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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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테니스 선수''' 겸 테니스 지도자. 한국 테니스의 레전드이다.
강원도 춘천에 위치한 이형택 테니스아카데미의 원장이며, 그리고 KBS N SPORTS, MBC SPORTS+의 테니스 해설위원이기도 하다. 아시아 선수가 성공하기 힘든 테니스에서 고군분투하며 대한민국 테니스의 자존심으로 활약한 선수였다. 오른손잡이이며 한손 백핸드를 구사하고, 하드 코트에 강한 특성을 보였다. 개인 세계 랭킹 최고 순위는 ATP 싱글 랭킹 36위(2007년 8월 6일), 복식 세계 랭킹 95위(2006년 1월 16일)로 단식과 복식에서 모두 세계 100위권 안에 들었던 수준급의 선수였고 선수 생활 때 온갖 한국 남자 테니스 사상 최초 기록과 최연소 기록을 세우던 선수였다.
한국 테니스계는 2009년 이형택 은퇴 이후 이형택의 공백을 메워줄 후계자 육성에 실패하면서 수년간의 긴 침체기에 빠졌다. 2015년에 들어서야 정현이 맹활약하기 시작하면서 이형택의 후계자가 등장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 테니스계에 이형택이란 존재는 한국 선수도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존재이면서 한편으로는 뛰어넘기 힘든 높은 기준이기도 했다.
2. 경력
3. 수상 내역
4. 통산 타이틀
5. 선수 시절
5.1. 메이저 대회
'''이형택의 연도별 메이저대회 성적표'''
5.2. 프로 전향~1999년
1995년 프로 전향 이후 1995년 4월에 한국의 서울에서 열린 ATP 투어 KAL컵 코리아 오픈 남자 단식에 주최 측이 초청한 본선 와일드카드를 받고 처음으로 ATP 투어 남자 단식 본선에 출전하여 본선 32강전(1회전)에서 국내 최강자이던 3년 선배 윤용일을 2-0(7-6<9-7>, 6-3)으로 꺾고 역시 처음으로 ATP 투어 남자 단식에서 16강에 진출하였다. 하지만 16강전에선 세계 랭킹 82위로 대회 8번 시드를 받은 그렉 루세드스키[9] (캐나다)에게 세트 스코어 0-2(4-6, 4-6)로 완패하여 탈락하였다.
1995년 5월에 한국 테니스 서킷(퓨처스 대회 전신) 1차 대회 남자 단식에서 '''만 19세 4개월의 나이로 퓨처스급 대회 첫 우승'''을 달성했다. 1995년 10월엔 한국의 서울에서 개최된 서울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에 출전해서 4강에 진출하면서 이형택 자신의 세계 랭킹 최고 순위 기록인 280위를 돌파하여 세계 랭킹 244위까지 세계 랭킹 순위를 상승시켰다.
이형택은 1995년에 테니스 서킷 대회 남자 단식 우승은 1번이었으나 4강에도 여러 번 올라갔고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에서도 1번 4강에 진출하면서 1995년 연말 세계 랭킹 순위는 241위로 프로로 전향한 지 1년도 안 되어 국내 선수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다. 물론 이형택이 국내 선수들 중에서 독주한 것은 아니며 1999년까지는 3년 선배인 윤용일과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였다.
1996년 4월에 이형택은 한국의 서울에서 열린 ATP 투어 KAL컵 코리아 오픈 남자 단식에 주최측이 초청한 본선 와일드카드를 받고 본선에 출전하였으나 본선 32강전(1회전)에서 세계 랭킹 111위인 알렉스 라둘레스쿠(독일)에게 세트 스코어 1-2(3-6, 6-3, 1-6)로 패하여 탈락하였다. 그리고 1996년 9월에 이형택은 중국의 베이징에서 개최된 베이징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에 출전하여 4강에 올랐다.
이형택은 1998년 5월 말에서 한국에서 열린 '''한국 1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 우승'''하였고 연이어 6월 초에 열린 '''한국 2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도 우승'''하였다. 그리고 이형택은 캐나다로 출국하여 6월 말에 캐나다의 퀘벡에서 개최된 '''캐나다 2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도 우승'''하고, 연이어 7월 초에 역시 캐나다의 퀘벡에서 열린 '''캐나다 3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도 우승'''을 달성했다.
