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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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이현[1] 츠루가역 앞에 있는 천일창 동상. 출처
'''국적'''
사로국
'''이름'''
천일창(天日槍, 天之日矛, アメノヒボコ)
'''생몰년'''
? ~ ?
'''링크'''
izusi, 성씨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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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창과 관련된 자료가 있다고 전해지는 이즈시 신사(出石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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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정보의 스샷이다.
1. 소개
2. 일본서기에서의 등장
3. 고사기
4. 실존 인물인가?
5. 기록
6. 관련 문서


1. 소개


일본서기》에서 사로국 출신의 왕자라고 주장하는 인물. 11대 스이닌 덴노 시기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고사기》에서는 동일한 발음을 다르게 음차한 천지일모(天之日矛)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귀화 동기 등도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신공황후가 그의 후손이라고 전해진다.

2. 일본서기에서의 등장


스이닌 덴노 3년(기원전 27년 / 기원후 93년) 봄 3월, 신라 왕자 천일창이 귀화했다. 가지고 온 물건은 우태옥(羽太玉) 1개, 족고옥(足高玉) 1개, 제록록적석옥(鵜鹿鹿赤石玉) 1개, 출석소도(出石小刀) 1자루, 출석모(出石鉾) 1자루, 일경(日鏡,청동거울) 1개, 웅신리(熊神籬) 1개 등 7가지였는데, 다지마국(但馬國)에 보관하여 항상 신물(神物)로 삼았다. 【일설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천일창이 작은 배를 타고 와서 하리마노쿠니(播磨國)에 정박하여 육속읍(肉粟邑)에 있었다. 그때 덴노가 미와노키미(三輪君)의 시조 오토모노누시(大友主)와 야마토츠끼(倭直)의 시조 나가치(長尾市)를 하리마(播磨)에 보내어 천일창(天日槍)에게, "너는 누구이며, 어느 나라 사람인가" 라고 물었다. 천일창이, "저는 신라 국왕의 아들인데, 일본국(日本國)[2]

에 성황(聖皇)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라를 동생 지고(知古)[3]에게 주고 귀화하였습니다."라 대답하고, 물건을 바쳤는데 엽세주(葉細珠), 족고주(足高珠), 제녹녹적석주(鵜鹿鹿赤石珠), 출석도자(出石刀子), 출석창(出石槍), 일경(日鏡), 웅신리(熊神籬), 단협천대도(膽狹淺大刀) 등 8가지였다. 이에 (덴노가) 천일창에게, "하리마노쿠니(播磨國) 肉粟邑이나 아와지시마(淡路島) 出淺邑의 두 읍 중에서 너의 마음대로 살도록 하라"고 조칙을 내렸다. 이 때 천일창(天日槍)이, “신이 장차 거주할 곳에 대하여 만일 천은(天恩)을 내려 신이 원하는 곳을 허락하신다면, 신이 직접 여러 나라를 돌아보고 마음에 드는 곳을 지급받고자 합니다”라고 아뢰니,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천일창이 토도하(菟道河)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북으로 오미노쿠니(近江國) 아나무라(吾名邑)에 들어가 잠시 머물 다가 다시 오우미(近江)으로부터 와카사국(若狹國)을 거쳐 서쪽으로 다지마국(但馬國)에 이르러 거주처를 정하였다. 오미노쿠니(近江國) 경촌곡(鏡村谷) 도인(陶人)은 바로 천일창를 따라온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천일창는 타지마국(但馬國) 출도(出嶋)의 사람 태이(太耳)의 딸 마타오(麻多烏)와 결혼하여 단마제조(但馬諸助)를 낳았다. 제조(諸助)는 단마일유저(但馬日楢杵)를 낳고 일유저(日楢杵)는 청언(淸彦)을 낳았으며 청언(淸彦)은 다지마모리(田道間守)를 낳았다.】


