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1. 개요
大衆音樂/POPular music
널리 많은 사람들, 즉 대중이 즐기는 음악을 일컫는다. 장르에 관해선 음악 관련 정보 참고.
2. 상세
대중음악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아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고 계속해서 변해왔으며 시간과 장소, 사람에 따라 그 정의가 다르다.
사전적으로 대중음악은 순수음악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대중에게 중점을 둔 음악을 말한다. 순수음악이 예술성과 심미성에 가치를 두는 데 반하여, 감각적인 대중성과 오락성 그리고 상업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1] 또 순수음악은 더욱 긴 시간의 지속성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하여, 대중음악은 짧은 시간의 유행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중음악은 순수음악의 속성을 계속해서 흡수해오면서 예술성과 심미성을 얻어나갔고 소위 말하는 예술성은 대중음악을 논하는 데에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대중음악을 가리켜 흔히들 팝이라고 부른다. 잘못된 사용법은 아니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 팝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우선 큰 의미의 대중음악이 있고, 작은 의미로는 장르로서의 팝이 있다. 전자는 Popular music 내지 줄여서 그냥 Pop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후자는 보통 Pop이라고 하지 Popular라고 하지는 않는다. 줄임말이 의미가 축소되면서 고유명사화된 것.
대중음악은 2010년대에 들어 인터넷과 유튜브 등의 매체 발달로 인해 세계 최대의 음악 시장인 미국조차도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로 전 세계적인 파급력과 영향력이 이전보다 유례가 없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대중음악은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에게까지 막강한 인기를 얻게 된다. 이로 인해서 문제가 생기는데, 그 첫 문제는 미국의 대중음악으로 인해 많은 나라들의 음악이 자국에서조차 인기가 없을 정도로 자생력이 소멸되고 있다는 점이다. 당장 프랑스와 독일 등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들이 이거에 의해 가장 크게 피해를 본 케이스이다.[2] 유럽 국가들은 중남미에 큰 자국어 시장을 보유한 스페인과 포르투갈[3] 자국 대중음악 가수들의 인기 기반이 탄탄한 러시아, 터키[4] 를 제외하면 앞서 말했듯이 자국어로 부르는 노래가 자국에서조차 영미권 대중음악보다 인기가 없는 게 현실이다. 아예 독일은 힙합/랩이 차트를 쓸어갈 정도니 말을 다했다. 동유럽 같은 경우 러시아, 터키를 제외하곤 대부분이 미국 팝과 K-POP으로 도배되고 있다.
3. 음악구조 용어
4. 역사
(대중음악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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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대중음악의 기원
대중음악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적어도 '''현재 존재하는 장르들의 뿌리는 대부분 미국에서 시작'''되었고, 영국 음악 역시 대중음악의 정의를 내리는데 있어서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초기의 대중음악은 미국 흑인 음악인 블루스나 스윙 재즈, 틴팬앨리(Tin-Pan-Alley) 지역 작곡가들이 상업성을 노리고 유럽 오페레타를 더욱 가볍게 만든 백인 음악인 트레디셔널 팝(Traditional pop)밖에 없었다.
4.2. 초창기, 스윙 재즈와 트레디셔널 팝
대중음악 시대의 실질적인 첫 번째 스타는 빙 크로스비이다. 트레디셔널 팝의 특징으로 꼽히는 크루닝(Crooning) 역시 빙 크로스비가 홀로 개발한 것이다. 동시대에는 재즈 음악 역시 대중음악이었는데, 루이 암스트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조금 더 지나면 이 흑인 음악인 재즈가 백인들의 취향에 맞게 한 번 퇴색된 스윙 재즈가 인기를 끌게 되는데, 현대적인 대중음악의 시작으로도 볼 수가 있다. 글렌 밀러나 토미 도시가 이 스윙 재즈 시대의 대표적인 밴드리더였다. 스윙 재즈는 이 시대 미국 음악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과장이 아니라, 이 시대 미국 하면 스윙 재즈였고, 미국의 대중 음악이라 해도 스윙 재즈가 먼저였다.
이 시대에, 대중음악의 실질적인 시작을 알리는 것이 생기는데 그게 바로 "음악 차트"이다. 빌보드는 1936년 최초의 현대적인 음악 차트를 시작했으며, 1940년에는 현대적인 싱글 차트를 시작하여, 미국 전역에서 인기 있는 곡들의 순위를 매기기 시작했다.