이렇게 이형택은 2달 동안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 4연속 우승을 거두었고 1998년 8월엔 미국 켄터키 주 렉싱턴에서 개최된 FTB 클래식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에 출전하여 처음으로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에 결승전에 올라 준우승하였다. 1998년 8월 말엔 그랜드슬램 대회인 US 오픈 남자 단식 예선전에 출전했으나 예선전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1998년 10월에 이형택은 일본에서 열린 '''일본 4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도 우승'''하였다. 여기에 이형택은 1998년 12월에는 태국의 방콕에서 개최된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남자 테니스 단체전에서 한국팀의 일원으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받음으로서 군면제 혜택을 받게 되었다.
1999년 3월에 이형택은 일본의 이사와에서 열린 '''일본 1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 우승'''하였고 1999년 5월초에는 중국의 베이징에서 개최된 '''중국 1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 우승'''하였으며 5월 중순에 중국의 톈진에서 열린 '''중국 2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도 우승'''하였다. 1999년 5월 말에 한국의 서울에서 개최된 코리아 2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선 준우승하였다. 이렇게 이형택은 3개월 동안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 우승 3회와 준우승 1회를 거두면서 1999년 6월 초엔 세계 랭킹 199위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세계 랭킹 200위 안에 진입'''하였다.
1999년 9월에 이형택은 영국의 본머스에서 개최된 ATP 투어 브라이턴 오픈 남자 단식에 주최 측이 제공한 와일드카드를 받고 본선에 출전하였으나 본선 32강전(1회전)에서 세계 랭킹 48위로 대회 5번 시드를 받은 스테판 쿠벡(오스트리아)에게 세트 스코어 0-2(4-6, 6-7<4-7>)로 완패하였다.
1999년 10월초에는 중국의 상하이에서 열린 ATP 투어 하이네켄 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한 이형택은 세계 랭킹이 288위였기에 예선전부터 출전하였는데 예선 3라운드를 모두 통과하며 본선에 진출하였다. ATP 투어 하이네켄 오픈 남자 단식 본선 32강전(1회전)에선 세계랭킹 100위인 라몬 델가도(파라과이)를 2-1(3-6, 6-4, 6-2)로 꺾고 16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16강전에선 세계 랭킹 153위인 토드 우드브리지(호주)와 풀세트 접전을 벌였으나 결국 세트 스코어 1-2(7-5, 2-6, 6-7<8-10>)로 아깝게 역전패하여 탈락하고 말았다.
1999년 10월말에 이형택은 일본의 오사카에서 개최된 '''일본 5차 퓨처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 우승'''하였다. 그리고 이형택은 1999년 11월에는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열린 요코하마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에서 우승함으로서 이형택에게 있어 '''통산 첫 챌린저 대회 남자 단식 우승'''을 만 23세 10개월의 나이로 해냈다. 그리고 이 우승으로 이형택은 세계 랭킹 190위까지 올라서며 자신의 세계 랭킹 최고 순위 기록도 경신하였다.
5.3. 2000년
이형택/2000년 항목으로
5.4. 2001년
이형택/2001년 항목으로
5.5. 2002년
이형택/2002년 항목으로
5.6. 2003년
이형택/2003년 항목으로
5.7. 2004년
이형택/2004년 항목으로
5.8. 2005년
이형택/2005년 항목으로
5.9. 2006년
이형택/2006년 항목으로
5.10. 2007년
이형택/2007년 항목으로
5.11. 2008년
이형택/2008년 항목으로
5.12. 2009년
2009년 1월 첫째주에 인도의 첸나이에서 열린 ATP 투어 첸나이 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한 이형택은 본선 자동 출전권을 받아서 본선에 출전하였으나 본선 32강전(1회전)에서 세계 랭킹 55위로 대회 8번 시드를 받은 마르셀 그라노예르스(스페인)에게 세트 스코어 0-2(4-6, 5-7)로 완패하여 탈락하고 말았다.
2009년 1월 세째주에 호주 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 신청할 때의 이형택의 세계 랭킹이 107위여서 본선 자동 출전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형택은 예선전부터 나섰으나 예선 1라운드에서 패하여 탈락하였다.
2009년 투어 초반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왼쪽 무릎 부상 여파로 좋지 못한 컨디션이었던 이형택은 최악의 부진에 빠지면서 2009년을 마지막 시즌으로 은퇴를 결심하는데 2009년 5월에 열린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과 2009년 6월에 열린 윔블던 남자 단식에 출전하기 위해 치료에 전념하였으나 결국 왼쪽 무릎 부상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손목 통증까지 겹치자 예선전 출전을 포기했다.
