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도쿠라 켄
1. 소개
일본의 전 야구 선수. 대한민국에서는 SK 와이번스, 삼성 라이온즈에서 활약해 잘 알려져 있으며, KBO 리그를 거친 외국인 선수에서 KBO 리그 팀의 지도자가 된 케이스다. 등번호는 25(주니치), 23→17(킨테츠, 2000~02→03), 24(요코하마), 27(요미우리), 54(SK), 16(삼성)번을 거쳤다.
한국프로야구에 외국인 선수 제도가 도입된 이래 5번째 일본인 선수였으며[3] , 성적 및 인품 양면에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인 선수다. 이 때문에 2011 시즌 중 웨이버 공시되어 일본으로 돌아갔을 때 많은 한국 팬들이 안타까워했는데, 그래서인지 삼성 팬들은 카도쿠라의 인스트럭터 취임을 환영했고 오치아이 에이지가 투수코치를 그만둔 점까지 겹쳐 카도쿠라가 제 2의 오치아이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릭 밴덴헐크가 2군으로 내려가 그에게서 사이드 스텝을 보완해 각성했으며, 큰 경기만 가면 멘탈이 무너지던 심창민이 2014년 한국시리즈에서 완벽투를 펼쳤고, 서동환이 집중 조련을 받은 후 시범경기에서 괜찮은 모습을 보여 주면서 점점 평가가 올라가고 있다.
2. 선수 생활
2.1. 일본 시절
중학생 때 이미 190cm를 넘긴 체격 조건으로 인해 주목을 받았으나, 코시엔 출장은 없었다.[4] 대학 시절 모교인 도호쿠 복지대학[5] 을 준우승까지 올리는 데 일조하며 일본프로야구 스카우트들의 눈에 들었고, 그 후 1995년 주니치 드래곤즈에 드래프트 2차로 지명받으며 일본프로야구에 발을 들인다.
데뷔 시즌인 1996년에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상대로 7월 28일에 프로 데뷔 첫 승을 올리며 7승을 거두고, 1997년, 1998년에는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한다. 그 후 2000년에 트레이드를 통해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로 이적, 2001년에는 8승 6패를 거두기는 했지만 평균자책점 6.49를 기록하며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래도 선발과 중간계투를 오가며 긴테쓰의 마지막 리그 우승에 공헌하였다. 하지만 당시 프로 2년차 선수였던 이와쿠마 히사시에게 밀려 일본시리즈에 등판기회를 갖지 못했다.
2003년 오프시즌 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 이적, 2005년에는 시즌 최다 탈삼진인 '''177개'''를 잡아내며 데뷔 후 첫 삼진왕 타이틀을 따냈다. 같은 팀의 미우라 다이스케와 공동으로 따낸 삼진왕 타이틀이며,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는 3위를 거두며 A클래스에 진입한다.
2006년 시즌 후 2년 2억 엔+성과급이라는 조건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보상선수는 구도 기미야스)로 이적했다. 그러나 2년 간 23경기에 등판하여[6] 1승 7패로 부진하였다. 결국 2008 시즌 후 방출되었는데, 여기에 대해서 요미우리 상대로 강한 성적을 거둔 그를 돈지랄로 영입한 뒤 고의로 기용하지 않았다는 음모론적 해석도 있다.
요미우리에서 방출된 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도전, 시카고 컵스와 입단 계약을 맺고 스프링캠프 연습경기에서 6경기 3실점의 호투를 보였지만, 나이 때문인지 갑작스레 마이너리그로 내려갈 것을 통보받는다. 그 전에 김성근 감독이 먼저 SK 와이번스 행을 제의했지만, 이 시기에는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NPB 13년 통산 302출장(190선발) 76승 82패 10세이브 2홀드. 통산 방어율 4.36.
2.2. 한국시절
'''한국프로야구에서 2년 이상 활약한 최초의 일본인 선수'''이자, 팀의 스프링캠프부터 훈련에 참가한 첫 외국인 선수이기도 하다. 팀에 대한 애정과 성실한 인성 등을 겸비한 선수로 팀의 후배들이 외국인임에도 형님이자 선배로 따를 정도라고 하며, 소속 팀이었던 SK나 삼성뿐만 아니라 타 팀 팬들로부터도 사랑받았다.
