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호/고구려
1. 개요
고구려의 연호에 대해 서술하는 페이지.
고구려는 사료가 부족한 만큼, 고구려의 연호로 추정하는 것들도 대부분 금석문에 남아있는 것들이다. 문헌 사료에는 연호는커녕 연호를 사용했다는 사실조차 전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연호 사용 사실을 기록해 준 발해와 신라와는 다른 특이한 점. 특히 발해의 연호는 중국이 그때그때 꼬박꼬박 기록해줬다. 그러다 발해 말기 일부 왕은 중국도 혼란기라 적어주지 못했다.
국가에서 사용했던 연호가 사서에 남아 있지 않은 사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오호십육국시대의 국가인 북량에서도 사서에서 확인되지 않는 자체적인 연호가 유물의 발견과 더불어 확인된 바 있다. 현존하는 14개의 북량석탑 중 6개의 예에서 기년이 확인되었는데 승양(承陽), 승현(承玄), 연화(緣和), 태연(太緣) 등이다. 승양을 제외한 승현, 연화, 태연은 중국 사서에서는 보이지 않는 연호이다.[1]
2. 확실한 연호
2.1. 영락(永樂): 광개토왕
414년에 건립된 광개토왕비는 물론 408년에 건립된 덕흥리 고분에도 나온다. '''교차검증'''이 된다! 이 정도면 확인사살급. 고구려의 연호라는 근거를 더 언급할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확인된 한국의 연호 중 가장 이르다. 출처 사료도 408년산(産)으로 비교할 수 없이 빠르다. 단 광개토왕비 등 관련 기록에 최초라는 언급이 있는 것은 아니기에 고구려에서 최초로 사용한 연호인지는 불확실하다.
명나라의 영락제도 같은 연호를 사용한 바 있다.
2.2. 연가(延嘉): 안원왕 또는 영양왕 추정
연가7년명 금동광배에 등장. 발굴지가 경상남도 의령군이지만, 명문에 아예 '''고려국'''이라고 쓰여 있어서 이쪽도 확실하다. 불상의 제작 수법으로 보아 6세기 말엽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기미년인 599년(영양왕 10년)으로 비정된다.
연가 7년이 언제인가에 대해서는 419년(장수왕 7년)설[2] , 479년(장수왕 67년)설[3] , 539년(안원왕 9년)설[4] , 599년(영양왕 10년)설[5] 등으로 견해가 갈라지고 있다. 그런데 이 불상과 같이 가사자락을 왼쪽 손목으로 걸쳐내려 가슴을 U자꼴로 터지게 하여 비스듬히 입은 승각기[上內衣]를 보이도록 한 방식은 중국에서도 480년경에야 새로 나타난다. 또 이 불상과 같은 나발(螺髮)은 5세기 중엽의 북위 불상에서 시작되어 6세기 중엽에 일반화되었다. 게다가 현겁천불신앙은 북위 시대인 525년의 용문석굴(龍門石窟)의 조상명(造像銘)에서 처음 확인된다. 이러한 점 등으로 미루어, 아무래도 연가를 5세기의 고구려 연호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연가 7년을 539년 혹은 599년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6]
3. 고구려의 연호일 가능성이 높은 것
3.1. 영강(永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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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평양 평천리에서 발굴된 높이 21cm, 너비 15cm짜리 금동광배(金銅光背) 뒷면의 명문에서 확인. 명문에는 ‘永康'''七'''年’이라는 연호가 나타나 있으나 간지 부분이 한 글자는 마멸되고 다른 한 글자는 아예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정확한 연대는 알기가 어렵다. 간지 부분은 甲□으로 판독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나, 辛□로 판독하기도 하고[7] , 아예 양원왕 7년(551)에 해당하는 신미(辛未)로 판독하기도 한다.[8] 1992년에는 □午로 판독하는 견해[9] 도 제시되었다.
영강 연호를 사용한 중국 왕조는 많은데, 개중 이것과 한자까지 일치하는 것을 살펴보면 후한 환제, 서진 혜제, 후연 혜민제(모용보), 서진 문소왕(걸복치반) 정도가 있다. 이들 중 7년 이상 사용한 것은 서진 문소왕뿐인데, 중국의 동쪽에 있는 고구려와는 달리 서진은 정반대편 서쪽에 있었기에 굳이 고구려가 서진의 연호를 사용했을 리는 없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연호일 가능성이 높다.
3.2. 건흥(建興)
건흥5년병진명 금동광배에 등장. 1915년 충청북도 중원군에서 발굴되었는데, '건흥(建興) 5년 병진'이라는 연호와 간지가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476년(장수왕 64년)설[10] , 536년(안원왕 6년)설[11] , 596년(영양왕 7년)설[12] 이 있다.
