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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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폴란드전, 미국전에 도움과 터키전에 골을 기록하는 등 4강신화에 큰 기여를 한 선수이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철도청 축구단 (1995~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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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중앙초등학교 때 축구에 입문, 강릉의 축구 명문 강릉중학교, 강릉상고를 졸업한 뒤 명지대학교 졸업,[2] 1995년 철도청 축구단에 입단한다.[3] 이을용은 철도청 축구단에서 1년 8개월여를 뛰고서 상무로 입대한다.
2.1.2. 부천 SK (1998~2002)
상무 제대 이후 1998년 부천 SK에 입단을 하면서[4] K리그 생활을 시작했다. 부천 SK의 윤정환-김기동-윤정춘-이을용이라는 황금 미드필더라인의 한 축을 맏으며, 좋은 활약을 펼치면서 유명해졌다.
2.1.3. 트라브존스포르 (2002~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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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대활약을 하고 단숨에 유럽 구단들의 주목을 받은 이을용은 당시 유럽 진출이 확실시 된 박지성, 송종국, 김남일, 이영표보다 먼저 터키의 트라브존스포르와 계약하여 월드컵 멤버 중 유럽 리그 진출 1호 선수가 된다. 초기에는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현지 적응 실패에다 부상까지 겹치며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부천 SK와 트라브존스포르 사이에 이적 분쟁으로 잡음이 끌어올랐으며, 결국 트라브존스포르로의 완전 이적이 무산되고, 이을용은 안양 LG 치타스로 이적한다.
이러한 잡음과는 달리 2002월드컵 3,4위전에서 터키와 우호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덕분인지 현지 팬들에게는 따듯한 환영을 받았던 듯 하다.
2.1.4. 안양 LG 치타스 (2003~2004)
안양 LG 치타스가 연고지를 서울로 옮겨 FC 서울로 이름을 바꿨을 때에도 남아서 활약했다.
2.1.5. 트라브존스포르 (2004~2006)
이후 2004년에 트라브존스포르로 재이적하여 지난번보다 좀더 괜찮은 활약을 펼쳤다. 터키 리그에선 1골과 20개 이상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꽤 좋은 활약을 펼쳤다. 당시 트라브존스포르의 감독을 맡고 있었던 바히드 할릴호지치와 잠시 함께한 적이 있다.
2.1.6. FC 서울 (2006~2008)
2006년 FC 서울로 재이적하여 2008년까지 활약하며 팀의 2008년 준우승에 공헌하였으며, 터키 시절 인연을 맺었던 세뇰 귀네슈가 감독으로 취임하자 팀의 주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 2009년 자신의 고향을 연고지로 하여 새롭게 창단된 강원 FC로 이적 후 베테랑이자 팀의 기둥으로 활약하였다.
2.1.7. 강원 FC (2008~2011)
2011년 강원의 부진 속에 주장을 맡고 있던 서동현이 2군으로 내려가며 주장 자리를 승계했다. 창단 시즌인 2009년 이후 2번째 주장직 선임. 현재 유소년 축구 교실을 여는 등 은퇴 이후를 준비하는 듯 하다. 그리고 2011 시즌 잔여 경기 3경기를 남겨놓은 10월 4일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했다.
강원에서는 첫 시즌 눈부신 활약을 보였으나 두 번째 시즌에서는 후보로 밀리기도 하는 등 굴곡이 있었다. 세 번째 시즌인 마지막 시즌에서도 중앙 미드필더를 두 명이나 용병으로 영입하는 등 팀의 플랜에 없어 보였으나 처참한 경기력이란 현실에 직면하자 결국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마지막 시즌의 모습을 보면 노련함, 수비력, 패스, 키핑, 드리블에선 군계일학이었으나, 활동량과 순발력, 스피드 등이 현저히 줄었고 그에 따라 빠른 역습에 대한 대처는 근본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좋은 킥이 있다고는 하지만 활동량과 스피드가 받쳐주지 않는 탓에 답답한 경기양상을 중거리슛으로 타개하기도 어려웠다. 은퇴가 임박한 선수가 다 그랬지만 양날의 검.