2.2.1. SK 와이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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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 2009년
마이너리그행을 통보받은 후 여러 구단을 물색하다, 2009년 마이크 존슨과 크리스 니코스키가 연속으로 부도난 SK 와이번스와 시즌 중에 계약을 맺고 입단했다.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5번째이자, 와이번스에서는 2006년 시오타니 가즈히코 이후 2번째로 들어온 일본인 선수.
2009 시즌 성적은 8승 4패, 평균자책점 '''5.00'''로 좋아 보이지는 않았으나, 갑작스런 방출로 인해 강훈련으로 소문난 SK 특유의 스프링캠프에서 몸을 만들지 못한 점, 도중에 중간계투로 보직 변경되었을 때 엄청나게 불을 지른 게 반영된 결과였다. 하지만 시즌 후반과 한국시리즈에서 150km대의 공을 뿌려 호투하면서 부활, 재계약에 성공해 2010 시즌 선발 투수로 활약했다.
2.2.1.2. 2010년
시즌 초에 개막 7연승을 질주하며 20승을 목표로 하겠다고 했는데, 20승에는 실패했지만 30경기에 출장해 14승 7패, '''평균자책점 3.22'''로 매우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2010시즌 전체 투수 중 3위에 올랐다.[7] 그리고 이는 개인 한 시즌 최다 승수다. 일본에서는 두 자리 승수는 4번이나 기록했지만 탈삼진왕 타이틀을 딴 요코하마 시절의 11승이 최다승이었다.
2010년 올스타전 팬 투표 투수 부문에서 1위를 달리다 막판에 조정훈에 밀려 2위를 했다. 하지만 조정훈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상태였기 때문에 출전, 동군 선발로 나왔다가 떡실신당한 김광현에 이어 2이닝을 던지고 내려왔다. 그에게 있어서는 일본 시절을 포함해서 처음 출전하는 올스타전이었고, 한국프로야구 사상 첫 올스타전 출전 일본인 선수란 기록도 남겼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1경기 2이닝 3피안타 4볼넷 1몸에 맞는 공 1탈삼진 1실점 1자책점 평균자책점 4.50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승으로 우승했다.
2010년 11월 5일 대만과의 클럽 챔피언쉽 2차전에서 선발 투수로 등판, 7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는 호투를 펼쳐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6회에서 견제로 2아웃을 잡는 모습이 일품. 게다가 연륜의 힘(?)으로 2사 만루 위기상황에서도 미소를 보이고 결국 이닝을 종료시키는 포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2010년 시즌 후반부터 왼쪽 무릎에 통증을 느꼈으며, 한일 클럽 챔피언십 이후의 검사에서 수술이 불가피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 결과가 나오자 SK 와이번스에서 재계약하지 못하고 나오게 되었다. 일단 수술 없이 재활만 하면 괜찮다는 모양. 삼성 쪽에서도 메디컬 테스트 결과도 마찬가지라고..
2.2.2. 삼성 라이온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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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1. 2011년
결국 2011년 시즌에는 연봉 30만 달러에 삼성 라이온즈와 계약하였다.[8] 순수 일본인 최초의 삼성 용병이 되었다.[9] 2010 시즌 후반엔 구위가 떨어져서 14승도 SK의 팀 전력의 도움이 컸다고 하지만 기록은 기록이다. 14승 투수가 다른 팀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구단 입장에서는 모르겠지만 팬 입장에선 확실히 아쉬운 결과. 앞으로 그의 턱을 보고 싶다면 대구로 가자!
원래라면 SK 구단도 당연히 아쉬워해야 하지만 무릎 통증의 정도에 대해 카도쿠라 본인과 구단과의 입장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구단 입장에선 2010 시즌 14승 투수라는 것을 알면서도 통증이 2011 시즌에 큰 장애가 될것이라 판단했고 본인은 투수라면 누구나 달고 다니는 정도의 문제라는 것.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였다.
삼성의 경우 원래 재일교포 투수인 카네무라 사토루를 데려올 생각이었지만, 카도쿠라가 SK 와이번스에서 풀리자 입단 테스트를 거쳐 바로 계약했다. 대신 삼성에서 방출 조치된 박진만이 SK로 가면서 박진만과 카도쿠라의 암묵적인 트레이드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삼성에 와서는 팀 내 최고령이었지만 나이차 나는 어린 선수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내 인기가 많았다.
