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오랑과 세오녀

 

1. 개요
2. 내용
3. 상세


1. 개요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현재 전해지는 버전은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것이다.[1] 무대가 되는 곳은 경상북도 포항시 호미곶(영일만) 일대이며, 호미곶에 가면 연오(延烏)와 세오(細烏) 부부의 동상이 있다.

2. 내용


第八阿逹羅王即位四年丁酉東海濵有延烏郎細烏女夫婦而居. 一日延烏歸海採藻忽有一巖負歸日本. 國人見之曰 “此非常人也”, 乃立爲王.

(신라의) 8대 아달라왕 4년 정유(157)[2]

연오랑, 세오녀 부부가 동해안에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오가 해초를 따다가 바위가 움직이더니 그를 실은 채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갔고, 일본인들은 비범한 사람이라며 왕으로 삼았다.

細烏恠夫不來歸尋之見夫脫鞋亦上其巖, 巖亦負歸如前. 其國人驚訝奏献於王, 夫婦相㑹立爲貴妃.

세오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기다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보고 바위 위에 올랐다. 그러자 그 바위는 또다시 움직여 세오를 일본으로 데려갔고 세오는 연오와 다시 만나 왕비가 되었다.

是時新羅日月無光. 日者奏云 “日月之精降在我國, 今去日本故致斯怪.” 王遣使來二人, 延烏曰 “我到此國天使然也. 仐何歸乎. 雖然朕之妃有所織細綃, 以此祭天可矣.” 仍賜其綃. 使人來奏, 依其言而祭之然後日月如舊. 藏其綃於御庫爲國寳, 名其庫爲貴妃庫. 祭天所名迎日縣又都祈野.

한편, 그 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신라 아달라왕이 점술가를 불러 까닭을 점치게 하자 점술가는 우리나라의 해와 달의 정기를 품은 이들이 일본으로 갔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신라 왕이 사람을 보내어 연오와 세오에게 돌아오도록 촉구했으나 두 사람은 돌아올 수 없다 하고 대신 세오가 직접 짠 비단을 보내었다. 왕이 그 비단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자 비로소 해와 달이 빛을 되찾았다. 그 비단을 국보로 보관한 창고를 귀비고(貴妃庫), 비단으로 제사를 지내던 곳은 훗날 도기야(都祈野) 혹은 영일현(迎日縣)이라 불렸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1, 연오랑 세오녀(延烏郞 細烏女) ##'''