특히 팀을 리드해 줘야 될 고참이지만,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렇게 몸으로 막 부딪히는 호전적인 스타일이 아니고 소리치는 스타일도 아닌데다 활동량까지 떨어져서 팀원들의 전투의욕을 고취시키기 어려웠다. 기왕에 물러나는 만큼 강원 FC로서는 스타일 변화의 기회로 삼았으면... 어쨌든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수고 많았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 그래도 경기를 보면 중원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은 단연 이을용이었다. 마지막으로 선수생활을 한 강원 FC에서 코치 수업을 받고 있었다.
2.2. 대표팀 경력
2.2.1.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99~2006)
2.2.1.1. 허정무호 1기 시절 (1998~2000)
1999년에 대표팀에 처음으로 발탁되었으며 1999년 3월 28일 브라질과의 친선경기에서 데뷔를 하였다.[5] 이후에도 꾸준히 대표팀에 발탁되어 활약하게 된다.
2.2.1.2. 히딩크호 시절 (2001~2002)
2.2.1.2.1. 2002년 FIFA 한국/일본 월드컵
그가 국내에서 상당히 유명해진 계기는 뭐니뭐니해도 2002년 한일 월드컵이었는데, 당시 미드필더로써 활약하던 이을용은 폴란드와의 조별예선 경기에서 황선홍의 선제골을 정확히 어시스트했다[6] . 다만, 당시 축구를 지켜보던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 다음 경기인 미국전에서 페널티 킥을 실축했다는 것이 더 기억에 남아있다(...)[7][8] 그러나 그 경기에서 후반 프리킥[9] 으로 안정환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며 다행히 역적신세는 피했다. 또 최용수에게 날카로운 패스를 찔러넣어 결정적인 득점 찬스를 만드는 등 전반적인 경기력은 좋았다. 페널티 킥 실축 이후 경기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다. 스페인전은 김남일의 부상으로 교체 출전하였다.[10] 터키와의 3, 4위전에서는 전반 9분 그림같은 프리킥 골로 홍명보의 실수로 인한 실점을 만회했다.[11] 참고로 이을용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1골 2도움을 기록했는데 이는 한국 대표팀 최다 공격 포인트이자, 역대 월드컵 중 단일 대회 최대 공격 포인트다.
2.2.1.3. 코엘류호 시절 (2003~2004)
2.2.1.3.1. 2003년 EAFF 일본 동아시안컵
2003년 일본에서 열린 동아시안컵에서 이을용은 '''을용타'''라는 신조어를 만드는 사건을 일으킨다. 때는 12월 7일, 중국과의 경기 중 이을용의 코너킥을 유상철이 받아 넣어서 1-0으로 이기고 있었다. 중국의 리이 선수가 이을용 선수가 이전에 부상당했던 부위를 집중적으로 노리고 무리한 태클을 하며 들어오자 이에 빡친 나머지 오른손으로 뒤통수를 가격 했고 결국 퇴장당했다. 중국 선수는 태클로 이을용을 공격한것 때문에 옐로우 카드를, 이을용은 중국 선수 뒤통수를 때려서 레드 카드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두 팀의 몸싸움이 일어난것은 물론이다. 경기는 그대로 이어져 1-0 한국 승리.
2.2.1.4. 아드보카트호 시절 (2005~2006)
2.2.1.4.1. 2006년 FIFA 독일 월드컵
이후 대표팀에서는 조 본프레레 감독의 전술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발탁되지 못하다가[12] 2005년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취임한 후 다시 발탁되었다. 그러나 부상 때문에 첫 소집인 2005년 10월 A매치에서는 제외되었지만 곧바로 다음 11월 A매치 주간에 소집되어 세르비아 전에서 1년만에 복귀경기를 치렀다. 가나와의 평가전에서 골을 기록하고 독일 월드컵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다.
