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쿠초라
1. 개요
바이마르 공화국의 축구선수.
2. 생애[3]
2.1. 어린 시절
쿠초라의 아버지는 동프로이센에서 겔젠키르헨으로 이사해 온 광부로 겔젠키르헨의 탄광에서 근무했다. 쿠초라도 어린 시절에는 학업과 함께 광산업을 도왔으며 이는 그가 축구에 전념하게 되는 192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4]
2.2. 선수 생활
쿠초라는 1923년 FC 샬케 04에 입단했고, 1925년 평생의 친구 프리츠 슈체판도 샬케에 입단시켰다. 이 둘의 입단으로 샬케는 서부 독일의 강자로 떠올랐고 1926년에는 서부 독일 리그 준우승을 차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 무렵 쿠초라는 대표팀 승선도 이루는 기쁨을 맛봤다.
1928년 쿠초라는 올림픽 대표팀 명단에 들었지만 경기는 뛰지 못했다. 쿠초라는 1930년에 빈에서 월 1,000마르크를 받고 뛰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지만 그는 팀에 대한 충성심으로 그 제안을 거절했고, 대표팀에서도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였다. 스위스를 상대로 해트 트릭을 기록하며 5대0의 대승을 이끌어냈고 당시 최종 보스였던 잉글랜드에 3대3으로 비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샬케는 가울리가가 창설될 무렵부터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고, 그 중심에는 쿠초라와 슈체판이 있었다. 1933년 독일 축구 챔피언십 결승에서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에 패해 준우승에 머무른 샬케는 다음 해 다시 결승전에 올랐다. 상대는 1. FC 뉘른베르크. 쿠초라는 탈장으로 고생하면서 결승전 출전을 강행하였고, 결승골을 넣으면서 샬케에 첫 독일 챔피언의 영광을 안겨주었다.[5]
그 이후 샬케는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갔다. 11회 연속 가울리가 베스트팔렌 우승을 바탕으로 독일 축구 챔피언십 6회 우승을 달성했으며, 특히 1937년에는 DFB-포칼도 우승하면서 독일 클럽 축구 역사상 최초의 더블#s-7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샬케의 위용에도 불구하고 쿠초라는 대표팀에서 12경기 출전에 그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대표팀 감독 오토 네르츠가 롱볼축구를 선호해서 자이로스코프라 불릴 정도로 빠르고 유기적인 숏패스 플레이를 펼쳤던 당시 샬케 선수들과 성향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쿠초라는 샬케를 27년간 지키다 1950년, 45세에 축구화를 벗었다.
2.3. 감독 생활
쿠초라는 1935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감독을 잠시 맡기도 했는데, 이 때는 지금처럼 두 팀의 라이벌리가 지금처럼 심각하지 않았고 원래 보루시아의 감독을 맡기로 했던 매형제 프리츠 텔렌의 부탁으로 임시 감독이 되었다. 즉, 쿠초라가 보루시아의 첫 감독인 셈.
에르켄슈비크에서는 팀을 가우리가에 진출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2.4. 이후
1971년 4월 19일, 쿠초라는 베스트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친정팀의 무기력한 패배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당시 샬케는 DSC 아르미니아 빌레펠트에 0대1로 패했는데 이에 대해 입장료 18마르크가 아깝다는 식의 강도 높은 비판을 가했다. 그러나 이 경기는 나중에 승부조작으로 밝혀졌다! 분데스리가 스캔들로 명명된 이 사건으로 샬케 구단은 된서리를 제대로 맞았다.
