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납치 사건

 




일본어: 金大(きんだい(ちゅう((けん, 金大中(キム・デジュン拉致事(らちじ(けん
1. 개요
2. 과정
3. 후폭풍
4. 기타
5. 창작물에서
6. 관련 문서


1. 개요


[image]
납치 사건 이후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김대중.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이듬해 대한민국 중앙정보부가 유신 반대운동을 주도하던 재야 정치인 김대중에게 저지른 납치 및 살인미수 사건이다. 대담하게도 일본에 있는 김대중을 납치하고, 먼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 했다. 그러다 미국 정부에게 배의 위치가 탄로나는 바람에 계획을 포기한다. 결국 김대중일본 도쿄도에서 실종된 지 닷새째 되던 날 밤에 서울 동교동 자택 앞에서 발견된다.

2. 과정


납치 이전 김대중1972년 10월 11일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 및 일본 정계 인사들과 만나기 위해 도쿄를 방문하여 체류하다가, 10월 유신이 발생하자 해외 망명을 결심하였다. 망명 후 김대중은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초대 의장으로 취임해 미국일본의 교포 사회를 중심으로 반정부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일본 도쿄 그랜드 팰리스 호텔 객실중 가장 위층인 22층 2212호에서 민주통일당(약칭 통일당) 당수 양일동, 김대중의 조카뻘이자 국회의원이던 김경인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며 담화를 나누고 자유민주당의 중의원인 기무라 도시오[1] #와의 약속장소로 출타하던 김대중이 한국인으로 보이는[2] 괴한 5명에게 납치당했다. 범행 현장에는 백두산 담배, 배낭, 휴지, 노끈, 마취제 등의 유류품이 남아 있었다.
괴한들은 오사카 또는 고베로 추정되는 안가에서 김대중의 옷을 작업복으로 갈아입히고, 눈과 입을 포장용 테이프로 막은 다음, 다시 차에 태워 1시간가량 달려 바닷가에 이르렀다. 여기서 모터보트에 태워 30~40분 항해한 뒤, 정박해 있던 중앙정보부의 공작선 536톤 용금호에 김대중을 인계한다.
용금호에 있던 자들은 김대중을 배밑 쪽 선실로 끌고 가, 손발을 다시 묶고 눈에는 테이프를 여러 겹 붙인 다음 그 위에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 오른손목과 왼발목에 각각 수십 kg짜리 바위를 매달고, 등에 판자를 대어 몸과 함께 묶었다. 이때 이들은 "던질 때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바다에 후카(상어)가 많던데", "솜이불을 씌워 던지면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을 주고 받았다. 공포에 질린 김대중은 속으로 "하느님 예수님 제발 저를 살려 주십시오" 라며 기도했다고 한다.
용금호가 전속력으로 항해하던 중, 김대중은 눈이 번쩍하는 불빛과 함께 굉음을 느꼈으며 선실에 있던 자들은 "비행기다!" 하면서 뛰쳐 나갔고, 배와 비행기가 서로 쫓고 쫓기를 30분 이상 계속하였다. 훗날 SBS 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싶다는 이 비행기가 미국 CIA의 연락을 받은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주한 일본 대사를 지낸 무토 마사토시는 자기가 동북아 과장 시절 여러 자료를 찾아봤지만 일본 자위대 비행기나, 해상보안청 헬기가 출동한 기록을 못 봤다고 일본인터뷰에서 증언하였다. 일본인지 미국인지 아니면 다른 국가인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당시 CIA 서울지부장이던 도널드 그레그[3]가 감청 요원으로부터 김대중이 납치되었다는 말을 듣고 직접 중앙정보부에 전화를 걸어 "김대중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했다고도 한다.