2.3. 기록
2.3.1. 부천 SK
- K리그 준우승 1회 : 2000
- 리그컵 우승 1회 : 2000
- 리그컵 준우승 2회 : 1998 (아디다스코리아컵, 필립모리스코리아컵)
2.3.2. 트라브존스포르
- 쉬페르리그 준우승 1회 : 2004-05
- 터키컵 우승 1회 : 2002-03
2.3.3. FC 서울
- K리그 준우승 1회 : 2008
2.3.4.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4위 : 2002
- 동아시안컵 우승 : 2003
2.3.5. 통산 성적
2.3.5.1. 국가대표
2017년 9월 5일 기준이다.
2.3.6. 주요 개인 수상
- 자황컵 체육대상 남자 최우수상 수상 : 2002
- 체육훈장 맹호장 : 2002
- 헬로! 풋볼 팬즈 어워즈 베스트 캡틴 : 2009
2.4. 플레이 스타일
'''아름다운 테크닉과 떨어지는 피지컬'''
부천 황금 미드필더진의 방점을 찍은 선수답게 아름다운 조율능력과 패싱력을 갖추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볼키핑 능력, 스피드가 준수했고 스태미너는 매우 좋았다. 왼발잡이로서 수비형 미드필더와 왼쪽 미드필더가 주포지션이고, 왼쪽 풀백, 중앙 미드필더도 소화가능해 국대에서도 이 포지션들을 소화하곤 했다. 왼발 킥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중앙 미드필더일 때는 볼배급을, 측면에 섰을 때는 크로스가 돋보였고, 국가대표팀에서는 프리킥을 떠맡다시피했다. 2002월드컵 터키전 환상적인 프리킥골이 대표적인 장면.여러 포지션을 소화가능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축구지능도 뛰어났다. 홍명보가 은퇴하고, 기성용이 없던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의 빌드업은 이을용의 몫이었다.
다만 신체적으로는 축구선수로서 평범한 키에 체격도 건장하지 못해 제공권과 경합능력이 좋지 않았다. 다양한 포지션을 볼 수 있고 뛰어난 킥 정확도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부족한 신체 능력이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해 2002년엔 '''유상철'''과 '''김남일'''에게 밀려 측면에서 활동했고 2006년에도 약간 왼쪽에 치우쳐서 (김정우의 커버를 받은 2010년 기성용처럼)김남일의 지원을 받았다. 수비시에도 좋은 축구지능과 투쟁심을 바탕으로 타이밍 좋게 압박들어가는 플레이는 잘했지만 직접적으로 부딪쳐 볼을 탈취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4백 체제에서 똑같이 볼 탈취와 경합능력에 약점이 있는 이영표를 왼쪽에 세울 경우 측면에 이을용과 이영표의 경합 능력 부족으로 측면이 약해졌다.
3. 지도자 경력
3.1. 코치 경력
3.1.1. 청주대학교 코치 (2015~2016)
2015년 1월 12일 청주대학교 축구부 코치로 부임하였다.[13] 이것 때문에 청춘 FC에서 청주대 축구팀이 상대팀으로 나오기도 했다. 여기서 지도자 이을용이 어떤사람인지를 알수있는데 엄할것 같은 인상과 달리 선수들을 신경쓰고 격려를 하고 섬세하게 챙겨주는 등 엄마스타일의 모습이다. 물론 쓴소리를 할때에는 거침없이한다.
3.1.2. FC 서울 2군 코치 (2016~2018)
이후 2016년 12월에 FC 서울에 2군 코치로 합류하면서 R리그에 출전하는 선수들을 지도하게 되었다. 2008년 이후 무려 8년 만의 복귀.
3.1.3. FC 서울 감독 대행 (2018)
2018년 4월 30일 황선홍 감독이 자진 사퇴하면서 감독대행 자리를 맡게 되었다. 감독대행직 수락 후 인터뷰의 타이틀은 '''서울의 자존심을 회복하겠다.'''
