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동참모의장
1. 개요
合同參謀議長, Chairman of the Joint Chiefs of Staff
많은 국가 군대의 3군[1] 통합 의결기구인 합동참모본부의 의장이다. 보통은 줄여서 합참의장이라고 부른다.[2] 유럽 쪽에서는 '국방참모총장(Chief of the Defence Staff)'(영국)이나 '국방감찰총감(Generalinspekteur der Bundeswehr)'(독일)이라고 부른다. 중화민국 국군에서는 특이하게 합참의장을 '참모총장'이라고 부르고, 우리나라의 참모총장에 해당하는 직위는 육/해/공군 사령이라고 부른다. 이 기구가 보통 그 나라 군대의 가장 높은 의결기구이며 이 보직은 그 기구의 총책임자인 만큼 경험이 제일 많은 대장이 보임된다.
대한민국 국군의 대장 7명 중에서도 서열이 가장 높기 때문에 합참의장은 현역 군인의 좌장(座長)이라고도 불린다. '''현역 군인이 오를 수 있는 가장 최고위 보직'''이다.
국방부 장관 같은 경우에는 계통상으로 군대조직 내부의 자리가 아닌 행정부 관료로서의 보직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문민통제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에 제복군인은 할 수가 없고 오로지 민간인만 될 수 있다.[3] 그래서 '''이론상으로는''' 과거 고려시대 강감찬같은 순수 문관 출신도 가능하다. 실제로 현재 문민통제를 강력하게 실행하는 나라는 그런 사례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건군초기를 제외하면 올라갈 만큼 올라간 고위장성이 퇴역하고 바로 가는 자리이다. 마치 회사에서 사원인 부장이 퇴직하여 퇴직금 정산받고 임원으로 가는 것과 같이 신분이 바뀐다. 그래서 국방부 장관은 민간인이지 군인은 아니다. 물론 바로 어제까지 군인이었으니 일반 민간인하고 같을 수는 없다. 따라서 정부 입장에서는 군조직의 통솔과 장악에 유리하기 때문에 이렇게 운용하고 있는 실정이다.[4] 유사하게 법무부 장관과 외청인 검찰청의 최고직책인 검찰총장과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보통 장성들에게는 신변보호와 사무연락 등의 일을 하는 전속부관이 있다. 합동참모의장은 이 밖에도 '보좌관'이라는 직함을 가진 비서 보직이 있다. 이 보좌관은 전도유망한 국군 대령이 보임된다. 일례로 제42대 국방부장관을 지낸 김태영 예비역 대장도 대령 시절 합참의장 보좌관을 지냈다. 합참의장의 비서실장은 준장이다. 대개 공군 준장이 임명되며, 김성일, 최차규 前 공군참모총장이 비서실장을 역임한 바 있다.
참고로 국군 대장 7명의 의전서열은 '합참의장 > 육군참모총장 > 해군참모총장 > 공군참모총장 > 그외 4성장군 3명'순이다. 나머지 4성장군인 한미연합사 부사령관과 육군의 작전사령관 2명 중에서는 진급일이 빠른 순으로 서열이 높아진다. 국방일보 기사 정확한 서열은 대한민국 국군/장성급 장교 문서로.
2. 육해공의 비중
한국군의 경우 42대 원인철 합참의장까지 육군이 36명[5] , 해군이 1명 공군이 3명씩이다.
미군의 경우 20대 마크 밀리 합참의장까지 육군이 10명, 해군이 4명, 해병대가 2명, 공군이 4명이다.
자위대의 경우 통합막료회의의장과 통합막료장을 합쳐 야마자키 코우지 6대 통합막료장까지 총 31명인데 이중 육상자위대가 15명, 해상자위대가 8명, 항공자위대가 7명이다.
