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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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전 삼성 라이온즈, 한화 이글스 소속의 야구 선수. 삼성 라이온즈의 암흑기를 상징할 만한(...) 포수. 삼성 라이온즈에서의 이미지만 보자면 나균안[1] 의 삼성 버전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동대문상고[2] 와 동국대학교를 졸업했다.
2. 선수 경력
1990년대 중반의 삼성 라이온즈는 호쾌한 타격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마운드가 문제였는데, 김상엽, 박충식, 김태한 정도가 간신히 지탱하는 상황이라 1994년 이후에는 계속 가을에 경산 볼파크에서 마무리 훈련만 하는 실정이었다.
마운드 외에 포수진 또한 문제였다. 원년부터 함께 해온 이만수가 체력 등의 문제로 주전 포수로 출전하기 힘들게 되자, 1988년 최동원↔김시진 트레이드 때 같이 온 김성현이나 1993년 시즌 중 빙그레 이글스에 이상목을 주고 데려온 박선일 등이 포수로 돌아가면서 출전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박선일과 김성현마저 각각 방출과 트레이드로 1996년을 마지막으로 팀을 떠났다.
덕분에 1997년부터 김영진이 주전으로 포수 마스크를 쓰게 되었는데, 정말 안습 크리의 연속이었다. 어깨나 블로킹은 쓸 만했지만, 단 한 번도 타율이 1할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통산 타율 1할 5푼'''[3][4] 에 극악의 투수 리드 등으로 상대 팀 팬들마저 측은지심을 들게 할 정도였다.
전병호가 사인문제로 백인천과 마찰을 빚을 때 사인을 잘못 읽었던 포수가 바로 김영진이며, 이 일로 백인천이 화를 이기지 못해 뇌출혈로 쓰러져 조창수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았다. 그해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은 악재에도 불구하고 김성근이 이끄는 쌍방울 레이더스를 꺾고 플레이오프에서 LG 트윈스에 안타깝게 져 고배를 마셨는데 사실 2연패 뒤 2연승을 기록했고, 5차전에서도 6회까지 2-0으로 앞서 리버스 스윕을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김영진이 포일을 시전한 것을 시작으로 폭풍 7실점(...)하면서 역전패하면서 2승 3패가 된 것이었다. 이렇듯이 삼성의 부침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통산 sWAR*이 -2.97로 KBO에서 꼴찌였'''다.[5] 다행인지 불행인지 2010년대 후반에 같은 포지션의 후배가 무서운 속도로 마이너스 war을 적립하며 김영진의 이름을 수시로 소환하고 있다. 그리고 2019년 9월 6일 경기에서 -0.08을 빠르게 적립하며 최하위를 빼앗았다. 더욱 무서운 것은 김영진은 6시즌에 걸쳐 달성한 기록이지만, 이 후배는 3시즌, 실질적으로는 '''단 2시즌'''만에 달성했다.[6]
2.1. 1997년 8월 23일 안습의 절정, 낫아웃 사건
무엇보다 김영진이라는 이름이 야구 팬들의 기억 속에 깊이 남게 한 사건은, 1997년 8월 23일,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대구 DH 1차전에서 일어났다.
4:1로 삼성이 이기고 있던 9회초 쌍방울의 공격 2사 주자 1, 2루 상황에서 대타로 타석에 들어온 장재중이 볼 카운트 2-1[7] 에서 원 바운드 볼을 헛스윙했다. 투수 김태한이 던진 원 바운드 볼을 타자가 힘차게(?) 휘둘렀지만 맞지 않고 그대로 포수 미트로 들어가서 김동앙 주심은 삼진을 선언했고, 동시에 김영진은 관중석으로 공을 던져 버렸다.
야구 규정상, '''2아웃 일때''' 2S에서 원 바운드 볼을 헛쳤을 때는 타자한테 스트라이크가 주어져서 삼진 처리되지만, '''아웃되지 않는다'''. 병살 유도를 방지하기 위해 1루에 주자가 있을 경우 낫 아웃 조건이 되더라도 낫 아웃이 적용되지 않지만, 2아웃일 때는 병살이 필요없기 때문에 1루에 주자가 있어도 낫 아웃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포수가 타자 주자를 태그하거나 공을 1루로 보내야 아웃 처리되는데….
당시 삼성의 사령탑이던 백인천 감독이 덕아웃을 뛰쳐나오며 1루로 공을 던지라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이미 공은 관중석으로…. 그리고 덕아웃으로 들어오던 장재중은 쌍방울 주루코치와 선수단의 외침에 황급히 1루로 달려갔다.
심판진은 경기 종료를 선언한 후 3루측 본부석까지 이동했고 당시 중계 방송사인 SBS는 엔딩 자막을 냈으며 KBO 홈페이지에는 승패 투수까지 띄워둔 상황이었다.
김성근 감독은 본부석으로 들어가는 심판진 앞을 막아서서 강력히 항의했고 일단 주심은 김성근 감독을 퇴장 조치했다. 4심 합의 후 오심을 인정하고, 야구 규칙에 의거하여 김영진이 장재중을 아웃시키지 않고 그냥 관중석으로 공을 던져서 볼데드를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악송구에 대한 안전 진루권을 부여, 타자와 주자를 모두 2루씩 진루시킨 후 경기를 재개했다(4:2 2사 2, 3루). 이후 최태원의 2타점 동점 적시타 등에 힘입어 쌍방울은 4:1로 진 경기를 4:6으로 역전승했다.
물론 백인천 감독도 김영진에게 1루로 공을 던지라고 덕아웃에서 소리를 질렀지만 경기가 끝났다는 안도감에 도취된 김영진은 감독의 지시를 듣지 못하고 이런 일을 저질렀다. 백인천 감독의 혈압을 왕창 올리는데 일조한 셈.
