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키 노리치카
1. 개요
일본의 프로야구 선수로, 2000년대 이래 NPB를 대표하는 교타자. 소속팀인 야쿠르트에서는 대선배인 와카마츠 츠토무, 후루타 아츠야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프랜차이즈 스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 뒤에는 6년 동안 저니맨으로서 여러 팀에서 활동했다. 2006, 2009, 2017 WBC 등 국제대회에도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 여러 차레 선발되었고, 2009년 대회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상당히 많은 안타를 만들어 내는 등의 활약으로 한국 야구팬들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다.
2. 경력
2.1. 프로 입문 전
중학교 시절까진 상당히 자존심이 강한 스타일로 알려졌으며, 이러한 까닭에 고교시절까지 투수로 뛰었으나 와세다대에 입학하게 되면서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하게 된다.[12] 아오키를 받아들인 와세다대학은 대단한 황금기를 맞게 되는데, 도쿄 6대학 야구 연맹[13][14] 에서 와세다는 4년 연속으로 도쿄 6대학 리그의 패권을 차지했는데, 이 때 타선에서 1번부터 6번까지가 모두 프로 지명이라는 기염을 토한 00학번 세대가 주력을 이뤘다. 이 아오키의 동기들 이외에도 1년 선배로 와다 츠요시, 1년 후배로 다나카 히로야스[15] 등의 좋은 선수들이 많았던 시기였는데, 아오키는 주로 2번 타순에 배치되면서 높은 타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동기 유격수 토리타니 다카시(현 한신 타이거스)가 대학리그 3관왕에 오르는 등 타격 관련 타이틀을 싹쓸이해가는 바람에 2인자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결국 실적에 비해서는 다소 저평가되어 2003년 드래프트에서 4순위로 야쿠르트에 입단하게 된다.[16]
2.2.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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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해인 2004년에는 1군 출장은 적었으나 2군에서 빠른 발 외에도 원래 가지고 있던 타격 재능을 발휘해 2군 타율 .372라는 대단한 실적과 2군 올스타게임 MVP 수상 등 뛰어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2005년에 팀 주력 외야수였던 이나바 아츠노리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로 FA 이적하면서 빈 외야 자리를 차지했다. 처음에는 대학 시절과 마찬가지로 2번 타순에 배치되었으나 신통치 않았는데 1번 타자로 타순을 조정하며 대성공, '''풀타임 첫해에 시즌 202안타를 기록하며''' 1999년 로버트 로즈의 192안타를 넘어 센트럴리그 단일시즌 최다안타 신기록을 세우고 신인왕을 수상하였다.[17] 이후 2010년에 개인통산 두번째 200안타를 달성하면서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200안타 시즌을 2번 가진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214안타를 치며 본인의 기록을 경신한 맷 머튼 덕분에 2005년처럼 수위타자 - 최다안타 타이틀을 동시에 석권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2011년엔 .292/.358/.360, 4홈런 8도루에 그쳤지만 워낙 투고타저였던 2011년인지라 컨택 능력엔 크게 의문을 갖진 않는 듯. 다만 팀의 3번을 쳤다 하더라도 도루가 8개에 그쳤다는 점에서 주루 능력이 감소한 게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었다. 다만 이 해는 아오키뿐만 아니라 센트럴리그 타자들의 도루 개수가 전체적으로 줄어든 시즌이긴 했다.[18]
2.3.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
2.3.1. 밀워키 브루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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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시즌 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을 시도했고 2012년 1월 17일, 포스팅 시스템에서 250만 달러의 이적료를 써낸 밀워키 브루어스와 2+1년 계약에 합의하였다.
