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세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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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世光
1951년 12월 26일 ~ 1974년 12월 20일(향년 22세)[1]
1. 개요
2. 초기 생애
3. 암살 결심
4. 만경봉 호 승선과 권총 절취
5. 번외: 조총련과 김호룡
7. 수사에서 사형집행까지
7.2. 일본 경찰의 비협조적 태도
7.3. 나는 바보였습니다
8. 대중매체에서


1. 개요


문세광(文世光, 1951년 12월 26일 ~ 1974년 12월 20일)은 박정희대한민국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던 재일 한국인으로, 일본식 통명은 난조 세이코(일본어: 南条 世光)이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2. 초기 생애


1951년 12월 26일, 일본 오사카에서 석면 제조업자인 아버지 문병태와 어머니 육말란 사이에서 3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은 경상남도 진양군 대평면 상촌리 3-24.[2][3]
오사카의 구와즈(桑津) 소학교, 히가시스미요시(東住吉) 중학교를 거쳐 세이키(成器)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였으나, 2학년 때 중퇴했다. 재학 당시 성적은 뛰어나지 못했으나 학급위원, 생도회 부회장 등 과외활동에는 적극적이었고, 학원 분규나 정치 활동에는 큰 흥미를 보였다고 한다. 동맹 휴학 등 저항운동을 주도했고, 다른 학교의 데모에도 큰 흥미를 보였다.
학교 중퇴 후 활동을 시작한 것은 조총련이 아닌 민단 산하의 청년조직인 "한청"이라는 단체였다. 다만 당시 한청은 1972년 거류민단으로부터 공산주의 이념을 신봉하는 반정부 과격단체라는 이유로 취소를 당한 불법단체였다.
일본 쪽의 자료에 의하면 제4인터내셔널 일본지부(볼셰비키/레닌주의파)와 연계된 일본 신좌파 고교생 좌익단체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등[4], 그가 혁명적 급진사상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에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오사카 한국 총영사관에 인질극을 벌이고 폭발테러를 벌이자고 한청 중앙본부 부의장인 김군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2005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따르면 김군부는 이 편지를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1년후 민단계 언론인 통일일보에서 이 편지가 공개되었다. 한청본부로 보내려던 이 편지가 같은 건물을 쓰고 있던 민단에 보내졌고, 민단은 주일 한국대사관에 이 편지를 보냈고 중앙정보부도 이 편지를 입수해 문세광을 예의주시하게 된다.

3. 암살 결심


문세광은 암살을 결심한 뒤에도 때때로 마음의 동요가 있었으나, 공작금 50만엔을 받은 이후에는 약점이 잡혀 물러날 수 없게 되었다.[5] 1973년 11월 19일부터 23일까지 3박 4일 동안 학창시절 여자친구였던 요시이 미키코(吉井美喜子)[6]와 함께 홍콩을 여행하기도 한다. 암살용 권총을 구입할 겸, 요시이 미키코의 남편인 요시이 유키오(吉井義雄) 명의의 여권으로 외국 출입이 가능한지 실험해 보기 위함이었다.
이후 1974년 2월에는 김호룡의 지시로 도쿄의 한 병원에 위궤양 환자로 위장해 1달간 입원한다. 이 입원 기간 동안 트로츠키의 <테러리즘공산주의> 등의 공산주의 서적 몇 권을 읽고 김호룡이 특별히 선별해서 보낸 몇몇 사상교육 인사들과 만난다.