여담으로 이 해프닝은 2010년 이후로 나올 수가 없게 되었다. 2010년 KBO의 룰 개정에서 낫 아웃의 타자주자 아웃 시점을 기존 타자가 '''덕아웃으로 들어가는 시점'''에서 '''타자가 타석 주변 흙으로 이뤄진 서클을 벗어나는 시점'''으로 변경했기 때문. 이는 2009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룰 개정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2010년 이후의 룰에 따른다면 타자 장재중은 타석 주변 서클을 벗어났기 때문에 자동으로 아웃 처리된다.
2.2. 낫아웃 사건 후 여파
김영진의 낫아웃 사건에 충격과 분통을 터뜨린 삼성 라이온즈는 이후 많은 돈을 들여 동시에 여기저기서 포수들을 미친듯이 수집했다. 1998년 해태의 정회열, 1999년 시즌 중에는 두산의 진갑용을 현금 트레이드까지 하면서 데려오는 데 이어 2000년에는 FA 시장에서 김동수까지 질렀다. 결국 이 분노의 영입 속에 2000년 김영진은 주전 자리를 완전히 뺏겨 그 해 1군에 올라오지 못했고, 2001년 4월 27일 내야수 김승권을 상대로 외야수 조정권과 함께 한화 이글스에 트레이드되었다. 그 해 1군 7경기에 그친 뒤 시즌을 마치고 소리 없이 은퇴했다.
결국 삼성이 수집한 포수 이적생들 중 진갑용이 금지약물의 힘으로 성적을 냈고, 삼성은 한국시리즈가 무산된 1980년대 이후로 2002년에는 최초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뒤 우승을 여러 번 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약물 적발 이후 진갑용의 성적이 약물 이전으로 롤백[8] 하기 시작하면서 삼성은 또다시 포수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지영으로 버티다가 드디어 오랜만에 현질로 강민호를 영입한다. 하지만...
2.3. 여담
사실 위의 모든 사실은 애교로 봐 줄 수 있는데, 바로 삼성 라이온즈가 1995 드래프트 때 투수 '''진필중을 대신해서 지명했던 선수가 김영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변명거리가 있는 게, 대학 시절만 해도 김영진과 진필중은 넘사벽이었다. 김영진은 동국대 시절 4년 동안 줄곧 태릉선수촌 밥을 먹은 91학번 최고의 포수였지만, 진필중은 중앙대 4학년 당시 어깨 부상으로 인해 1승밖에 거두지 못했던 투수였다. 하지만 프로에 들어와서 위상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야만없이지만, 만약 진필중이 두산에서만큼 모습을 보이며 삼성에서 활약했다면 굳이 임창용을 '''양준혁+현금 20억'''을 쓰며 데려오지 않아도 될 뻔했고,[9] 돈성이라는 이미지에 박히지 않을 뻔했다. 게다가 진필중은 1995년 한국시리즈에서 6차전 승리투수가 되면서, 2승3패로 몰리는 상황에서 숨을 돌림과 동시에 OB가 패권을 가져갔으니, 프로야구의 판도를 완전히 바꾼 드래프트였다고 볼 수 있다.
이문한 전 삼성 스카우트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은 진필중의 잠재력을 믿고서 2차지명 2라운드에서 뽑기로 진필중의 가족과 약속했는데, OB 측에서 이를 간파하고 2라운드에서 진필중을 뽑아서 '''허탈'''해했었다고 한다. 전성기가 지난 2003년 이후 먹튀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진필중은 임창용과 더불어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군림했다. 더군다나 삼성이 두산에게 하극상을 당했던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 양 팀 투수들 중에서 유일하게 철벽으로 막았던 그를 생각하면 안습의 결정판이다.[10]
3. 연도별 성적
[1] 포수 시절 한정. 나균안으로 개명하고 투수가 된 현재는 2군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고 있다.[2] 청원정보산업고로 되어 있었는데, 이거는 1998년에 바꾼 교명이다. 2000년에 야구부를 청원고에 이관한 후 2003년에 청원여자고등학교로 전환.[3] 못 치니까 9번 타순에 기용되는 건 둘째치고, 나중에는 아예 타격 폼을 번트를 대는 듯한 폼으로 바꿨다. '''어차피 못 치는 건 매한가지니까 영 안되면 번트라도 대라'''는 뜻에서 그렇게 치게 했다고.[4] 이 선수가 94경기만 더 나갔다면, 염경엽을 능가하는 통산타율 최하위가 되었을 것이다. 김영진 통산타율이 1할 5푼, 염경엽은 그나마 나은 1할9푼5리.[5] -2보다도 못하는 선수는 김영진과 야수로 권두조, 염경엽, 투수로는 해태 출신 최상주가 있다. 이 투수는 85년 '''무려 선발투수로 12점대의 방어율을 기록하고도 5승을 챙겼다.''' [6] 나종덕의 커리어 하이인 2017 시즌은 단 5경기 나와 4타수 2삼진만을 기록했다.[7] 그 당시에는 S-B-O 순서로 전광판에 표기했다. 2012년부터 미국처럼 B-S-O 순서로 표기한다.[8] 롤백이라기보다는 엄밀히 약빨이 세월에 따라 저하되며 부상이 잦아졌다고 보는게 적절할 수 있다.[9] 진필중은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임창용과 쌍벽을 다투는 최고의 마무리 투수였다.[10] 반대로 임창용은 두산의 우승이 결정된 6차전에 등판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을 질러 1997년 한국시리즈 당시의 씽씽투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