사실 아오키가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했을 때 처음에는 메이저리그에 정착하기 쉽지 않을 거란 의견이 우세했는데, 2011 시즌에 미네소타 트윈스로 이적한 니시오카 츠요시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일본 출신 타자에 대한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의 평가가 급격하게 나빠진게 그 이유다.[19] 250만 달러라는 비교적 박한 금액이 나온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처음 입단했을 당시 밀워키 내에서의 아오키의 위치는 백업 외야수였다. 그나마 라이언 브론이 약물 스캔들로 인해 50경기 출장정지를 당하면서 어느 정도 출장 기회는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였으나, 그마저도 브론이 항소에서 이기면서 없던 일이 되자 순식간에 낙동강 오리알이 될 뻔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하나 운이 따르는데 기존 주전 우익수 코리 하트가 무릎부상을 당하게 되어 외야수비가 힘들어졌고,(이후 하트는 1루수로 전향한다) 그를 대신하여 아오키가 브루어스의 주전 우익수가 된다.
아오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테이블 세터로 꾸준히 출장하여 밥상을 차리게 된다. 그리고 2012년 4월 21일에 역대 아시아 선수중 두번째로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쳤으며[20] 6월 7일에는 시카고 컵스와의 경기에서 선제 솔로홈런을 날리고 3대3 상황인 연장 10회말에는 MLB 데뷔 첫 끝내기 솔로 홈런을 날려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시즌 막판 밀워키가 비스트모드를 보이며 와일드카드 경쟁을 할때 큰 활약을 했다. 한 때 타율이 3할 가까이 올라가기도 했을 정도였으나 막판 두경기에서 대차게 말아먹는 바람에 3할타율은 성공하지 못하였고 팀도 와일드카드 경쟁에서 미끄러져 나갔다.
2012시즌 최종성적은 타율 .288 150안타 10홈런 50타점 30도루. 첫 MLB 풀타임 시즌을 성공적으로 보냈다. 아시아 출신 메이저리거 타자 중에서는 성공사례로 꼽아도 손색없을 정도.
2013 홈 개막전에서 3회말 콜로라도의 투수 챠신으로 부터 솔로홈런을 터트리며 첫 번째 팀홈런의 주인공이 되었다. 2013년에는 스타트는 좋았으나 작년보다는 떨어진 활약을 보였다. 시즌 최종 성적은 155경기 .286 .356 .370 171안타 8홈런 37타점 20도루. 테이블 세터로서 그럭저럭 준수한 성적이었지만 장타율이 작년에 비해 6푼 가량 떨어졌고, 도루자도 12개나 당한 것이 흠.
그리고 브루어스의 좌익수 자리에 크리스 데이비스(2번 항목)가 새롭게 떠오르고 라이언 브론도 징계에서 복귀함에 따라 외야에 자리가 없어졌기 때문에 아오키가 트레이드 될 것이라는 전망이 시즌 종료 전부터 돌기 시작했고, 결국 시즌 이후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좌완 윌 스미스와 트레이드 되어 캔자스시티 로열스로 이적하였다.
2.3.2. 캔자스시티 로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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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측에선 알렉스 고든대신 1번 타순에 아오키를 배치를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리드오프 자리에 아오키가 더 적임자라고 본듯. 최초 기대와는 달리 시즌 초중반엔 수비, 타격 모든 부분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여줬으나 팀의 상승세와 같이 올라가더니 9월 15일부터 벌어진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3연전에서 무려 12타수 11안타를 기록하면서 팀 역사상 3연전에서 가장 많은 안타를 친 선수로 기록되는 등 9월 22일까지 7경기 타율 0.636을 기록할 정도로 타격에 물이 올라 시즌 막판 타격을 이끌면서 팀을 29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올리는데 기여했다. 최종성적은 .285 /.349 /.360 140안타 1홈런 40타점 17도루.
포스트시즌에도 거의 매경기 3타수1안타1득점 정도를 해주며 팀이 와일드카드,디비전,챔피언쉽 시리즈를 통과하는데 크게 기여하지만 월드시리즈에서는 타격에서 맛간 모습을 종종 보여주며 결국 경기 후반에 제로드 다이슨과 교체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2.3.3.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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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17일 (한국시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1+1년 400만 달러의 FA 계약을 맺었다. 성적에 따라 70만 달러의 바이아웃이 붙어있는 계약. 마이애미 말린스로 이적한 마이클 모스의 공백과 후안 페레즈 외에 풀타임으로 쓸 법한 좌익수가 없는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21] 저지 넘버는 캔자스시티에서 달던 23번을 그대로 달고 출전한다.