2011 시즌 첫 등판인 4월 3일 KIA전에서 2이닝 동안 김상현의 만루 홈런을 포함해 홈런 2개, 총 5개의 안타를 맞으며 '''8실점을 기록'''했다. 이걸 보면 아주 엄청나게 털린 것 같지만... 김상수의 실책과 같은 에러 덕(?)에 자책점이 '''겨우 1점'''. 카도쿠라는 지난 시즌 KIA를 상대로 6경기에 등판해 4승을 챙겼는데, 가코도 부진하고 삼성은 '''또''' 외국인 선수를 잘못 뽑은 걸까? 하는 의문을 남겼다.
4월 15일 삼성 대구 홈경기에서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등판, 저번에 시원하게 털린 것과는 달리 6이닝 4피안타(탈삼진 4개, 사사구 2개) 1실점으로 호투하며 퀄리티 스타트를 끊으며 그날 승리 투수가 되었다. 일단 삼성 팬들로서는 그의 안정적인 투구 내용에 외국인 선수 또 잘못 뽑았나 하는 불안감을 조금 해소할 수 있었다...
4월 22일에는 넥센전에 선발로 등판, 6회까지 1실점으로 잘 막다가 7회가 되자 체력이 다했는지 제구가 마구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주자를 2명 남겨두고 정현욱에게 마운드를 넘겨줬는데, 이 상황에서 김민성이 친 타구를 유혹의 명철신이 잡았는데 '''병살 상황에서 잡은 공을 떨어뜨리고 또 그게 발에 닿아 굴러가는 치명적인 에러가 작렬해서''' 동점을 허용하고, 급기야 강정호가 역전타를 뽑아내면서 '''덕아웃에 앉아서 패전투수가 되고 말았다.''' 하필이면 개인통산 100승 달성이 눈앞이었기에 카도쿠라 입장에서는 너무나 안타까웠을 듯.
4월 29일 한화전에서 다시 한번 통산 100승 달성을 노렸지만, 그가 6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펜진의 퐈이야로 또 다시 승이 날아갔다.''' 지못미.
5월 1일에는 엔트리에서 말소되었다. 부친이 위독하여 일본으로 가야 했기 때문.
5월 7일, LG전에 앞서 귀국. 선발진에 복귀했다. 인터뷰시 불펜 피칭 컨디션이 좋다고 했지만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5월 12일 SK전에 선발 등판했으나, 7이닝 4실점 3자책으로 ND가 되었다. 유독 SK전에 약한 듯 하다. 아무래도 그전에 있던 팀이다 보니 전력분석팀에게 간파가 된 듯.
5월 18일 넥센전에 선발 등판, 5회까지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등 '''9이닝 무실점 호투하며 완봉승'''을 거뒀다. 게다가 이 1승은 한 달 간의 노력 끝에 마침내 이룬 '''한일통산 100승'''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6월 11일 7이닝 5피안타 2볼넷 3탈삼진 3실점(1자책)을 기록하며 5승을 거뒀다. 그리고 이 승리로 김선우를 제치고 KBO 방어율 수위에 오른다. 평균자책점 2.28. 몇년만에 제대로 성공한 삼성 용병 투수라 삼성 팬들은 말 그대로 부왘을 울리는 중. 그런데 6월 17일 경기에서 KIA 상대로 '''2.2이닝 11실점'''(17일 경기 평균자책점 '''37.125''')으로 무너지면서 평균자책점 순위가 1위에서 10위로 급락.
2011 시즌 KIA전 3경기에서 한 번도 3이닝을 넘기지 못하면서 평균자책점 23.82를 기록했다. 상위권 싸움과 포스트 시즌을 대비해야 하는 팀 입장에서 특정 팀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신경쓰이는 부분이었고, '''전반기 마지막 날인 7월 21일''', 구단 측에서 웨이버 공시했다.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었을 때 모두들 잠시 쉬는구나 생각했으니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 부진한 성적과 무릎 통증, 특히 KIA와의 상대 전적이 좋지 않은 것 등의 여러 사정이 겹친 듯. 결국 2011 시즌 5승 6패, 평균자책점 4.07의 성적을 남기고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10]
2.3. 일본 복귀 후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도 야구에 대한 미련은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몸 상태를 회복한 2012년 초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 잇달아 입단 테스트를 신청했을 정도. 하지만 2번의 기회에서 모두 쓴 잔을 마셨다.