4. 만경봉 호 승선과 권총 절취


만경봉호는 북한일본을 왕래하는 북한 선박으로, 1971년 8월 18일 취항했으며 당시의 선적지는 함경북도 청진시였다. 이 배의 취항 목적은 조총련 동포의 조국 방문이라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 목적은 조총련 간부와 조직원에 대한 선내 정치학습, 기항지를 중심으로 한 지방자치단체와의 접촉을 통한 친북 세력 확대 공작 추진과 불법 활동가에 대한 직접지도 등이었다.
문세광은 만경봉호에 승선하여 북한의 공작지도원과 40분 가량 면담한다. 이 지도원은 문세광의 신원과 과거 투쟁경력 그리고 그가 추진 중인 박정희 암살계획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식당에서 인삼주를 곁들인 식사를 대접하며 "남조선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완수를 위해서는 남조선의 사회 혼란을 조성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남조선 대통령을 암살하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 사업은 김일성 주석이 직접 지시한 혁명과업이니 생명을 걸고 성공시켜야 한다."고 당부한다. 문세광은 그 지도원에게 "김일성 주석을 위해 생명을 바쳐 기필코 암살하겠노라"고 대답한 뒤 그날 밤 늦게 하선한다.
문세광은 저격용 권총의 취득 방법을 여러가지로 궁리했는데 결국 일본 경찰의 권총을 훔치기로 한다. 일본 경찰을 골탕먹이는 것이 첫번째 이유였고, 훗날 자신의 범행이 북한의 배후 조종이 아닌 일본인이 개입된 것으로 위장해 한일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이 2번째 이유였다.
7월 초순부터 오사카, 고베, 나라, 교토 등지의 여러 파출소를 대상으로 답사를 시작한 그는 대부분의 파출소가 2층에 위치에 침입이 어려운데, 유독 오사카 소재 다카쓰(高津) 파출소만은 단층으로 야간 침입이 용이하다는 것을 파악해낸다. 문세광은 다카쓰 파출소 교통경찰관들의 권총을 절취하기로 결심하고, 실행 후 경찰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사전에 고베에 가서 시내 다방에서 성냥 2갑을 준비한다.
1974년 7월 18일 새벽 4시 경 경찰관들이 파출소로 돌아와 숙면하는 것을 확인한 후, 뒷문을 파이프렌치로 헐고 들어가 미리 준비해 간 성냥 2갑을 그곳에 버린 다음 취침 중인 경관 2명의 권총 2정과 실탄 10발을 포함해 가죽 벨트에 달린 권총 케이스 2개, 수갑 2개, 경찰봉 1개 등을 절취한다. 그 중 S&W M36 1정과 .38구경 실탄 5발을 박 대통령 저격용 총기로 선택하고, 나머지 권총 1정은 자기 집 2층 다다미 마루 밑에 감추고 그 외의 절취품은 나라(奈良) 부근 하천에 버린다.

5. 번외: 조총련과 김호룡


7.4 남북 공동 성명 직후인 1972년 9월 3일, 오사카 소재 페스티벌 홀에서 민단조총련이 회동에 단합대회를 열었다. 이 때 문세광은 한청 대표로서, 김호룡은 조총련 대표로서 각각 참여해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김호룡은 이 대회 이틀 후 아침 8시경 오사카에 있는 문세광을 찾아와서 조총련 이쿠노구 지부 정치부장이라고 자신이 소개한 뒤, 단합대회에서 문세광이 보여주었던 활약상을 극구 칭송했다. 그는 "같은 핏줄을 받은 같은 민족끼리 서로 간격이 없어야 되겠고, 마침 우리 집도 이 근처에 있으나 정치이념을 초월해서 자주 만나자"고 했다.

그 후 김호룡은 매월 평균 2회 정도 문세광의 집을 드나들었다. 명절에는 조총련 대표 한덕수가 보내온 물품이라며 과실주·인삼주 등을 선물해 문세광의 환심을 샀다. 그는 또 남북정세, 한일관계 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주로 남한과 일본을 비난하였고, 북한 및 조총련에서 발간한 팸플릿과 교육자료를 제공하였다. 특히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부터는 그전까지 북한의 우월성을 선전하던 것과는 달리 남한에 대한 비난에 중점을 두어 선전했으며, 문세광도 이에 완전히 동조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단계에 이르러 1973년 9월부터 남한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박정희를 암살해 이를 인민봉기의 기폭제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이런 영웅적 과업을 수행해야 된다고 선동했는데, 문세광은 이에 고무되어 박정희 저격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2005년 국내 언론 최초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김호룡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는 자신은 문세광과는 그저 인사를 나눌 정도의 사이에 불과했으며, 조총련과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1974년 5월 중순에 김호룡이 문세광의 집에 찾아와 "혁명가는 무기를 스스로 조달하여 혁명을 성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는데, 김호룡 본인은 2005년 인터뷰에서 이 말을 듣고 어이없어 하며 웃었다. 또한 당시 경시청 경비국장으로 문세광 수사를 전담했던 야마모토 시즈히코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의 인터뷰에서 조총련과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관련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어서 김호룡을 수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심지어 한국 수사당국도 김호룡을 수사하지 않아 이 주장은 사실상 사장된 상태다.