부상 여파가 지속되면서 결국 이형택은 상당수 대회 출전을 포기하고 2009년 7월에 열린 데이비스컵, 2009년 10월에 열린 삼성증권배 챌린저 투어 남자 대회에만 출전한 후 2009년 11월 공식 은퇴하게 되었는데 이형택이 현역 선수로 달성한 커리어는 '''세계 랭킹 최고 36위''',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16강(4회전) 진출 2회''',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32강(3회전) 진출 4회''', '''마스터스 시리즈 남자 단식 16강 진출 3회''', '''ATP 투어 남자 단식 우승 1회''', '''ATP 투어 남자 단식 준우승 1회''', '''ATP 투어 남자 단식 4강 진출 5회'''[10] ,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 우승 13회'''[11] 를 기록하였다. 현역 선수로 달성한 커리어로 보면 레전드였던 한국 테니스 선수라고 할 수 있다.
6. 은퇴 이후, 그리고 현역 복귀
2009년 11월 1일 은퇴식을 갖고 선수 생활에서 물러났다. 이후 춘천에 이형택 테니스 아카데미를 열고 테니스 유망주들을 길러내고 있으며, KBS N 스포츠의 해설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런데 2013년 5월 현역 복귀를 선언하며 코트로 돌아왔다! 9월 한국선수권대회를 정식 복귀 무대로 보고 있다고. 이번 복귀는 이형택이 만37살의 나이에 복귀를 선언할 때까지도 이형택 이상의 선수를 키워내지 못한 한국 테니스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올 것 으로 보인다. 경향신문 인터뷰 테니스 코리아 인터뷰
이후엔 주로 코치에 전념하면서 복식경기를 병행중. 2015년 3월엔, 유망주 홍성찬 선수의 전담코치를 하며 홍성찬 선수와 퓨처스대회에 나가 1회전에서 톱시드 복식조를 꺾기도 했다.
2015년 MBC SPORTS+에서 중계방송된 국제 프리미어 테니스리그 대회에서 해설을 맡았으며, 2016년 대회에서도 해설을 맡았다.
2016년에 다시 KBS N SPORTS의 해설위원으로 복귀했다.
2019년 8월 13일부터 아프리카TV에서 개인 방송을 시작했다. 닉네임은 머드Lee형택. 첫 방송은 간단한 토크 방송으로 캐스터안의 도움으로 진행되었으며 캐스터안의 팬들이 이형택의 방송 런칭을 축하하며 별풍선을 많이 쏴주기도 했다. 본인은 차후 테니스 방송 및 유튜브도 할 예정이라고 한다.
7. 커리어 평가
아시아, 특히 테니스 불모지 출신으로 세계랭킹 40~100위대를 유지했던 투어 중견급 선수였다. 꾸준히 해외 무대에서 뛰었다면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겠지만 데이비스 컵, 아시안 게임, 올림픽 등 '''국가대표로 대회 출전하는 것을 종목불문 중요시하는 한국 스포츠계의 풍토 때문에''' 실제 선수 커리어에 도움이 안되는 종합 대회, 단체전에 매번 차출되어 나갔고, 국내의 낮은 저변 확대를 위해 국내 대회에 강제로 출전해야 했던 것 등 때문에 세계 랭킹 순위 관리가 힘들어 더 올라갈 기회를 놓치고 아쉽게 커리어를 마감한 케이스이다.
게다가 이형택의 본격적인 해외 원정 투어 여행도 외국 선수들과 비교해선 늦은 편이었다. 이형택의 프로 전향은 1995년에 했다고 나와있지만 이형택이 실제 해외 원정 투어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것은 이형택 본인이 2016년에 테니스코리아 잡지에 기고한 칼럼에 따르면 대학 졸업 후에서야 본격적으로 해외 원정 투어를 시작했다고 한다. 다른 나라 프로 테니스 선수들이 빠르면 주니어 연령 막바지 시기나 늦어도 시니어 연령 초창기에 본격적으로 해외 투어를 도는 활동을 시작하는 것과 비교하면 이형택은 거의 5년 정도 늦게 해외 원정 투어를 다니기 시작한 것으로 이형택이 보다 빨리 해외 원정 투어를 시작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커리어를 쌓고 은퇴했을 수도 있다.
