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단

 

'''義和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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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단의 깃발
1. 개요
2. 상세
3. 행적
4. 기타


1. 개요


근대 중국에서 개화를 반대하던 무술집단이자, 먼나라 이웃나라를 비롯한 많은 학습만화에서는 '나쁜 서구 열강과 일본에 저항한 조직' 정도로만 서술했으나 '''의화단 운동에서 이들이 보여준 현실은 무차별 살육이나 강간을 일삼고 다니는 제노포비아적이고 극악무도한 미치광이 범죄집단에 불과했다.'''[1] 쉽게 말하자면, '''청나라탈레반'''.
원래는 의화권(義和拳)이라는 무술을 수련하던 권법집단이었으나 개항 이후에는 부청멸양(扶淸滅洋)[2]이라는 이름 하에 반란을 일으켜 열강에 대항했다. 당초에는 전형적인 반청복명 계통의 비밀결사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이나, 지도층이 청나라 황족에게 포섭되면서 친청으로 방향이 선회된 것으로 보인다.[3]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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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단은 무술 종교적 요소가 강하게 포함되었는데, 의화권을 익히면 금강불괴 도검불침의 몸이 되어 을 맞아도 문제가 없다고 선전하고 다녔다.[4] 실제로도 대중 앞에서 총알을 막아내는 일종의 차력쇼 같은 걸 해보였지만 일부러 총에 총알을 안 넣고 화약만 넣거나 온갖 훼이크를 썼다. 영화 《황비홍 2》에서도 백련교주가 이렇게 나온다. 의화권을 익혀서 총에 맞아도 안 죽었지만 알고 보니…옷 속에 두툼한 철판을 숨겨서 총에 맞아도 안 죽었던 것. 그러나 황비홍의 발차기에 맞고 날아가 뾰족한 곳에 등이 뚫려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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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통일된 조직도, 권법도 없었다. 공통점이라면 스스로를 권민(拳民)이라고 부르며 기독교를 믿는 교민(敎民)에 대적하며, 누런 베, 황포로 머리를 감싸고, 배는 붉은 색으로 가리고, 양권을 하여 신령을 몸으로 부르고, 큰 칼로 배를 내보여서 자르는 시늉을 한다든지, 인후로 창 끝을 버티는 차력쇼를 벌였다…[5] 권법을 배우면 '도창불입(刀槍不入)'[6]이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연령대도 10대부터 노인까지 골고루였다. 《삼국지》, 《수호지》 등에 나오는 오호대장군같은 호걸들을 신봉하였으며 의화권의 미신적 힘과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 신천지로 나아가자는 환상에 민중에게 급하게 확산되었다. 향촌의 신사들도 이들의 물주가 되어주었다.
그런가 하면 청나라 말엽에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면서 그 전까지 일하던 직업이 쓸모가 없어지자, 쫓겨나서 실업자가 된 사람들이 대거 의화단에 가담하기도 했다. 한 예로 의화단의 대표적인 지도자인 장덕성(張德成)은 원래 중국의 남북을 잇는 대운하에서 뱃사공으로 일했으나 서양에서 들어온 증기선 때문에 운하 관련 일이 사양 산업이 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이외에도 서양에서 들어온 철도가 중국에 놓이자, 그 전까지 대운하에서 운송 물류 사업인 짐꾼이나 뱃사공으로 일하던 수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은 새로운 운송 수단인 철도에 밀려 일자리를 잃고 실업자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의화단에 참가한 수많은 중국인들은 철도를 보는 족족 망치나 도끼로 모조리 때려부쉈다. 철도가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았다고 여겨 원한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의화단 참가자들은 철도가 서양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침탈하는 도구라고 여겨 미워한 탓도 있었다. 이렇듯 서양 물건에 의해 실업자가 된 장덕성을 비롯한 수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은 서양인들 때문에 자신들이 생계를 잃었다고 여겨서 서양과 서양인들을 증오했고, 그래서 서양을 중국에서 몰아낸다는 의화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던 것이다.[7]

3. 행적


의화단의 등장은 그동안 진행된 태평천국까지를 포함한 기독교 문화 및 기독교인들의 행위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선교사들이 토지를 강탈하는 행위가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는데 이 상황에서 청나라 정부는 그런 선교사들을 관리와 동등한 위치로 격상시켰다. 이런 권리를 얻은 선교사들은 세력확장에 박차를 가했고, 그래서 중국인들은 중국이 기독교화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중국인들에게 기독교의 예배(미사)와 고해성사 문화는 "난교"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기르는 고아원을 영아유괴로 오인하고 공격하는 경우도 많았다. 여기에 포교는 허락되었으나 원래부터 그렇게 기독교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관료들의 시각이 가세했다.[8] 일부 무슬림들과 백련교의 잔당도 이들에 합류했다.

