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인물/1950년대
1. 1950년
선정 당시 '미국의 전사'(The American Fighting Man)로 표현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싸우는 미군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1950년의 인물은 정치인들도, 공산주의를 막지 못한 딘 애치슨 같은 외교관들도 아니다. 또 맥아더 같은 장군들도 아니다. 올해의 인물은 전사(戰士)라는 환영받지 못하는 역할을 맡은 미국인이다. 미국의 전사는 문명의 십자군이 아니라 운명의 징집병이다 - 타임지
올해의 인물 최초로 불특정 다수 집단을 선정한 사례다. 이 때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1]
2. 1951년
이란에 서구 기업들이 가지고 있던 석유산업을 모조리 국유화 하는 조치를 단행, 이 덕에 자원 민족주의가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세계 경제에 결정적인 정책을 시도한 덕에 올해의 인물로 수상. 참고로 이 양반은 이 조치후 2년뒤에 군사 쿠데타[2] 로 물러나게 된다.
3. 1952년
조지 6세의 사망후 왕위를 이어받은 엘리자베스 2세가 올해의 인물로 선정. 빅토리아 여왕이후 50여년만에 여왕의 등극이라 세계의 관심이 높기도 했다.
4. 1953년
독일의 부흥을 이끌었고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출범을 지지하면서 공산주의 세력확대 경계를 주장했다. 거기다 매카시즘으로 반공주의가 확산되던 미국에서 바라보기엔 더없는 우호적인 인물이었기에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5. 1954년
1954년 트리에스테 협정 체결과 더불어 소련이 미국에 대해 도발 혹은 군사적 충돌을 야기할때 그 이상으로 소련에게 타격을 줄 만큼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미국이 타격 받은 이상으로 소련에 보복해야 된다는 뉴룩(New look)정책을 주장, 역시 매카시즘이 불어닥친 미국에서 높은 지지를 받으며 올해의 인물로 선정.
6. 1955년
GM의 경영인. 당시 GM은 가파른 성장세로 단일기업으로 최초로 정부에 낸 세금이 10억달러를 돌파했고 그만큼 미국 경제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큰 기업이었다. 그 때문에 1952년부터 CEO를 맡고 있던 커티스가 올해의 인물에 선정.
7. 1956년
1956년 부다페스트 시민들이 소련의 통제와 사회주의 통치 전반에 반항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이에 소련은 무력 진압을 했다.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이들의 행동을 높이 평가해 올해의 인물로 선정. 1950년 미군에 이어 두번째로 불특정 다수에 대한 선정이었다.
사실, 이때 민주주의 진영에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개입은 소련과의 전면전, 혹은 세계 3차대전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했고 헝가리 인들에 대해 상징적인 격려를 보내준 것이 올해의 인물 수상이다.
8. 1957년
1957년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 이건 세계를 뒤흔든 일이었고 미국의 입장에선 언제든지 자기들 머리위로 핵폭탄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올해의 인물로 선정.
표지를 보면 쉽게 알수 있는데 흐루쇼프 손에 있는게 스푸크니트 1호고 머리위의 왕관은 반흐루쇼프와의 정치적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 국가원수에 앉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9. 1958년
헌법을 뜯어 고쳐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한을 주는 제5공화국 헌법을 제정하며 막강한 대통령이 된 골이 올해의 인물로 선정.[3]
10. 1959년
인기가 높았던 대통령인 데다 무난히 잘 나라를 이끌어서 종합평가제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올해의 인물로 선정.
[1] 타임지의 특성상 하일레 셀라시에처럼 침략당한 쪽의 지도자를 띄워주는 경향이 있다.[2] 미국과 영국의 지원이 있었다.[3]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는게 프랑스 제4공화국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때 내각이 13년 동안 23번이나 바뀌었다''' 한마디로 개판 5분전이었기에 좀 지나칠 정도로 대통령에게 권한을 매우 강하게 집중시켰다 물론 그때도 논란이 많은 편이었으나 드골이 아닌 사람도 집권하고,드골주의자가 아닌 사람도 집권하고 심지어 드골과 대척점에 서 있던 사람도 집권이 가능하자 임기를 5년으로 단축시킨거 빼곤(본래는 7년으로 중임가능) 현재까지 계속 유지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