이때 CIA가 따로 움직였다고 한다. 납치된 김대중의 소재를 24시간 안에 파악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이때 주한 미국 대사이던 하비브는 그레그 CIA 한국 지부장에게 박정희김대중이 납치된 후 24시간 동안은 미국의 눈치를 볼 것이니, 그 안에 찾아내라고 조언했고, 결국 CIA 한국지부 요원들이 김대중의 소재를 찾아냈다. 이때 관련 정보를 소지한 요원이 직접 청와대로 찾아가자 박정희는 앞에선 아이돈노를 외친 다음 뒤로는 풀어주란 명령을 했다고 하는 루머가 있었으며, 거의 맞는 내용으로 보인다. 참조
이러한 일이 일어난 직후에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용금호로 어떤 전화가 걸려왔고, 전화를 받은 선원들은 갑자기 김대중의 복면을 벗기고 손을 풀어주며 마실 것도 제공했다. 김대중을 배에 태운 지 53시간 만의 일이었다. 이때 어떤 젊은 선원이 김대중에게 "당신은 왜 해외에서 반국가적인 행동을 하고 다니는가?"라고 물었고, 김대중이 "나는 박정희 정권을 반대한 것이지 국가를 반대한 적이 없다"라고 답하자, 그 선원이 "정부는 국가와 같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 끝에 김대중은 8월 11일 새벽 부산항으로 추정되는 항구에 도착해 구급차에 태워지고 수면제에 의해 잠들었다. 잠이 깼을 때는 어느 2층 건물에 있었다. 다시 어두워지자 차에 태워진 김대중은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풀려났다. 납치된 지 129시간 만인 8월 13일 밤 10시 15분경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 정부 개입설을 부정했다. 일본 경찰이 범인의 지문을 채취하는 등[4][5]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포착하고 사건 관련자들의 출두를 요구하자 이를 거부해버린다. 이 때문에 일본에선 주권 침해[6]에 대한 비판 여론이 대두, 한일 정기 각료회의 연기나 대륙붕 석유탐사를 위한 한일 교섭이 취소되는 등 한일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된다. 결국 미국의 배후 영향력 행사와 한일 간의 절충 끝에 김대중의 해외 체류 중 언동에 대한 면책, 김종필 국무총리의 진사[7] 방일 등에 합의, 사건 발생 86일 만에 끝났다.
11월 2일 김종필 국무총리가 일본을 방문하여 다나카 가쿠에이 당시 일본 총리에게 "이번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한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로서 각하와 일본 국민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한다. 한국 정부는 두 번 다시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한다."라고 사과하고 같은 내용의 대통령 친서를 전달했다. 김종필의 회고에 따르면 박정희에게 보고없이 독단적으로 이후락은 대형 사고를 쳐놓고는 "가만히 있으면 가라앉을거요","(김종필이 경위에 대해 묻자)난 모르오"라고 뻔뻔한 태도로 있었다. 김종필은 이를 매우 속상하게 여겨 사건의 책임자인 이후락 중정부장에게 크게 화를 냈고,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줄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당시 한일 간의 '절충'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다나카 일본 총리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주장도 있다. 재미 언론인 문명자가 1977년 한국 정부가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을 통해 다나카에게 돈을 제공했다는 의혹을 처음 제기했고, 오마이뉴스가 익명의 국정원 진실위 관계자 인터뷰를 인용해 김대중 사건 직후 조중훈이 별다른 이유 없이 대통령에게 불려간 일이 있었다는 기사를 냈다. 또 2001년에는 다나카의 측근이라는 기무라 히로야스 전 니가타현 의원이 자신이 박정희의 밀사 이병희 당시 무임소장관과 그가 가져온 4억 엔을 다나카에게 연결해 줬다고 주장하는 글을 일본 잡지 분게이슌주(문예춘추)에 게재하기도 했다. 신동아 2001년 2월호의 번역본

