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요기제미날
1. 개요
'''代々木ゼミナール'''
일본의 대학입시 전문 학원. 이름은 "요요기 세미나"라는 뜻으로, 원래 일본에서는 세미나를 독일어 발음인 ゼミナール (제미나-루)[1] , 줄여서 ゼミ라고 한다. 약칭은 요제미(代ゼミ).
http://www.yozemi.ac.jp/
2. 상세
카와이주쿠와 함께 대표적인 대입 준비 학원으로 나다 고교, 카이세이 고교 등의 진학교와 함께 매년 1,000명 이상의 도쿄대학 합격자를 배출한다.[2] 때문에 본고사를 앞둔 겨울에 일본의 수험생들이 도쿄로 상경해 방까지 잡아놓고 특강을 듣기도 한다. 한국으로 치면 강남대성학원의 포지션.
매년 6월경 대학들의 랭크와 편차치를 발표하는데, 대학교를 줄세우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경쟁사 카와이주쿠, 순다이는 요요기제미날과 함께 학원계의 빅3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대입 수험생의 감소로 2015년에 27개의 분원 중 20개를 폐쇄했다.
3. 마성의 CM송
한국에 이름이 알려지게 된 계기는 학원 자체가 잘 나가서 아니라, 2006년부터 방송된 이 학원 광고 후크송이 워낙 포스가 넘치기 때문이다.
위 버전은 도쿄 버전이고, 각 지역마다 버전이 따로 있어서 나오는 대학이 다르다. 홋카이도에서는 홋카이도대학, 도호쿠에서는 도호쿠대학, 주부에서는 나고야대학, 주고쿠에서는 오카야마대학, 간사이에서는 오사카대학, 고베대학, 규슈에서는 규슈대학, 구마모토대학 등이 등장한다. 또한, 간사이 버전에서는 사립대학으로 소케이 대신 칸칸도리츠가 나온다. 전국구 합본[3]
이런식으로 TV, 그것도 TV 도쿄나 TBS 테레비 같은 곳에 대놓고 '''대학 서열화 조장문구'''가 나온다. 이 포스 넘치는 후크송은 방송과 동시에 2ch과 니코동 등지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당연하다시피 니코동의 필수요소화되어 패러디 작품과 매드무비가 나오게 되었다. 아래는 니코동 능력자들의 일부 작품.[4]
'''나이트 오브 요제미''' (요제미 CM X 나이트 오브 나이츠)
'''CCO 제미날''' (요제미 CM X 각 나라의 이중극점을 검증해 보기)
'''바지락 제미날''' (요제미 CM X 마츠오카 슈조)[5]
4. 여담
- 이 곳은 하라 히데노리의 만화 겨울 이야기의 주요 무대인 야마노테 학원의 모델이기도 하다. 건물도 비슷하게 생겼고 요요기제미날 근처 요요기 역에 야마노테선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 100%다.
- 1980년대에는 금삐까 선생님이란 별명을 가졌던 사토 다다시(佐藤忠志)라는 강사가 유명했다.[6] 전성기엔 연봉 2억엔(당시 기준)에 고급 외제차를 호화롭게 튜닝하고 살 정도로 부자였으나, 90년대 버블 붕괴와 청년층 인구의 급감으로 말년에는 모든 것을 잃고[7] 생활고에 시달려 생활보호 수급을 받으며 쪽방에서 사는 신세로까지 추락했다. 2019년 9월 쪽방에서 고독사했다. 향년 68세.
- 광고에 나오는 대학 이름을 전부 BMS로 구현한 동영상도 있다... 3044개나 되는 노트를 15초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에 욱여넣었다. 게다가 예~~~ 하는 부분은 데님으로 구현해 놓았다. 드럼 사운드는 양손 스크래치로 놓았다.
[1] 그렇기 때문에 한글로 표기할 때는 '요요기 제미'''나르''''가 되어야 하지만 원어를 고려하지 않은 오해로 인해 제미'''날'''로 알려졌다.[2] 물론 통계에는 허점이 많이 존재한다. 중복 합격자도 그렇고 겨울 특강 한 번 들었어도 학원 소속 합격자로 발표하기 때문.[3] 홋카이도-도호쿠-호쿠리쿠-간토-도쿄-주부-간사이-주고쿠-규슈 순.[4] 이 외의 작품을 검색하고 싶을 때는 맨 위에 적은 일본어로 검색하는 것보다 YZM으로 검색하는 것을 추천한다.[5] 마츠오카 슈조 매드 내에서도 대표 소재 중 하나가 바지락이다.[6] 참고로 이 사람도 N수생 출신. 릿쿄대학에서 반수해서 게이오기주쿠대학에 갔다. 석사는 쓰쿠바대학에서 취득.[7] 학원강사는 1990년대에 은퇴했지만 교육 평론가 및 대학 겸임교수 활동을 하면서 2009년만 해도 정치에 도전하는 등 죽기 10년 전까지만 해도 나름 갖고 있는 것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완전히 몰락한 후인 2018년의 인터뷰에 의하면 그 시점에서 1년 반 전에 부인과도 별거하게 되었다고 했고, 그 후로는 본인도 생활에 대한 의지를 반쯤 놓은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