시즌 초부터 1번 타자로 나섰고, 3할대 타율을 유지하며 조 패닉과 함께 테이블 세터로 활약했지만, 6월 21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전에서 다저스 선발 카를로스 프리아스의 공에 다리를 맞고 교체되었고, 결국 6월 24일자로 부상자명단에 올랐다.2주 정도 결장할 거라고. 거의 한 달이 넘어서 복귀했지만, 복귀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제이크 아리에타의 공에 머리를 맞으면서 타격감이 죽어버렸고, 이후 뇌진탕 증세까지 보이며 9월 3일 경기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시즌 아웃되었다. 이래저래 불운했던 한 해였는데, 결과적으로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처음으로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한 시즌이 되었다. 최종 성적은 93경기 0.287 102안타 5홈런 26타점 14도루.
시즌 후에 옵션 사용이 거부되면서 FA로 풀리게 되었다.
2.3.4. 시애틀 매리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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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매리너스와 1+1년 계약을 맺었다. 2016년도 연봉은 550만달러이고 매년 최대 150만달러까지 추가로 받을 수 있는 인센티브도 계약 내용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반기에는 타율이 2할 5푼을 채 넘지 못하는 부진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동안 약점을 보이지 않았던 좌완 투수에게 갑자기 약해져버린것도 투수구장인 세이프코 필드의 영향을 받은 것이 컷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시즌 중반에는 부진한 성적과 더불어 팀 내 불펜투수 보강 때문에 마이너리그로 강등되는 굴욕까지 겪어야 했다. 하지만 마이너리그에 다녀온 이후에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였는데, 본인 말로는 기술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헬멧과 배트까지 바꾸는 등 절치부심했다고 한다. 그렇게 올스타브레이크 이후 0.339의 타율을 기록하며 부활, 0.283 118안타 4홈런 28타점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다만 계약 자동 갱신 옵션인 480타석에는 도달하지 못했기에(467타석) 시즌 후 FA로 풀리게 되었는데, 일단 시애틀 측에서는 후반기 활약을 높게 봤는지 옵션과는 별개로 재계약 가능성도 열어둔 상태라고 한다.
시즌 종료 후 웨이버 클레임으로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가게 되었다. 연봉은 지난 시즌과 같은 550만달러.
2.3.5. 휴스턴 애스트로스
2017년 3월에 열린 WBC에 일본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이번 대회 일본팀의 유일한 메이저리거이자 2009 WBC 이후 무려 8년만에 일본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메이저리거가 되었다. 그는 대회내내 팀의 주전 외야수로 활약하며 팀의 4강 진출에 기여했다.
6월 12일(현지시간은 6월 11일) 미일통산 2천안타를 치며 명구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7월 1일 팀이 크게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투수로 등판, 1이닝 3실점을 기록했다. 현재 타율 0.272로 나쁘진 않으나 출장빈도가 줄고있다.
7월 31일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트레이드 상대는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작년까지 뛰다 토론토로 트레이드 됐었던 프란치스코 리리아노로, 테오스카 에르난데스와 같이 토론토로 건너가게 되었다.
다만 2017년 월드시리즈에서 휴스턴이 우승함에따라 2017 정규시즌을 휴스턴에서 뛰었던 아오키도 운좋게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를 받게 됐다.#
2.3.6. 토론토 블루제이스
현지 시간 8월 6일, 친정팀인 휴스턴과의 원정 경기에서 홈런을 쳤지만 팀 패배에 빛이 바랬다. 이후 제한된 출장기회 속에서도 홈런 3개를 때리는 등 타격 성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입지를 다지는데는 실패해 8월 28일에 지명할당 조치되었고 곧바로 다음날인 29일에 완전 방출되었다.