3. 고사기


고지키(古事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옛날 신라의 아구누마(阿具奴摩・阿具沼)라는 늪에서 한 여인이 낮잠을 자고 있을 때, 햇빛이 무지개처럼 내려와 그녀의 음부에 닿았다고 한다. 여인은 바로 임신하여 붉은 구슬을 낳았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어떤 남자가 그 여인에게 간절히 부탁해 구슬을 얻은 후 몸에서 떼는 일 없이 언제나 지니고 다녔다. 어느 날 그 남자가 소를 끌고 음식을 산으로 나르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아메노 히보코가 그 남자를 보고 소를 죽여 먹으려 한다고 착각해 감옥에 가둬버린다. 그 남자는 아무리 해명을 해도 히보코가 용서를 해주지 않자, 결국 언제나 지니고 다니던 붉은 구슬을 건네주고 나서야 겨우 용서를 받게 된다. 히보코가 그 구슬을 갖고 집에 돌아가 마루에 두자 그 구슬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했다.
히보코는 여인을 정실로 삼았으며 그녀는 매일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거만한 성격의 그는 어느 날 아내를 욕하며 비난했고, 그녀는 부모의 나라로 돌아간다는 말을 남기고는 작은 배에 올라 난바의 나루터에 있는 히메코소 신사(比売碁曾神社)로 떠나버렸다.[4] 히보코는 깊이 반성하고 아내를 찾아 일본으로 향했다. 그러나 난바 해협을 지배하는 신이 방해하여 아내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다지마에 상륙하고 말았다. 그는 그곳에서 마에쓰미(前津見)라는 현지 여인과 결혼했다고 한다.[5]
붉은 옥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배를 이동하여 지나갔다는건 김수로왕허황옥 신화와 비슷한 점이 있다. 또한 일본 건국 신화인 스사노오아마테라스와도 연관성이 제기되는데, 전체적인 스토리 구조가 신라에 강림했던 신인 스사노오가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넘어갔다는 것이 신라에서 일본으로 넘어갔다는 천일창과 기본 플롯이 비슷하다. 일본서기에서는 천일창을 쓰누가아라시토(都怒我阿羅斯等) 라는 의부 가락국 즉, 가야왕자라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이나바의 흰토끼 설화와 비슷하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4. 실존 인물인가?


천일창이 성스러운(...) 덴노를 섬기려고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주고 위험을 감수하며 일본에 왔다는 이야기인데, 사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봤을 때 신빙성이 크게 떨어지는 이야기이다. 또한 천일창이라고 하는 이름이 한국 역사 기록에 발견되지 않을 뿐더러 시대상으로 따져도 마땅한 사람이 그다지 없기 때문에 미스테리의 인물이다. 현재 가설이 여러 가지 있지만 일본서기 기록 연대 자체가 확증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미스테리다.
천일창이 신라의 왕자라는 부분을 신뢰하고 나서 한국 기록 삼국사기와 대조해보면 그나마 천일창과 행적이 유사한 인물이 신라 제7대왕이 되는 일성 이사금이다. 일성은 3대 유리 이사금장남이자 태자였는데 동생(5대 파사 이사금)이 대신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파사가 죽은 후 조카이자 아들이 없던 6대 지마 이사금을 거쳐서 이미 노인이 된 일성이 결국 동생보다 수십 년 늦게서야 왕위에 오르며, 왕위에 오르기 전 젊은 시절 일성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비어있다. 즉, '''신라 왕자'''라는 부분과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했다'''는 부분이 일치한다.[6] 만약 일성=천일창이라면 일본에서 활동하다 말년에 다시 신라로 귀국했고 신라 정계의 사정에 의해 늦게서야 왕위에 올라서 20년을 다스리는 스펙터클한 인생을 살았다는 말인데.. 물론 일성 이사금의 비정상적인 연대를 고려하면 동일인물이라기보다는 천일창의 아들이 박일성일 가능성이 높다.
삼국사기에는 빠져있는 역사 기록으로서 의부 가락국(가야)에 대해 쓰여있는 몇안되는 역사 기록이다. 고지키에선 신라 왕자 일본 서기에선 가야 왕자라 한것은 후대에 가야와 신라를 혼동했을수도 있다. 옛 고대 한반도인들이 일본 열도를 도래한것에 대한 중요한 역사 기록으로 볼수있다. 일본 고대 가야식 토기가 나타나는 것에 대한 증거로도 볼수있다.
일설에는 천일창이 일본에 처음 상륙했을 때 바위가 막고 있었으나 이를 칼로 베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 제철기술자라는 설##도 있으며, 기원전 무렵 진한인의 일본 이주 설화로 풀이하거나[7], 삼국유사연오랑과 세오녀 전설처럼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왕이 됐다는 점이나 연오랑의 동생인 지고가 등장하는 것을 비교해 천일창이 바로 연오랑이며 신라의 태양신 신화가 일본으로 넘어간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8]
또한 일본 제국주의의 프로파간다로 쓰였던 진구 황후가 그의 후손이라는 기록도 있다. 러시아 태생의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은 진구황후 혹은 그의 모티브가 되는 사람이 고대 한국어족이라고 추측했는데, 그의 주장을 따르자면 천일창 이야기가 해당 기록과 연관이 있게 된다.

