서, 2006년에는 LG에서 배터리코치를 했고, 2008년부터 롯데 자이언츠 2군 배터리코치를 맡았는데 2011시즌 후 재계약 포기 통지를 받아 잠시 휴식기를 가졌다. 2013시즌 롯데 자이언츠 육성군 배터리코치로 복귀했고 시즌 후 1군 배터리코치로 올라왔다.
코치로서의 능력은 여러 모로 애매하다. 양상문 LG 감독이 롯데에서 2군 감독을 하던 시절 그의 인맥으로 데려온 인물이 양용모와 이강돈.[3] 하지만, 이 시절 1군 배터리코치인 한문연 코치와 더불어 팬들은 그의 능력에 의구심을 표했다. 삼성, 롯데 시절 실적이 없는데다가, 현역시절 수비가 김영진급인지라, 포수가 아니라 외야수 알바를 뛰기도 했었고 김영진의 백업 포수로 뛰던 양용모의 능력에 어느정도 신뢰가 안 갔던 것은 사실이다.
그나마 장성우 등의 포수 유망주 성장에 공헌이 어느 정도 있다고 보인다.
2016년에는 3군 수석코치를 맡았으나, 롯데와 재계약에 실패한 후 고향 팀이자 친정 팀인 한화 이글스의 2군 배터리코치로 가게 되었다.
2017년 김성근 감독이 나간 이후, 코치진 개편으로 1군 배터리 코치가 되었다. 백업으로 나선 포수들의 플레이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아마 코치의 평가가 올라갈 듯하다. 그러나 시즌 종료 후 구단으로부터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고 팀을 떠났다.
박명환야구TV에서 오상민이 언급했다. SK 와이번스 시절 배터리로 호흡을 맞췄고 인천에 있는 나이트 클럽에 같이 가서 마시고 놀기도 했다고..
4. 연도별 성적
5. 관련 문서
[1] 1987학번[2] 양용모의 왼쪽에 있는 선수는 이강돈.[3] 이강돈 코치 역시 1999년부터 줄곧 한화에서 2군 타격 코치, 1군 외야 수비 코치 등을 거쳤으나, 성과가 딱히 없어서 지도력에 대한 의문이 있던 상황이었다. 결국 롯데에서 해임되었고, 빙그레 시절 후배인 이정훈이 한화 2군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자 북일고 감독에 선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