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원왕

 


'''고구려 23대 국왕'''
'''安原王 | 안원왕'''
'''시호'''
고려 표기
'''안원왕(安原王)'''
왜가 인용한
백제 표기
'''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1]
'''향강상왕(香岡上王)'''
'''연호'''
연가(延嘉)(?)[2]
'''성씨'''
고(高)
''''''
보연(寶延)
'''왕후'''
정부인(正夫人)[3], 중부인(中夫人)[4], 소부인(小夫人)[5]
'''왕태자'''
고평성(高平成)
'''생몰년도'''
음력
? ~ 545년 3월 / 음력 12월 24일[6]
'''재위 기간'''
음력
531년 5월 ~ 545년 3월 / 12월
(13년 10개월 또는 14년 7개월)
1. 개요
2. 상세
3. 기타
4. 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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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제23대 임금.

2. 상세


문자명왕차남으로 후사가 없던 형 안장왕으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았다.[7]일본서기》에 의하면 형인 안장왕이 시해를 당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를 근거로 고구려 내부의 혼란이 가속되어 폭발한 것으로 보기도 하며 혹자는 안원왕이 안장왕을 시해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기록의 부재로 근거는 빈약하다.[8]
체격이 매우 장대하여 신장이 7척 5촌[9]이나 되었다고 하며 도량도 넓었다고 한다.
본격적인 쇠퇴기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안원왕의 재위 기간에는 큰 사건 없이 조용한 치세가 이어졌다. 오히려 중국에서 북위가 망하고 화북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는데 고구려는 국경을 맞댄 동위와 화친하였다. 한편 535년부터 자연재해가 연달아 일어나는데 535년 5월에 홍수, 10월에 지진, 12월에 우레가 치고 전염병이 돌았다. 536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고 8월에 메뚜기 떼가 농사를 망치며 537년 3월에는 기근까지 이어졌다. 이에 안원왕 본인이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위로하고 수습해 해결되기도 했다.
동위와 외교 관계를 맺는 한편 양나라와도 교류를 유지하며 양면 외교 기조를 유지하기도 했다.
백제와는 투닥거렸는데 540년 백제 성왕이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해서 이를 물리치기도 했다.[10] 여기까지만 보면 기근에 시달렸지만 안장왕이 회복시킨 고구려의 전성기를 어느 정도 유지한 제법 나쁘지 않은 군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선 행적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사실은 광개토대왕부터 시작된 고구려의 전성기가 안원왕의 재위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것.[11] 연달아 박살나며 망신을 제대로 당한 것은 아들 양원왕 때지만 전조는 안원왕 때부터 배경으로 짙게 깔려있었던 것. 무엇보다 후계 계승 문제가 아주 제대로 터지고 말았다.

이 해에 고려(高麗)에 대란(大亂)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살해당하였다.【『백제본기』에는 “12월 갑오(20일)에 고려국의 세군(細群)과 추군(麁群)이 궁문에서 싸웠다. 북을 치면서 전투를 벌였다. 세군이 패하였으나 사흘 동안 군사를 해산하지 않았다. 세군의 자손을 모두 사로잡아 죽였다. 무술(戊戌, 24일)에 코마노쿠니(狛國, 박국)[12]

누타노스오리코케(鵠香岡上王, 곡향상강왕)[13]가 죽었다(薨).”고 한다.】

'''《일본서기》 권38 긴메이 덴노 6년(545년) 고구려에서의 대란(大亂)'''


이 해에 고려(高麗)에 대란이 있었다. 무릇 싸우다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백제본기』에서 “고려에서 정월 병오에 쿠노오리쿠쿠(中夫人, 중부인)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나이가 8살이었다. 코쿠오리코케(狛王, 박왕)에게는 3명의 오리쿠쿠(夫人, 부인)[14]