1980년에는 독일 공로훈장 공로십자장, 1985년에는 겔젠키르헨의 명예 시민에 위촉되었다. 1986년에는 노르트베스트팔렌주 Order of Merit도 수여받았다. 하지만 이런 훈장 수여에는 상당한 논란이 따랐는데 쿠초라, 슈체판이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즉, 나치당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 쿠초라는 스포츠와 정치를 구분하던 덜 정치적인 사람이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축구와 병행한 담배 사업에서 유대인 아이들을 위해 티켓을 구해준 적도 많아서 아직도 논란이 된다고 한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본능적이면서도 파이터 기질이 있었다. 그러면서 자이로스코프라고까지 불리던 샬케의 핵심 선수답게 기술도 뛰어났다. 기술을 바탕으로 뛰어난 플레이메이킹을 펼칠 수 있었고 득점력도 좋았다.
4. 뒷이야기
- 레오 사우어라는 유대인 사업가가 쿠초라를 후원하면서 운전면허증을 따게 해주고 그의 기사로 취직시켜줬다. 덕분에 그는 광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스웨덴의 왕 구스타프 5세와의 문답.
- 오토 네르츠가 자신의 성향과 샬케 선수들이 맞지 않아 그들을 대표팀에 많이 뽑지 않기도 했지만 쿠초라만큼은 뽑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다. 네르츠가 쿠초라에게 그는 독일 대표팀을 위해 뛰지 않는다고 하자 그에 대한 대답이 'Sie können mich am Arsch lecken.(내 엉덩이나 핥으슈)'(...) 이래서 그 뛰어난 기량을 갖고도 쿠초라는 월드컵에서 단 한 경기도 뛸 수 없었다. 일설에는 자신의 겹사돈이자 동료인 슈체판을 발탁하지 않아서 일부러 태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6]
- 빌트에 따르면 샬케의 전 회장, 귄터 아이히베르크는 해외에 휴가를 가서 쿠초라의 장례식에 제때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 아이히베르크가 쿠초라의 무덤에 신선한 화환을 놓는 사진을 고집했고 덕분에 장례식 중 화환을 놓는 의식이 두 번에 걸쳐 치러졌다고..
- 독일의 전 대통령 요하네스 라우의 일화에도 쿠초라가 등장한다. 그는 축구 경기장의 이름이 여성의 이름으로 헌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남긴 질문이 '그럼 우리는 그걸 뭐라 불러야 되나? 에른스트 쿠초라의 부인 경기장?'이었다.
- 쿠초라의 흔적은 지금 샬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샬케의 사무실 이름이 에른스트 쿠초라이다. 또한, 샬케의 지정학적 위치도 쿠초라로 부른다.
5. 수상
5.1. 클럽[7]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우승 6회: 1934, 1935, 1937, 1939, 1940, 1942
- DFB-포칼 우승 1회: 1937
- 서부 독일 리그 우승 4회: 1929, 1930, 1932, 1933
- 가울리가 베스트팔렌 우승 11회: 1933-34, 1934-35, 1935-36, 1936-37, 1937-38, 1938-39, 1939-40, 1940-41, 1941-42, 1942-43, 1943-44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준우승 3회: 1933, 1938, 1941
- DFB 포칼 준우승 4회: 1935, 1936, 1941, 1942
5.2. 개인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쿠초라는 FC 샬케 04 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클럽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4] 쿠초라가 완전히 광산일에 손을 떼게 되는건 1930년대 초반에서야 가능했다. 자세한 것은 뒷이야기 항목 참조.[5] 결승골을 넣고 나서 남겼다는 소감이 '어디로 차야할 지 몰라서 걷어냈다.'였다. 그런데 이 경기 후반 43분까지 0대1로 지고 있다가 슈체판과 쿠초라가 2분만에 1골씩 넣어 2대1로 역전한 경기이며 샬케의 첫 우승 경기였다. 캄프 누의 기적에서 결승골을 넣은 올레 군나르 솔샤르의 소감이 이런 식이라면 축구계는 다른 의미로 뒤집어졌을거다.[6] 하지만 슈체판은 나중에 실력을 인정받아 이탈리아 월드컵과 프랑스 월드컵에 주장으로 출전하였다. [7] 쿠초라는 FC 샬케 04 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클럽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