2.3.7. 뉴욕 메츠
현지 시간 9월 2일, 마이클 콘포토, 요에니스 세스페데스의 부상으로 외야진이 초토화된 뉴욕 메츠와 계약을 맺었다. 이로써 2017년 한 시즌동안 세 팀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남은 시즌동안 주전 우익수 겸 테이블 세터로 나서며 나름대로 꾸준한 모습을 보였으나 시즌 종료 후 방출됐다. 올해가 연봉조정 자격 마지막 해라 메츠 측에서 금액에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2.4.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2기
시즌 후 다시 FA가 되었는데, 본인은 메이저리그에서 더 뛰고 싶다는 의욕을 보이며 팀을 계속 물색했으나 스프링캠프 시기가 코앞으로 다가온 1월 말까지 메이저리그 팀과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자 결국 1월 30일, 3년 10억엔의 규모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계약을 맺으면서 7년만에 친정팀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유니폼 번호는 이전에 쓰던 23번을 그대로 사용한다고 한다.
2018년 5월 2일 경기에서 NPB 통산 4천타수를 채우면서 롯데 오리온즈에서 뛰었던 레론 리의 통산 타율 3할2푼의 기록을 뛰어넘어 통산 타율 3할2푼7리로 '''NPB 통산타율 랭킹 1위'''에 오르게 되었다. 물론 아직 현역이기 때문에 향후 퍼포먼스 여하에 따라서 다시 레론 리에게 1위자리를 내줄 수 있지만 레론 리가 통산타율 랭킹 1위에 오른 1993년 이후[22] 무려 25년간 통산 타율 랭킹 1위의 자리를 외국인 타자에게 내줬던 NPB로서는 일종의 자존심 회복에 성공한 셈. 참고로 아오키가 NPB 통산타율 랭킹 1위로 올라서기 이전의 현역타자 통산 최고 타율은 우치카와 세이이치의 3할8리였다.
6월 14일 세이부와의 교류전 경기에서는 인사이드 파크 홈런을 쳤다. 평범한 중플타구였으나 중견수 아키야마 쇼고가 달려가다 자빠지며(...) 홈까지 들어왔다. 실책으로 기록되지 않아 인사이드 파크 홈런으로 인정.
시즌초는 전반적으로 미국 시절 하향세가 그대로 이어지는 모습이다. 보통 리그수준을 낮추면 리바운딩을 하기 마련인데 리바운딩하지 못하고 미국 마지막 해보다 좀 낮은 성적을 기록하며 크게 생산성있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중이었다가...6월 26일 현재 .287을 기록하고 있고 점점 상승곡선에 있다. 4월에 .250, 5월에 .280, 6월 현재 .340의 월별 타율이다. 날이 더워질수록 잘하고 있다. 말그대로 슬로스타트라고 봐도 될듯하다.
9월 현재는 타율 .328 8홈런 58타점 출루율 .416 장타율 .475 OPS .892로 한창 일본에서 활약하던 시절의 비율스탯까지 올라왔다. 타율은 센트럴리그 5위, 출루율은 리그 8위에 해당하는 기록. 홈런은 8개를 기록하고 있지만 리그 최다인 33개의 2루타를 때려내고 있어 갭파워는 아직 남아있다. 다만 도루시도는 크게 줄였기에 현재까지 2개의 도루만을 기록하고 있다. 주로 2번 타순에서 활약하면서 야마다와 발렌틴 등 중심타선의 타점 기회를 최대한 제공하고 있다. 지난해 최악의 시즌을 보냈던 소속팀도 2위로 반등했고 아오키 본인도 복귀 첫 시즌 녹슬지 않은 기량을 보여주었기에 일본에서의 첫 시즌은 성공적이라 볼 수 있을 듯 하다. '2번타자=희생번트 전담 요원'이라는 통념이 여전한 일본에서 강한 2번타자의 역할을 잘 보여주는 중.
10월까지 타율 .327(리그 4위) 162안타(리그 5위) 10홈런 67타점 출루율 .409(리그 7위) 장타율 .475 OPS .884를 기록했으나, 10월 2일 베이스타즈와의 경기에서 8회 무사에 기습번트로 1루에 출루하는 중에 발목에 부상을 당했다. 다음날 1군 로스터에서 말소되었다. CS를 준비해야하는 야쿠르트로서는 리그 최고의 테이블세터 역할을 해주던 아오키의 부재라는 뜻밖의 악재를 만난 셈. 결국 CS 1차전 전날 극적으로 1군에 다시 등록되었지만 아오키는 CS 내내 한 타석도 출장하지 못했고, 팀은 아오키의 부재로 인해 CS 사상 최초의 노히트노런을 당하는 등 식물타선이 되어 광탈했다.