가 있었다. 마카리오리쿠쿠(正夫人, 정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쿠노오리쿠쿠가 마카리요모(世子, 세자)를 낳았다. 그쪽의 외척이 추군(麁群)이었다. 시소오리쿠쿠(小夫人, 소부인)[15]도 아들을 낳았다. 그쪽의 외척은 세군(細群)이었다. 코쿠오리코케가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세군과 추군이 각각 부인이 낳은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세군 측에서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일본서기》 권41 긴메이 덴노 7년(546년) 고구려에서의 대란(大亂)'''

안원왕의 1번째 왕비아들을 낳지 못했고 결국 두 후비를 들였는데 공교롭게도 두 후비 모두 아들을 1명씩 낳게 되었다. 결국 고구려의 외척추군세군이 자기네 소생의 왕자를 옹립하려 대판 싸움을 벌이기에 이르는데 추군 세력이 승리를 거뒀다. 그 결과 세군 측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족히 2천 명이 넘었다고 전한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 등 한반도 측 사서에는 보이지 않으며 백제본기를 인용한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왕권이 약화되고 국력이 쇠퇴하는 정황과 일치하기 때문에 다수의 국사학자들은 이 내용을 신뢰하고 있다.
더군다나 《삼국사기》 <거칠부전>에 의하면 551년 고구려의 혜량 법사가 고구려를 정탐하러 온 신라거칠부에게 "지금 우리나라는 정사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머지않았으니, 귀국으로 데려가 주기를 바라오(我國政亂 滅亡無日 願致之貴域 於是)." 운운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상기한 정치적 혼란과 관련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3. 기타


“원하옵건대 왕의 영혼이 도솔천(兜率天)으로 올라가 미륵(彌勒)을 뵙고 천손(天孫)이 함께 만나며, 모든 생명이 경사스러움을 입으소서.”

- 절골 유적에서 출토된 명문(銘文·새긴 글씨) 금동판 명문 중에서 출처

1988년 6월 함경남도 신포시 오매리의 이른바 절골 유적에서 출토된 명문(銘文·새긴 글씨) 금동판이 외척 세력 간에 발생한 왕위 계승 분쟁 와중에 승하한 안원왕을 위한 추복(追福) 불탑의 탑지(塔誌)가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이 불탑을 봉헌한 측은 옛 동옥저(東沃沮) 지역의 유력 가문이었으나 왕위 계승 분쟁에서 패배한 세력일 것이라는게 학계의 추론이다.
특히 명문에는 탑을 건조한 내력과 함께 ‘○和三年 歲次 丙寅 二月二十六日’(○화 3년 세차 병인 2월 26일)이라는 작성 일자가 나와 있다. 여기서 ‘○和’라는 연호는 자획이 떨어져 나가 분명치 않으나 북한 측은 이를 ‘태화(太和)’로 판독하고 고구려 양원왕(544년 또는 545년∼559년) 때인 546년 2월 26일에 금동판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명문 가운데 ‘천손’이라는 말은 중국의 천자(天子)나 일본의 천황(天皇)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그 이전까지 발해 문왕(文王)이 사용했던 ‘천손’이라는 단어가 이웃나라를 모방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금동판의 발견으로 발해 ‘천손’의 원류가 고구려임이 확인됐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안원왕 본기'''
一年夏五月 안원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三月 북위가 왕을 책봉하다
二年夏四月 양에 조공하다
二年夏六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年冬十一月 양에 조공하다
三年春一月 왕자 평성이 태자가 되었다
三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四年 동위가 왕을 책봉하다
四年 동위에 조공하다
五年春二月 양에 조공하다
五年夏五月 남쪽에 수해가 발생하다
五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五年冬十二月 큰 전염병이 돌다
六年 큰 가뭄이 들어 백성을 구제하다
六年秋八月 병충해가 발생하다
六年秋八月 동위에 조공하다
七年春三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다
七年冬十二月 동위에 조공하다
九年夏五月 동위에 조공하다
十年秋九月 백제의 침입을 물리치다
十年冬十月 겨울에 날씨가 온난하다
十年冬十二月 동위에 조공하다
十一年春三月 양에 조공하다
十二年春三月 큰 바람이 불다
十二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十二年冬十二月 동위에 조공하다
十三年冬十一月 동위에 조공하다
十四年冬十一月 동위에 조공하다
十五年春三月 안원왕이 죽다