3.3. 경□ 또는 □경
1930년 황해도 곡산에서 발견된 금동신묘명삼존불에 나타나는 명문을 바탕으로 파악한 것이다. 출토 위치상으로 보나, 조각 양식으로 보나 고구려의 불상일 가능성이 높다. 이 불상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곧바로 4년이라 기록된 것으로 보아 '景'이 연호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나, 기본적으로 어떤 글자인지 판독이 안 된다.景四年在辛卯比丘道須共諸善知識那婁賤奴阿王阿𡍄五人共造无量壽像一軀願亡師父母生生心中常値諸佛善知識等値遇彌勒所願如是願共生一處見佛聞法
북한의 손영종은 연호 부분을 白宣(백선)이라 판독하고 있으나[13] , 景이라는 한 글자의 위아래로 어떠한 간격도 없기에 두 글자로 읽는 것은 무리가 있다. 양은경은 이것이 경□ 또는 □경이라는 연호가 한 글자로 줄어든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중국의 용문석굴(龍門石窟) 연화동 내부의 북벽에 있는 조상감의 명문 중에서 "大魏'''孝三年'''歲次癸未四月癸巳朔八日庚子"라는 구절이 있음을 근거로 들었다. '효창(孝昌)'이라는 연호에서 昌을 생략하고 孝만 쓴 것인데, 조상 제기(造像題記)를 새길 당시에는 두 글자의 연호 중 한 자만을 새겨도 사람들이 모두 인지하고 있었기에 이처럼 한 글자를 생략한 채 표기한 예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한다.[14]
연호가 무엇인지는 둘째치고, 기년(4년)과 간지(신묘)가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손영종은 불상의 연대를 문자명왕 21년인 511년으로 보았다.
3.4. 연수(延壽): 장수왕(?)
1926년 서봉총에서 출토된 유물인 은합의 명문에서 발견된 연호. 延壽元年太歲在卯(연수 원년 태세 재묘)와 延壽元年太歲在辛(연수 원년 태세 재신)이라고 적혀진 은합이 발견된 서봉총의 연대가 5세기 중반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연수라는 연호는 장수왕 시기에 사용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위에 나오는 延嘉와 자형이 비슷하기 때문에 동일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실제로 삼국사기에서도 壽와 嘉를 바꿔쓴 사례가 발견되기도 한다.
3.5. □화
함경남도 신포시 오매리의 절골 유적에서 1988년 6월 발견된 '신포시 절골터 금동명'에 적혀 있다. "□和 三年 歲次 丙寅二月廿六日 □戌朔"이고, □의 두 글자는 일부가 떨어져 나가서 판독이 어려운데, 각각 '太和'와 '甲戌'로 추정하여 '태화 3년 병인, 2월 갑술삭 26일'로 해석하고 제작 시기를 양원왕 2년(546)에 비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위의 영강 연호와 겹치기도 하고, 양원왕이 선왕의 연호를 2년 동안 유지했다는 전제가 필요한 등 논란이 있다. 제작 시기(□화 3년)를 영양왕 17년(606)으로 보기도 한다.[15]
4. 고구려의 연호일 가능성이 낮은 것
- 건시: 소수림왕의 연호라고 주장하지만 근거는 전혀 없다.
- 태녕: 태녕 4년명 와당(太寧四年銘瓦當)에 나온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설명에 따르면,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현성의 대중목욕탕 및 영화관 도서(道西)에서 출토되었다. "太寧四年太歲□□閏月六日己巳造吉保子宜孫"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는 고구려의 연호일 가능성이 낮다. 첫째로, 동진에서 323년 3월부터 326년 1월까지 태녕(太寧)이라는 연호를 썼다. 게다가 태녕 4년의 윤달 6일이 기사일이라는 것은 그 달의 1일이 갑자일임을 뜻하는데, 태녕 3년인 325년(을유, 미천왕 26년)에 갑자일로 시작하는 윤8월이 있다. 1년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고구려가 중국의 역법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발생한 혼동 때문으로 추정되며, 혹자는 이것을 아예 광개토대왕의 활동 연대가 1년씩 차이 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쓰기도 한다.
- 개화(開化): 엄밀히 따지면 굳이 여기에 서술하지 않아도 되는 연호(?). 등장하는 기록(사료가 아니다!)이 환단고기다. 물론 단순히 환단고기에만 나와서 적는게 아니라, 위패산성 비문에도 나온다는데.... 문제는 이 위패산성 비문이라는게 공식적으로 전혀 확인되지 않은 자료라는 점이다. 환단고기와 위패산성 비문에 의하면 보장왕 시기 연호라고는 한다. 자세한 것은 http://ekrrkdwjd.egloos.com/2589370 참조. 상당히 영양가 있는 댓글이 많이 달렸으므로 그것까지 읽어보자. 관련 글인 http://katnani.egloos.com/2715709도 읽어보면 좋다.
[1] 양은경, 2005, 「경4년신묘명 금동삼존불의 새로운 해석과 중국 불상과의 관계」, 『선사와 고대』 23-23, pp.43~44[2] 李昊榮, p.103.[3] 손영종, 1966, 「금석문에 보이는 삼국시기 몇 개 년호에 대하여」, 『력사과학』 4, p.357.[4] 金元龍, p.156.[5] 黃壽永, p.173.[6] 이 문단의 내용은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서 가져온 것이다.[7] 도유호, 1964, 「평천리에서 나온 고구려 부처에 대하여」, 『고고민속』 3, p.32[8] 손영종, 1966, 「금석문에 보이는 삼국시기 몇 개 년호에 대하여」, 『력사과학』 4, p.358[9] 久野建, 1992, 「平壤博物館の佛像」, 『MUSEUM』 490, p.4[10] 李丙燾, p.23~24.[11] 손영종, 1966, 「금석문에 보이는 삼국시기 몇 개 년호에 대하여」, 『력사과학』 4, p.355.[12] 黑板勝美, p.6.[13] 손영종, 1966, 「금석문에 보이는 삼국시기 몇 개 년호에 대하여」, 『력사과학』 4, pp.355~356[14] 양은경, 2005, 「경4년신묘명 금동삼존불의 새로운 해석과 중국 불상과의 관계」, 『선사와 고대』 23-23, p.43[15] 이승호. (2015). 新浦市 절골터 金銅板 銘文 검토. 목간과문자, 14, 227-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