2019년도 야쿠르트의 테이블세터로 활약했다. 타출장 .297/.385/.442에 OPS 0.826. 16홈런 58타점 1도루. 작년보다 OPS는 좀 떨어졌지만 홈런을 16개나 쳤다. 이젠 도루는 아예 시도도 3개밖에 안했고 타율 또한 하락했으며, 대신 삼진과 홈런수가 대폭 늘어났는데, 스탯을 보면 알겠지만 82년생 나이 37살에 장타 위주의 타격으로 전환하려 시도한 것. 주력이 떨어질 나이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선택이지만 나이 37살에 플레이스타일을 바꾸기도 쉽지 않은데, 어쨌든 어느 정도 성공해서 주력의 노쇠화에 따른 생산성 하락을 어느정도 방어할 수 있었다. 한 해 한 해가 다른 나이인 만큼 다음 시즌에도 유의미한 결과를 거둘지는 또 내년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38세 시즌인 2020년에는 좌익수로 전향하였다. 본래 송구가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팀에 리그에서 제일 수비못하는 발렌틴이 있어서 둘을 같이 쓰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오키가 우익을 볼 수밖에 없었는데, 발렌틴이 FA로 나가며 좌익수 자리가 비게 되어 아오키가 맡게 되었다. 전향은 대성공으로 수비는 발렌틴보다 훨씬 안정감이 있는 데다가 수비부담이 줄어들어서인지 나이 38살에 장타력도 만개했다. 시즌 1개월 반 지난 7월말 시점에서 타출장 3/4/6(!)에 6홈런, OPS 1을 넘기며 세리그 최고 타자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와중에 도루는 0개로 완전히 장타 위주의 타격으로 갈아탔다. 나이 38살에 이러는 걸 보면 역시 야구는 원래 잘하는 놈이 잘한다. 10월 19일 시점에서도 타출장 .313(리그 공동 5위)/.413(리그 2위)/.567(리그 4위)에 OPS 0.980('''리그 2위''') 18홈런(리그 10위)를 기록하며 무라카미 무네타카와 둘이서 야쿠르트 타선을 이끌고 있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시즌 후 3년 10억엔 잔류계약을 따냈다.
3. 경기 스타일
기본적으로 중장거리형 타자로서 여기에 적절한 일발장타력과 스피드도 갖춘, 여러 면에서 스즈키 이치로의 보급형이라고 보면 적합하다.
홈런을 노리기보다는 뛰어난 동체시력과 넓은 컨택트를 바탕으로 안타를 주로 노리는 스타일이지만, NPB 시절에는 최대 20홈런까지 쳐 본 적이 있을 정도로 장타력이 있는 중장거리 히터였다. 일본 시절에는 그의 상위호환이라고 평가되는 이치로가 일본시절에 그랬듯이 타출장 345의 강타자에 수위타자, 200안타까지 먹어본 적 있고 도루왕까지 해본 적 있는 준족에 외야 수비도 뛰어난 완성형 5툴 플레이어였다.[23]
메이저리그에 온 뒤에는 두 자릿수 홈런(10개)을 때려낸 데뷔시즌을 제외하면 한번도 장타율 4할을 넘기지 못하는 전형적인 단타자가 되었으나, 그래도 잊어버릴 만 하면 한번쯤 홈런을 쳐줄 만한 정도의 일발장타력도 보유하고 있다. 이는 주로 하위타선~테이블세터 정도를 오가는 타순상 조금 아쉬울 순 있어도 큰 문제는 되지 않으며, MLB 기준으로 3할은 못쳐도 2할 8푼 에버리지는 꾸준히 기록해주는 평균 이상의 교타자로 자리잡았다. 주전으로의 첫 시즌에는 100개가 넘는 삼진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타격 스타일을 완전히 정립한 이후에는 거의 극단적으로 삼진을 당하지 않는 타자가 되었다. 메이저리그 시절에도 6년동안 삼진률이 10% 밖으로 벗어난 시즌이 단 한 시즌에 불과했을 정도. 참고로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타격폼을 상당히 자주 바꾸는 스타일인데, 타격폼을 나눠서 사용하며 슬럼프에 빠질 때마다 변경한다고 한다.