이런저런 면에서 한국 테니스 환경에서 나오기엔 굉장히 뛰어난 테니스 선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1998년에 자신이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테니스 단체전 금메달로 병역혜택을 받은 뒤,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테니스 단체전에서 한국팀의 주역으로 맹활약해 금메달을 따내며 전웅선, 김선용 등 후배 테니스 선수들의 합법적 병역 브로커 역할을 해준 건 천만 다행(...). 이형택이 은퇴한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은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이후 처음으로 테니스 종목에서 노골드에 그쳤다. 이형택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12]
이형택 선수가 아시아에서 최상급(3손가락)에 들었던 건 맞지만 태국의 테니스 영웅인 파라돈 스리차판[13] 을 넘진 못했다. 이형택이 스리차판에게 상대 전적도 밀리고, 아시안 게임 남자 단식 결승에서도 이형택이 스리차판에게 패배를 기록했다. 그리고 스리차판 외에 대만의 루옌순[14] 이나 일본의 마츠오카 슈조 등도 투어 대회에서 거뒀던 실적으론 이형택과 맞먹는다.[15]
그리고 201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세대인 니시코리 케이는 2014년 시즌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면서 스리차판의 커리어를 넘어섰다고 평가받는다. 다만 스리차판은 전성기 시절에 포스가 굉장했으나 전성기가 굉장히 짧았고 은퇴후엔 연예계 활동이나 타종목 외도(레이싱이나 골프 등)에 힘쓰고 있어서 자국내 테니스계에 남기는 업적으론 이형택 선수가 더 높은게 사실이다. 이형택급의 실적을 기록한 선수가 대만과 일본에도 있다곤 하나 그 나라에서 테니스 영웅으로 대접받는 극소수기도 하고. 한국 테니스계에 있어서 이형택이 전무후무한 존재란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한국 남자 테니스계는 이형택이 은퇴한 후 5년이 넘게 이형택의 뒤를 이을 선수들을 육성하지 못하다가 2015년에야 정현이 등장하여 이형택 이후 한국 테니스 남자 선수로는 처음으로 세계 랭킹 100위 안에 진입하였고 정현은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에도 한국 테니스 선수로는 이형택 이후 처음으로 출전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형택이 쌓은 커리어를 정현이 따라잡으려면 상당한 기간 동안 정현이 꾸준한 기량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현은 2018년 1월 그랜드슬램인 호주 오픈에서 노박 조코비치를 3-0으로 이기며 이형택이 이룬 그랜드슬램 16강을 넘어선 8강 진출을 이뤄냈고, 이어 8강에서 테니스 샌드그렌까지 격파하고 4강에 오르며 이형택의 최고 랭킹이었던 36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
8. 기타 활동
- 2014년 KBS 2TV의 오락프로그렘 우리동네 예체능 테니스편에 코치로 고정 출연하였다. TV 오락프로그램 첫 출연이었다. 한편 당시 해당 프로그램의 여자코치는 가수 윤종신의 아내인 전미라 전 테니스 선수였다. 한편 2015에는 동 프로그램의 족구편에도 잠깐 출연한 적이 있다.
- 테니스코리아에 투고하는 테니스 칼럼이 네이버기사로 올라온다. 테니스 세계랭킹 100위 안에 들면 생기는 특전과 함께 한국의 열악한 선수풀을 이야기하며 '우리나라에는 롤모델로 삼을 만한 인물이 없다'고 했는데, 많은 네티즌들이 '이형택 선수 무시하나?'라고 생각했지만, 글쓴이가 이형택 본인이었다는 걸 알고 할 말을 잃기도 했다.(...) 곧 정현이 등장하며 옛말이 되었지만.여담으로 정현에게 신경 많이 쓰는걸로 보인다.
- 2019년 JTBC 뭉쳐야 찬다의 '어쩌다FC' 멤버로 5화부터 출연했었다.
- 2021년 2월 7일부터 뭉쳐야 쏜다 - 전설들의 농구대잔치에 출연한다
- 체육훈장 맹호장 수훈자다.[16]
- 뭉쳐야 찬다 2019년 11월 24일 방영분에서 자신이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빵과 우유를 준다고 해서 였다고 밝혔다.
- 여담으로 비흡연자다.
