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호족
1. 개요
일반적으로 호족(豪族)은 중앙 귀족과 대비되는 지방의 유력자를 이르는 말로, 토호(土豪)라고도 불렸다. 이들은 정복 사업을 통해 한층 넓어진 영토의 통치력이 약화된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권력 관계를 만들었으며, 지연・혈연 등을 배경으로 토지와 농장, 노비, 자체적인 사병까지 거느리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신라 후기에는 정국이 혼란한 틈을 타 전국 각지에서 친족 집단 중심의 호족 세력이 세를 키워갔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신라의 지방 관료들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등 후삼국시대의 주역으로 자리잡았다. 통일 전쟁에서 호족들 중 고려에 적대하거나 후백제의 편에 선 호족들은 최후에 고려가 승리하게 되면서 연거푸 몰락한 반면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우거나 귀부한 호족들은 결혼과 등용 등 포용 정책의 혜택에 힘 입어 고려 초기 국가의 지배계층을 이루게 되었다.[1] 이후 중앙 정계로 진출한 호족 출신의 가문들은 왕실 내 권력을 노리고 다툼을 벌였으며, 이는 2대 혜종(912 ~ 945)과 3대 정종(923 ~ 949)의 요절을 초래했다. 결국 광종(925 ~ 975)대에 들어와 호족들을 억누르기 위해 과거제와 노비안검법을 도입하는 등 공포 정치를 펼치면서 대부분 숙청되어 사라져갔고, 그 세도 약해졌다.
그러나 광종 사후 숙청으로부터 살아남은 호족들은 경종이 즉위하자 자기들끼리 이전보다 더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여 이후 음서와 공음전을 바탕으로 한 문벌귀족 세력으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이때 문벌귀족이 되지 못한 중소 호족들은 향리 계층을 이뤘고, 후기의 혼란기에 또 다시 신분상승의 기회를 맞아 일부는 권문세족이 되기도 했으나 여기서도 기회를 잡지 못한 호족들은 여전히 향리으로 남았으며 조선 개국 이후에 대과에 급제하여 양반 계층이 될 수 있었던 사례들 이외에는 중인 계급인 아전층을 형성하게 된다.
2. 상세
한국에서 호족이 역사 전면에 나타나는 시기는 통일신라 말기 ~ 후삼국시대로, 왕권이 강했던 8세기경까지의 신라 중대까지는 미미하다가 신라 하대인 9세기경 농업의 발달로 인한 인구 폭증과 계속된 진골 귀족들간의 왕위 쟁탈전으로 인해 지방 통치력에 공백이 생겼고, 이에 따라 여러 형태의 호족이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중앙의 6두품 세력은 경주 김씨와 화백회의 중심의 절대적 카스트인 골품제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이들이 호족에게 포섭됨에 따라 신라 멸망의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또 교리와 규율을 중시하는 귀족 중심의 교종 불교 대신, 개인적인 참선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 중심의 선종 불교를 지원했다. 이들은 선종 승려 도선이 들여온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경주의 기운이 이러이러해서 다했고 자기네 연고지가 길지'라고 주장해 세력을 불리기도 했다.
대개 신라 말 등장한 호족들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 몰락귀족형: 모종의 사유로 중앙정치에서 배제된 경주 김씨 귀족집안이 지방에서 토착화되어 호족이 되는 경우. 오래 전에 중앙의 왕위쟁탈전에서 패배해 명주에 자리를 잡은 김주원의 후손인[2] 김순식 일가가 있으며, 신라가 항복한 후 기존의 경주 김씨, 박씨 등의 진골 귀족들도 동경(경주)을 근거지로 한 고려의 호족이 되었다.
- 군진점거형: 신라 하대에는 전국에 군진이 설치되었는데, 서남해의 청해진, 예성강 유역의 패강진[3] , 남양만 일대의 당성진, 강화도의 혈구진 등이 있었다. 이런 군진에서 지방군을 지휘하던 사령관이 사적으로 확보한 부하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군진을 사실상 사유화해버린 다음 인접 고을들의 지배권까지 손에 넣으면서 그 일가가 호족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견훤 등이 있다.