한 세대를 지나면, 트레디셔널 팝이 정형화 되게 되었고, 이 시기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대중음악계 최초의 엔터테이너 프랭크 시나트라'''이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1940년 토미 도시 악단에 들어가 보컬이 되었는데 이때 발표한 "I'll Never Smile Again"이 빌보드 싱글 차트 12주 연속 1위를 하며 돌연 스타덤에 올랐고, 10대 여자들에게 특히 많은 인기를 얻었는데, 이때 얻은 별명이 "Idol of the bobby soxer"였다. Bobby soxer는 그의 소녀 팬층을 일컽는 말이었는데 그 소녀 팬층이 착용하고 있던 특유의 양말에서 기인한 것이다.
동시대에 냇 킹 콜이나 페리 코모 등의 가수도 프랭크 시나트라에 비견할 만한 상업적 성공과 인기를 얻었다. 냇 킹 콜이나 페리 코모는 프랭크 시나트라보다 시대의 아이콘 적인 면은 없지만, 차트 성적이나 히트곡 수로만 보면 프랭크보다 월등했다.
토니 베넷과 코미디언 출신 딘 마틴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남성 4중창단들의 활약도 이 당시 돋보였다.
4.3. 1950년대 중후반, 로큰롤 전성시대
1950년대에 흑인음악인 블루스가 크게 유행하게 되는데 블루스가 스윙재즈를 흡수하면서 리듬감이 중요해지고 리듬 앤 블루스, 줄여서 R&B가 탄생한다.[5] 또 한편으로는 백인음악인 컨트리와도 결합하며 비트가 강한 로큰롤이 탄생한다.[6] 하지만 기성세대들은 여전히 트레디셔널 팝을 즐겼다. 그러나 1950년대 초중반 이후 로큰롤은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떠오른다.[7] 특히 '''엘비스 프레슬리'''가 당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며 '''비주류였던 로큰롤 장르를 음악계 주류로 만든 일등공신''' 역할을 하게 된다. 블루스는 여전히 마이너였기에 '''대중음악은 백인 중심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1958년부터, 미국에서는 "락앤롤의 종말"이라 일컬어지는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1958년 제리 리 루이스의 13세 사촌과의 결혼, 리틀 리처드의 "락앤롤은 사탄의 음악이다!" 발언 이후 가수 생활 은퇴[8] , 척 베리의 체포[9] , 이 사건들로 인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입대[10] , 1959년 버디 홀리를 포함한 락앤롤 가수 3명의 경비행기 추락, 같은 해 락앤롤을 퍼트리는 데 크게 기여한 라디오 디스크 쟈키 앨런 프리드의 페이올라 사건 등으로 인해 미국 내에서 락앤롤 정신은 사장되고야 말았다.
4.4. 1960년대, 록 음악과 소울 음악
이 락앤롤 음악이 사장되어 버리자, 1960년대 초반의 미국 음악계는[11] 크게 세 가지의 음악 장르가 주류가 되었다. 첫 번째는 소울 음악과 리듬 앤 블루스를 필두로 한 미국 흑인 음악이 유례없는 전성기를 맞기 시작했다.[12] 레이 찰스와 모타운의 초기 아티스트들이 대표적이다. 두 번째는, 락앤롤과 기존의 트레디셔널 팝 등을 섞은 팝 음악이 유행하게 되었다. 리키 넬슨이 대표적이다. 세 번째는, 이 락앤롤 음악에서, 락앤롤 정신은 빼버리고 특유의 멜로디만 남은 댄스 음악이 유행하게 되었다. 처비 체커의 The Twist를 시작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현대의 대중음악 기틀이 잡힌 것은 1960년대 이후이다.[13] 1960년대 중반부터 록 음악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곧 로큰롤은 독자적으로 발전하면서 그 뿌리인 블루스와 컨트리로부터 서서히 멀어지게 되고 하나의 형식을 갖춘 장르로써 록 음악이라 불리기 시작한다. 1950년대 말부터 미국에서 시들해진 록의 인기가 바다 건너 영국에서 유행하게 되면서 재즈와 결합하게 되고 자연스레 스키플 밴드들이 생겨난다. 그중 하나였던 '''비틀즈'''가 큰 인기를 끌게 되는데, '''다양한 시도들을 통해 로큰롤에서 록 음악을 정의 내리는데 도움을 주게 되면서 대중음악에서 록의 입지를 다지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블루스가 영국으로 건너가 만들어진 브리티시 블루스 밴드였던 롤링 스톤스와 R&B 밴드에서 시작했던 더 후는 하드 록의 기반을 마련한다. 이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젊은 층의 큰 지지를 받았고 이는 히피 문화로 이어졌다. 