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트 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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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대인 출신의 가톨릭 성녀, 순교자이자 가르멜 수도회 수녀. 유럽의 수호성인[2] 수도명은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
수도생활을 통해 당시 박해로 인해 고통받고 있던 자신의 뿌리인 유대인과 깊이 연대하고자 했던 20세기의 성녀. 교회 역사상 유대인으로서는 처음 성인품에 오른 인물.[3]
한나 아렌트, 시몬느 베유,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세계 4대 유대인 여성 철학자.
출생 1891년 10월 12일 독일 브레슬라우. 1942년 8월 9일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선종. 1987년 5월 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998년 10월 11일, 역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축일은 8월 9일.
1.1. 생애
성녀 에디트 슈타인은 1891년 10월 12일, 지금은 폴란드 땅이지만 당시에는 독일 영토였던 슐레지엔 지방의 중심도시 브레슬라우(오늘날의 브로츠와프)에서 태어났다. 마침 태어난 날이 이스라엘의 축일인 '속죄의 날(욤 키푸르)' 이었기에 철저한 유대교인이었던 모친은 이 우연의 일치를 아주 좋은 징조로 여겼다.
에디트 슈타인은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전통적인 유대교 신앙을 훈련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사춘기와 학생 시절에 무신론적인 지성인들과 가까이 지냈으며 인격적인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다른 형제들보다 영특했던 딸이 무신론자로 자람은 당시 어머니의 가장 큰 걱정이었다.
독일 괴팅엔대학에서 심리학, 철학, 역사학, 독문학 등을 공부한 뒤 1916년 프라이부르크에서 후설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고 후설의 개인 조교[4] 가 되었다. 그 후 현상학 분야에서 독자적인 연구 활동을 하며 교수자격논문(하빌리타치온)을 제출한 뒤 교수가 되고자 노력하나, 당시 독일 학계에서 여성이 교수로 재직함은 거의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대학 철학강사나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에디트 슈타인은 잠시 방문했던 친구 집에서 <성녀 아빌라의 테레사 자서전>을 읽고 깊이 감화되어, 유다교 신앙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을 결심한다.[5] 1922년 1월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은 에디트 슈타인은 유다인을 박해하는 독일인과의 화해를 위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라는 믿음으로, 1933년 42세 나이로 에디트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쾰른의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해 하느님의 진리를 따르기 위해 스스로를 봉쇄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6] 이듬해인 1934년에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7] 라는 수도명을 받는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자 에디트는 언니 로자 슈타인[8] 과 함께 네덜란드의 에히트 가르멜 수도원으로 도피하지만 1942년 8월 2일에 체포되고,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진다. 이미 가톨릭으로 개종했기에 더 이상 박해대상이 아니었지만, 유대인 태생으로서 같은 유대인과 함께 하겠다는 결심으로 수용소에서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던 중 8월 9일 가스실에서 살해되었다고 추정된다.
선종 이후 에디트 슈타인의 시복 시성 절차는 유례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1987년 시복, 1998년 시성되었다. 선종 당시 교황은 "그녀의 순교는 유럽사의 극적인 상징이자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를 잇는 화해의 가교"라고 말한 바 있다. 2006년 10월 11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의 벽감에 에디트 슈타인의 성상이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축성을 받은 후 설치되었다. 사진
1.2. 학문적 업적
에디트 슈타인의 학문적 업적은 크게 현상학적 기여와 신학(특히 여성신학)의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1.3. 기타
성녀 에디트 슈타인은 시복시성된 지 오래 지나지 않은 최근 성녀로, 한국에는 별로 유명하지 않다. 그러나 에티스 슈타인이 공부하고 일했던 독일에는 각 주마다 이름을 딴 고등학교[9] 가 존재하며 에디트 슈타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성당도 많을 정도로 공경받고 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에서 세례받은 가톨릭 신자들은 에디트 슈타인을 수호성인으로 모시기도 하는데, 에디트 슈타인이라는 성인의 본명으로 세례를 받기도 하지만 수도명인 데레사 베네딕타 혹은 라틴어 이름인 테레시아로 받기도 한다.
미국 현상학회의 대모라 불리는 안나-테레지아 티미에니에츠카(Anna-Teresa Tymieniecka)가 에디트 슈타인의 제자다.
1995년에 에디트의 삶을 다룬 영화 <7번방>이 제작되었다. 주인공인 에디트 역에는 역시 유태인이며, 훗날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성모 마리아 역으로 열연한 마야 모르겐슈테른이 출연했다.
2. 관련 문서
-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 에디트 슈타인처럼 아우슈비츠에서 선종한 가톨릭 순교자. 차이점이 있다면 콜베 신부는 유대인이 아니라 폴란드인이라 나치의 박해를 받았다.
[1] '십자가의 테레시아 베네딕타'라는 뜻이다.[2] 성녀 에디트 슈타인, 성녀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 비르지타.[3] 앞서 활동한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 천주의 성 요한(추정) 역시 유대인 혈통이다. 그러나 시성될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순수 스페인인으로 알고 있었기에, 에디트 슈타인이 유대인으로는 처음 성인품에 오른 인물이라 할 수있다. 물론 예수의 제자 등 성서 시대 유대 인물들은 제외한 얘기.[4] 에디트 슈타인 후임 조교가 바로 하이데거이다.[5] 아빌라의 테레사도 유다인 출신이었다. 보다 정확히는 할아버지 대에 유다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가문이었다.[6] 에디트의 수도회 청원기와 수련기 생활은 고난으로 가득했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자신의 학문적인 업적 대신 가장 막내 수도자로 지내면서 자신을 비워내야 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같은 청원기에 있던 18살의 어린 동료 청원자들과의 나이차 때문이었다고 한다.[7] ‘데레사’라는 이름은 성녀 데레사, ‘베네딕타’라는 이름은 그가 베네딕토회로부터 받은 영적 유산을 의미한다.[8] 언니 역시 에디트의 세례 이후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수도회 일을 도왔다.[9] 대부분 가톨릭계 사립학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