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화

 

1. 개요
2. 바탕
3. 나라별 소중화 사상
4. 비슷한 사례
5. 같이보기


1. 개요


小中華
말 그대로 '작은 중화'를 일컬으며 '중화사상'의 하위 갈래라고 볼 수 있다. 정확히는 정통 한족 국가인 명나라가 망한 이후 주변국들에서 중화의 계승은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가 아니라 자신들이 그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한 사상이다.
쉽게 요약하자면 '''"우리나라야말로 가장 선진적인 문명을 계승했다"'''를 기본으로 하는 사상으로, 유럽에서 신성 로마 제국, 제3의 로마 등 로마 계승의식을 내세우던 것과 비슷하다. 구한말 서양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당대 조선의 지식인들도 유럽의 로마 계승이란 문제와 소중화 의식의 유사성을 직접 지적하고 있었다. 단정적으로 말하면 정신승리법이지만 이걸 단순히 한심한 정신승리로만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논란이 많다.

2. 바탕


소중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중화'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 현대에는 '중화사상'이 중국의 민족주의와 결부되고 패권주의와 맞물리면서 다소 폭압적인 중국제일주의 사상처럼 여겨지곤 하는데, 소중화가 언급되던 시기의 중화사상은 현대의 중화사상과는 달랐다.
이 당시의 중화사상은 말그대로 '문명권'에 속해있는지 여부를 나타내는 사상이었다. 즉, 천자 중심의 세계질서에 포함되어 있고 천자를 중심으로 굴러간다는 것을 인정하는가를 의미했다. 여기에 출발하여 사상이 확립되고난 이후에는 전근대 동아시아 국가의 기틀, 다시 말해 군주가 있고 유교적 종법에 따른 계승체계를 따르고 신권과 왕권이 적절히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적절한 견제장치가 존재하는지 등도 '중화'의 조건에 포함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당시의 '중화'가 의미하는 바는 현대로 따지면 삼권분립이나 헌법 같은 요소를 충실히 국가의 바탕으로 깔아두고 있는지 여부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북한 같이 이러한 체계가 잘 잡혀있지 않고 유명무실한 나라를 제대로 된 국가가 아니라고 까는 것처럼, 당시에는 '중화'에 편입되길 거부한 족속들을 '오랑캐'[1]라고 부르면서 깠다.
여기서 출발한 '소중화'라는 말은 원래 중국 다음의 문명국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소중화'는 중화를 가장 잘 본받는 모화국가라는 뜻으로, 한족의 중화제국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언급한다고 해서 미국에 종속됨을 자처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 당시에도 '중화'를 표방하는 것이 한족 중화제국에 종속됨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 명나라가 망한 이후에는 '명나라가 망했으니 이제 우리가 제일의 중화국가'로 바뀌게 된다. 이런 소중화 의식은 명나라 멸망 이후 중국 주변의 조선과 일본, 베트남 등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현상이며, 이는 중화 문명이라는 근대 이전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핵심적이고 포괄적인 틀에 소속함을 표명함으로서 내수용 정통성과 권위 뿐만 아니라 대외 관계에서도 이점을 제공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도구였다.
명나라가 망한 후에 '청나라는 제대로 된 정통 중화왕조가 아니니 우리가 중화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생겼다. 명나라 이전에도 중국 대륙에는 비한족 통일 정권이 계속 들어섰었는데, 그 때는 소중화 논란이 생기지 않았다. 몽골인이 세운 원나라는 당시 국정에 깊숙히 간섭해서 소중화 사상이 싹틀 여지가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명나라 멸망 이후 섬길만한 중화 국가가 소멸했기에 소중화 사상이 싹튼 것이다.
현대로 따지자면 "미국의 민주주의가 몰락했으니 그 다음으로 민주주의를 잘 지켜온 대한민국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다." 같은 사상이 나온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당시 식자층과 권력계층에게 있어 '중화'란 중요한 요소였다.
외왕내제에서 더 나가버렸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과거부터 외왕내제를 실시하고 근대 무렵에 소중화 사상을 가지고 있던 나라들은 중화 시스템 안에 들어가는 일이 있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독립국가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중화문명이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할 수 있는 범위 바깥에 있었으며, 조공과 책봉은 그저 외교적 수사였다고 볼 수 있다. '중화 문명'은 송대 이후로는 중원이라는 지정학적 대상에 구속된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권 전반을 포괄하는 이데올로기적 프레임으로 진화했다. 그런 만큼 물리적 현실로서의 정치적 주권과 포괄적인 문명적 정체성으로서의 중화 사상은 근대 민족주의적 관점처럼 서로 배제하고 대비하는 관계가 아니었다.
현대 중국에는 당나라는 일본이 계승하고, 송나라는 베트남이 계승하고, 명나라는 한국이 계승하고, 민국대만이 계승하고, 마오쩌둥 치하 중공 초기는 북한이 계승해서(...) 지금 중국에는 남은 게 없다는 자조적인 농담이 있다.#, #