3. 대한민국 국군
3.1. 역대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
4. 미군
제18대 미군 합참의장인 육군대장 Martin Dempsey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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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합동참모본부(Joint Chiefs of Staff / JCS)의 최고 책임자이자 미군 내 서열 1위이다.[6] 미국-스페인 전쟁 때만 해도 미국 육군과 해군은 따로 놀았다. 그 때문에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육해군 합동위원회(Joint Board)'를 설치하였으나 자문기관에 불과하였다.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수준까진 아니었지만 미국 해군과 육군은 각각 해군부와 육군부 소속이었고 국방부가 생긴 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었다. 당시 미군은 영국군과 작전을 수행했는데 영국군에 '국방참모본부(Chiefs of Staff Committee)'[7] 가 있던 것과 달리 미국에는 상응할 만한 조직이 없었다. 미군은 영국군과 '연합참모본부(Combined Chiefs of Staff)'를 구성했는데, 영국 국방참모총장에 상응할 만한 미군의 직책으로 '''육해군 최고사령관 참모총장(Chief of Staff to the Commander in Chief of the Army and Navy)'''을 1942년 7월 20일에 창설했다.[8] 이는 오늘날의 합참의장에 해당한다. 참고로 연합참모본부에 참석했던 미군 측 장성은 4명이었는데, 육해군 최고사령관 참모총장 윌리엄 리히(William D. Leahy) 해군원수,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원수, 해군참모총장 어니스트 킹 원수, 육군항공사령관[9] 헨리 아놀드 원수가 나머지 구성원이었다.
1947년에 국방부가 생기면서 합참은 국방부의 산하기관이 되었고, 1949년 오마 브래들리 대장이 취임[10] 하면서 해당 보직의 명칭을 오늘날의 명칭(Chairman of the Joint Chiefs of Staff)으로 고쳤다.
한국군과는 달리 각군 대장들이 적어도 한 번씩은 취임한 적이 있다. 이쪽은 육·해·공군뿐만이 아니라 해병대 대장도 합참의장을 역임해왔다. 물론 역대 미 합참의장들의 출신을 거론하면 육군의 비율이 가장 높지만, 각 군별로 그렇게 크게 차이가 나진 않는다. 대충 육군이 역대 합참의장의 과반에 조금 못미치게 임명되었고 나머지 과반을 해군과 공군, 가끔 해병대가 내정되는 식.[11] 한국군 합동참모의장처럼 전군을 대표하는 제복군인의 장이지만 그쪽은 우리와는 달리 군령권이 없다.
JCS는 말 그대로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과 제복군인들 위에서 군령권을 갖고 있는 국방장관의 참모라고 보면 된다. 미군에서 작전권한을 가진 가장 높은 군인들은 각 통합전투사령관들. 지역별로는 6개(중부, 태평양, 북부, 남부, 유럽, 아프리카), 기능별로는 4개(전략, 수송, 특수작전, 사이버전) 등 총 10개 사령부가 편성되어 있다. 통합전투사령관을 거친 후에 각군 참모총장이나 합참의장에 임명되는 순간부터 야전업무에 관한 직접적인 영향권(작전권)을 거의 상실한다. 이러한 지휘구조는 '장성 1인에게 군 전체의 지휘권을 맡기면 문민통제에 어긋난다'는 지적과 더불어, 전세계를 대상으로 자국 군대를 배치 및 운용하는 미국의 군사적 특수성을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다(만약 미국이 자국 영토의 방어만을 신경써야 하는 평범한 국가라면, 병력 전체를 총괄 지휘하는 최고사령관 1인을 별도로 둘 수밖에 없다). 의장부대와 합참 직속 참모진을 빼고는 예하 부대도 없게 된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군령 자체가 합참의장과 각군 참모총장들을 완벽하게 우회해서 대통령 → 국방장관 → 통합전투사령관 → 예하 야전군으로 하달되는 형식이니 정말 실권하나 없는 직책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제1보좌역이자 합동참모회의에서 각군 참모총장의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 주된 업무인 데다가 명색이 제복군인의 1인자이다 보니 군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게 크다(군령권만 없을 뿐). 같은 이유로 각군 참모총장들도 은근히 뒷방영감같아 보이지만 영향력이 생각보다 세다. 그래도 통합전투사령관 보직이 확실히 제복군인으로서는 가장 간지나는 요직.