[1] 훈독은 코쿠, 코마(狛) 코쿠(鵠,國) 카(香) 카(岡) 노(の) 쿠스시스, 아스메스(上) 오리코케(王)와 누타(香岡) 스(上) 오리코케(王)가 있다.[2] 539년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삼국 시대 주요 불상인 국보 제119호 연가 7년명 여래입상에서 쓰인 '연가'가 바로 안원왕의 연호로 추정되기도 한다.[3] 후사 없음. 안장왕비 한씨와 동일인일 가능성 있음. 일본서기 기록.[4] 추군 소속, 양원왕 고평성의 친모. 일본서기 기록.[5] 세군 소속. 일본서기 기록.[6] 일본서기 흠명기에 따르면 545년 12월 24일 무술일에 사망했다고 한다.[7] 앞서 전성기를 유지시킨 안장왕이 재위 12년만에 승하했을 당시 앞 대를 이용하여 보령을 계산해보면 꽤 노년의 나이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왠일인지 후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본 측 설화에 복귀군이라고 하는 안장왕의 아들이 등장하기는 한다.[8]삼국사기》에는 형인 안장왕이 안원왕을 아꼈다는 기록이 나온다. 물론 그것이 안원왕이 안장왕을 죽이지 않았다는 근거로 쓰기에는 부족하다.[9] 고구려척은 35.6cm인데 이 경우 거의 2.7m에 육박하는 거인이 된다. 아마 사람의 키를 잴 때는 고구려척이 아닌 한척을 쓰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한척을 쓸 경우 172cm 정도로 현실적인 수치가 나온다. 물론 당시의 평균 신장을 고려하면 172cm도 굉장히 큰 키이다.[10] 양원왕 대의 일이지만 백제 성왕은 한강 유역을 되찾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본격적 공격이 아니라 사전 답사였던 듯하다.[11] 일본서기에 따르면 안장왕이 시해당했다고 한다. 다만 안장왕이 시해당했다는 기록은 일본서기 이외의 당대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고 무엇보다 안원왕 말엽부터 혼란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무조건 시해당했다고 단정짓기도 어려운 실정이다.[12] 일본에서는 고구려를 박(狛), 駒(구)로 표기해놓고 코마(こま)라고 훈독하였다. 이는 백제에서 부르던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고구려가 백제를 백잔이라는 멸칭으로 불렀던 것처럼 삼국은 서로를 오랑캐, 짐승 등 나쁜 의미로 부르곤 했다. 현대 일본에서는 고려(高麗)를 코라이(こうらい)라고 음독하지만, '코마신사(高麗神社)', '코마씨(高麗氏)'의 경우처럼 전통적인 부문에서는 관습적으로 '코마'라고 훈독하기도 한다.[13] 여기서 곡향은 곡림향화(鵠林香火)라는 불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용어라고 한다. 이를 근거로 추군은 국내성에서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던 귀족 불교 세력, 세군은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한 신진 불교 세력이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6세기 이후 국왕 중심적 불교가 세퇴하면서, 추군과 세군으로 나누어진 귀족 불교 세력 사이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한 상황이 닥치게 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14] 백제에서 왕후를 가리키던 말인 어륙(於陸)과 동계통의 단어임이 분명하다.[15] 시무(シム)로 적혀있기도 하다. 여기에 근거해 시소(シソ)를 신(シン)의 오기로 보기도 한다. 시소를 신의 오기로 보는 이유는 일본서기에 간(干)이 칸(カン)이 아닌 카무(カム)로 적혀있는 경우가 있고 세군(細群)의 군(群)이 군(グン)이 아닌 쿠무(クム)로 적혀있는 경우가 있기에 시무(シム)에 대응되는 것은 시소(シソ)가 아니라 신(シン)이 되어야 하기 때문. 이는 일본의 발음(撥音)으로 시무의 원형은 신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