3. 나라별 소중화 사상



3.1. 조선


유럽에서 황제라고 부른 것은 로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후 게르만오스트리아는 로마의 옛 땅으로서 황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독일게르만 계통을 이어 마침내 황제로 칭호를 정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의관과 문물은 모두 명나라의 제도를 따랐으니 그 계통을 이어서 칭호를 정한들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또한 청나라와 우리나라는 다같이 동양에 있으므로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로마의 계통을 이어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9월 26일 양력 4번째 기사

우리나라의 강토한나라 #s-3.2당나라의 옛 땅에 붙어있고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은 다 송나라#s-5명나라의 옛 제도를 따르고 있으니, 그 계통을 잇고 그 칭호를 그대로 쓴들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가 다같이 로마의 계통을 이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독립과 자주는 이미 여러 나라가 공인하였으니 당당한 존호(尊號)에 거하는 것은 응당 실행해야 할 큰 법도인데 폐하께서는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 것입니까?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9월 29일 양력 2번째 기사

후기에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가진 사상이다. 기존의 '중화'인 명나라가 멸망했으니 진정한 '중화', 즉 문명국은 조선 말고는 없다는 사상이다.[2] '조선 중화주의'라고도 표현한다.
기본적으로 중국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 중에서 중국 황제의 명문을 무시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성리학만 특별히 명분을 중시하는 게 아니다. 명분이라는 말은 차라리 원칙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게 오해가 없다.
조선이 명나라를 대국으로 모신 것은 단순히 명분타령 때문만이 아니라 현실적 국력이나 문화적 수준 때문이다. 당시 만주족은 그냥 숲에서 사냥하던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이들과는 교류 정도를 유지하는 교린 정책을 취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 국력이 쇠퇴하면서 만주족(여진족)의 후금, 이후에는 청나라가 부상한 것. 새로 조선의 왕이 된 광해군은 실리외교를 통해 후금과 명, 그리고 조선의 삼각관계를 유지하는데 집중했다. 하지만 광해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단순히 실리외교 문제가 아니었다. 광해군의 지지세력인 북인들이 소수파였고, 단순히 명분과 실리의 문제가 아니라[3], 당시까지는 인구가 1억 명이 넘는 명나라가 100만 정도되는 후금에게 멸망당할 거라고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결국 서인들은 인조반정을 일으키고, 광해군과 북인파를 축출한 후 인조를 내세워 정권을 장악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정묘호란병자호란을 당하면서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버티다가 항복, 삼전도에서 청 태종 앞에서 세번 절하고 아홉번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청에게 굴복하는 치욕을 겪게 된다.
사실 그 앞의 상황이 어찌됐든 간에 조선 왕이 적국에게 치욕을 당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상황. 이건 성리학자의 명분론을 운운할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당시 조선 사람들은 광해군이든 화친파든 다 성리학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노론의 거두인 우암 송시열북벌을 외치면서 제기된 것이 소중화론이었다. 중화문명의 정통 왕조인 을 계승한 것은 오랑캐인 '''이 아니라 바로 조선'''이라는 논리였다. 이는 송시열의 유명으로 제자들이 만동묘를 세운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만동묘는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즉, '''이제 중원에서 문명 즉, 중국(중화)이 파괴되고 야만적인 오랑캐가 들어섰지만, 그들은 중화의 정통이 아니며 조선만이 유일하게 중화(문명)의 정통을 이었다'''는 선언이었다.
당연하지만 효종 때의 북벌론은 "중국 대륙을 정복하고 우리가 중원의 새로운 황제가 되자"가 아니라 "중원에서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의 문명을 다시 회복시켜 주자"는 것이었다.