5. 기록


기록 출처
  • <古史記> 천지일모 신화
<古史記>에 이나바의 흰토끼 설화의 기본적인 스토리 뼈대인 '천지일모 신화'가 기록되어 있다.
옛날 신라국주아들이 있었다. 이름은 천지일모(아메노히보코)라고 하였고 바다를 건너왔다. 건너온 이유는 신라국에 연못이 하나 있는데 연못의 이름은 아구누마(阿具奴摩)라 하였다. 이 연못에서 천부(賤婦)가 낮잠을 자는데 무지개 같은 빛이 그 여자의 음상(陰上)에 비치는 것을 또 다른 천부(賤夫)가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고 여인의 행동을 주시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낮잠을 자고 임신을 하여 적옥(赤玉)을 낳았다. 이를 지켜보던 천부가 그 옥을 달라고 졸라서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이 사람이 산곡에 밭을 일구었기 때문에 밭가는 사람들의 음식을 소 한 마리에 지워 산곡 안으로 들어가고 있을 때 국주의 아들 천지일모와 마주쳤다. 이에 그 사람에게 묻기를 "왜 음식을 소에 지워 산으로 들어가느냐. 네가 필시 이 소를 잡아먹으려 하는 것 같다"하고서 그 사람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
그러자 "소를 잡아먹으려 한 것이 아니고 밭일하는 사람의 음식을 가져가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그래도 용서해주지 않으니 천부가 허리에 차고 있던 옥을 바치자 놓아주고 그 옥을 가져와서 침상에 놓았더니 아름다운 처녀로 변하였다.
그리하여 혼인을 하고서 적처(嫡妻)로 삼았다. 그 아내가 언제나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남편에게 대접했다. 그러자 그 국주의 아들이 교만한 마음이 생겨 아내를 꾸짖었더니 그녀가 "항상 내가 당신의 아내 노릇만 할 사람이 아니다. 내 조국으로 가겠다"하고서는 곧 몰래 작은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난파에 머물러 살았다. 이에 천지일모가 그의 아내가 도망간 것을 알고 쫓아가서 난파(나니와)에 이르렀을 때 도신(渡神=대국주신)이 막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다지마국(多遲摩國)에 머물렀다.
  • <日本書記>'수인기'
<日本書記>'수인기'에는 신라에서 천일창이 가져온 단군을 제사지내는 고대의 무구가 기록되어 있다.
신라왕자 천일창이 내귀하였다. 가지고 온 물건은 우태옥(=엽세주) 1개, 족고옥 1개, 제녹녹의 적석옥(赤石玉) 1개, 출석의 소도 1구, 출석의 창 1지, 일경 1면, 쿠마노 히모로기(熊神籬) 1구 등 모두 일곱 가지였다. 그것을 다지마[但馬]국에 간수해두고 항상 신물로 여겼다.
  • <古史記>
고사기에는 천일창이 응신으로 창씨개명(이름을 서로 바꿨다고)했다고 나온다.
처음 오진 덴노가 태자가 되자 월국(고시노쿠니)에 가서 각녹(角鹿)의 사반대신을 배알하였다. 그때 대신과 태자가 이름을 바꾸었다. 그래서 대신을 이자사와케노미코토(去來紗別尊)라 부르고 태자를 호무다와케노미코토(譽田別尊)라고 하였다. 대신의 본명은 호무다와케노카미(譽田別神)이고, 태자의 원명은 이자사와케노미코토(去來紗別尊)이다.
  • <風土記>'월전국 기비신궁'
<風土記>'월전국 기비신궁'에 응신과 천일창이 동일인물이라 다시 나온다.
기비신궁(氣比神宮)은 우사(宇佐)와 동체이다. 팔회(八幡,야하타)은 응신천황(오우진)이 진좌하였다.
  • <日本書記>'신대기'
일본서기에는 천일창과 똑같은 행적을 보이는 스사노오 설화가 나온다.
스사노오(素盞鳴尊)의 소행이 괴씸하였다. 그래서 여러신이 천좌치호를 과하고 쫓아내었다. 이때 스사노오(素盞鳴尊)는 아들 이소타케(五十猛)를 데리고 신라국으로 내려가 소시모리(曾尸茂梨)라는 곳에 있었다. 그런데 말을 하기를 "이 땅은 내가 살고 싶지 않다"라고 하고는 진흙으로 배를 만들어 타고 동쪽으로 가서 출운의 파천 상류에 있는 조상봉(鳥上峰)으로 갔다.
  • <신찬성씨록>
<신찬성씨록>에 나오는 '이나히노미코토'의 조상 계보가 천일창과 연관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시라기[新良貴] 성씨의 원조는 진무 덴노의 부왕인 우가야후키아에즈이고 그 아들 이나히노미코토(稲飯命)의 후손이다. 이나히노미코토는 신라국[新良國/新羅國] 출신이며 국주에 즉위했다. 신라국왕과 조상이 같다.」
是出於新良國。即為國主。稻飯命出於新羅國王者祖合
  • <日本書記>
소나갈질지, 도노아아라사등 이야기.
>임나국(任那國;미마나노쿠니)이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를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임나는 축자국을 떠나 2천여리 북으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계림의 서남에 있다.
