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나베 슌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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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前 프로야구 선수.
세계에서 가장 낮은 릴리스 포인트를 가진 언더핸드 스로 투수로 유명했으며, 2000년대 치바 롯데 전성기의 주축 선발로 활약했다.
투구의 처음부터 끝까지 변칙으로 똘똘 뭉친 선수인데, 패스트볼의 완급을 조절할 때 단순히 힘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미세하게 투구폼의 속도까지 조절했다. 그리고 릴리즈 포인트까지 최저 5cm에 맞추고 있지만 미묘하게 릴리즈 포인트 높이도 조절한다고 했다. 그래서 국가대표전에서는 더더욱 강했다. 그를 상대했던 한국 타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공이 엄청 낮은 곳에서 오다가 갑자기 무릎 근처에서 솟아오른다고 했다.
국가대표전에서 한국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와타나베지만 변칙 기교파이면서도 컨트롤이 뛰어난 편은 아니라서 제구가 안되는 날에는 털릴 때가 많았다. 볼 끝도 상당히 가벼운 편.
대한민국 야구 팬들에게 이래저래 유명한데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나오면 대한민국을 미친듯이 털어버리기 때문이었다. 특히 2006 1라운드 한일전과 2라운드 한일전 당시 한국을 겨냥해 등판한 선발 투수이기도 했고, 실제로 와타나베는 매우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다.[3]
국내에는 이미 와타나베와 같은 정통 언더핸드투수, 그것도 선발 투수는 '''메이저리그 시절 김병현이 사실상 마지막이었다.'''[4] 하지만 SK와이번스 박종훈이 15-16시즌부터 선발로 안착하면서 언더핸드 선발투수 계보를 물려 받게 된다.
국내에도 한때 한희민, 이강철 이태일, 박정현, 김기덕 같은 잠수함 투수가 많았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사라지고 현역 언더핸드 투수중 와타나베와 같이 무릎 아래에 릴리스포인트가 있는 투수는 정대현, 김병현, 박종훈 3명만 남았으며 박종훈을 제외하면 모두 와타나베보다는 릴리스포인트가 높다. 사실 박종훈도 와타나베보단 릴리스포인트가 높다. 그나마 전 세계에서 채드 브래드포드와 함께 와타나베에게 비빌 수 있는 투수이다.'[5] 국내에서는 2000년대 이후 사이드암에 가까운 높이에서 적당히 빠른 볼에 적당한 지저분함을 조합하는 옆구리타입이 많이 생겨났지만, 이들이 오히려 양산화되면서 프로 1군에 오면 타자들이 적응해 처참하게 무너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기속성으로 키워서 써먹을려고 하는 학원야구 감독의 욕심 때문이라는 비판도 상당하다. 그래도 특히 국가대표전에서는 그 적응하기 어려운 생소함때문인지 강한 면모를 보였다.
그리고 2015년 11월 5일 한화 이글스에서 투수 인스트럭터로 영입했다는 기사가 났다.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3194771 그동안 옆구리투수로 영 재미를 못봤던 한화 이글스라.. 이번 기회를 통해 있는 옆구리 투수들이 잘 할수 있을지 두고보자.
초등학교 시절부터 야구를 좋아했으나 사실 투수로서도 타자로서도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몸집이 큰 것도 아니었고, 힘이 좋은 것도 아니었으며 발이 빠른 것도 아니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때까지 줄곧 불펜 투수였다. 하지만 대학에 가서도 야구가 하고 싶었기에 아버지로부터 언더핸드로 바꿔보지 않겠냐는 말을 들었다. 운동선수로서의 천부적인 재능은 부족했지만, 유연한 몸 덕택에 언더핸드로 전향할 수 있었고 극단적으로 낮은 릴리스 포인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대학교 모두 야구리그에서 강팀이 아니었고 그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불펜 투수였다. 하지만 일본의 사회인야구에서는 팀을 도시대항 야구 8강에 올려놓으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에도 뽑혔다.
그리고 2001년 드래프트 4위로 치바 롯데 마린즈에 입단했다. 첫 2년간 2승 5패라는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특히 2년차에는 방어율이 6점대까지 치솟기도 했다.