발도 빠르다보니 수비범위도 넓은 편이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느려짐에 따라 많이 줄어든 편. 도루 또한 밀워키 첫 해가 30도루로 절정이었고 이후 점점 갯수가 줄어들고 있다. 덤으로 홈플레이트에 바짝 달라붙어 타격하는 자세 때문에 몸에 맞는 공이 많은 편이다. 일본에서의 10년간 101개, 미국에서 6년간 48개의 몸의 맞는 공으로 커리어 1군 통산 159개의 몸에 맞는 공을 기록중인데, 이는 아오키보다 12시즌을 더 뛴 이치로(114개: 일본 59, 미국 55)보다도 45개가 많은 것이다. 이대로 5년 정도 커리어를 계속한다면 키요하라 카즈히로의 일본 기록(196개)을 넘어설 가능성도 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단기계약으로 팀을 옮겨다녔는데, 마지막 시즌을 제외하면 거의 매년 주전급 외야수로 활약했다. 기본적으로 지금 당장 구멍을 메꾸기엔 괜찮지만 장기계약으로 묶을 정도의 타자는 아니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에버리지나 출루율만 놓고 보면 평균~평균 이상은 되지만 코너 외야수임에도 장타력이 아쉬웠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주력과 수비력이 조금씩 하락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 6년 통산 9정도의 fWAR을 기록했고 딱 매년 1~2점대의 fWAR을 기록했기 때문에,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도 칼럼 등에서 메이저리거로서 풀타임 출장을 보장할 수 있는 마지노선급 선수의 대표적인 예시로 종종 언급된다.
그래도 메이저리그 6년을 되돌아보면 점점 성적은 하락하였으나 결과적으로 그때그때 팀이 그에게 바란 기대치만큼의 퍼포먼스는 충실히 보여주었던 선수로 기억될 듯 하다. 참고로 아오키가 빅리그에서 기록한 774개의 안타는 역대 아시아 출신 메이저리거 4위에 해당한다.[24]
야구선수로서는 상당한 언더사이즈다. 공식 프로필 175cm으로 야구선수들 프로필 신장이 착화신장임을 감안하면 실제 키는 170~172정도로 보는 것이 옳다. 덕분에 정수빈이나 손아섭 등 언더사이즈 외야 교타자들이 롤 모델로 자주 꼽고 또 비교되는 선수.
일본으로 돌아와서는 플레이스타일이 바뀌었다. 단순히 일본-미국의 리그수준차가 아니라 플레이스타일 자체가 바뀐 것. 나이가 들어 주력이 죽어 도루는 거의 못 하게 되었는데 대신 장타 위주의 타격으로 전환해서 장타자로 변신했다. 홈런 갯수는 10개 중반 정도는 깠던 일본 1기 시절과 별 차이가 없지만 장타 비율이 확실히 늘어서 발은 느려졌지만 장타율은 1할 5푼 가량 상승해서 2020년 시즌 기준 5할 후반대의 장타율을 찍고 있다. KBO리그로 치면 최정, 김주찬 등이 30대 들어가며 이런 식으로 플레이스타일을 바꾸었는데, 아오키는 무려 나이 38살에 변신에 성공한 것. 더군다나 상술했듯 몸이 작아 장타를 치기에 유리한 체격조건도 아니다. 이쯤 되면 야구천재라고밖에 할 말이 없는 선수.