그리고 히피 문화의 절정이 이어지던 시기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 비치 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 등이 시작하여 마약을 한 몽환적인 느낌의 록 음악이 유행하는데, 이를 사이키델릭 록이라고 한다. 이 음악 사조를 바탕으로 도어즈,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같은 전설적인 밴드들이 1967년에 나와서 대중음악계를 뒤흔든다. 이 사조는 1970년까지 이어지다가 샤론 테이트 암살사건으로 히피 문화가 몰락하고 사이키델릭 록을 이끌던 3J[14] 가 비슷한 시기에 요절하며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포크에는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이 등장하며 음악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위에서 말했던 모타운과 흑인 음악은,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로도 계속 전성기를 누렸다. 모타운은 슈프림즈, The Temptations, The Four Tops, 스티비 원더, 마빈 게이 등의 아티스트를 기점으로 미국 음악계를 점령했다. 이 중에서도 슈프림즈는 비틀즈에 비견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으로는 흑인 음악인 소울, R&B, 재즈 등이 서로 결합되어 현재의 수많은 흑인 음악의 모태인 펑크(Funk)가 탄생했다. 제임스 브라운은 이 장르의 개발과 대중화를 거의 홀로 이끌었다. 1965년 "Papa's Got a Brand New Bag"으로 대중화의 서막을 알렸고, 이후 60년대 중후반 수많은 Funk 히트곡을 내놓는다. 제임스 브라운이 Funk를 대중화 시키면서, 수많은 Funk 아티스트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과 아이슬리 브라더스가 있다.
일렉트릭 기타의 경우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 중 하나인 지미 헨드릭스가 혜성같이 등장하여 이펙터 등의 사용을 정립하고 좡좡거리는 주법을 퍼뜨려 이후의 록 음악계에서의 기타 연주법에 대한 기틀을 잡았고, 또한 이후에 등장하는 헤비 메탈 장르의 기반이 되었다.
4.5. 1970년대, 흑인 음악과 록 음악
1970년대에는 시각적 충격을 강조한 글램 록과, 개러지 록에 뿌리를 둔 펑크(Punk) 록이 등장했다.
대중적으로는, 하드 락이 큰 인기를 끌었다. "Grand Funk Railroad"는 영국 하드 락 밴드들보다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미국 하드 락 밴드들의 자부심을 "We're an American Band" 한 곡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펑크(Funk)는 당시 발전한 신시사이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대중화된 디스코로 발전해 나갔다. 한편으로 미국의 흑인들 사이에서 힙합이 태동하고 있었는데 펑크(Funk), 레게, 소울, 재즈 등의 영향을 받으며 랩이란 개념이 생겨났다. 1979년 발표된 슈거힐 갱의 Rapper's Delight은 랩 음악의 시초를 알렸다.
4.6. 1980년대, 비디오 시대의 도래
1980년대부터 대중음악은 흑인이 주도해 나간다. 그리고 불가능해 보였던 '''흑인음악의 시대'''를 열어버린 인물이 바로 마이클 잭슨이다. 디스코의 시대가 저물고 하우스 음악으로 발전하면서 댄스 뮤직이 유행하는데 마이클 잭슨은 이를 팝, 록, R&B 등 수많은 장르와 결합시키며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며 팝의 황제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마이클 잭슨'''은 '''음악을 통해 모든 인종을 아우르며 전 세계의 고질적 병폐였던 인종차별 완화시켰고 이것은 대중음악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본격적으로 블록버스터 시장을 개척해 나간다.''' 그리고 힙합 역시 메이저로 급부상하여 어엿한 대중음악의 일부로 자리매김한다.
한편으로 80년대는 메탈의 황금기로 80년대 초 영국에서 도래한 NWOBHM을 시작으로 익스트림 메탈의 기반을 마련한 스래시 메탈과 메탈 역사상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글램 메탈 등의 장르가 등장한다. 또한 마돈나의 등장으로 여성 음악가들에게 새로운 방향성이 제시되었다. 결정적으로 이 시기부터 마이클 잭슨의 등장 이후, 프린스, 휘트니 휴스턴과 같은 흑인 아티스트들이 백인음악으로 인식되던 장르를 끌고 들어와 큰 인기를 얻으며 음악의 흑백장벽이 무너지는 모습이 나타났다.