합참의장이 군령권 없이 통합사령부들의 전략 기획 및 조율을 담당하는 점이 비효율적이라며 작전권을 줘야한다는 얘기가 1980년대 중반에 나오기도 했지만 미국 의회에서 거부했다. 미국 헌법의 기본이 제복군인 1인에게 미합중국 전군의 작전 지휘권을 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골자였다. 출처
합동참모의장
4.1. 역대 합동참모의장
미국 정부는 합참의장 배분에 있어서 다양한 출신을 등용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미군에서 시기에 따라 달라도 보통 대장의 70% 정도는 사관학교 출신이긴 하지만[12] 합참의장에선 비사관학교 출신들도 꽤 많다. 재임 중에 6.25 전쟁이 발발하고 원수로 진급한 오마 브래들리를 제외하면 전원 대장이다.
여담으로 미국공군사관학교는 아직 한 명도 합참의장을 배출 못 했다. 미 공군은 역대 4명의 합참의장을 배출했지만 웨스트포인트 출신이 둘, 학사 1명에 학군 1명이다. 미국공군사관학교가 의외로 꽤 늦게, 대한민국 공군사관학교보다도 늦게 생겼을 정도로 역사가 짧은 편이라... 참고로 육군에서 독립한 뒤 1959년 공사가 첫 졸업생을 배출할 때까지 10년 넘는 기간에는 미국육군사관학교와 미국해군사관학교에서 공군 장교가 배출되었다.[13]
사병 출신 장성은 네 명이다. 3대인 네이선 트와이닝과 8대인 조지 브라운은 사병으로 복무중에 사관학교에 진학했고 10대인 존 베시는 현지임관으로 장교가 됐고 13대인 존 샬리카시빌리는 병으로 복무 중에 학사사관에 지원했다.
5. 자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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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군의 합동참모의장에 해당하는 일본의 통합막료장(統合幕僚長 とうごうばくりょうちょう)은 일본의 제복 자위관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직위로 2005년까지는 통합막료회의(統合幕僚会議)의 통합부대만 관리했다. 그러나 2006년 통합막료회의가 통합막료감부(統合幕僚監部)로 개편되면서 전·평시에 상관없이 방위대신의 지휘를 받아 각 자위대를 지휘한다.
사실 일본에선 막료란 말은 참모의 대체어로 쓰이며[22] 통합막료장은 지휘관이 아니다. 막료장이란 단어는 참모총장과 동의어로 쓰인다.
역대 통합막료장은 총 네 명인데, 육상자위대에 한 명, 해상자위대에 두 명, 항공자위대에 한 명이 있으며 현직인 야마자키 코우지는 육상막료장 출신이다.
이들이 전역할 경우에는 황거에서 파티를 열어준다고 한다.
일본의 역대 통합막료장.
통합막료회의 시절에는 통합막료회의의장(統合幕僚会議議長)이라 불렸으며 2006년 3월 27일부로 통합막료감부가 되면서 통합막료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통합막료장
5.1. 역대 통합막료장
초기에는 일본 육사나 해병 출신들이 차지했다. 자위대의 수뇌부엔 일본군의 상당수가 유입됐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군경력자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면 경찰이 거기까지 올라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리고 대좌 이상의 장교에서 통합막료회의의장에 오른 사례는 없다.
다만 초대 통합막료회의의장인 하야시 게이조는 일본군 출신이 아닌 관료 출신이었다. 경찰 예비대를 거쳐 1950년에 육상자위대에 들어갔고 내무부 출신으로 구 육군 출신들과 파벌 싸움을 벌였다. 그나마 이 사람이 통합막료회의의장으로 10년, 그리고 육군막료장의 전신이자 당시 최고 선임 자위관이었던 제1막료장과 그 전신인 경찰 예비대 총감 등 14년이나 한 탓에 육상자위대에 일본 육군 출신들이 덜 들어오게 되었다. 다만 방위성을 엄청난 파벌싸움으로 얼룩지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일본군 출신으로 첫 의장(2대)에 오른 스기에는 일본 해군 중좌 출신이었다. 장성급들은 자위대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맛사키 하지메가 통합막료회의의장에서 통합막료장으로 넘어갔으므로 총 31명이 이 자리를 역임했다. 육상자위대 출신이 14명, 해상자위대 출신이 9명, 항공자위대 출신이 7명으로 육상자위대가 주축이긴 하지만 한국군과 비교하면 3군 모두 골고루 한 편이다. 1990년대부터 방위대학교 출신들이 독점하고 있다.