절치부심한 3년차 2003년 시즌, 첫 등판에서 그는 홈런 4방을 얻어맞아 8실점했고, 이윽고 수뇌진으로부터 "니 다음 등판이 마지막 기회야. 우천 취소되면? 그럼 넌 그냥 끝"이라는 최후 통첩을 받았다. 그의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등판 날, 비가 오긴 했지만 다행히 우천 취소는 안 되었고 어찌저찌 5⅔이닝을 2실점으로 막으면서 승리투수가 되었다. 이 경기를 기점으로 자신의 투구 스타일을 바꿨다. 원래는 강속구 언더핸드로 승부를 봤지만, 이때부터 철저한 변칙 기교파로 탈바꿈. 패스트볼 평균 구속이 '''120km/h대이다'''. 커리어 하이 시즌이었던 2005년 계측된 패스트볼 최고구속이 고작 132km/h에 불과했을 정도. 어쨌든 3년차부터 드디어 선발투수로 자리잡아 9승을 올렸고 이듬해인 2004년 12승을 따내며 처음으로 두 자리 승수를 올렸다.
언급했듯이 2005년이 커리어 하이였으며 15승 4패 2.1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이 시즌 첫 등판 경기가 개막 2차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상대 경기였는데 9이닝 동안 안타와 볼넷 1개씩만을 내주고 그렇게 출루시킨 주자는 병살로 다 잡아들이며 완봉승에 성공했다. 팀은 라쿠텐 상대로 '''0-26'''으로 신나게 점수를 뽑아 와타나베를 받쳐줬다. 2015년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일본프로야구 최다점수차 영봉패 기록. 이 해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 맹활약을 펼쳤고, 일본시리즈 2차전에 선발등판해 9이닝을 무실점으로 깔끔하게 막으며 완봉승을 기록했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롯데 선발진의 한 축을 맡아 매해 많은 투구이닝과 준수한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지만 영 승운이 따르지 않는 탓인지 두 자리 승수를 거둔 적은 2008년뿐이다. 2007년엔 177이닝을 먹고 2.44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음에도 달랑 9승에 그쳤고, 2009년의 경우 144이닝에 4.0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지만 승패는 고작 '''3승 13패'''에 그치며 당해년도 최다패를 뒤집어썼다.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노쇠화와 부상을 겪으며 4승에 그쳤고, 급기야 2013년엔 단 1승도 따내지 못하고 6차례 등판해서 4패에 4.62의 평균자책점으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2013시즌 후, 뜬금없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도전을 선언했다.기사
나이가 38세가 되는 노장인데다가 2013년 성적도 썩 좋지 않았으며, 제구가 안되면 무조건 홈런으로 연결된다는 약점도 있으나, 2군에서 절치부심하였고, 본인은 인생의 마지막 도전으로 생각한다며 테스트도 개의치 않는다고 한다. 지바 롯데 구단은 2000년대 2회 우승에 큰 공헌한 그를 대승적 차원에서 FA로 풀어준다고 한다. 롯데는 노쇠화에 접어든 와타나베가 없어도 큰 영향이 없고 일본내 타 팀으로 이적한다는 것도 아니니 왕년의 에이스에게 인심 한번 쓴 것.
나이가 있고, 부상전력도 있으며, 작년 성적이 영 좋지 않기 때문에 메이저리그 계약은 어려울 것이라는게 중론이며, 마이너리그 계약이나 스프링캠프 테스트 참가 등을 노려야 할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하지만 투구 스타일 자체가 대단히 변칙적이고 유니크하기 때문에 제구만 전성기 시절로 돌아온다면 메이저리그에서 나름 원 포인트 릴리프 정도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전망도 있었다.
2013년 12월 13일, 보스턴 레드삭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으나 2014년 3월 29일 메이저리그 진입에 실패해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방출되었고 독립리그 애틀랜틱 리그의 랭카스터 반스토머에서 뛰었다.
2015년 시즌이 끝나고 KBO 리그의 한화 이글스의 투수 인스트럭터로 영입되어 한화의 마무리 훈련 기간 동안 언더핸드 - 사이드암 투수 육성에 힘을 보태게 되었다. 이것이 선수 은퇴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2015년 12월에는 신일철주금 사회인야구팀의 코치 겸 선수로 부임했다. 2016년 3월 16년만의 사회인 야구 공식전 등판에서 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으며, 같은해 6월 도시대항전 예선에서 본인의 사회인야구 최장 이닝 투구(6이닝)을 기록하며 4피안타 무실점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 날 승리로 팀을 도시대항전 본선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본인의 친정팀인 지바 롯데의 TV 중계 경기 해설자로 출연하고 있다.
1. 개요
일본의 前 프로야구 선수.
세계에서 가장 낮은 릴리스 포인트를 가진 언더핸드 스로 투수로 유명했으며, 2000년대 치바 롯데 전성기의 주축 선발로 활약했다.