4.7. 1990년대, R&B와 힙합
무너진 흑백장벽과 다양화 된 장르 속에서 1990년대는 '''대중음악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1990년대의 대표적인 가수로는 머라이어 캐리[15] , 셀린 디옹 등이 있으며 1990년대 초반, 힙합은 완전히 음악계의 중심에 자리 잡고 황금기를 맞게 된다. 또한 컨템퍼러리 R&B 같은 흑인 음악들이 흑인 가수들에 의해 팝이나 힙합과 결합하며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으로 미국에서는 전설적인 밴드 너바나로 시작된 그런지 열풍이 순식간에 메인스트림을 점령하며 한때 록 음악에 혁명을 불러왔다. 영국에서는 그 반향으로 복고적 요소에 국가적 색채가 더해진 브릿팝이 크게 유행한다. 이들을 포함한 여러 장르들은 기존의 록 음악을 대체하려는 성격이 강했는데 이를 얼터너티브 록이라 한다. 또 가수의 한 형태로 아이돌(보이그룹, 걸그룹)이란 개념이 생겨났으며 팝과 댄스에 힘입어 큰 인기를 얻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일렉트로니카가 탄생한 시기이기도 하다. 다양한 장르들이 가장 안정된 균형을 이루고 있었고, 음악에 대한 소비가 늘어 수익이 컸기에 국가를 불문하고 즉, 대중음악의 황금기라고 부른다. 특히 커지고 커지던 음악 시장은 '''1999년'''에 절정을 맞았으며 '''역사상 가장 거대한 앨범 판매량을 기록한 해'''이다.
4.8. 2000년대, 흑인 음악의 최전성기
2000년대에 일렉트로니카는 다양한 장르들과 끝없이 결합하기 시작한다. 특히 비트감이 강한 록, 댄스, 힙합 등과 시너지 효과를 이루며 여러 시도들이 이루어졌고 장르들은 더욱 세분화되었다. 아예 팝에 대해 대체적 성격을 가진 얼터너티브[16] 장르가 본격적으로 대두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대중음악은 상업적으로 점점 하락세에 접어든다. 지속되는 세계적인 경제불황과 리스너들의 소비 경향이 싱글 위주로 바뀌면서 앨범 판매량이 급감한 것이 원인이다.
4.9. 2010년대, 일렉트로팝과 힙합
2010년대에는 힙합과 컨템퍼러리 R&B 등의 흑인음악이 음악적으로 진일보하게 된다. 특히 힙합은 일렉트로니카와 긴밀하게 결합해 유례없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실험성이 강한 얼터너티브 힙합이 대두되었다. R&B 역시 음악적으로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고 기존의 컨템포러리와 구분되는 얼터너티브 R&B가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꾸준히 인기를 받던 라틴 음악이 2016년부턴 대중음악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될 정도로 큰 영향력을 보유하게 됐다. 한편 기존의 앨범 시장(피지컬)은 해가 갈수록 축소되고 있는 반면 스트리밍 시장이 압도적으로 증가했고 앨범을 피지컬로 발매하지 않고 스트리밍으로만 발매하는 사례가 눈에 띄게 많이 늘면서 음악 시장이 새롭게 바뀌고 있다. 특히 대부분의 노래들이 스트리밍 시장을 겨냥하여 2분대 중반~3분대 초반으로 많이 짧아졌다. 2019년의 경우 실험적 음악[17] 이 크게 유행하며 2000년대 이후로 정체했던 대중음악의 방향성이 서서히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4.10. 2020년대, 힙합 vs 팝
2020년대의 경우 2010년대 중반부터 이어진 뉴트로의 흐름이 계속해서 이어졌으며, 영국에서는 그라임과 트랩을 결합한 드릴 랩이 개발되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음악 시장의 경우, 2010년대 후반에 극강세를 보이던 스트리밍 시장이 하락세를 보이고 반대로 라디오 플랫폼이 전성기를 맞았다. 현재 음악 시장의 구도는 라디오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대중적 롱런곡 vs 덤핑 등의 각종 음원 공세를 이용한 1주 반짝 판매량 1위 곡[18] 두 개로 나뉜 상황이다.