5.1.1. 주요 출신 주특기
주특기를 살펴보면 보병, 수상함, 조종 출신들이 가장 많긴 하다. 역대 통합막료회의의장 및 통합막료장 26명 가운데 경찰 관료 출신이 1명(육상자위대), 보병 출신이 8명(육상자위대), 수상함 출신이 4명(해상자위대), 조종 출신이 6명(항공자위대), 포병 출신이 1명(육상자위대), 기갑 출신이 2명(육상자위대), 통신 출신이 1명(육상자위대), 잠수함 출신이 2명(해상자위대), 항공(육상자위대 항공대(1명) 및 해상자위대 항공대(3명)) 출신이 4명, 공병 출신이 1명(육상자위대)이다.
- 통합막료회의의장(☆)
6. 중국 인민해방군
중국인민해방군참모부의 총참모장을 말한다. 이 사람이 육해공을 지휘한다. 국방부가 아닌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지휘를 받기 때문에 사실상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지휘관보다는 참모에 가깝다. 계급은 상장이지만 중국군은 계급이 상-중-소 3단계이므로 북한군의 상장이 타국의 중장급인데 반해 중국군과 러시아군의 상장은 타국의 대장과 상응한다. 영어로도 Admiral/General(대장)으로 표기하며 사실상 해외 방문 등에서 대장으로 취급한다.
2016년 1월 1일에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부의 명칭이 중앙군사위원회 연합참모부로 바뀌면서 팡펑후이 전 12대 총참모장이 그대로 1대 연합참모장으로 계승하였다. 이전까지는 총참모장이 육군사령원을 겸직하는 형태였으나 연합참모부로 최고 군령기관으로 바뀌면서 육군사령원이 별도의 직책으로 분리되었다. 육군사령원이란 개념과 독립한 것은 기존의 합동성 강화를 위해 역할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연합참모부 참모장
6.1. 역대 연합참모부 참모장
- 총참모부 성립 전의 총참모장
- 총참모부 총참모장
- 연합참모부 참모장
7. 중화민국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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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국군에서는 참모총장(中華民國參謀總長)이 한국의 합참의장에 해당한다. 2019년부터 선이밍 공군상장이 참모총장으로 재직했으나 2020년 1월 2일 헬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북양군벌 시절에는 당연히 육군이 강세였지만 국부천대 이후로 섬나라가 되면서 참모총장 자리를 육해공이 골고루 가져간 편이다. 대한민국 국군이 박한기 합참의장까지 육군이 36명[26] , 해군이 1명 공군이 2명이지만, 중화민국군은 황수광까지 27명 가운데 육군이 12명, 해군이 9명, 공군이 8명이다.
중화민국 참모총장
7.1. 역대 참모총장
8. 싱가포르군
싱가포르 국방총장
9. 호주군
10. 영국군
국방참모총장(Chief of the Defence Staff (United Kingdom))이라고 부르며 약칭은 CDS이다.