이후 홋카이도 소재 한 병원의 소속 사회인야구 팀에 입단했다.[11] 도시 대항전 예선에서 선발로 나와 '''7이닝 퍼펙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2012 아시아 시리즈 결승전에서는 일본 방송에서 해설을 맡기도 했다. 비슷하게 대한민국現(키움 히어로즈, 당시 우리 히어로즈)에서 뛴 적이 있는 다카쓰 신고 또한 몇몇 경기에서 해설을 맡았다.
사회인 야구 팀에 입단한 이후에도 프로 팀 트라이아웃을 계속 시도하였으나 더 이상 그에게 현역 연장의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고, 결국 2012년 말 은퇴를 선언하며 17년 간의 프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2.4. 연도별 성적
3. 지도자 경력
3.1. 2013년
삼성의 투수 인스트럭터로 계약했다. 애초엔 투수코치로 온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코치로서 경력이 없다 보니 인스트럭터로 계약했다 한다.관련 기사 다만 김태한 1군 투수 코치가 미숙 하다는 지적이 있어서 일부 삼성 팬들은 김태한 대신 그가 1군 메인 투수 코치를 맡아 주기를 바랐다. 2013 시즌 초 부진했던 릭 밴덴헐크가 잠시 2군에 있었을 적에 카도쿠라에게 지도를 받아 기량을 키웠다는 게 돋보인 점.
3.2. 2014년
2014년에는 삼성과 정식 2군 투수코치로 계약했다. 삼성 라이온즈가 유망주 육성을 위해 BB 아크를 만들면서 BB 아크의 육성위원도 겸하였다.
2013년에 입증한 투수 조련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2014년 4월 15일 두산전에서 1회 만에 어깨 부상으로 자진 강판하고 2군으로 내려온 헐크의 밸런스를 찾아 주었다. 그리고 헐크가 2014년 5월 8일 SK전에서 최고 156km/h를 찍는 직구를 앞세운 7이닝 무실점 호투를 펼치는 데 조력했으며, 관련기사 2013년 2차 드래프트로 이적해 온 두산 출신의 서동환을 집중적으로 조련하였다.관련기사
3.3. 2015년
2015년 성준 전 SK 와이번스 수석코치가 2군 투수코치 겸 BB아크 지도위원으로 오면서, 1군 불펜 코치로 보직 변경되었다. 2014년 불펜의 기량 저하가 눈에 띄게 늘어난 상황에서 그가 릭 밴덴헐크를 에이스로 지도하였던 경험으로 인해, 삼성 팬들은 망해 가고 있는 삼성 불펜을 카도쿠라가 살릴 수 있는지 기대하는 중이다. 그리고 김태한의 삽질이 갈수록 답이 없어지는 중이라 내친 김에 1군 투수코치를 카도쿠라가 맡기를 기대하는 삼팬도 많다.
그러나 2015 시즌을 마치고 계약이 만료된 후 삼성과 재계약하지 않았다고 하며, 조진호가 1군 불펜코치로 보직 변경되었다. 삼성 팬들은 뒷목을 잡는 중. 그리고 2016년 삼성 투수들은 김태한과 조진호 아래에서 궤멸적인 성적을 보여 주고 있는 중이다.
시즌 후 삼성 라이온즈와 재계약하지 않으며 한국을 떠났다.
4. 근황
요코하마에 있는 리틀야구 팀인 쓰즈키 주오 보이즈의 코치로 일했었고, 한때는 TBS의 해설자로 마이크를 잡았다가, 2019년부터 주니치 드래곤즈의 2군 투수코치로 현장에 복귀했다.