- 촌주가문형: 기존 신라의 최하급 행정단위인 촌(村)의 유력자인 촌주의 가문이 세력을 키워 인근 마을까지 자신의 지배권에 넣고 호족화 한 경우. 이 유형이 호족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예를 들어 아자개,[4] 서신일, 홍술, 선필 등이 있다.
- 상업세력형: 상공업으로 재부를 쌓은 유력 가문이 지방의 지배권까지 확보한 경우. 왕건과 유천궁 일가 등을 위시한 패서호족들과 서남해 해안의 호족들이 이쪽 계통이었다. 서남해의 능창은 해적질을 하면서 사병을 대거 보유하고 무역으로 재부를 쌓았다. 당시는 국가의 통제력이 사라져 각지에 새로운 세력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던 때에 단순한 상업으로만 유지된다는 건 불가능했기에 당연히 무역을 호위할 병력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설득력이 있는 추정인 것이 통일신라말은 신라구(신라해적)가 창궐하여 오히려 일본 큐슈는 물론이고 세토내해에 신라구가 진출해서 일본 각지를 털어먹던 시절이다. 그런 신라에서 해상무역으로 거상이 되고 한 지역의 호족이 된다는것은 상당한 무력을 지닌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애당초 전근대에 해상에서 무력을 갖춘 상인 세력들은 기본적으로 해적 세력의 성격을 겸하고 있었다.
그래도 왕건은 창업군주로서의 실적과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왕건 생전에는 이러한 무리수가 통했지만, 왕건 사후에는 그마저도 효력을 잃어서 곧 고려 왕실의 존립이 위협받기 시작했다. 왕건의 처가측 호족들이 각기 자기네 가문쪽 왕자, 왕손을 왕위에 올리려고 일종의 왕위쟁탈전에 돌입한 것이다. 당장 적장자이자 적법한 후계자인 혜종 왕무는 공산전투 전후 왕건이 한창 밀릴때 후백제 손에 일시적으로 나주가 점령되었다 재탈환하는 과정에서 나주의 외가가 너무 몰락해버려서 적장자의 정통성과 태자로서의 업적, 일신의 무력을 갖고도 오래 버티지 못했고, 그나마 외가의 기반이 상당하던 정종 왕요조차도 호족들 상대하다가 젊은 나이에 비명에 갔다.
이후 정종의 동생인 광종이 왕위에 오르고나서 아예 작심하고 공포정치를 펼치면서 이런 믿을 수 없는 호족들을 모조리 박살냈고 , 과거제를 기반으로 인재를 등용하기 시작하면서 호족 세력은 중앙 정계에서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고 중앙 집권이 강화되면서 기존의 호족세력은 하급 귀족을 이루게 되었다.[8][9]
고려의 지방 행정조직은 크게 5도 양계 경기 체제였는데 이 가운데 군사적 성향이 강한 양계와 중앙에서 직접 지휘하는 경기를 제외한 5도 지역(경상, 전라, 양광, 서해, 교주)은 인구나 규모가 큰 고을인 주현에만 지방관을 파견하고, 부근의 작은 고을인 속현에는 파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현의 지방관이 간접통치하고 실질적 지배는 기존의 호족층인 '향리층'이 맡았다.
이후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태종을 시작으로 향리 '계급'의 세력을 급속도로 약화시키기 위한 정책이 시작되었고, 엄밀히 말해 하급'''귀족'''이었던 향리층은 양반과 상민 사이의 아전, 그러니까 중인층으로 격하되었다.