북벌이 사그라든 이후에도 청나라를 오랑캐 취급하는 경향은 남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에 방문하는 사신을 명대에는 '조천(朝天)'(천조#s-1에게 조회하러 간다)을 썼지만 청대에는 '연행(燕行)'(연경(북경)에 간다)으로 바꾼 것. 또한 공문서에서도 청나라는 피국(彼國), 즉 '저쪽 나라' 정도로 지칭되었다. 이 이유 때문에 명대에 파견한 사신을 조천사라고 부르고, 청대에 파견한 사신을 연행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홍순학이 지은 '연행가'의 그 연행이다.
그런데 이후 청나라가 명나라보다 훌륭한 치세를 보여주게 되면서 소장학파에서는 북학(청을 배우자)이 나타나게 된다. 박지원도 "청나라가 들어섰다고 해서 중국 대륙이 야만으로 타락한 것이 아니며, 중화 문명은 그대로 남아있다"고 평가했다. 즉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는 것은 '''오랑캐(만주족)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아들여서 그들의 사회와 문화 안에 남아 있는 중화 문명을 배우는 것'''이라고 보았다. 원래 동아시아에서 중화 문명은 특정 민족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의 소중화사상과 사대주의가 충돌한다는 식의 논리는 말이 되지 않는다. 쉽게 말해 명을 섬기고 명의 문물이나 제도 사상 등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대주의라면, 조선의 소중화 사상은 명이 멸망한 뒤에 자국이 곧 명의 후계자라고 내부적으로 주장하고, 오랑캐(청나라)에게 외형적으로는 굴종할지라도 그들을 명과 동급의 중화로써 인정하지는 않겠다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선의 소중화 사상의 문제는 청나라에 대한 외교보다도 조선 내부의 문화적 변화에 있다. 병자호란 이후 소중화주의가 퍼지면서 주자가 설정한 유교적 의례 등을 교조적으로 지키려 하는 경향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호란 이후의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기 때문에 복잡하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명나라 멸망 이후 중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어지고 조선 내 자체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나 국문학의 주체성이 보여진 점 등이 그러하다. 게다가 이러한 경향은 조선 후기 서민 문화의 발전과 결합하여 조선의 독자적인 문화가 더욱 강조되는 경향이 보였다.
결국 조선시대에서 소중화는 '''중화=문명'''이라는 인식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이고, 실학자들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경세를 논의했던 것이지 성리학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새로운 사상과 방법론을 논의했던 것이 아니다. 물론 양명학을 받아들인 강화학파 같은 경우나 서양 학문+천주교를 받아들인 정약전 · 정약용 같은 인사들도 분명히 있기는 했지만, 다수의 실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을 공부했던 사람들이었다.
물론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된 시기에 명나라의 복수 운운하며 정치공작을 펼친 인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연암 박지원 같은 사람은 허생전 뒷부분에서 대차게 깠다.

이런 이 대장의 말을 들은 허생은 크게 노하여, '''"뭐야!? 명나라의 원수를 갚겠다는 놈이 할 말이 그것 뿐이냐? 상투를 트는 건 본래 오랑캐의 풍속이며 흰 옷은 상을 치를 때나 입는 옷이 아니더냐? 바야흐로 대륙을 정벌하겠다면서 그까짓 꼴같잖은 예의범절이나 따지다니, 이게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할 말이더냐! 너 같은 놈은 마땅히 목을 베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칼을 집어 대장의 목을 베려고 들었다.

영조 44년에 노론 대신인 김약행은 이 사상을 기반으로 영조에게 '''칭제하자는 상소를 올렸고 특히 한원진[4]은 아예 중국 대륙으로 진출해 정복해도 된다고 주장하였다.'''#[5] 심지어 소중화가 아니라 '''대중화(大中華)'''라고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베이징대 역사학 교수가 조선의 소중화 사상과 반청 감정이 현재 한국에서 반중감정의 형태로 잔존해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청나라를 미개한 오랑캐라고 혐오하던 감정이 현 중국인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어 있다는 의견이다.[6]# 다만 현재 한국은 중화 계승 사상이 딱히 강조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있다' 정도로 참고하면 된다.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더불어 현 중국의 중화사상을 비꼴 때 유머 차원에서 소중화 드립을 치기도 한다.