4. 연도별 기록
5. 이모저모
- 미국에서는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을 가진 선수 중 한 명으로 통하는 듯 하다.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을 시절 밀워키 브루어스 중계진은 아오키를 제대로 발음하는데 한참이나 걸렸다고 하며, 기타 다른 팀 중계진들은 아요키, 애오키라고 발음하기도 했다(...). 이름은 노리치카가 아니라 그냥 노리라고 줄여서 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게 미국 내 애칭으로 굳어졌다. 이 때문에 2014년과 2015년에는 등록명을 아예 Nori Aoki로 표기하기도 했는데, 2016시즌부터는 다시 Norichika Aoki로 회귀했다. 물론 중계진은 계속 '노리'라고 불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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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이적한 2015시즌 중 자이언츠가 2014년 월드 시리즈 우승팀 자격으로 백악관에 초청될 때 함께 참석하게 되었는데, 아오키가 지난 시즌 월드시리즈 준우승팀 소속의 선수였다는 점에서 상당한 진귀한 상황이었다(...).
2015년 말에 손아섭이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했을 때는 언론에서 손아섭과 가장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로 아오키를 꼽기도 했다. 메이저 리그 전문가이자 해설자인 송재우 위원의 '발이 느린 아오키'라고 평가한 것이 대표적인 비유. 여담이지만 발이 느린 아오키면 쓸모없는 선수를 돌려 말한 것에 가깝다. 아오키는 그 발로 생산력을 뽑아내는 선수이기 때문에...
- 정준하가 이대호 인터뷰차 시애틀 훈련장에 가자 이대호가 소개시켜줘서 같이 인사도 나누었다. 처음부터 정준하가 꽤 유창한 일본어로 인사하자 깜놀한 표정을 짓기도... 첫 악수 후 다시 장갑을 꼈는데 정준하가 악수 한번 더 청하자 다시 장갑벗고 정중하게 악수하는 모습이 인상적.
- 로얄스 때 꽤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파울플라이를 잡다가 하필 슬라이딩하면서 공이 들어간 곳이... 덕분에 이곳저곳에 영상으로 박제되었다.
6. 관련 문서
[1] 정확한 영문 표기는 이것이 맞지만, 메이저리그 시절에는 'Nori Aoki'로 불렸다.[2] 팀명에 도쿄가 붙은 건 2006년부터.[3] 그를 대표하는 등번호로, 야쿠르트, 캔자스시티, 샌프란시스코, 토론토 시절 달았던 등번호[4] 야쿠르트에서 메이저리그 무대 진출 전 2년 간 달았던 등번호[5] 1번으로 변경하면서 기존 아오키가 달았던 23번은 같은 팀의 10살 후배인 야마다 테츠토 가 달았으며, 아오키가 미국진출한 이후 2016년부터 야마다가 1번으로 변경함으로써 아오키가 달았던 등번호는 모두 야마다가 달게 되었다.[6] 휴스턴 시절 달았던 등번호.[7] 밀워키 시절 달았던 등번호[8] 시애틀 시절 달았던 등번호[9] 뉴욕 메츠 시절 달았던 등번호[10] 센트럴리그 최초의 시즌 200안타 기록.[11] 일본프로야구 우타자 최초이자 외국인 최초 시즌 200안타 기록.[12] 다양한 이유가 거론되나 가장 유력한 것은 외야수 훈련이 편해서(...)[13] 와세다대와 게이오기주쿠대의 정기전에서 출발한 야구리그로 와세다대학, 게이오기주쿠대학, 메이지대학, 호세이대학, 릿쿄대학, 도쿄대학이 소속되어있다. '''1925년'''에 출범되었는데 야구에서 시작된 대학간의 교류는 곧 확대되어서 도쿄 6대학이 일본의 상징적인 대학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들을 부르는 다른 명칭은 '일본의 아이비리그'다. 여담으로 와세다와 게이오기주쿠 사이의 정기전에서 시작된 까닭에 리그 최종전은 언제나 이 두 대학의 경기로 끝나게 된다.[14] 도쿄 6대학 야구 연맹의 리그전은 메이지 진구 구장에서만 치뤄지는데, 진구 구장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홈구장이다. 