사실 이 호족이란 용어는 말이 꽤 논란이 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한국사에서의 '호족' 은 이 용어가 원래 나온 중국과 달리 친족집단이 아니었으므로. 개념이 서로 다르므로 용어도 서로 달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신라 말에 지배자의 위치까지 올라간 사람들 중에는 자기 일족이 없거나 일족이 본디 유력하지도 호족으로 토착화되지 않았던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기훤이나 양길은 한 지역의 지배자였지만 본디 도적이었다가 일개인이 초적 수장으로서 운좋게 관아를 잡아먹고 지역의 패자로 군림한 것이지 일족이 유력한 가문으로서 호족화된 것은 결코 아니었고, 능창이나 작제건은 상인이자 사실상의 해적 수장급의 인물이었으며, 견훤의 가족은 지방 호족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자기 나라를 세우면서 일족이 바로 왕족으로 격상되었고, 궁예는 본인의 가문과 연을 끊은 승려 출신에 왕위에 올라 국혼을 하기 전까진 아예 가족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지방세력들은 당대에 성주나 장군 등으로 불렸기도 하다. 그러니 호족의 사전적 정의에 충실하자면 이들은 호족이 아니고, 편의상 호족으로 분류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고려사 연구자들 중에는 이러한 호족이란 용어 자체를 일본사학계의 영향으로 보고 당대 사람들이 사용했던 성주, 장군 등으로 칭하는 연구자도 있다.[10]
3. 목록
이 밖에 광주 이씨, 진성 이씨, 덕산 이씨, 고력 신씨, 봉화 정씨, 창녕 성씨, 예안 김씨, 반남 박씨, 양주 조씨, 평주(평산, 무송) 윤씨, 목천 우씨, 목천 돈씨, 목천 장씨 등이 고려 개국 초기에 호장에 봉해진 것으로 여겨지나 고려 태조 때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위의 성씨들은 고려 초, 중, 말기 중에 전해지는 인물을 시조로 하고 있다.
[1] 호족의 본관별로 분석하면, 통일 전 옛 고려 지역 출신이 성씨의 수에 있어서는 전체의 62%, 고급 관료의 수에 있어서는 75%를 차지하였다.[2] 김순식이 김주원의 후손인지는 기록상 명백하지 않다. 다만 강릉 일대의 강력한 토착 세력이었다는 점에서 아마도 왕위계승전쟁에서 밀린 뒤 명주군왕 작위를 받고 대대로 강릉 일대를 통치했던 김주원의 후손이라 추측하는 것이다. 김순식은 후삼국의 마지막 대규모 전투였던 일리천 전투에 1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참여했을 만큼 강력한 호족이었다.[3] '예성강 유역'의 세력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름 그대로 평양 대동강 근처의 세력이라고 보는 주장 또한 존재하고, 고려 태조가 3번에 걸쳐 거듭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은 박지윤, 박수문, 박수경 부자의 평주 세력이 패강진 세력이라고 보는 관점 또한 존재한다.[4] 아자개는 기록상 농민 출신이지만, 기록에 나타난 여러 가지 정황상 평범한 농부 출신이라기보다는 촌주나 그에 준하는 정도의 부농으로 비정할 수 있다.[5] 이런 자들은 왕건이 신라에 대해 유화적 태도를 보이고 견훤은 조정을 업신여기자 대부분 고려 측에 붙게 된다.[6] 아무리 여자가 좋아도 굳이 정실을 29명이나 둘리가 없기 때문이다. 보통은 내명부의 기강을 잡기 위해서라도 정실 부인(=왕비)은 한 명만 두고 그 아래는 전부 후궁으로 퉁치게 마련인데 왕건은 정식 왕비가 29명이었다는 거다.[7] 대동강 이남을 경비하는 신라말의 유력 군진.[8] 신라의 옛 진골 귀족들 또한 고려 왕가와 유착된 경순왕계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경주 일대의 향리로 전락하여 고려에 대해 불만이 많있고 이 불만이 이어져 무신정권 시기 신라부흥운동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9] 오늘날 전해지는 많은 본관들의 시조 또는 중시조들은 광종 대에 과거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인물인 경우가 적지 않다. 호족들 중에서도 일찌감치 새로운 제도에 적응하여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인물들은 귀족 계층으로 편입되고 지방에 머물던 계층들은 향리가 되었다.[10] 대표적으로 고려 지방제 권위자인 경상대 윤경진 교수.[11] 나말 여초에 존재했던 경주의 호족으로 고려 태조 때 좌윤을 지냈으며 딸인 헌목대부인이 왕실과는 혼인관계를 맺게되어 왕비족이 된다. 그러나 평준 이후로는 경주 평씨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봐서는 왕권강화 과정에서 숙청된 것으로 여겨진다.[12] 왕규의 첫째, 둘째 딸은 태조의 15, 16번째 왕비가 되었고, 셋째 딸은 혜종의 두번째 왕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