2019년엔 주니치 2군을 맡는 와중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한국야구 경험에 대해 이런저런 술회를 털어놓기도 했다. 꽤 객관적으로 한국 야구 경험자 입장에서 통찰력 있는 코멘트를 남겼다. https://www.youtube.com/watch?v=JmrbEsNgZ0E (3분 50초 가량부터) 한국은 일본에 비해 수준이 낮고 포크볼에 약한 경향이 있다, 한국 선수는 상대의 커리어를 보고 사람을 가려가며 말을 듣는 경향이 있다, 한국인은 성형한 여자가 대부분이다 등 아픈 팩트폭력부터 야구 스타일이 메이저리그 지향적이고 파워가 있다, 옆의 라커를 쓰고 있던 국가대표 포수를 하던 캡틴이 먼저 야구를 가르쳐 달라고 말을 걸어오는 등 일본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 선수가 해외야구를 잘 보지 않는데 한국선수는 NHK 등으로 일본야구를 보며 연구에 열심이다, 국제대회에서 이기고자 하는 선수들의 의욕이 강하다, 인프라의 개선이 빠르다는 등 장점도 칭찬하며, 과거에는 일본야구에서 퇴물이 되어서 한국에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겐 안 되고 즉전력감이 되지 않으면 외국인 선수로서 힘들 것이라며 굉장히 객관적인 시선으로 한국야구를 돌아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담으로 한국에서 술집에 갔던 일화를 털어놓기도 했는데 텐프로였던 듯(...) 물론 본인은 일본으로 치면 고급 클럽 같아 보이는 곳이었다고 잘 모르는 상태에서 설명했는데, 시스템 설명을 하는 것을 보면 정황상 빼박이다(...) 일본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러한 멘트를 우익이니 혐한이니 오해를 하는 경우도 적잖게 있었는데, 정황을 보면 술집 이야기에 이어 응원문화, 치어리더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성형 이야기를 했는데 카도쿠라가 먼저 꺼낸 화제도 아니었을 뿐더러 실제로 모델이나 치어리더 등의 업계는 성형을 많이 하는 것 또한 사실이고 일반인도 성형 일본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이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오히려 카도쿠라는 "그게(성형) 뭐가 나쁘다는거지?" 하는 식으로 성형문화를 중립적으로 보았으며 MC의 한국야구 인프라는 역시 일본보다 좀 뒤쳐져있지 않냐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그렇기에)오히려 인프라 발전이 빠르다는 식으로 한국의 긍정적인 면만을 가능한한 말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즉 한국 생활에는 그럴대로 만족을 했고, 카도쿠라 본인 또한 한국야구를 겪으면서 스스로 굉장히 많은 것을 배웠다고 볼 수 있다.[12]
5. 기타
개인 블로그와 홈페이지를 지극정성으로 꾸미는 것으로 유명한데, 사진과 근황을 수시로 업데이트하며 몇몇 이모티콘은 '''자신이 직접 도트를 찍어서''' 만들기까지 했다. 블로그를 통해 일본 야구 팬들이 한국프로야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어 그를 보기 위해 직접 문학 야구장에 찾아오는 일본인 관광객들도 생겼다. 아예 한국프로야구 관광 패키지 상품이 등장했을 정도. 현재 홈페이지는 해킹당하여 접속이 불가능하다.
매우 크고 아름다운 턱으로 일본에서도 유명했다. 오죽하면 별명이 '모아이', '아고쿠라(턱의 일본어 ''''아고''''+카도'''쿠라''')였을까… 심지어 일본의 한 사이트에서는 히다마리 스케치의 교장이라는 말도 나왔다. '턱형제'로도 유명했는데, '턱형'이 카도쿠라, '턱동생'이 우치카와 세이이치[13] ...'''과연'''. 버라이어티에 출연하여 안토니오 이노키 흉내를 내기도 했다고.
대한민국에 와서도 별명이 카'''턱'''이다.(…) 참고로 가도쿠라의 블로그 닉네임은 JAW N KEN...그러니까 '''턱&겐'''...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는 듯. 게다가 블로그 사진에선 턱을 만지고 있다! 그렇지만 스스로 만진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방문한 일본인 팬이 턱을 만지고 있는 사진이 잘린 것이다. 참조 같은 크고 아름다운 턱을 가진 홍성흔, 조성환과 함께 턱 삼형제로 대동단결했다.