6.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1974년 지인인 요시이 미키코(吉井美喜子)의 남편 '''요시이 유키오(吉井義雄)'''의 이름으로 여권을 발급 받아 방한,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이 열렸던 국립극장에 들어가 일본인 초청자임을 빙자하고 잠입하였다.[7] 기념사를 낭독 중이던 박정희를 향해 총을 발포하였지만 재빨리 연설단 밑으로 피하며 저격에 실패했고, 그 옆자리에 앉아 있던 육영수가 그 총알에 맞아 사망하였다. 그리고 현장에서 긴급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1974년 12월 20일 사형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에서 향년 24세의 나이로 처형 되었다. 사건에 관한 내용은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문서로.

7. 수사에서 사형집행까지



7.1. 자칼


문세광이 검찰에 송치된 것은 8월 24일이었다.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사건의 지휘를 정보부장 보좌관을 맡고있던 '''김기춘''' 검사에게 맡겼다. 문세광 사건이 일어나기 전 8월 초순 김기춘은 가족과 함께 대천해수욕장으로 여름휴가를 가서, 막 한국어 번역판이 나온 자칼의 날을 재미있게 읽었다 한다. 그가 휴가에서 돌아온 지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이 사건을 맡게 된 것이다.
임무를 맡은 김기춘은 하루빨리 범행동기와 배후세력 등을 파악할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8월 16일, 김기춘은 일본어를 구사하는 정보부 수사관을 대동하고 문세광을 첫 대면한다. 그 때까지 문세광은 30시간 동안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김기춘 : 소설 「자칼의 날」을 읽었지요?

문세광 : 네, 읽었습니다. 선생님도 읽었습니까?

김기춘 : 나도 재미있게 읽었소. 그런데 당신이 바로 자칼이 아니오?

문세광 : 그렇습니다. 내가 바로 자칼입니다.

김기춘 : 당신의 사상은 무엇입니까?

문세광 : 나는 공산주의를 신봉합니다. 나는 공산혁명을 이룩하려는 한 수단으로 여기에 왔습니다.

김기춘 : 그렇게 혁명을 하겠다는 사람이 왜 이렇게 비겁하게 입을 다물고 있소이까?

결국 김기춘은 자칼의 날을 통해 문세광의 말문을 열었고, 범행 경위 일체에 대한 자백을 받아냈다고 한다.
그러나 김기춘의 주장과 달리 당시 합동수사본부의 중간 브리핑에 따르면 문세광은 '''체포된 지 불과 5시간 만(=15일 저녁)에''' 수사관의 강한 압박에 굴복, 자신이 암살범이며 본명은 문세광이라고 자백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담당검사는 김영수, 정치근 검사로 나온다. 돈 오퍼도퍼에 따르면, 문세광은 자신의 이름이 문세광이며 오사카의 집주소까지는 밝혔으나 그 뒤로는 전쟁포로의 대우를 요구하며 침묵을 지켰는데 둘째날이 되어서 담당 검사 중 한명이 "당신이 자칼이오?"라고 묻자 "그렇소."라고 대답한 후 잡범이 아니라 혁명가의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여겨 진술을 시작했다고 한다.

7.2. 일본 경찰의 비협조적 태도


초기엔 일본 경찰도 범인이 일본 파출소에서 훔친 권총으로 외교관계를 맺은 우방국의 국가원수를 암살한 시도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수사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한국 측이 문세광 배후세력으로 조총련을 지목하자 일본 수사당국은 비협조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일본 경찰의 수사 협조 의뢰요구에 대하여 한국 경찰과 중앙정보부는 무조건 '잘 알 수 없음'이라는 취지의 회신을 했는데, 문세광 사건에서는 반대로 일본 경찰이 중앙정보부의 수사협조의뢰에 대해 극히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것. 예컨대 "문세광이 미키코를 만났다는 OO다방이 오사카의 XX지역에 있다는데 사실인가?"라는 물음에도 "모르겠다"라는 식.
심지어 문세광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한 김호룡에 대해서도 일본 경찰은 소환하거나 조사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문세광의 오사카 자택 조사를 비롯한 증거조사의 상당 부분이 매우 허술하게 이루어졌고, 이 때문에 문세광 사건의 상당 부분이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으며, 일각에서 음모론이 돌고 있는 배경이 되었다.[8]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공개된 일본 경찰의 수사 결과에 따르면 문세광이 권총 두 자루를 훔쳤다고 주장한 오사카 모 파출소에서 발견된 족적과 지문은 문세광의 것이 아니었고, 문세광이 그 중 한 자루의 총을 버렸다고 주장한 나라 근교의 하천에서는 총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7.3. 나는 바보였습니다