3. 후폭풍


이 사건에 대해 경찰이 수사 은폐하려는 의혹이 일었다. 사건 직후 박정희에 의해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나 아무런 성과없이 1년 후인 1974년 8월 14일 내사중지했으며, 다시 1년 후인 1975년 7월 21일 내사종결했고 그대로 묻혀버렸다. 그리고 수사본부가 작성한 당시 수사자료를 보면 엄청난 범위를 수사를 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정작 찾은 증거는 전무. 당시 수사본부 부본부장이었던 당시 마포경찰서장 이흥세는, 실제로 수사본부가 한 수사는 서류조사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당시 여당인 공화당에서는 오히려 사건이 김대중의 자작극이 아니냐는 주장을 했다. 이에 대해 정일형 의원은 국회에서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에게 사건에 대해 질문하면서 “무엇 때문에 한 정권이 개인을 상대로 하여 이토록 심한 피해망상증에 걸려 있는지 알 수가 없다"며 강하게 비판하다가 이에 항의하는 여당 의원들과 몸싸움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다.
게다가 이 사건은 이미 국제적으로 알려진 상황이라서 유신정권은 욕을 잔뜩 먹었고, 납치사건이 일어난 해인 10월에는 서울대 문리대가 동맹휴학을 하고 유신반대 연좌데모를 시작하면서 유신반대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시위주동자들을 무자비하게 체포하는 걸로 맞섰지만, 이미 불붙기 시작한 유신반대운동은 경북대, 부산대 등 지방까지 번져, 12월이 되자 김수환 추기경, 장준하 선생, 함석헌 선생 등의 주도로 개헌청원 100만 서명운동을 벌이고, 이듬해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1호를 발령하게 된다. 그러나 계속해서 저항이 계속되었고 이에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를 연달아 발령한다. 그리고 '''그 해 광복절 날 영부인 육영수가 김대중 납치사건에 격분하여 박정희의 암살을 시도한 재일교포 문세광의 저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추가로 북한 또한 김대중 납치사건을 계기로 모든 남북대화를 중단한다고 선언하였으며 남북관계는 다시 얼어붙게 된다.