>
>임나인 소나갈질지(蘇那曷叱智)가 “나라에 돌아가고 싶다.” 고 청하였다. 아마도 선황의 시대에 알현하러 와서 아직 돌아가지 않았던 것인가? 그래서 소나갈질지에게 융숭하게 상을 주었다. 아울러 붉은 비단 1백 필을 주 어 임나왕(任那王;미마나노코니키시, 미마나노코키시)에게 하사하였다. 그러나 신라인이 길을 막아 이것을 빼앗아버렸다. 양국의 원한이 이때 처음으로 생겼다.
>
>[어떤 책에서 말하기를 어간성 천황의 시대에 이마에 뿔이 있는 사람이 있어 배 를 타고 와서 월국(越國;코시노쿠니)의 사반포(笥飯浦;케히노우라)에 정박하였다. 그러므로 그곳을 각록(角鹿;츠누가)이라 이름하였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의부가라국왕(意富加羅國王)의 아들로 이름은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츠누가아라시토)이고 다른 이름은 우사기아리질지간기(于斯岐阿利叱智干岐)라고 한다. 일본국에 성황(聖皇)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귀화하였다. 혈문(穴門;아나토)에 도착했을 때에 그 나라에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이도도비고(伊都都比古;이츠츠히코)였다. 나에게 ‘나는 곧 이 나라의 왕이다. 나를 제외하고 또 다른 왕은 없다. 그러므로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됨을 살펴보니 틀림없이 왕이 아님을 알 고 즉시 다시 돌아왔다. 길을 알지 못해서 섬과 포구에 계속 머물렀다. 북해로부터 돌아 와 출운국(出雲國;이즈모)을 거쳐 여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이때 천황이 죽었다. 그 대로 머물러 활목천황을 섬겨 3년이 경과하였다. 천황이 듣고 도노아아라사등에게 “너의 나라에 돌아가고 싶은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러고 싶다.”라고 대답하였다. 천황이 아 라사등을 불러 “네가 길을 헤매지 않고 빨리 왔더라면 선황을 만나고 섬길 수 있었을 것이 다. 그러니 너의 본국의 이름을 고쳐서 어간성천황의 이름을 따라 즉시 너의 국명으로 삼 아라.”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붉은 비단을 아라사등에게 주어 본토에 돌아가게 하였다. 그 국호를 미마나국(彌摩那國;미마나노쿠니)이라 함은 이것이 연유가 된 것이다. 아라사등은 받은 붉은 비단을 자기 나라의 군부(郡府)에 보관하여 두었다. 신라인이 그것을 듣 고 군사를 일으켜 와서 붉은 비단을 모두 빼앗았다. 이것이 두 나라가 서로 원망하게 된 시초라고 한다.
>
>(어떤 책에서 말하기를) 처음에 도노아아라사등이 본국에 있을 때 황우(黃 牛)에 농기구를 싣고 시골로 갔다. 그런데 황우가 갑자기 없어져 그 자취를 찾아 갔다. 흔적 은 어떤 군아(郡衙) 가운데에 있었다. 한 노인이 “그대가 찾는 소는 이 군아에 들어갔다. 그런데 군공(郡公)들이 ‘소가 짊어지고 있는 물건으로 보면 틀림없이 잡아먹으려는 것 이다. 만약 그 주인이 찾아오면 물건으로 보상하면 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잡아서 먹어버렸다. 만일에 ‘소 값으로 어떤 물건을 얻고자 하는가?’ 라고 물으면 재물을 바라지 말고, ‘군 내(郡內)에서 제사를 지내는 신을 달라’ 고 하시오.”라고 말하였다. 얼마 후에 군공들이 와서 “소 값으로 어떤 물건을 얻고자 하는가?”라고 물었다. 노인이 말한 대로 대답하였다. 그 들이 제사지내는 신은 흰 돌이어서 흰 돌을 소 값으로 받았다. 그것을 가지고 와서 침실 속 에 두자 그 신석(神石)이 아름다운 소녀로 변했다. 아라사등은 몹시 좋아하여 교합(交合)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아라사등이 다른 곳에 간 사이에 소녀가 갑자기 사라졌다. 아라사등은 크게 놀라 자기 처에게 “소녀는 어디로 갔는가?”라고 물었다. “동쪽으로 갔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곧 찾아서 멀리 바다를 건너 일본국으로 들어왔다. 찾는 소녀는 난파(難波;나니하)에 와서 비매어증사(比賣語曾社;히메고소노야시로)의 신이 되었다. 또 풍국(豐國;토요쿠니)의 국전군(國前郡;미치노쿠치노코호리)에 이르러 다시 비매어증사의 신이 되었다. 두 곳에서 나란히 제사지낸다고 하였다.]
>
>初御間城入彦五十瓊殖天皇[謚崇神。]御世。額有角人。乗船泊于越国笥飯浦。遣人問曰何国人也。対曰。意富加羅国王子。名都努我阿羅斯等。亦阿利叱智干岐。伝聞日本国有聖帰化。到于穴門。有人。名伊都々比古。謂臣曰。吾是国王也。除吾復無二王。勿往他処。臣察其為人。知非王也。即更還不知道路。留連島浦。海北廻。経出雲国至此国也。是時会天皇崩。便留。仕活目入彦五十狭茅天皇[謚垂仁。]詔曰。汝速来者。得仕先皇。是以改汝本国名。追負御間城善号。曰弥麻奈。因給織絹。即還本郷。是改国号之縁也