5. 국가별 대중음악
5.1. 서구권
- 미국: 팝, 힙합, R&B, 록, 댄스 음악, 컨트리
- 영국: 브릿팝[19] , 록
- 프랑스: 샹송(Chanson)
- 스웨덴: 스웨디시 팝, 블랙 메탈
- 독일: 슐라거(Schlager)
- 러시아: 러시안팝(Russian Pop, Российская поп-музыка), 바르드(Бард, 음유시)
5.2. 동북아시아
5.3. 라틴
5.4. 중동풍
- 터키: 튀르크체 팝(Türkçe Pop) (터키 외 해외 명칭은 터키쉬 팝 (Turkish Pop))
- 인도: 힌디 팝(Hindi Pop) (혹은 I-POP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아랍: 아랍팝 (Arab Pop) (이집트와 레바논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 그리스: 렘베티카(Rembetika)
[1] 이러한 이유때문에 당연하게도 대중성을 갖고있는 대중음악의 존재는 클래식이 발전한 형태인 현대음악을 청중들로부터 하여금 멀어지게 만들었다.[2] 저 나라들은 유튜브 통계만 봐도 인기가수와 인기 영상 20위권까지 자국 출신 가수는 아예 없거나 1, 2명 밖에 없고 나머지 인기가수들은 전부 영미권 가수들일 정도다. 자국어로 부르는 가수들이 영미권 가수들보다 자국 안방에서조차도 인기가 더 없다는 얘기. 이것 때문에 이 지역 가수들은 자국어를 버리고 영어로 음악 활동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스웨덴의 아바, 프랑스의 다프트 펑크가 그러한 케이스. 그래서 독일의 람슈타인은 자신들의 노래 가사에서 '난 자국어로 노래하지 않아'라는 가사를 직접 집어넣어서 저러한 세태를 풍자한 바 있다. 실제로 위에 언급한 유럽 국가들은 자국어가 버젓이 있어도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the voice, 갓 탤런트 등)에서 대부분 참가자들이 영어로 노래를 부르며, 인기 가수로 떠도 영어로만 발매를 하거나 아예 자국을 떠나 미국으로 진출해버린다...그러면서 그 자리를 KPOP이 채우고 있는 실정이다.[3] 포르투갈은 희한한 게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는 참가자들이 영어 노래를 부르며 경쟁하다 이 프로그램에서 우승을 하거나 혹은 우승은 못해도 크게 뜬 가수는 꼭 자국어인 포르투갈어로 음반을 내서 자국은 물론 포르투갈어권(주로 브라질)에서 인기를 얻는다. 대표적인 예가 The voice Portugal 4에서 우승한 Fernando daniel으로 수 많은 영어노래를 부르며 해당 시즌을 우승하였지만 우승 후에는 주로 포르투갈어로 앨범을 발매하고 있으며 그중에서 Espera, Voltas는 포르투갈, 브라질 등 포르투갈어권에서 굉장히 인기도 많고 유튜브 조회 수도 상당하다.[4] 유럽의 방송, 음악 협회들과 단체에 유럽 국가 명의로 가입되어 있고 각종 차트에서도 유럽으로 포함시키기 때문에 음악계에서는 유럽 국가로 분류한다.[5] 당시의 R&B는 로큰롤의 초기 형태와 상당히 유사했다. 현재의 컨템퍼러리 R&B와는 유사성을 찾기가 힘들다.[6] 역시 현재의 록과는 차이가 있다.[7] 주로 Slient Generation 세대였다. 베이비 부머 세대(1946 ~ 1964 출생)는 락앤롤의 전성 시대가 시작될 당시에 애들이었다.[8] 목사 안수를 받았다.[9] 당시 만연했던 인종차별의 영향이 어느 정도 있었다.[10] 기성세대들에게 좋은 인식을 남기고, 오랫동안 가수 커리어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2년 동안 독일에서 운전병 생활을 했다.[11]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전의 미국 음악계를 말한다.[12] 이 시대를 시작으로, 2020년대 현재까지 흑인 음악이 주도를 잡게 된다.[13] 1960년대의 경우 대중음악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전체가 크게 변동이 있었던 시기로 이 시기부터 히피가 유행하며 클래식 시대가 종말을 맞게 된다.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잭 니콜슨 등의 메소드 배우의 등장과 뉴웨이브 시네마의 유행, 헤이즈 오피스의 폐지로 1960년대 이후와 이전으로 영화계의 역사가 크게 나뉘는데, 음악계도 그런 셈.[14]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재니스 조플린. 공교롭게도 모두 27세에 죽었다.[15] 1990년대를 상징하는 가수로 여러 매체와 시상식에서 디케이드 상을 수상하며 1990년대 최고의 가수임을 인정받았다.[16] 타 장르와 완전히 구분 지어 얼터너티브 뮤직이라 부른다.[17] 빌리 아일리시의 어떠한 장르로 특정지을 수 없는 우울한 음악이 유행했고 빌보드 19주 연속 1위로 대기록을 세운 릴 나스 엑스의 Old Town Road의 경우 컨트리 음악과 트랩을 절묘하게 결합시켜 큰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18] 이런 곡 대부분은 리믹스 편법과 페이올라, 그리고 스탠 문화로 인해 1위를 해먹는다.[19] 흔히 '브릿팝'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영국의 대중음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브릿팝은 1990년대 중반을 풍미하던 대중음악의 한 장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