그리고 셋이 같이 찍은 사진을 블로그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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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민의 턱 형제를 향한 잇단 빈볼 사건으로 마지막 타겟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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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이종범 등과는 주니치 시절 동료였다. 광주 원정 때 이종범의 집을 방문한 뒤, 방문기를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다. 여담으로 부인 타마에 씨는 재일교포다. 또한 이종범이 2020년에 주니치에 연수코치로 가면서 다시 한솥밥을 먹게되는 등 끈끈한 인연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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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한일 프로통산 100승 한 이후 장미 100송이를 받았고, 이를 블로그에 게재했다. 옆에서 증정하는 사람은 박석민.
대한민국의 외래어표기법을 따르자면 '''가도쿠라 겐'''이라 KBO에서 이름 순으로 배열할 때 가득염보다 더 앞에 있어야겠지만, KBO에는 '''카도쿠라'''로 등록이 되어 있다.
자녀로는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있다. 장남인 유키도 야구선수다. 그리고 딸 리오 양도 여러 번 방한(?)을 해 잘 알려져 있다. 2010년 8월 11일 시구도 했고, 2011년 5월 27일에도 시구를 했다. 여담이지만 중국의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장예모와 닮았다.
다만 못 할 때는 톰 션의 이름을 따서 턱션 등으로 까였다.
2017년 10월 7일 오릭스 버팔로즈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전에서 시구를 했다.
2017년 10월 24일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가 19년만에 일본 시리즈 진출에 성공한 뒤에 열린 승리 축하회에서 인터뷰를 맡았다.
6. 관련 문서
[1] 만화 크게 휘두르며의 등장학교인 토세이 고교의 모델. 또한 만화 야마노스스메의 애니메이션판의 주요무대가 되는 학교의 모델이기도 하다.[2] 시즌 시작은 2군 투코로 했지만, 시즌 중 BB Ark가 개막하자 투수파트 육성위원을 겸하게 되었다.[3] 카도쿠라 이전에는 모리 가즈마(롯데, 2003년), 이리키 사토시(두산, 2003년), 시오타니 가즈히코(SK, 2006년), 타카츠 신고(히어로즈, 2008년)가 있었다. 여담이지만 롯데의 모리는 시즌 전 퇴출. 대부분이 투수다.[4] 참고로 그의 모교인 세이보학원 고등부 야구부는 1999년에 처음으로 코시엔 본선에 진출했다. 카도쿠라가 졸업하고 약 7~8년 뒤의 이야기.[5] 이 학교 출신 OB로 사사키 가즈히로, 카네모토 토모아키 등이 있다.[6] 심지어 선발 투수로 주로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요미우리에서는 5경기밖에 선발로 나오지 못했다.[7] 1위는 류현진, 2위는 김광현.[8] 묘하게도 삼성은 다음 해인 2012년에도 SK와 재계약이 결렬된 투수 브라이언 고든과 계약을 맺었다.[9] 이전에 삼성에서 뛰었던 김일융과 송일수도 일본 국적이었지만 재일동포였다.[10] 여담으로 카도쿠라의 방출 후 몇 년 뒤에 팀당 외국인 보유 한도가 늘어났어도 일본인 용병 선수는 KBO에 나타나지 않는 상황이다. 이 점은 아시아 쿼터제가 KBO 리그에도 도입되어야 해결될 듯. 다만 아시아 쿼터제가 도입되어도 일본인 용병 영입은 이미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과 일본프로야구라는 상위 리그의 존재로 첩첩산중인데, 인성 문제 등으로 일본 리그에서 금지어 수준으로 찍히거나 일본 내 인지도가 없다시피 하거나 주전 경쟁에서 밀리는 위치의 선수어야 KBO 리그의 문을 두드릴 가능성이 있다.[11] 일반적인 일본의 사회인 야구단은 오전에는 소속회사 등의 업무를 보고, 오후에 야구 활동을 진행하는데, 카도쿠라 켄의 경우는 특이하게도 순수하게 선수로만 영입되었다고 한다.[12] 엄밀히 말하면 그가 겪었던 SK 와이번스는 당시에도 구장 인프라 개선을 가장 열심히 시도했던 구단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인프라 발전이 빠르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인천SK행복드림구장에 그린존이 처음으로 개설된 해가 바로 그가 한국시리즈 우승반지를 획득한 2010 시즌이였다는 것이 그 증거. 물론 선수 말년과 코치로 그 말많았던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을 겪기도 했지만...[13]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같이 뛰던 시기도 있어서 더욱 부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