- 미래통합당 대표였던 황교안과 테니스를 쳐서 진 적 있다고 한다. 물론 제대로 했다간 일반인인 황교안이 다치므로 설렁설렁 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 별명은 불편한 형택씨,머드리 등 꽤 웃긴 별명들을 가지고 있다.처음에는 형택씨라는 호칭을 불편해했으나 별명화된 이후에는 그냥 웃어 넘기는 모양이며 심지어 인스타그램 해시태그에도 사용한다.[17]
- 예능에서의 깐죽깐죽거리는 머드리 이미지[18] 와는 별개로 평소에는 굉장히 진지하고 해야 할 건 다하는 성격인듯 하다.실제로 안정환과의 면담을 자진하여 하기도 했으며[19] 미국 집에서도 축구 연습을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 2020년 3월, 이형택의 아내가 인스타그램 통해 손소독제를 코로나 19 확산 이전보다 20배 높은 가격으로 사업자등록 없이 한국, 미국에 판매했다는 의혹이 있다. 언론에서 몇몇 경우를 과장했다는 주장도 있어서, 아직 좀 더 알아보아야 한다. 물론 본인 잘못은 아니지만 이미지 하락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9. 참고 링크
[1] 94학번 , 당시 체육특기자들은 지금과 달리 학과 선택 자유가 있었기에 여기저기 많이 선택했다.물론 수업은 학교에 따라 가기도 했지만 아무도 안 들어갔다고.[2] 2004년 대학원에 진학해 2007년 졸업했다.[3] 프로필상 179이며. 뭉쳐야 찬다 2020년 02월 02일 방영분에서 177로 측정되었다.단 키가 준 것이 아니라 운동선수들은 거의 신발을 신고 신장측정을 해서 그런 것이다.[4] 현역 시절에는 81kg이고 뭉찬 20200202에서 82로 측정[5]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단체)
훈련소는 메이커로 유명한 이기자 부대 신교대를 나왔다.
그래서인지 백골부대 원정갈 때 군대 얘기를 잘 하는 모습이다.[6] 캠퍼스 커플이며 동갑이지만 이형택이 빠른년생으로 학번이 빨라서 오빠라고 부른다고 한다. 무용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다.[7] 막내딸 이미나가 유튜브 채널에 나왔다. 딸과 닌텐도 스위치 게임인 마리오 스포츠 테니스 대결에서 여느 아버지가 그렇듯 딸을 봐주지 않고 이겨 특유의 깝죽대는 모습을 보였다. [8] 벨라루스공화국의 블라디미르 볼치코프와 팀을 이루었다.[9] 1991년에 프로로 전환하여 2007년에 은퇴하였고 1997년에는 세계 랭킹 최고 순위 4위까지 기록하였으며 전성기는 1997년부터 1999년까지였던 선수로 1995년 ATP 투어 KAL컵 코리아 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할 무렵에는 ATP 투어 남자 단식 우승 1회, 준우승 1회를 기록중인 젊은 선수였다. 특이점으로 1995년 ATP 투어 KAL컵 코리아 오픈 남자 단식 우승 직후인 1995년 5월에 어머니의 모국인 영국 측의 집요한 설득으로 캐나다 국적을 버리고 영국으로 귀화하였다. 은퇴 시의 통산 주요 성적은 1997년 US 오픈 남자 단식 준우승, 1997년 윔블던 남자 단식 8강 진출, 1998년 마스터스 파리 오픈 남자 단식 우승, 마스터즈 시리즈 남자 단식 4강 진출 2회, ATP 투어 남자 단식은 우승 13회, 준우승 10회를 기록한 선수이다.[10] ATP 투어 남자 단식 우승 1번과 ATP 투어 남자 단식 준우승 1번을 포함하면 ATP 투어 남자 단식 4강 이상을 7번 올라간 것이 된다.[11] 이형택이 달성한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 우승 13회 기록도 한국 남자 테니스 선수 사상 역대 최다 우승 기록이다.[12] 다행히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선 한국 선수들이 테니스 남자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냈다.[13] 니시코리 케이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아시아 최고의 남자 테니스 선수를 꼽는다면 파라돈 스리차판을 꼽았다. 스리차판은 1997년에 프로로 데뷔하였고 2001년까진 이형택과의 대결에서 눌렸지만 스리차판의 전성기가 시작된 2002년 이후엔 이형택을 압도하였으며 스리차판의 전성기 기간은 2002년부터 2006년까지였다. 니시코리 케이 이전의 아시아 최고의 남자 테니스 선수답게 2003년에 아시아 국적 선수로는 세계 랭킹 최고 순위인 9위를 기록하였으며 2010년 은퇴 때까지 ATP 투어 남자 단식 통산 우승 5회, 준우승 6회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은 1번도 8강에 진출하지 못했고 마스터스 시리즈 남자 단식에서 거둔 성적도 4강 진출 3회를 기록하여 세계 랭킹 최고 순위 기록에 비해 큰 대회에선 성적이 부진한 편이었다.