4. 기타


김대중과 함께 양김으로 불리던 김영삼은 이 일을 매우 비판하였다. 나중에 본인이 김대중과 갈라섰을때도 "이 사건은 박정희가 김대중을 노린 테러"라고 언급했다.
당시 용금호의 조리장인 조시환은 1994년 민주당 당사에서 양심선언을 하면서, 비행기가 분명히 있었다고 했다. 또한 이후락의 인터뷰와 달리 호텔에서 발견된 유류품들은 당초 김대중을 호텔방에서 살해, 사체를 토막내고 피를 욕실 배수구로 흘러 보낸 뒤, 토막난 사체를 배낭에 담아 바닷 속에 버리려는 목적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또 용금호에서 범인들이 한 행동과 말들을 종합해 보면, 김대중을 수장시킬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는 1974년 12월 미국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잭 앤더슨을 만났을 때, 자신은 이 사건에 대해 모르며 중정의 소행이라고 말했고, 그 책임을 물어 이후락을 중정부장직에서 해임시켰다. 김종필은 1980년 3월 12일 아사히 신문 논설주간에게 이후락이 납치 계획을 세우고 미국 CIA에 통보했다고 말했다. 이후락은 1980년 전 국회의원이자 고향 친구인 최영근에게 1973년 박정희김대중을 죽이라고 지시했으나 자신은 곤혹스러워 계속 미뤘고 김종필과도 이야기가 다 되었다며 박정희가 재촉하자 실행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락은 그 후 박정희는 이 사건에 대해 관계가 없다고 말을 바꾼다.
현재는 이 사건의 당사자인 박정희, 김대중, 이후락이 모두 죽어서 납치를 지시한 인물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아낼 길은 없다. 그나마 김종필이 직접 인터뷰를 했다. JP의 증언에 의하면 이후락이 단독으로 범행을 지시해놓고 박정희한테 갑작스럽게 보고를 했다고 한다. 결국 JP는 일본까지 직접 가서 사과하게 되었고, 가는 비행기에서만 재떨이를 4번이나 가득 채워서 갈았다고 한다.[8] 내용을 보면 이후락이 이런 일을 벌인 이유는 윤필용 사건 때문에 박정희한테 엄청나게 갈굼을 당하자 박정희에게 잘 보여서 만회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2014년 1월 21일 민주당 정청래 의원이 미국에 갔다 와서 CIA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공개했다. 대략 다 항목에 있는 내용이지만서도.
전 주한 미국대사 성 김 부친인 김기완[9] 공사가 여기에 관여했다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했기에, 성 김도 완전한 미국인이 되었다. 여기에 관여하지 않았거나 미국으로 가지 않았다면 오늘날 주한미국 대사는 다른 이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아이러니하게도 버락 후세인 오바마 행정부에서 한인 2세 최고위직 인사들이 박정희와 악연을 가져 미국 국적을 취득한 부친으로 인해 자신도 미국 국적을 가지게 된 점이다.
특히 성 김의 부친 김기완은 임택근의 매형으로 즉, 임택근이 성 김에게는 외숙부가 되며, 김기완이 손지창, 임재범에게는 고모부가 된다. 손지창, 임재범과 성 김은 외사촌과 고종사촌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임택근이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와 거리 인터뷰하는 사진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어찌보면, 권력에 들어갈 입장임에도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정권 치부를 잘 드러냈다고도 할 수 있다. 더군다나 김기완은 창랑호 납북 사건의 피해자였다. 납치 피해자가 납치 가해자가 된 아이러니이다.
박근혜는 자서전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은 자기 아버지가 직접 지시한 일이 아니며, 박정희 본인도 납치사건을 언론 보도를 통해 처음 들었을 때는 북한의 소행으로 의심하는 등 진상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증언하였다.[10]
서강대학교의 손호철 교수가 과거사진상규명위원으로 활동하던 당시 이 사건도 조사했는데, 그에 따르면 중정 측에서 애초에 김대중 의원을 죽이려는 계획도 논의했지만 최종 단계에서는 납치만 하는 것으로 결정났다고 한다. 또한 박정희가 김대중 납치사건에 관해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의 중정요원들이 불법적인 공작을 일본에서 벌인 것이 주권침해에 해당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었다. 결국은 한국 정부가 김대중일본에서의 반유신투쟁과 통일운동 등의 활동을 문제삼지 않겠다는 약속을 일본 정부에 하고 무마가 되었다. 그런데, 이후 소위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서 김대중의 일본 내 활동이 사형을 언도한 근거로 인용되어, 일본의 반발을 살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전두환의 신군부는 판결문에서 이 부분을 삭제한, 변조된 판결문을 일본 정부에 전달하는 기상천외한 조작극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2020년 8월 12일 이런 보도가 나왔다. 이게 이상하지 않을게 당시 중정에서도 이후락만 강력하게 작전을 추진했고 휘하 요원들은 전부 반대했던 걸로 알려졌다. 납치를 지시했던 총책임자도 당일 갑자기 종적을 감춘 데다 미국 정보부에서는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던 걸로 봐선 내부에서 사보타주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5. 창작물에서


