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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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기업인.
2. 생애
1952년 1월 20일,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여배리에서 태어났다.
경북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상경해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서울대학교에서 전자공학과 학사학위, 서울대학교와 매사추세츠 대학교[1] 에서 전자공학 석사학위, 스탠퍼드 대학교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국비유학 1기(1977년) 합격자.
2.1. 기업인 생활
'''"삼성에 천재급 인재는 없어도, 준천재급 인재는 세 명이 있다.'''
, 진대제, 황창규다."''''''ㅡ 이건희'''
미국에서 휴렛팩커드 IC LAB 연구원, IBM 왓슨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이후 삼성전자에 입사하여 미국법인 수석연구원, 반도체부문 상무이사, System LSI 사업부장 대표이사 부사장, 중앙연구소 소장, 디지털미디어총괄 대표이사 사장을 지냈다. 64메가 128메가 1기가 D램 등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며 '삼성 신화'를 일군 주역이 됐다.'''"삼성반도체 역사의 결정적 장면 중 첫 번째는 도쿄 선언, 두 번째는 이건희 회장이 정보 저장 공간인 셀(cell)을 늘리기 위해, "스택으로 간다." 세 번째는 1990년 7월 어느 날이다. 전 세계 기업 중 가장 먼저 16M D램 완제품을 선보였다. 일본 회사들보다 서너 달 빨랐다. 일본의 기술을 따라잡은 순간이었다."'''
ㅡ 주간조선 인터뷰 中
1983년에 기흥에 반도체 공장을 세우게 주도한 이가 당시 삼성전자 반도체소재기술그룹 부장을 맡고 있던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이자, 현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학회장이다. 참고로 기흥연구소장(전무급 대우)은 이윤우 전 삼성전자 부회장이다. 박재근의 경우, 그 유명한 전설의 수요공정회의를 매주 수요일마다 열게한 인물이며, 연구소장 또한 필참시켰다고 한다. 참여정부 당시에는 산업자원부의 주도로 벌어진 차세대 메모리 개발사업 단장을 맡았던 사람이다.[3]
진대제는 2000년 삼성그룹 산하의 미국 벤처기업 디지털 미디어 비즈니스(DMB)[4] 의 CEO를 지내다가 2003년 초 노무현 대통령의 연락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DMB를 청산한다. 3자 중 인텔의 요구를 삼성이 수용하기에는 삼성의 파운드리 능력이 부실해서 2001년부터 이미 삐걱거리고 있었다고.
2.2. 정치인 생활
2001년 김대중 정부에서 대통령 직속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자문위원을 지냈다.
2003년 2월 25일 참여정부 출범과 정보통신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당시 진대제는 3월 12일에 삼성전자 7만주의 스톡옵션을 지급받을 예정이었는데, 임명을 수락하면서 이를 지급받지 못하게 되었다.
참여정부 출범과 정보통신부 장관을 추천하기 위해 대기업 총수들을 불러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임명할만한 인사를 추천해달라고 제의했고, 이건희는 "진대제가 제일 좋을 거 같다."며 추천했으며,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2006년까지 최장수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냈으나,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위해 당에 차출되었다. 초기에는 서울특별시장에 거론되었으나, 강금실 법무부 장관의 서울특별시장 지지도가 더 높게 나오자 에서는 서울시장에 강금실, 경기도지사에 진대제를 공천하기로 결정하였다.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당시 여당이던 소속으로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소속 김문수 후보에 밀려 2위로 낙선하였다. 강금실 또한 강남 3구의 높은 벽을 체감하며 낙선하고 만다.
낙선 이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정치는 아무나 못 하는 거 같다. 정계 도전을 위해 경기도지사에 뛰어들어봤더니 굉장히 어렵더라. 정치에 소질도 적성도 없는 거 같다. 정치는 하는 분들이나 하는 거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거 같다."고 셀프디스(...)를 하며, "다시 경제계로 복귀해보니 그야말로 신바람이 난다."고 인터뷰했다.#
2.3. 정계 은퇴 이후
광운대학교 석좌교수, 제 2대 인천세계도시엑스포 조직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대한민국 헌법재판소 자문위원을 역임하였다. 2006년 말부터 중소·벤처기업에 투자하는 사모펀드(PEF) 운용사 스카이레이크인큐베스트에서 2006년부터 대표를 지내고 있다. 2019년에는 일선에서 서서히 손을 뗄 것이라고 한다. 2019년 기준 펀드 운용 자산은 2조 정도. 2013년에 1호 펀드를 청산하고 투자자들에게 원금과 수익금을 돌려줬더니 전직 장관에게 뜯긴 돈을 돌려받은 (...) 투자자들이 매우 놀랐다고 한다. 아마 전직 장관 중 가장 부유한 인물일 것이다. AUM 대비 %로 연봉을 챙겨가는 사모펀드 특성 상 '''진대제의 재산은 최소 수천억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또한 2018년 1월부터 2019년 3월까지 1년간 한국블록체인협회의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즈음하여 진대제의 삼성 복귀 이야기도 있었으나 이재용 부회장 - 진대제 전 장관 사이의 만남이 이뤄지지 않아서 삼성 복귀는 없는 일이 된 듯 하다.