3.1. 의화단 운동


의화단이 1899년반기독교 운동을 벌여 교회를 불태우며 소란을 일으키자 청 왕조는 위안스카이를 보내 이를 진압하였으나 오히려 운동은 거세져 주변으로 파급되었으며 철도(외국 세력 침투의 상징) 등을 파괴하며 북경까지 확산되었다.[9] 이후, 성격이 반기독교 운동에서 '부청멸양'을 구호로 내세우는 반외세운동으로 달라졌다. 그리고 청 정부가 이들과 손을 잡으면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항목 참조.
그러나 전투 끝에 8개국 연합은 톈진에서 청 정부와 의화단의 연합 군대를 개발살내버렸고[10], 이후 베이징으로 진격해서 이를 점령했으며, 이후로 신축조약을 체결하여 청을 사실상 반식민지로 만들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민간인 살상과 더불어, 주로 청조 황실 및 귀족의 재산에 대한 대대적인 약탈이 자행되었다.

4. 기타


영어권에서는 의화단 운동을 'Boxer Rebellion'이라고 부르는데, 이거는 당시에 서양 선교사들이 의화단이 무술과 체조를 중요시하는 걸 보고 "권투선수(Boxer)들 같다"고 평한 데서 나왔다고 한다.
가끔 중국권법인들은 많은 고수들이 여기에 참가했다가 죽어버려서 비기가 끊어졌다고 둘러댄다.[11]
[1] 그 상세한 내용은 의화단 운동 항목의 만행 참고.[2] 왕조를 받들어 외세를 물리친다.[3] 백련교의 한 분파라는 설도 있다.[4] 그런데 식민국가나 반식민국가의 반란군들이나 개화 반대파 세력들도 이런 주술적, 미신적 요소가 현대식 화기도 이기게 해준다는 믿음을 막 퍼뜨리고 다니며 소속원들을 독려한 전적이 많다. 물론, 결과는 어디 가든 '''망했어요…''' 가까운 한국의 우금치 전투만 해도 개틀링과 근현대식 저격소총에 그 많던 농민들이 관군과 일본군에게 피해 한 번 제대로 못 주고 다 작살났다.[5] 의화단에 관련된 역사적 자료들이 하도 많다 보니, 여기에 대해서도 관련 연구자들 사이에서 말들이 많다. 의화단원들이 중국 시골에서 전해지는 무당들의 굿 하는 모습에 의거한 트랜스 상태에 빠져서 저런 일이 가능했다고 하거나 일시적으로 신체의 기능을 강화시키는 흥분제를 복용하고 날뛰었다는 증언도 있다.[6] 직역하면 "칼과 창이 들어가지 않는다", 즉, 칼과 창, 더 나아가 무기로도 소용 없어지는 금강불괴의 몸을 가지게 된다는 뜻…[7] 출처: 실업이 바꾼 세계사 179~182쪽/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8] 여기에 백성들이 이런 중상 및 토지 약탈로 기독교인들을 소송하면, 관리들은 항상 일을 시끄럽게 했다며 문초하면서도, 기독교인들에 대한 오해를 푸는데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고, 사실 청나라 정부에 의해 관리의 권리를 얻은 종교인들도 있어서(주교, 선교사 등) 기독교인들을 다루기도 어려웠다. 이러다 보니 "관리들이 정당하지 못하게 기독교인들을 편들고 있다"라는 오해가 더욱 퍼지게 되었다. 이는 청 조정과 일부 지방정부들이 반서양 감정을 부추기는데도 잘 이용되었다.[9] 위안스카이가 이들을 부추겨 자멸을 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10] 당연하지만 의화권은 총을 막는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의화단에게는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11] 사실, 무술에 더 큰 피해를 입힌건 문화대혁명이었다…중국에서는 거진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마오쩌둥이 일으킨 일이다보니 애먼 의화단 운동 핑계를 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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