3.2. 일본


일본을 중심으로 하여 아이누(=에미시, 에조), 하야토, 그리고 한반도의 국가를 포함하는 일본이 주장하던 종주권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것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는데, 대외적으로 최초로 언급된 경우는 5세기 경에 일본에서 중국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의 왕을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六國諸軍事(6국제군사)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倭國王(왜국왕)"으로 자처한 것을 꼽는다.[7] 임나일본부설의 기본적인 근원에도 이러한 뿌리깊은 소중화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소중화주의를 일본 고대사에서는 '''동이의 소제국'''론 혹은 '''왜적(倭的) 천하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외에도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자 일본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명나라는 무너지고 조선은 항복했으니 '''일본이야 말로 진정한 중화'''라는 주장이 펼쳐졌는데, 이때 진무천황이 사실 춘추전국시대 오나라 태백의 후손, 혹은 형제라는 속설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후에도 일본 제국주의[8]에 영향을 끼쳤다는 연구도 존재한다.

3.3. 베트남


베트남 역시 다른 주변국들처럼 명청 교체 이후 중화를 자신들이 계승했다고 여겼다.
중세 이후 베트남이란 국가 형성 과정은 '''정치적으로는 중원의 통일 제국에서 철저한 독립을 추구하되, 문화적,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오히려 중화 문명의 내재화'''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국가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베트남은 한반도의 왕조들보다 더 철저한 중화 사상을 내세워 국내용 칭호나 문서에서는 아예 대놓고 베트남 조정을 베이징을 비롯한 중원의 그것과 대비되는 '''남조'''라 칭했고, 참파크메르 같은 인근 나라들을 정벌하며 유교를 비롯한 중화 문명의 전파를 명분으로 삼았다. 과거 제도종묘사직에 지내는 제사 또한 일찍부터 수용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자신들이 복속시킨 참파나 크메르 쪽에 대충 끼워 맞춘(...) 중국식 작위를 내리며 외왕내제식 통치를 했다. 고려시대부터 활동 범위가 한반도로 제한되고, 조선 초기 사군 육진 개척 이후 국경이 고정되었던 한반도와 달리 이쪽은 근대까지 베트남이 다른 민족을 몰아내며 남진을 계속 했으니 이들을 흡수하고 지배할 중화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더욱 적극적으로 주장할 근거와 여건이 마련되었던 셈이다.[9] 중화제국과 오랫동안 대립해 왔던 베트남 본인들 입장에서는 껄끄러울 수도 있는 소리지만, 어찌 보면 문명으로서는 중화의 일부를 자처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독립되어 있었던 조선과 비슷하게 독자적으로 따로 놀던 '''중화 문명의 최남단 베이스'''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베트남은 동남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싱가포르와 더불어 동북아시아의 한자문화권에 들어가는 나라로서 일부에서는 동북아시아권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베트남을 제외한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문화적으로 인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베트남과 이질감이 매우 크다.[10] 그래서 베트남은 크메르족, 참족 등 인접 동남아시아 민족들과 역사적으로 사이가 영 좋지 않았고 역으로 동북아시아에 더 강한 동질감을 보인다. 현대 베트남인들 중에서는 베트남이 동남아시아가 아니라 동북아시아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뭐 실질적으로 보면 동남아시아보다 동북아시아가 더 국력도 크고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크니 베트남 입장에서는 동남아시아보다는 동북아시아에 끼는게 이득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다만 조선에서는 베트남이 워낙 왕조가 빨리 갈려나가다 보니 "쟤네들 유학한다더니 하는 짓거리가 저게 뭐냐?" 라는 식으로 까기도 했다. 사실 베트남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한것이 938년이고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한것이 1862년인데 그 사이의 십이 사군 시대와 남방을 통치한 쩐조, 응우옌조를 빼도 왕조가 12개나 존속해있었을 정도로 왕조 교체가 잦았고,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래로 개성왕씨에서 전주이씨로 왕조가 딱 한번 교체되었던 조선에서 그럴말이 나올법 하기는 했다.