3. 상세


연오랑과 세오녀에서 랑(郞)과 녀(女)는 성별을 나타내기 위해 붙었으니 정확히는 '연오'와 '세오'라고 해야 바르며, 실제로 원문에서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6차 교육과정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도 이 설화가 '연오와 세오'라는 제목으로 올라가 있다. 또한 이 두 사람의 이름에 들어가는 오는 까마귀 오(烏)로 삼족오로 대표되는 '태양'을 상징하는 암시적인 글자이며, 그들이 일본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된다고 한다.
아달라 이사금 항목에 나오듯이 당시 신라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혼란이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문제가 많이 있었고, 각종 천재지변도 있었다.[3] 결국 아달라 이사금 사후에는 박혁거세계 박씨의 왕위 계승이 끝나고 석탈해의 후손인 석씨에게 왕권이 넘어가는데, 이와 연관지어 권력 투쟁에서 패한 신라 귀족이 해와 달의 정기로 상징되는 귀중한 무언가를 갖고 일본으로 망명을 한 일이 이 설화의 배경이 되지 않았나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스이닌 덴노 3년 3월 신라 왕자 천일창(千日槍)이 8가지 보물을 가지고 대한해협을 건너 도래하여 다지마국에 정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연오랑 설화와 연관짓는 의견도 있다. 물론 시기상으로는 천일창이 100여 년 정도 빠르지만 삼국사기 초반부와 일본서기 연대 기록은 신뢰도가 다소 떨어지는 터라[4] 시대차가 좀 나도 동시대 인물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세오녀가 길쌈한 베를 보내었다는 것과 이후에 길쌈의 신이 된다는 것에서 일본에 길쌈기술이 전해진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고,[5] 연오랑은 이에 대응하여 제련기술이 전해진 것으로 본다. 역사스페셜에서는 심지어 '연오랑 세오녀 일본의 신(神)이 되었나?' 편에서 연오랑과 세오녀가 스사노오의 모티브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관련기사 링크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신화학은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일단 한낱 어부 부부가 일본에서 왕과 왕비가 되었다는데 부른다고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을 것 같기는 하다... 다짜고짜 딴 나라에서 갑툭튀해서 온 어부 부부를 갖다가 일본 사람들이 왕으로 삼았다는 언급 때문에, 실은 이 둘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왕조에 편입된 신분 높은 사람들이지 않냐는 추측도 있다.
그 외에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한국사에선 일월성신신화라는 것이 있다. 한국사에서 메이저한 일월신화는 연오랑 세오녀가 유일하다. 해님달님은 전래동화다.[6]
그리고 원문에서는 연오랑이 타고 간 바위에 대해서 忽有一巖負歸日本[7]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이 負歸이다. 연오랑은 본인이 가고 싶다고 원해서 자의적으로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찾아온 바위가 그를 태우고 일본으로 간 것이기 때문이다.[8] 이는 세오녀가 건너올 때에도 巖亦負歸如前[9]이라고 해서, 負歸를 사용하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천일창과 비교해보면 급한 쪽이 정반대로 묘사된 것이다.
천랑열전연오랑이 여기서 이름을 따왔다. 그런데 연오랑은 위 이야기도 그렇지만 전형적인 신라계 이름인데 고구려인 이름으로 썼다. 포항시의 지명이자 옛 이름인 연일(延日), 영일(迎日), 오천(烏川) 등은 모두 이 설화에서 유래된 이름들이다.
고대 이후에는 고려공민왕 당시 영일현 감무로 부임한 이인부라는 사람이 이곳에 일월지사적비를 세우고 주민들은 봄, 가을 혹은 중양절에 천제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16세기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영일 고적(古跡) 조에는 영일현에서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도기야에 있는 연못[10]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유적들은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 때 멸실되었다고 한다. 근래에는 포항시에서 이곳을 중건하고 일월사당을 새로 건립하여, 매년 10월 열리는 일월문화제에서 주민들이 다시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1] 삼국유사를 쓴 일연수이전이라는 신라 말 혹은 고려 초의 책에 쓴 책을 보고 인용해 쓴 것이다. 수이전은 설화 모음집 같은 책으로 일연 때(고려시대)는 남아있었지만 지금은 세월이 흐르면서 없어졌다.[2] 실제로는 아달라 이사금이 아니라 한 갑자 빠른 파사 이사금 시절(97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연오랑과 동일인물로 보이는 천일창이 신라왕의 형으로 나오기 때문. 특히 일본서기에서 천일창의 등장시점이 기원전 27년, 이주갑인상을 고려했을 때 기원후 93년이라는 점도 작용한다.[3] 설화에서 해가 빛을 잃었다고 하며 언급되는 일식도 아달라왕 때 실제로 있었다.[4] 일본서기의 연대 오류는 확실한 정설이고(이주갑인상 문서 참조) 삼국사기 초반부의 연대 오류는 학계에서 대체로 인정하나 오류가 없거나 거의 없다고 보는 학자도 일부 있다.[5] 길쌈 관련 기록은 이것 말고도 추석 명절이 최초로 언급된 유리 이사금 기록 등 신라 초기부터 여러 번 나온다.[6] 물론 햇님달님도 오랜 세월 전승되면서 원형을 잃고 너프(?)되어 전래동화 급으로 전락한 것이지, 거의 모든 인류문명에서 태양신은 절대적인 신으로 숭배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매우 신화적인 원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7] 어느 날, 연오가 바다에 가서 미역을 따고 있는데, 갑자기 어느 바위 하나가 그를 싣고 일본으로 데려갔다.[8] 負는 이 행동의 주체가 연오랑이 아니라 바위라는 것을 의미하고, 歸는 바위가 원래 일본에 있다가 이 때 연오랑 근처로 찾아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9] 바위는 그녀 또한 업고서 일본으로 갔다.[10] 이 연못을 일월지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