  • 납치 - 알려지지 않은 김대중 사건 - 나카조노 에이스케
  • KT(영화) - 일본 감독의 작품이라 그런지 일본 자위대 정보요원 위주로 진행된다. 실제로 육상자위대의 정보부대인 육상막료감부 별반 출신 영관급 장교 츠보야마 코조가 흥신소를 차려 중앙정보부를 도와 김대중의 거처 확인을 해줬다고 하는데, 정말로 퇴역한 뒤에 민간인 신분으로 개인적인 도움을 줬을 뿐인지 아니면 위장 퇴역한 뒤 실제로는 육상막료감부 별반 윗선에서 직접 개입한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적으로는 육상막료감부 별반이 직접 위장업체까지 차려 가며 비밀리에 개입했다는 설에 무게가 더 실린다.관련뉴스 참고로 이 작품의 주연은 김갑수[11], 음악은 호테이 토모야스가 담당했다.
  • 크리스 마르케의 다큐멘터리 태양 없이에서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단식 투쟁에 돌입한 시위대를 보여주면서 도쿄에서 비밀경찰이 납치한 적 있다며 잠시 언급된다.
  • 드라마 제5공화국 - 사건이 제4공화국 때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제4공화국이 아닌 제5공화국에 나온다. 제4공화국 방영 당시가 김영삼문민정부 때라서 그런듯. 25회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편에서 비중있게 다루었다. 김대중이희호와 면회하면서 자신은 이미 한번 죽은 몸이라 하면서 과거 회상으로 나온다.

6. 관련 문서



[1] 문세광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당시 일본 외상.[2] 이 사실 자체가 당시 정보부의 무능을 보여주는 요소. 인종적으로 고립된 지역에서 작전을 한 것도 아니고, 아무리 당시 경제적 격차가 지금과 비교할 바가 아니고 문화교류도 극히 적었다지만 일본이면 오히려 북한보다 신분을 숨기기가 훨씬 쉬운 나라다. 결정적인 것은 김대중의 납치를 저지하려는 양일동김경인에게 괴한 중 한명이 또렷한 한국말로 '''"시끄럽게 굴면 국제 망신이니 조금만 참고 조용히 있으라. 우린 서울에서 왔다"''' 라며 위협한 것이다. 그야말로 빼도박도 못할 확인사살...[3] 미국동아시아 지역 전문가. 40년이 넘는 CIA 요원 생활 대부분을 베트남, 대한민국, 일본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아버지 부시의 외교 고문을 거쳐서 1989년 주한 미 대사로 부임. 이후 미국의 한국 전문가들을 모아서 '코리아 소사이어티'를 창립해서 활동 중이다. 현재도 한미관계, 북핵 등 한반도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한미 양국의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4] 지문을 남긴 것도 병맛이지만, 더 병맛스러운 건 이 작자들이 호텔 주차료를 지불하지 않아 호텔 직원이 적어둔 차량번호를 조사해보니 요코하마 한국 영사관 소속 차량이었다. 그 차량의 주인 요코하마 한국 영사관 부영사 유영복은 사건의 주범인 이후락의 조카사위다.[5] 이후 외교적 비화를 일으킨 납치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인 쌍방의 밀사들은 이 일을 은어로 오카네(동전)300엔으로 돌려 말했다. 1973년 도쿄에서 장갑 한 켤레를 사려면 그 값이 300엔이었는데, 현장에 장갑이라도 끼고 지문을 남기지 않았으면 밀사들의 뒤치다꺼리가 더 쉬웠을 거란 자조적인 말이다.[6] 자국에 망명 중이던 외국인 인사를 외국 정보기관 요원들이 멋대로 납치하고 일본 치안당국의 수사에 전혀 협조하지 않은 것은 물론 자신들의 행위가 아니라고 발뺌했으니, 일본 입장에선 정당한 국가 주권을 침해당한 게 맞다.[7] 陳謝, 사태의 전후사정을 설명하면서 사과한다는 뜻으로 주로 일본에서 쓰는 말이다.[8] 당시엔 기내 흡연이 가능했다.[9] 김재권이라고도 불림. 창랑호 납북 사건 이후 개명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0] "김대중 납치사건이 언론에 보도됐을 때, 아버지께서는 화난 목소리로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아주 못마땅해 하시던 것을 곁에서 지켜봤다. 그때 아버지는 '북한이 한국 정부를 궁지에 몰려고 벌인 일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셨다. 나는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뚜렷하게 기억한다.",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11] 김대중이 아니라, 납치사건의 주모자 김차운(실존인물인 김동운 1등 서기관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영화줄거리소갯글) 역할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