5월 2일 경남 FC전을 통해 감독대행으로 첫 경기를 치렀고, 0:0 무승부를 거두었다.
5월 5일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슈퍼매치이자 홈 데뷔전에서 안델손의 2골에 힘입어 2:1로 승리, 본인 감독대행 커리어에서 첫 번째 승리를 거두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김성재 코치, 박용호 코치, 백민철 GK 코치 등 이을용 본인을 포함해 전직 FC 서울 주장과 선수 출신들로 구성된 코칭스태프가 벤치에서 모두 뛰어나와 얼싸안는 장면이 이 경기의 백미.
이날 경기에서 이을용은 측면과 중앙 크랙을 통해 상대 수비라인을 파괴함으로서 스리백만 들었던 수원 삼성의 고질적인 약점을 잘 파고든 전략의 승리를 거두었다고 평가받는데, 이는 마치 최용수와 흡사했다고 한다.
이후 전북전 대패와 월드컵 휴식기 직후 대구전 무승부로 의문부호가 붙었지만, 7월 11일 포항 스틸러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상대와 비교가 되지 않는 활동량과 한 경기에서 좌우 측면 그리고 중앙 모두를 다 뛰었는데 모두 잘하는 고요한의 미친 활약, 그리고 상대 수비진의 불안에 힘입어 3:0 대승을 거뒀다. 경기 내내 전방 압박을 쉼 없이 했고 수비라인도 상당히 끌어올렸다. 다음 날 열린 미디어데이에서 '''홈경기는 무승부도 안 된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말을 남기며 울산 현대와의 경기를 앞두고 팬들을 기대케 하고 있다.
사실 구수해 보이는 옆집 삼촌 얼굴과 달리 을룡타라는 별명처럼 상당한 터프가이다. 또한, 팬들의 또 다른 기대는 현역 시절 터키 리그(트라브존스포르)에서 활동했을 때, 서울로 복귀했을 당시에도 세뇰 귀네슈가 감독이었으므로 FC 서울 팬들은 너무나도 갈망하는 귀네슈 축구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잠시간의 반등으로 인한 좋았던 분위기도 무색하게 추석연휴와 개천절이 지나서도 계속된 부진에 리그 순위는 9위로 떨어지며 스플릿 시스템 도입 후 첫 하위 스플릿이 확정되었다. 이대로가면 최악의 경우 강등권 추락까지 걱정해야되는 상황으로 이을용 감독 대행의 정식감독 승격은 사실상 무산 될 확률이 높았으며 결국 최용수가 돌아오면서 휴식에 들어갔다.
3.1.4. 제주 유나이티드 수석코치 (2019)
최용수가 서울로 돌아오면서 감독 대행에서 물러난 이후, 제주에서 수석코치 제안이 왔고 상견례를 마쳤다고 한다. 2019년 부터는 제주의 수석코치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다. 관련 기사
이을용 코치의 부임 후 FC 서울 출신의 김동우, 윤일록등이 제주로 온 것이 이을용 코치의 영향이라는 긍정적인 평이 있다.
5월 2일 조성환 감독이 사퇴하면서 서울에 이어 대행을 또 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됐다. 후임 감독을 하루빨리 선임하겠다고 했지만 다음 경기까지 남은 시간은 2~3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퇴 다음날인 5월 3일 최윤겸 감독이 선임되었다.
현재 필드에서의 지휘는 최 감독이 아니라 이을용 수석코치의 몫이다. 경남 FC에서 이영익 수석코치가 김종부 감독의 지시를 듣고 테크니컬 에어리어에 서서 선수들을 지도하는 것과 비슷한 역할인 듯.