즉 아오키는 대학 때부터 무려 11년을 진구 구장과 함께한 셈이다.[15] 야마다 테츠토 이전까지 야쿠르트의 주전 2루수였던 선수. 2017년부터는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에서 뛴다.[16] 흥미롭게도 이치로 역시 오릭스의 드래프트 4위 지명이었다.[17] 센트럴리그에선 최초의 200안타였다. 퍼시픽리그는 94년 이치로가 기록한 210안타가 최초의 200안타였다.[18] 실제로 도루 1위가 28개를 기록한 요미우리의 신인 후지무라 다이스케였다. 사족이지만 이 타자는 .222의 타율에 OPS '''5할'''을 기록하는 위엄을 보여줬는데, 주루 능력은 최상급이지만 타격과 수비가 발목을 잡으면서 2013년부터는 사실상 1군에서 얼굴을 보기가 어려워졌고 결국 2017년 시즌 종료 후 전력외통보를 받고 요미우리 구단 직원으로 전업하면서 은퇴했다. 참고로 '''헤이세이 출신 선수''' 최초의 타이틀 수상자다.[19] 그래서 메이저리그 진출을 고려했던 나카지마 히로유키도 메이저리그 진출을 철회했을 정도였다. 1년 후 나카지마는 미국에 도전했지만 결국 마이너만 전전하다가 돌아왔다.[20] 스즈키 이치로가 MVP를 받은 올스타전에서 사상 처음 친 이후 두번째며 현재까지도 이 두명이 유일하다.[21] 엄연히 말하자면 2014년 포스트시즌에서 좌익수 포지션을 병행했던 트래비스 이시카와의 주전 포지션은 1루수이지 좌익수가 아니다. OME급 외야 수비를 보여준 데엔 다 이유가 있었던 것.[22] 레론 리 본인은 1987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했고 그 직후에는 아직 현역으로 뛰고 있던 부머 웰스(한큐/오릭스, 다이에)와 오치아이 히로미츠(롯데, 주니치, 요미우리, 닛폰햄) 등이 레론 리보다 높은 통산 타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선수들도 은퇴가 가까와지면서 노쇠화로 인한 기량 하락으로 통산타율이 하락했고 1993년 시즌 중에 오치아이의 통산타율이 3할2푼 밑으로 내려가면서 레론 리가 통산타율 랭킹 1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NPB의 통산타율 기준인 4천타수를 넘는 선수 중에서 일시적으로라도 레론 리의 타율을 뛰어넘는 선수가 나오지 않아서 무려 25년동안 레론 리가 통산 타율 랭킹 1위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참고로 스즈키 이치로는 3619타수 1278안타로 타수 부족으로 인하여 NPB 통산타율 랭킹에 들어오지 못하며 4000타수까지 남은 타수를 전부 무안타라고 계산하면 .3195로 레론 리의 타율보다 0.0007정도 뒤지게 된다. 물론 통산 타율은 개인 타이틀 시상 대상이 아니므로 나머지 타수를 전부 무안타로 가정한 타율이 레론 리를 뛰어넘는다고 해서 이치로를 통산 타율 랭킹 1위로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참고로 한국은 3000타수가 기준인데 기준을 높일 경우 장효조(통산 3050타수)의 기록이 참고 자료로 밀려나 버리기 때문.[23] 단 아오키의 홈 구장인 메이지진구 구장이 이치로가 뛴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홈이었던 그린 스타디움 고베보다 훨씬 타자친화적인 구장이었고, 구장 보정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풀타임으로 뛴 시즌 전부인 7년 연속 타격왕에 홈런/도루를 뺀 타격 전관왕을 차지한 적도 있는 이치로의 커리어가 아오키보다 당연히 한 수 위이다. 덤으로 아오키는 전성기에도 송구능력에 대해서는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반면 이치로의 어깨와 송구동작의 민첩함, 송구 정확도 등은 메이저에서도 최고 수준이었다. 또한 아오키의 경우 일본 시절 통산 장타율이 4할 중반으로 일본 시절엔 매 시즌 345를 찍었던 이치로에 비해서 장타력도 확연히 떨어지는 등, 물론 아오키도 좋은 선수였지만 명백히 이치로보다는 한 급수 아래의 선수였다.[24] 스즈키 이치로, 추신수, 마쓰이 히데키가 그의 앞에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