2. 플레이 스타일
투구의 처음부터 끝까지 변칙으로 똘똘 뭉친 선수인데, 패스트볼의 완급을 조절할 때 단순히 힘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미세하게 투구폼의 속도까지 조절했다. 그리고 릴리즈 포인트까지 최저 5cm에 맞추고 있지만 미묘하게 릴리즈 포인트 높이도 조절한다고 했다. 그래서 국가대표전에서는 더더욱 강했다. 그를 상대했던 한국 타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공이 엄청 낮은 곳에서 오다가 갑자기 무릎 근처에서 솟아오른다고 했다.
국가대표전에서 한국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와타나베지만 변칙 기교파이면서도 컨트롤이 뛰어난 편은 아니라서 제구가 안되는 날에는 털릴 때가 많았다. 볼 끝도 상당히 가벼운 편.
3. 한국과의 관계
대한민국 야구 팬들에게 이래저래 유명한데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나오면 대한민국을 미친듯이 털어버리기 때문이었다. 특히 2006 1라운드 한일전과 2라운드 한일전 당시 한국을 겨냥해 등판한 선발 투수이기도 했고, 실제로 와타나베는 매우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다.[3]
국내에는 이미 와타나베와 같은 정통 언더핸드투수, 그것도 선발 투수는 '''메이저리그 시절 김병현이 사실상 마지막이었다.'''[4] 하지만 SK와이번스 박종훈이 15-16시즌부터 선발로 안착하면서 언더핸드 선발투수 계보를 물려 받게 된다.
국내에도 한때 한희민, 이강철 이태일, 박정현, 김기덕 같은 잠수함 투수가 많았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사라지고 현역 언더핸드 투수중 와타나베와 같이 무릎 아래에 릴리스포인트가 있는 투수는 정대현, 김병현, 박종훈 3명만 남았으며 박종훈을 제외하면 모두 와타나베보다는 릴리스포인트가 높다. 사실 박종훈도 와타나베보단 릴리스포인트가 높다. 그나마 전 세계에서 채드 브래드포드와 함께 와타나베에게 비빌 수 있는 투수이다.'[5] 국내에서는 2000년대 이후 사이드암에 가까운 높이에서 적당히 빠른 볼에 적당한 지저분함을 조합하는 옆구리타입이 많이 생겨났지만, 이들이 오히려 양산화되면서 프로 1군에 오면 타자들이 적응해 처참하게 무너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기속성으로 키워서 써먹을려고 하는 학원야구 감독의 욕심 때문이라는 비판도 상당하다. 그래도 특히 국가대표전에서는 그 적응하기 어려운 생소함때문인지 강한 면모를 보였다.
그리고 2015년 11월 5일 한화 이글스에서 투수 인스트럭터로 영입했다는 기사가 났다.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3194771 그동안 옆구리투수로 영 재미를 못봤던 한화 이글스라.. 이번 기회를 통해 있는 옆구리 투수들이 잘 할수 있을지 두고보자.
4. 일대기
4.1. 학창시절
초등학교 시절부터 야구를 좋아했으나 사실 투수로서도 타자로서도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몸집이 큰 것도 아니었고, 힘이 좋은 것도 아니었으며 발이 빠른 것도 아니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때까지 줄곧 불펜 투수였다. 하지만 대학에 가서도 야구가 하고 싶었기에 아버지로부터 언더핸드로 바꿔보지 않겠냐는 말을 들었다. 운동선수로서의 천부적인 재능은 부족했지만, 유연한 몸 덕택에 언더핸드로 전향할 수 있었고 극단적으로 낮은 릴리스 포인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대학교 모두 야구리그에서 강팀이 아니었고 그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불펜 투수였다. 하지만 일본의 사회인야구에서는 팀을 도시대항 야구 8강에 올려놓으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에도 뽑혔다.
4.2. 프로입단
그리고 2001년 드래프트 4위로 치바 롯데 마린즈에 입단했다. 첫 2년간 2승 5패라는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특히 2년차에는 방어율이 6점대까지 치솟기도 했다.
절치부심한 3년차 2003년 시즌, 첫 등판에서 그는 홈런 4방을 얻어맞아 8실점했고, 이윽고 수뇌진으로부터 "니 다음 등판이 마지막 기회야. 우천 취소되면? 그럼 넌 그냥 끝"이라는 최후 통첩을 받았다. 그의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등판 날, 비가 오긴 했지만 다행히 우천 취소는 안 되었고 어찌저찌 5⅔이닝을 2실점으로 막으면서 승리투수가 되었다. 이 경기를 기점으로 자신의 투구 스타일을 바꿨다. 원래는 강속구 언더핸드로 승부를 봤지만, 이때부터 철저한 변칙 기교파로 탈바꿈. 패스트볼 평균 구속이 '''120km/h대이다'''. 커리어 하이 시즌이었던 2005년 계측된 패스트볼 최고구속이 고작 132km/h에 불과했을 정도. 어쨌든 3년차부터 드디어 선발투수로 자리잡아 9승을 올렸고 이듬해인 2004년 12승을 따내며 처음으로 두 자리 승수를 올렸다.