2020 시즌, 남기일 감독 취임 이후 코치진을 새로 조각하면서 코칭스태프 명단에서 제외되어 팀을 떠난 듯 하다.#
4. 여담
- 이을용의 큰아들 이태석 군은 2006년에 KBS N 스포츠에서 방영했던 '날아라 슛돌이' 2기의 연습생으로 김병지의 둘째 아들 김산 군과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3기에서도 출연하여 이강인과 함께 뛰었고 4기 때에는 무려 주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 FC 서울의 유스팀(오산고등학교)에서 활약을 하고 있다. 월드컵둥이로 2002년생. 2018년 AFC U-16 챔피언쉽에 국대로 발탁되기도 했는데, 아버지처럼 왼발잡이 레프트 풀백이다.[14] 2019년 현재도 대한민국 U-17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뛰고 있고 2019 FIFA U-17 월드컵 브라질 선수단에 포함되었다. '이을용 아들' 이태석 "지투 왼발 못쓰게 했죠"…8강행에 한몫'
- 사적으로는 옛 동료 중 안정환과 절친하다. 같이 우리동네 예체능에 출연한 적도 있다. 거기에 아빠! 어디가? 시즌2 멤버인 안정환의 게스트로도 출연. 청춘 FC 헝그리 일레븐에서도 안정환의 요청에 쿨하게 화답하면서 공동 감독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위 캔 게임 1부인 'e런 축구는 처음이라'에서 축구 게임인 피파 온라인 4에 도전하면서 고군분투하며[15]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 마리텔에 상술된대로 이을용과 친했던 안정환이 출연하였을때 한 말에 의하면, 나이트 간 이야기를 하다가 이을용도 갔었냐고 묻자, 안정환은 둘다 어렵게 자랐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을용과 단둘이서 만날 때는 신림동 순대골목에서 2천원짜리 머릿고기와 막걸리 6병씩을 먹곤 했다고 말했다. 당시 채팅창에 "을용타는 나이트 입구에서 빠꾸 맞은 거 아니냐?"는 글이 올라오자, 안정환은 "놀 때 을용이가 겉돌지 않도록 챙겨줬다. (얼굴이 가려지도록) 챙이 구부러진 모자를 쓰도록 준비시켜서, 나이트 기도(손님 관리자)가 있는 쪽에 내가 서서 (이을용을) 가려주며 들어갔었다" "여러 층이 있는 나이트를 갈 때, 물갈이 때문에 을용이는 윗층에 가지 못하고 지하에 있었다."고 말했다. 이에 채팅창에서 "을용타 입구컷" "을용타 패키지행" "을용타 3급수행" 등 이을용을 놀리는 글들이 올라오고 이를 김성주가 읽어주자 다시 채팅창에 "이을용 상암 MBC 출발"이라는 글까지 올라왔는데 이에 안정환이 "정말 오는 거냐"며 당황했다.
- 레진 코믹스에 올라온 어게인 2002라는 만화에는 원래 잘생기지 않은 얼굴이나 작은 편인 체격은 물론 인상마저도 상당히 의기소침하게 그려놨고, 스페인 카마초 감독의 발언으로 이을용은 김남일보다 못하고 약한 선수라는 대사를 적어놓았다. 당시의 김남일은 경합 능력과 활동량, 파이팅과 더불어 맨마킹이 정말 뛰어났지만 이을용만한 조율능력과 킥, 패싱력은 없었고[16] 더군다나 이을용은 왼발잡이였다. 신체적 강인함은 김남일만 못했지만 압박의 타이밍을 알아서 수비력도 결코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다른 면에서 충분한 강점을 가지고 있어 중용되었다. 뭣보다 그 묘사는 이을용이 1골 2도움으로 안정환, 박지성과 더불어 한국 대표팀 월드컵 통산 최다 공격포인트 기록 보유자이자, 단일 월드컵 대회(2002) 최다 공격포인트 기록자라는 걸 간과한 것이었다.
