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동궁

 


1. 개요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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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용동궁 터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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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렌도르프의 저택으로 사용당시의 모습

1. 개요


龍洞宮.
용동궁(龍洞宮)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5길 58 ~ 68에 있던 별궁이자 조선왕실의 궁가로 조선 명종의 장남 순회세자가 살았던 곳이다.

2. 역사


순회세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병약하여 태어난 지 이틀 만에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너무 어리고 더운 날씨 탓에 에 머물렀다. 하지만 자라면서도 건강하지 못하여 결국 5세에 궁궐 밖에서 거처한 적이 있는데, 이 때 잠시 거처한 것이 용동궁 역사의 시작으로 본다. 1556년에는 다시 중종의 잠저였던 상어의궁에 가 있었던 적이 있다.
순회세자는 11살에 윤옥의 딸 덕빈 윤씨결혼했는데, 2년 후에 후사도 없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자의 죽음으로 궁을 나오게 된 덕빈이 이 곳에 머물렀다. 순회세자의 사당인 순회묘(順懷廟)는 창의문 남쪽에 있었으며 이후 용동궁은 덕빈 윤씨의 사유 재산을 보관하고 에 딸린 토지에서 거두어들이는 조세로 경제 생활을 관리해주는 곳이 되었다.
이후로도 사유 재산으로 내려오다가 훗날엔 사도세자혜경궁 홍씨효명세자신정왕후 조씨의 궁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용동궁은 많은 토지를 소유한 궁이었는데, 영조수진궁, 명례궁, 용동궁, 어의궁, 창의궁 등 5개 궁의 면세전을 1,000결(結)을 한정하여 표준으로 삼되, 명례궁과 용동궁 두 궁은 대왕대비왕대비가 관할하므로 특별히 500결을 더 주도록 하고, 그 밖의 궁방은 800결로 제한했다.
조선 후기에 한성부 중부 수진방 박동으로 이전하여 ‘박동궁(礴洞宮)’으로도 불렸다. 이후 고종명성황후의 친척 민겸호가 살기도 했으나, 민겸호는 1882년 6월 임오군란 때 살해당했다. 민겸호가 죽고 나서 빈 박동궁에 살려는 사람이 없자, 고종이 이 집을 정치 고문으로 초빙한 독일인 묄렌도르프에게 하사했다. 묄렌도르프는 박동궁 한옥을 부분적으로 양식으로 개조해서 살았는데 이 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유리을 사용한 이 되었다.
1885년 12월 묄렌도르프가 중국으로 간 뒤 독일 상인 에두아르트 마이어가 설립한 세창양행에서 이곳을 관리했고, 1886년 11월부터 1889년까지 독일공사관이 있었다가, 이후 독일공사관은 정동 육영공원이 있던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자리로 이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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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신여학교 학감 주택.
1905년 이후로 용동궁은 빈 궁이었다가, 고종황제후궁순헌황귀비 엄씨의 소유가 되었다. 엄 귀비는 용동궁에 명신여학교를 설립했는데, 명신여학교는 곧 숙명여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엄 귀비와 그녀의 친정 엄씨 가문은 교육사업에 관심이 많아, 숙명여학교 외에 진명여학교양정학교(남학교)도 설립했다.
학제가 바뀜에 따라 숙명여학교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숙명고등여학교 등으로 불리다가, 1951년 오늘날과 같은 3년제 숙명여자중학교와 3년제 숙명여자고등학교가 되었다. 1938년에는 전문학교 과정도 신설되었고, 숙명여자전문학교는 1948년 숙명여자대학으로, 1955년 숙명여자대학교로 개편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숙명여중고가 1980년 강남구 도곡동으로 옮긴 이후, 현재 용동궁 자리에는 대한재보험공사의 코리안리재보험빌딩과 대한석탄협회의 석탄회관빌딩이 들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