언급했듯이 2005년이 커리어 하이였으며 15승 4패 2.1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이 시즌 첫 등판 경기가 개막 2차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상대 경기였는데 9이닝 동안 안타와 볼넷 1개씩만을 내주고 그렇게 출루시킨 주자는 병살로 다 잡아들이며 완봉승에 성공했다. 팀은 라쿠텐 상대로 '''0-26'''으로 신나게 점수를 뽑아 와타나베를 받쳐줬다. 2015년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일본프로야구 최다점수차 영봉패 기록. 이 해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 맹활약을 펼쳤고, 일본시리즈 2차전에 선발등판해 9이닝을 무실점으로 깔끔하게 막으며 완봉승을 기록했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롯데 선발진의 한 축을 맡아 매해 많은 투구이닝과 준수한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지만 영 승운이 따르지 않는 탓인지 두 자리 승수를 거둔 적은 2008년뿐이다. 2007년엔 177이닝을 먹고 2.44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음에도 달랑 9승에 그쳤고, 2009년의 경우 144이닝에 4.0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지만 승패는 고작 '''3승 13패'''에 그치며 당해년도 최다패를 뒤집어썼다.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노쇠화와 부상을 겪으며 4승에 그쳤고, 급기야 2013년엔 단 1승도 따내지 못하고 6차례 등판해서 4패에 4.62의 평균자책점으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4.3. 메이저리그 진출 선언
2013시즌 후, 뜬금없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도전을 선언했다.기사
나이가 38세가 되는 노장인데다가 2013년 성적도 썩 좋지 않았으며, 제구가 안되면 무조건 홈런으로 연결된다는 약점도 있으나, 2군에서 절치부심하였고, 본인은 인생의 마지막 도전으로 생각한다며 테스트도 개의치 않는다고 한다. 지바 롯데 구단은 2000년대 2회 우승에 큰 공헌한 그를 대승적 차원에서 FA로 풀어준다고 한다. 롯데는 노쇠화에 접어든 와타나베가 없어도 큰 영향이 없고 일본내 타 팀으로 이적한다는 것도 아니니 왕년의 에이스에게 인심 한번 쓴 것.
나이가 있고, 부상전력도 있으며, 작년 성적이 영 좋지 않기 때문에 메이저리그 계약은 어려울 것이라는게 중론이며, 마이너리그 계약이나 스프링캠프 테스트 참가 등을 노려야 할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하지만 투구 스타일 자체가 대단히 변칙적이고 유니크하기 때문에 제구만 전성기 시절로 돌아온다면 메이저리그에서 나름 원 포인트 릴리프 정도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전망도 있었다.
2013년 12월 13일, 보스턴 레드삭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으나 2014년 3월 29일 메이저리그 진입에 실패해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방출되었고 독립리그 애틀랜틱 리그의 랭카스터 반스토머에서 뛰었다.
4.4. 그 후
2015년 시즌이 끝나고 KBO 리그의 한화 이글스의 투수 인스트럭터로 영입되어 한화의 마무리 훈련 기간 동안 언더핸드 - 사이드암 투수 육성에 힘을 보태게 되었다. 이것이 선수 은퇴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2015년 12월에는 신일철주금 사회인야구팀의 코치 겸 선수로 부임했다. 2016년 3월 16년만의 사회인 야구 공식전 등판에서 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으며, 같은해 6월 도시대항전 예선에서 본인의 사회인야구 최장 이닝 투구(6이닝)을 기록하며 4피안타 무실점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 날 승리로 팀을 도시대항전 본선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본인의 친정팀인 지바 롯데의 TV 중계 경기 해설자로 출연하고 있다.
5. 기타
6. 연도별 주요 성적
[1] 現 도치기현 도치기시[2] 미국 독립 리그 애틀랜틱 리그 소속.[3] 1라운드 4⅔이닝 3피안타 1삼진, 1실점 2라운드 한일전땐 6이닝 1피안타 2볼넷 2삼진.[4] 김병현과 박종훈사이에 우규민이 있기는하지만 정통 언더스로로 분류하기는 좀 애매한 측면이 있다. 사실 김병현도 팔각도는 사이드암보다 약간 낮은 변칙 언더핸드 투수이다.[5] 사실 박종훈과 브래드포드는 낮을 땐 와타나베보다 더 낮게 던진다. 그러나 평균적으론 와타나베가 약간 더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