11. 관련문서
[1] 육군, 해군(+해병대), 공군[2] 사실 합참의장이라는 표현이 합동참모의장이라는 정식표현보다 더 많이 쓰인다.[3] 그렇지 않은 국가는 북한, 중국, 러시아가 있다.[4] 다만 이는 군사정권을 오래 경험한 우리나라에서 굳어진 경향이다. 미국만 하더라도 퇴역한지 한참 지나 현역 군조직에 영향력이 강하지 않은 인사가 임명되고 있다.[5] 초대 연합참모본부 총장 이형근부터 셀 때, 김종오 중장~대장이 '''총 3번''' 착임하였으므로 육군 출신은 37명이 아니라 35명이 된다.[6] 단 군번 최선임은 아니다. 콜린 파월은 1958년 임관자였지만 합참의장으로 재직 당시에 1956년 임관자인 노먼 슈워츠코프보다 직책상 선임이었고, 2014년 기준 합참의장인 마틴 뎀프시는 1974년 임관자인데, 2014년 기준 해병대사령관인 제임스 에이머스는 1970년 임관자이다. 미국에선 후배 기수가 진급했다고 대장을 벗거나 후배 군번이 최고 서열에 오른다고 전역하지 않는다. 한국에선 기수제가 계급이나 직책을 씹어먹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전역시켜버리지만.[7] 국방참모총장이 최선임 군인이다.[8] 당연히 이 명칭에 등장하는 '최고사령관(The Commander in Chief)'이란 바로 군 통수권자인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9] 육군항공대는 2차대전기에도 이미 계급체계와 복제만 육군과 동일했다 뿐이지 사실상 공군으로의 분리가 거진 마무리된 상황이었다. 단지 전시상황이라서 편제에서 급격한 변화를 가져가기 어려웠을 뿐. 이후 아놀드 원수는 미 공군의 분리 몇 년 후까지 생존하며 공군 원수까지 되어 전무후무한 텐스타(...)가 된다. [10] 그의 임기 중 6.25 전쟁이 터졌고, 1950년 9월에 그는 원수로 임명된다. 이는 미군 역사상 마지막 원수 임명 사례.[11] 18대인 마틴 뎀프시 대장 이전에는 공군-해병-해군 순으로 합참의장에 내정되었다. [12] 준장만 해도 학군 등이 더 많다.[13] 참고로 이 시기 해군참모총장이 제독들의 반란을 이끌었던 알레이 버크였다. 해사 생도들은 공군 가기가 좀 눈치보였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해사는 육사에는 비할 바가 못되지만 적지 않은 공군 소위들을 임관시켰지만 장교단에서의 목소리가 너무너무 작았다. 역대 육사 출신 공군 장교들은 60명 넘는 인원이 4성을 단 반면 해사 출신은 단 4명만이 4성을 달았다.[14] 입학 전에 사병으로 2년 근무했다. 전시라서 2년 만에 칼졸했다. 공군으로 넘어간 건 1947년의 일이다.[15] 1937년에 입학했는데 1936년에 미주리 주방위군에 입대하여 상병까지 복무했다.[16] 1942년에 조종사 라이선스를 따고 대학을 졸업한 뒤 미 육군 조종장교 과정에 지원하여 임관했다.[17] 1939년에 주방위군에 입대해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 1944년에 상사 계급으로 현지임관되어 소위가 되었다.[18] 이 시기부터 합동참모차장직이 신설되었다. [19] 최초의 ROTC 출신이자 흑인 출신 합참의장이다. 2년 선임인 노먼 슈워츠코프가 그의 지휘를 따랐다.[20] 1958년에 병으로 입대했고 1959년에 사관후보생에 지원하여 소위가 되었다. 폴란드에서 넘어온 조지아계로 1958년에 미국 국적을 땄다. 참고로 한국군은 귀화자는 본인은 입대가 안 되고 자녀부터 입대할 수 있다.[21] 일본에선 자위대의 업무란 의미로 대무(隊務)라고 표현.[22] 일본어에 참모라는 단어가 없는 건 아니지만 자위관은 군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 대체어로써 막료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23] 법무장교 출신으로, 자위대가 초법적 상황에 대처할 수 없다고 문제 제기를 하기도 했다[24] 1945년 8월에 일본 육사 마지막 기수로 입학하는 바람에 임관하지 못 하고 병으로 종전을 맞았다. 소련에 주재한 일본대사관에서 방위주재관(무관)으로 근무했는데 소련군에게 자위관은 군인이 아니다라고 폭언을 들었다고 한다. 훗날 고위 장성에 오르자 소련을 대상으로 한 북부방면대를 강화했다. 어차피 냉전기 일본의 방위백서상 주적은 소련이긴 했다[25] 일본에선 비행이라고 한다.[26] 초대 연합참모본부 총장 이형근부터 셀 때, 김종오 중장~대장이 '''총 3번''' 착임하였으므로 육군 출신은 37명이 아니라 35명이 된다.[27] (대행기간) 1954년08월12일-1954년08월17일 2급상장(육)[28] 1급상장이 사라지고 모든 제복군인의 최고 계급이 2급상장으로 정리되었다.[29] 사후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