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디 크루이프
1. 개요
네덜란드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겸 축구행정가. 2020년부터 선전 FC 감독을 맡고 있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자 감독 중 한 명인 요한 크루이프의 아들로 유명하다.''' 크루이프와 아내 대니 사이의 세 자녀중 막내이며, 부모의 국적인 네덜란드 국적이지만, 크루이프가 선수 생활을 한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서 스페인 국적도 가지고 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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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아버지 요한 크루이프가 감독으로 있던 FC 바르셀로나의 리저브 팀인 FC 바르셀로나 B에서 데뷔하였다. 오스카르 가르시아와 함께 팀내 득점 1위에 오르는 등의 활약으로 1994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프리시즌 투어에서 '''FC 바르셀로나 1군'''으로 콜업되었다. 1994년 9월 4일, 1군 정식 데뷔전을 치렀으며, 11월 2일, 4-0으로 이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 데뷔 골을 기록하였다.
이후, 잠깐이지만 백업 자원임에도 불구하고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로날드 쿠만과 함께 팀내 최다 득점자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으나,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4] 성장해야 할 시기에 오히려 기량이 하락하였고 유리몸인 그저그런 선수로 전락한다. 결국, 1996년 요한 크루이프가 FC 바르셀로나 감독직에서 경질됨과 동시에 요르디의 계약도 만료되어 팀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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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한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활약 덕분인지 알렉스 퍼거슨 감독으로부터 러브콜이 왔고 1996년 8월 £1.4M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 4년 계약을 맺는다. 시즌 초반 준수한 활약을 보였지만, 11월 말 '''무릎 부상'''이 재발해 다시 '''바르셀로나 시절과 같은 악순환을 반복하게 된다.''' 1998/99시즌 셀타 비고로 임대를 떠나기도 했으나 2골만을 기록하고 맨유로 복귀한다. 결국 별 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2000년 6월 30일 계약이 만료되어 팀을 떠나게 된다. 4년간 총 57경기에 출전하여 8골을 득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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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한 유망주로 잊혀질 때쯤, 라리가의 데포르티보 알라베스로 이적, 팀을 UEFA컵 준우승으로 이끌었다.[5] 2002/03시즌 구단이 강등되면서 2003/04시즌 에스파뇰로 이적, 10여 년만에 부상 없는 첫 시즌을 보내게 된다. 이후, 2004년 잠정 은퇴했으나, 2006년 우크라이나의 메탈루르 도네츠크로 복귀하여 두 시즌을 뛰었고, 2009년 몰타의 발레타에서 플레잉 코치로 1시즌을 보낸 후 현역 생활을 마감하고,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다.
2.2.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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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네덜란드 이중국적자로서 청소년시절 두 국가 모두가 국대로 선발하려고 했으나, 네덜란드를 택했다. 바르샤는 당시 네덜란드 국대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에게 그를 강력히 추전했고, 그는 히딩크호 오렌지 군단에서 몇경기 뛰기는 했으나, 성장하지 못해서 출장수는 매우 적다. 당시 네덜란드가 골든 제네레이션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후광으로 승선은 했으나, 붙박이는 되지 못한 것이다.[6] 그리하여 UEFA 유로 1996에 간신히 승선할 수 있었으나,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는 나가지 못했다. 네덜란드 국대로 9경기에 나가 1골을 기록했다.[7]
2001년의 활약으로 2002 월드컵 지역 예선을 앞두고 있던 네덜란드 국내에서는 요르디가 국가대표에 승선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지만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한편 스페인 국대는 뛰지 않았지만, UEFA 정식 회원국이 아닌 카탈루냐 축구 국가대표팀으로는 출전하기도 했다.
3. 감독 경력
마카비 텔아비브의 단장을 맡다가 2017-18시즌에는 감독으로 취임했다. 리그를 2위로 마치기는 했는데, 2010년대 이 팀은 이스라엘 리그에서 항상 1, 2위를 다투던 팀이었기 때문에 대단한 지도력으로 보기는 힘들다.
2018년 7월, 중국 슈퍼 리그의 충칭 당다이 리판 감독으로 부임했다. 전임감독이 바로 파울루 벤투. 벤투는 7월 22일 경질 당시 13위로 리그를 마쳤으나, 감독 경력은 고작 1년밖에 안되는 요르디 크루이프는 이후 2무 4패의 저조한 성적을 기록, 8월 19일에는 강등권인 15위까지 내려왔다. 이후 1무 1패를 더해 아직 첫 승도 신고하지 못한 채로 강등권인 15위에 머물러있다.
9월 15일 허난 젠예를 이겨 강등권으로 몰락시키고 강등권에서 벗어났는데, 이 패배 때문에 허난의 장외룡 감독은 해임당했다. 파울루 벤투나 장외룡을 보면 묘하게 크루이프는 한국과 간접적인 악연이 있다. 의외로 감독직에 능력이 있는 듯, 2018년 부임 초기에는 강등권을 전전했으나, 결국 강등을 면했고, 2019년에는 별다른 선수 수혈이 없음에도 팀을 중상위권에 고정시켰다.
하지만 저예산팀인 충칭의 한계 때문에 결국 10위로 리그를 마쳤다. 충칭 당다이 리판이 구단 홈페이지와 SNS계정을 통해 2019년 12월 크루이프와 상호 계약을 해지를 알렸다. 구단의 요구와 본인의 요구를 맞추지 못한 듯. 후임은 2017년까지 이 구단을 맡았던 장외룡.
2020년 1월 15일에 에콰도르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계약기간은 2022년 월드컵 최종예선까지다. 7월 25일 A매치를 단 한 경기를 치뤄보지도 못하고 에콰도르 축구 국가대표팀의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8월 14일 로베르토 도나도니 감독을 경질한 선전 FC의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2020년 주제프 마리아 바르토메우 FC 바르셀로나 회장의 독선과 무능이 큰 이슈가 되고 결국 탄핵 직전에 사임한 상황 속에서 차기 회장 후보 중 하나인 빅토르 폰트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4. 기타 경력
은퇴 후 키프로스의 AEK 나르나카(2010), 이스라엘의 마카비 텔아비브(2012-2016)의 프런트에서 단장으로 근무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FC 바르셀로나 (1994~1996)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94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1996-1997
- FA 커뮤니티 실드: 1996, 1997
6. 이야깃거리
[1] Jordi는 George의 카탈루냐식 이름이며, 요르디가 아닌 조르디라고 한다. 사실 요한 크루이프가 붙여준 이름이다.[2] 세컨드 스트라이커로도 뛰었지만,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다.[3] 말년에 메탈루르흐 도네츠크에서 센터백으로 뛰었다.[4] 무릎 반월상연골판 수술을 잘 못 받아 선수 커리어 내내 훈련 조차 100% 소화하지 못하는 몸 상태가 되었다. 더이상 정상적인 선수 생활이 어려워진 것.[5] 2001년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리버풀 FC와의 결승전에서 89분 극적인 동점골로 연장 승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연장 후반 리버풀의 맥칼리스터가 찬 프리킥이 델피 헬리의 몸에 맞으며 굴절이 되어 '''골든 자책골'''이 작렬하며 '''5-4'''로 석패했다.[6] 당시 네덜란드 미드필드에는 클라렌스 세도르프, 필립 코쿠, 에드가 다비즈,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로날트 더부르 등등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요르디가 뚫기 힘들었다.[7]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차두리를 지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