- FC 서울 창단 30주년 기념 예체능 축구단과의 기념 경기에서 FC 서울 레전드팀의 일원으로 출전했다. 예체능측에서 을용타 장면을 다시 보여줬을 때 안절부절못했다.
- 2011년 방송된 손창민의 터키 여행 프로그램인 '올 댓 터키'에서 이을용을 기억하는 트라브존 팬과 손창민이 만나는 장면이 있다. 해당 영상 3분 11초 부터
5. 관련 문서
[1] 現 태백시, 태백시가 된 것은 1981년이다.[2] 이을용의 이런 경력 때문에 2002년 이후로는 강릉상고와 강릉농고에서 축구부로 있었던 모든 사람들의 롤모델의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3] 당시 철도청 감독이었던 이현창 현 이천 시민축구단 현 감독은 이을용의 축구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하나이다. 또한 실업축구단에서 회의에 빠졌을 때 힘을 준 인물이 김승희 현 인천 코레일 감독이다. 특히 이현창 감독은 이을용이 울산대에서 적응을 못하고 뛰쳐나왔을 때 직접 찾아다니며 축구를 계속하게 했고, 혼자 살면서 고생하는 이을용에게 김치와 이불, 전기장판을 챙기기까지 했다. 또한 입대하기 전까지 이을용의 월급을 직접 관리한 뒤에 이을용이 입대할 때에 천만원 가까이 들어있는 통장을 주면서 군대에 보냈을 정도로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 때문에 이을용은 이현창 감독이 아니었으면 축구선수 이을용은 없다고 본인이 말할 정도이고, 감독님이 아닌 아버지라고 말할 정도이다. #[4] 부천 SK 드래프트 2순위로 입단하였다. 본인은 자신이 1순위가 아닌 2순위인게 자존심이 상했다고... 당시 부천 SK의 1순위 지명은 곽경근이었다.[5] 당시의 국가대표팀 감독은 허카우터 허정무 감독이었다.[6] 뿐만 아니라 기계인간(...)과 충돌로 회복중이던 이영표의 왼쪽 사이드도 잘 지켰다. 폴란드의 크로스를 수차례 무산시켰고, 한번은 고간(...)으로 상대의 슛을 방어해내기도 했다. 당시 송재익 캐스터는 "'이을용 선수 큰일이예요, 아직 자식이 없어요."(...)라는 멘트를 날리기도. 미국전의 부진은 이날의 타격 때문일 것이다(...)라는 주장도 있었다. [7] 원래 페널티킥 담당키커 1순위는 박지성이었으나 부상으로 전반 중반에 교체아웃당하자 2순위였던 이을용에게 돌아가게 된 것이였다. 여담으로 이 때 이천수는 본인이 직접 차려고 했으나, 히딩크가 예정대로 이을용에게 차도록 했다.[8] 이후 안정환과 술마시면서 한 말이 '천수가 공에 손을 대서 부정이 타서 안들어갔다'라고 한다.[9] 그 프리킥을 따게 해 준 미국 선수가 다름아닌 미국의 명선수로 유명한 랜던 도노반이었다.[10] 다만 호아킨에게 자주 돌파당하며 수비적으로 고전했다.[11] 당초 이을용은 이영표의 백업 선수로 월드컵 무대를 밟았으나 이영표가 부상으로 1,2차전을 나오지 못하게 되자 선발 출전하게 되었다.[12] 을용타 사건이 원인이라는 의견도 있다. 을용타 항목 참조.[13] 감독으로 조민국 감독이 선임되었다.[14] 정확히는 약간의 차이점을 말한다면 아버지는 주 포지션은 수비형 혹은 왼쪽 미드필더이며 부 포지션으로 레프트백도 소화할 수 있는 것이고 아들은 주 포지션이 레프트백이다.[15] 처음에는 게임시작은 커녕 회원가입, 로그인 방법을 몰랐다.. 그래도 열심히 연습해 실력이 늘긴 했다.[16] 김남일도 그런 능력을 대표팀급으로 가지고 있는 선수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