이후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 회장으로서 경영에 전념을 하는듯 했으나 2021년 2월 8일 나경원 서울시장 후보 캠프에 '1호 전문가 고문'으로 영입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3. 여담
'''역대 삼성전자의 고위직 임원급을 거쳐간 사람 중에서도 정말 굇수였다'''. 정말로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밥상을 피고는 한 번도 엉덩이를 떼지 않고 공부하다가 피곤하면 그대로 뒤로 누워 잔 다음, 다시 일어나 공부했을 정도의 독종이었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수학 과외로 생활비를 벌 정도로 명석했다고 한다. 전형적인 노력하는 수재형의 인물.
당시 경기고에서 전체 6등의 성적으로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입시에서도 당시 최고 명문이던 경기고의 학생들을 입시 성적에서 모두 물리쳤으나 중앙고등학교 학생에게 수석을 빼았겼다.
이병철 회장의 구애를 통해 삼성전자에 입사했을 때 왜 입사했냐는 주변 사람들의 질문[5] 에 '''"일본 놈들보다 더 좋은 반도체를 더 빨리 개발하려고."'''라는 취지의 대답을 했다고 한다. 삼성에서는 진대제를 미국에서 스카우트해 삼성반도체 미국법인 4M D램 개발팀장을 맡겼는데, 진대제는 자신의 지위로는 제대로 된 연구개발 및 상품 출시가 힘들다고 판단하여 삼성 측에 한국 법인 임원직을 '''요구'''했고, 이병철은 '''승인'''했다.[6] 진대제는 이로써 35세의 나이로 임원직인 반도체 상무이사로 승진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정통부 장관 시절에도 전자전기 공학 관련 논문을 발표하는 등 학자이자 기술자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줬다.
일주일 중 6일을 술 마셔도 거뜬했다는 주변인의 증언이 있었다. 신체도 타고난 강골인 듯 하다.
'''2019년부터 지역 이기주의로 주민들과 함께 의도적인 공사 방해를 하고 있다는 의혹이 있다'''. 넉 달 전에 이사왔다고. #, YTN 기사.
4. 선거 이력
5. 관련 문서
[1] 매사추세츠 주립대학[2] 1946년생. 이 쪽도 진대제급인데, 1966년 삼성전관(현 삼성SDI)에 입사하여, 1977년에는 삼성전자로 이직했고, 이후 30대에 상무와 전무(기흥연구소장이 전무급 대우였다.)를 거치며 폭풍 승진을 거쳤고, 1984년 삼성반도체 이사를 거쳐, 1992년 메모리사업총괄 부사장과 1996년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대표이사 사장, 2004년 총괄대표이사 겸 대외협력담당 부회장(삼성종합기술원(SAIT) 원장도 겸직), 2008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2009년에는 CEO 자리를 최지성에게 물려주며 이사회 의장을 맡았었고, 2010년 다시 한 번 삼성전자 대외협력담당을 맡았다. 참고로 그 전에 대외협력을 담당하던 사람이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이다. 2011년에는 부회장에서도 물러나며 상임고문에 위촉되었다. 광주과학기술원 이사장과 중동학원 이사장을 삼성 출신으로선 마지막으로 지냈다. 왜 마지막이라고 했냐면, 삼성그룹이 2011년을 마지막으로 중동학원 경영에 손을 뗐기 때문이다. 당시 이사는 김수근 삼성물산 부사장, 감사는 강재영 삼성미소금융 이사장.[3] 훗날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그 당시 신화를 줄줄이 얘기했다.[4] 삼성전자와 인텔, 미디어텍의 3자 JV 합작법인. 삼성이 51%의 지분을 보유하여 경영권을 가졌다. 반도체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기업이었다.[5] 당시의 삼성전자는 지금 같은 초일류기업이 아니라 일본 전자회사들의 아류에 불과했다.[6] 쉽게 말해서 일개 직원이 삼성에 임원으로 '''셀프 승진'''을 요청한 셈. 삼성 회장이던 이병철은 흥미롭게 여겨 면담을 하였고 진대제의 청사진을 듣고는 꿈을 펼쳐보라며 즉석에서 셀프 승진을 들어주었다. 둘 다 범상치 않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