문세광은 수사 초기에는 '바깥은 아무 일도 없느냐'며 민중봉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듯한 질문을 던졌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호룡을 비롯한 조총련 고위 인사들은 문세광의 저격 후에 남한 민중이 들불처럼 봉기를 일으킬 것이라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세광도 사형집행이 다가오자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게 됐다.
문세광이 검찰에 송치된 것은 8월 24일이다. 9월 12일은 기소되어 10월 19일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즉각 항소했으나 11월 20일 서울고등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었으며, 12월 17일은 대법원에서도 상고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됐다.
그는 사형 집행 전은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고, 사형 확정 3일 뒤인 12월 20일 새벽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진술은 일본어로 했다.

나는 정말 바보였어요… 일본에서 태어난 것이 한스러워요. 일본에서 속고만 살아… 속아 살았어요. 속아 살아… 결국 이렇게 되어버리다니… 박정희 씨에게 정말 몹쓸 짓을 했어요. 육영수 씨와 죽은 분[9]

에게는 정말 죽을 죄를 졌어요. 저도 그분들 곁으로 같이 보내주세요… 제 처에게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나이도 젊으니 재혼해서 제2의 인생을 살도록 전해주세요…….


8. 대중매체에서


1974년작 박태원 감독 영화 <조총련>에서 배우 장학수가 맡았고, 1986년작 KBS1 반공드라마 <멀고 먼 사람들>에선 백찬기, 1995년작 MBC 드라마 <제4공화국>에선 김상중이 각각 연기했다.

[1] 23세 생일을 6일 앞두고 사형 당했다.[2] 現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상촌리 3.[3] 대다수의 재일교포들의 본적은 영호남과 제주도에 집중되어 있다. 이때문에 재일동포 북송이후 이들은 북한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팽당한다. 문세광도 본적이 경남 진주에 있다.[4] 20세기 좌파 정치운동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제 4 인터네셔널은 트로츠키주의 국제조직이다. 즉, 기본적으로 스탈린주의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는 북한을 포함한 현실사회주의 국가와 그 영향력 아래 있는 조총련의 입장에서 문세광은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딱지는 거의 모든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 '반역자' 나 '빨갱이' 정도의 함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문세광이 북한 정부 차원에서 양성한 요원이라기 보다는 일본 국내에서 발생한 자생적 극좌파로써 북한 정권에게 이용당한 것이라는 근거 중 하나이다. 문세광은 제4인터 볼셰비키 레닌주의파의 대중조직인 무장봉기 준비위원회의 학생조직 "프롤레타리아 군단 전국 학생회(일명 프롤레타리아 군단. 줄여서 프로군단)" 산하의 "폭력 혁명 고교생 전선"의 일원으로서 조총련과는 궤를 달리하는 조직이다.[5] 김호룡은 일본 수사본부가 이 돈의 출처를 북한 공작금이 아니라 문세광의 모친이 준 것으로 확인했다고 주장했다.[6] 1950년 출생. 세이후(誠風) 중학교와 세이카(精華) 여고를 졸업했다. 여고 재학 중 사회과학 연구회에 가입해 재일교포 문제와 부라쿠민 해방운동 등에 관심을 갖고, 2학년 때는 클럽의 부장을 맡았다. 이 시절 세이키 상고의 자치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던 문세광과 알게 된다. 고교 졸업 후 로스다이어 회사에 8개월간 근무했으며, 이후 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요시이 유키오와 1971년 1월 결혼, 아들 1명을 두었다.[7] 문세광이 묵었던 조선호텔에서 국립극장으로 갈 때 호텔택시를 대절해서 가려했으나 조선호텔은 호텔택시가 있는 호텔이 아니어서 마침 누군가가 타고와서 조선호텔에 와 있던 호텔택시를 타고 갔다. 그 호텔택시가 바로 '''영화 택시운전사로 알려진 김사복포드 20M 택시였다.''' 다만 김사복이 운전한게 아닌 보조운전사 황수동씨가 운전했었다.[8] 일본이 문세광 사건 수사에 성의를 보이지 않자 당시 전국에서 일본을 규탄하는 관제데모가 열리기도 했다.[9] 당시의 합창단원으로서 광복절 기념식에 참가했던,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생 장봉화(1957-1974)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