4. 비슷한 사례



4.1. 문화대혁명 이후 대한민국


문화대혁명 이후 한국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소중화가 현실이 되었다. 유교 관련 서적이 중국에 없어서 한국에 남아있는 게 세계기록유산으로 올라가고, 중국에서도 전통 제례의식을 배우러 한국에 온다고 하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문혁 당시 유교와 공자 역시 봉건적인 사상으로 취급당해 취푸(곡부(曲阜), 공자의 고향)의 대성전에 모셔져 있던 공자상이 도끼로 박살났고, 진시황도 경악할 수준으로 유교 경전이 소멸되는 일이 일어났으며, 또한 무형문화재도 상당수 실전되었다. 대표적으로 문묘에 제사를 올리는 것, 즉 제향(祭享)하는 법이기도 한 《제공대전(祭孔大典)》도 실전(失傳)되어, 한중수교 이후 한국석전대제를 참고해서 재현해야 했다. 1990년 석전대제 베이징 아시안게임 개막행사로 초빙2004년 취푸 공묘 석전대제 재현 기사.
21세기가 된 현대에도 아직도 중국보다 한국에 · 대의 사료가 세세하게 많이 남아 있어서, 한국의 도움 없이는 유교 연구가 어려울 지경이다. 말하자면 한국이 오히려 중화 문명을 중국보다 잘 보전한 국가가 되었을 지경.
현대의 한국인들은 중화 중심의 사상에서 벗어난 지 오래이므로 소중화 사상은 드립에 가깝긴 하지만, 2010년대 한중관계 악화로 인해 반중감정이 퍼지면서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화의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는 풍조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 병자호란 시절 조선이 청나라를 보는 시선과 비슷해졌다고도 할 수 있다.
우남위키나 이승만 TV등에서는 한국의 반일감정의 근원이 친중 사대주의와 소중화 사상이라고 주장한 바 있으나, 소중화 사상을 가진 조선인들은 일본보다는 청나라를 더 싫어했고 청나라의 영토에 처들어가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으므로 주장의 신빙성은 낮다.[11]

4.2. 중화민국(대만)


청나라가 중국대륙을 통치했어도 중화사상은 살아있어서 한족은 만주족이 이끄는 청나라와는 다르고 오히려 청나라를 한족을 탄압하는 압제자로 보았다. 실제로 태평천국 운동 때 명나라 부흥을 꿈꾸는 지하조직인 천지회(天地會)가 상하이를 점령하고 '''대명(大明)태평천국''' 이라는 정부를 세워 홍수전과 제휴하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쑨원'''은 아예 혁명적 기치를 '''멸만흥한'''으로 정했고 청나라가 1912년에 멸망해 중화민국이 세워졌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난징에 있는 명 효릉[12]에 참배해 한족의 국가를 회복했다고 널리 알린 것이다.
이름부터 '''"中華"民國'''인데다 쑨원 사후 국민당의 권력자로 등극한 장제스는 북벌을 통해 군벌들을 정벌하거나 흡수, '''멸망 전 청나라의 영토를 그대로 소유하는 중화민국을 세웠다.''' 하지만 장제스가 이끌던 국민정부의 통치력이 미치던 곳은 수도인 난징과 강소, 강서, 절강, 안휘 등 주변 지역 뿐이었고 나머진 흡수된 군벌들이 자체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신강은 명목상 관리만 파견했지 독립지역처럼 행동했고 티베트는 사실상 자립상태였으며 몽골에는 아예 독립된 공산국가가 세워졌다.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중화민국은 잠시동안 진짜 중화제국을 다시 구현할 기회를 얻었지만, 스스로의 실책으로 인해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중화민국은 타이완 섬에 갇히게 된다. 그렇게 도망치는 와중에도 중화제국의 적통을 잇는다고 주장해온 중화민국은 북경과 중국대륙 곳곳에 있던 유물들을 긁어모아 수송선들에 전부 채워넣어 대만에 옮겨 국립고궁박물원에 전시했다. 공산화된 대륙에서 반달리즘이 벌어질 때 대만의 중화민국은 역으로 '''중화문명부흥운동'''을 펼쳐 자신들이 유일한 중화문명의 적통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공자의 종손인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쿵더청이 국부천대 때 국민당과 함께 대만으로 피신해서 공자에 대한 제사를 그대로 이어나갔다.
정치적으로 친중 행보를 보였던 중국 국민당 소속 마잉주 전 총통도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지만 하나의 중국은 오로지 중화민국'''이라고 못박아뒀고 대만의 보수주의자들 중 과격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조국은 중화민국이고 바다 건너 대륙 정부는 공산당 비적 떼라고 칭한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만의 도덕교과서에선 학생들에게 자신들은 중국 사람이라고 가르쳤다.
다만 이것이 "소"중화인지는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는데, 중화민국 정통론자인 대만인들이 생각하기에 자기 나라는 소중화같은 "하찮은 아류같은 게" 아니라 중화 그 자체, 즉 "대중화"이기 때문.
1990년대 이후 대만 독립운동이 본격화되고 민주진보당 등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대만의 중국 민족주의는 점차 흐려지고 있지만, 극단적인 대만 민족주의자가 아닌 이상 오늘날의 대만인들은 스스로의 중화 문화 계승을 자랑스럽게 여기거나, 적어도 부정하지는 않는다.