6. 관련 문서



[1] 옛 고시노쿠니(越國)[2] 참고로 일본이라는 국호가 만들어진 것은 한참 뒤인 670년이다. 이는 《삼국사기》 문무왕 10년 12월조의 기사나 《신당서》 동이전 일본조에 "왜국이 국호를 일본이라고 바꾸었다"라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일본서기》의 제작 이유가 자국 역사의 정통성 정립인 만큼 곳곳에 이런 식으로 윤색과 곡필이 가해졌다.[3] 초기 신라에서 차남이 즉위한 사례는 파사 이사금 뿐이므로 그와 동일인물임이 확실시된다.[4] 히메코소 신사(比売碁曾神社)의 후예격인 신사로서는 오사카부 오사카시 히가시나리구의 히메코소 신사,(比売許曽神社, 현재의 제신은 오오쿠니누시노카미의 딸인 시타테루히메노미코토) 같은 시 주오구 코즈 궁의 세쓰샤인 히메코소 신사 등이 있다.[5] 원래 아내의 이름은 아카루히메이다.[6] 단 삼국사기 기록상 일성보다 동생 파사가 먼저 왕위에 오른 건 파사 쪽이 더 위엄과 지혜가 있기 때문이라 쓰고 있다. 물론 다른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고 위엄과 지혜는 그냥 은유적으로 둘러댄 것일 수도 있지만[7] 이병도, 한국사대관 1964년. 64페이지[8] 소재영, 연오랑세오녀설화전 196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