5. 같이보기



[1] 과거에 야만인이라고 불린 사람들도 그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원 간섭기 참조. 바이킹들은 영국의 아이들을 창에 던지면서 놀았다. https://is.wikisource.org/wiki/Landn%C3%A1mab%C3%B3k/98._kafli [2] 일본이나 베트남은 당시 조선의 관념으로는 오랑캐로써 조선보다도 밑으로 여겨지는 국가였다.[3] 그 소수파인 북인마저 명에 대한 사대를 주장했으며 실제로 중립 외교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은 극소수였다.[4] 호락논쟁에서 인물성이론(오랑캐≠사람)을 주장하여 이간의 인물성동론(이후 북학파로 계승)과 대립한 그 한원진이 맞다![5] 루리웹에 소중화를 주장하던 신하들의 정신 상태를 매우 잘 보여주는 만화가 올라와 있다. [6] 실제로 조선시대 때 청나라에 대한 비하어였던 되놈, 오랑캐라는 표현은 조선 멸망 이후에도 잔존해 있었긴 하다.[7] 물론 중국은 이미 망한 삼한, 그리고 자기들과 별 교류가 없던 신라의 지배는 인정해도, 백제의 지배는 인정하지 않았다. 백제의 구이신왕이 이미 일본보다 먼저 중국으로부터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百濟諸軍事(백제제군사)鎭東大將軍(진동대장군)百濟王(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중국은 처음에는 "안동대장군 왜국왕"만 인정했다가 일본 쪽에서 끈질기게 청하자 겨우 (백제를 뺀) 나머지 지역의 지배를 인정했다. 사실 그 신라 역시 중국에게 낙랑의 지배를 허용받은 걸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은 중국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외교적인 제스처일 뿐이었다. 고개 숙이고 들어오는 나라들에 대해 대충 '너네 어디어디 왕' 하는 식으로 명함(…)만 인정해주는 식.[8] 메이지 유신의 주역은 개화파가 아니었고 서양인들을 오랑캐라고 비하했던 일본식 중화사상을 가졌던 세력들이었다. 이후 이들 중에서도 급진파와 온건파가 나뉘어 알력 다툼을 하는 양상이 된 것.[9] 물론 이렇게 중화 문명의 일부를 자처한다는 것과 정치적으로 중원의 통일 제국에게 종속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10] 다만 태국과 라오스, 미얀마의 경우에는 민족의 기원 자체가 중국 남부에서 유래해서 중국의 영향력이 없지는 않다. 특히 태국은 한족들도 태국으로 많이 이주해서 사회의 중축으로 당당히 자리를 잡았기도 했다. 다만 유교적인 관료체계를 베트남이 도입한것과는 다르게 태국은 유교의 영향력이 별로 크기 않아서 차이가 심하게 나게 된 것이다. [11] 사실 이는 한족과 만주족에 대한 중근세 지식인의 관점을 분별력없이 이해하고 현대인의 관점에서 주관적으로 중국이라는 카테고리에 묶고 있기 때문이다.[12] 명 태조 주원장의 능묘. 쑨원은 1925년에 북경에서 죽고 북경 교외 벽운사란 절에 안장되었지만 장제스가 북벌에 성공한 이후 수도인 난징으로 유해가 옮겨져 명 효릉 바로 옆에 안장되었다. 현재 '''중산릉'''이라 불리는 이곳은 한족이 이민족을 몰아내고 한족 국가를 세운 인물이 묻혀있다는 점에서 효릉과 같지만 관심도와 관광객 수가 효릉보다 넘사벽(...) 수준으로 많다고 한다. 오히려 중산릉에 방문한 김에 효릉도 같이 볼 정도. 참고로 릉(陵)이란 단어는 '''황제의 무덤'''에 쓰이는데 이를 보면 쑨원이 중화권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