[14] 2001년에 프로에 데뷔하여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최고 성적은 2010년 윔블던 남자 단식 8강 진출, ATP 월드 투어 남자 단식에서 기록한 최고 성적은 2014년 ATP 월드 투어 오클랜드 오픈 남자 단식 준우승, 그리고 ATP 월드 투어보다 한단계 아래인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에선 무려 29번의 우승을 달성하여 역대 최다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 우승자이며 2010년에 세계 랭킹 최고 순위 33위를 기록한 대만 남자 테니스 선수 중 역대 최고의 선수.[15] 이들의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최고성적은 모두 8강 진출로 이형택보다 살짝 위지만 대신 이형택은 루옌순이 못한 투어 남자 단식 우승을 기록한 점, 물론 마츠오카 슈조의 경우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8강 진출 성적은 물론이고 투어 남자 단식에서 우승 1회, 준우승 2회를 기록하여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16강 진출에 투어 남자 단식 우승 1회, 준우승 1회인 이형택보다 마츠오카 슈조의 성적이 약간 위지만 대신 이형택은 마츠오카 슈조와 달리 투어 대회에 출전한 8년간 꾸준히 투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며 세계 랭킹 순위를 꾸준히 70위 이내의 위치를 유지하였고 여기다 마츠오카 슈조가 못한 세계 랭킹 순위 40위 안에 들어간 것을 고려하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16] 같은 어쩌다 FC 멤버인 이봉주,진종오는 청룡장,안정환은 맹호장이 있다.[17] 근데 본인말고 그 해시태그를 쓴 사람이 아직까지 없다...[18] 와이프의 증언으로 봤을때 실제 성격도 깐죽대는듯 하다.더 무서운건 뭉찬에서 깐죽대는건 집에서 깐죽대는 거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고.[19] 여기서 조언을 들었는데 밤에 바로 나가서 들은걸 그대로 연습했다.우연의 일치인지 그냥 편한 곳에서 한 것인지 하필 테니스장(....)
훈련소는 메이커로 유명한 이기자 부대 신교대를 나왔다.
그래서인지 백골부대 원정갈 때 군대 얘기를 잘 하는 모습이다.[6] 캠퍼스 커플이며 동갑이지만 이형택이 빠른년생으로 학번이 빨라서 오빠라고 부른다고 한다. 무용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다.[7] 막내딸 이미나가 유튜브 채널에 나왔다. 딸과 닌텐도 스위치 게임인 마리오 스포츠 테니스 대결에서 여느 아버지가 그렇듯 딸을 봐주지 않고 이겨 특유의 깝죽대는 모습을 보였다. [8] 벨라루스공화국의 블라디미르 볼치코프와 팀을 이루었다.[9] 1991년에 프로로 전환하여 2007년에 은퇴하였고 1997년에는 세계 랭킹 최고 순위 4위까지 기록하였으며 전성기는 1997년부터 1999년까지였던 선수로 1995년 ATP 투어 KAL컵 코리아 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할 무렵에는 ATP 투어 남자 단식 우승 1회, 준우승 1회를 기록중인 젊은 선수였다. 특이점으로 1995년 ATP 투어 KAL컵 코리아 오픈 남자 단식 우승 직후인 1995년 5월에 어머니의 모국인 영국 측의 집요한 설득으로 캐나다 국적을 버리고 영국으로 귀화하였다. 은퇴 시의 통산 주요 성적은 1997년 US 오픈 남자 단식 준우승, 1997년 윔블던 남자 단식 8강 진출, 1998년 마스터스 파리 오픈 남자 단식 우승, 마스터즈 시리즈 남자 단식 4강 진출 2회, ATP 투어 남자 단식은 우승 13회, 준우승 10회를 기록한 선수이다.[10] ATP 투어 남자 단식 우승 1번과 ATP 투어 남자 단식 준우승 1번을 포함하면 ATP 투어 남자 단식 4강 이상을 7번 올라간 것이 된다.[11] 이형택이 달성한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 우승 13회 기록도 한국 남자 테니스 선수 사상 역대 최다 우승 기록이다.[12] 다행히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선 한국 선수들이 테니스 남자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냈다.[13] 니시코리 케이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아시아 최고의 남자 테니스 선수를 꼽는다면 파라돈 스리차판을 꼽았다. 스리차판은 1997년에 프로로 데뷔하였고 2001년까진 이형택과의 대결에서 눌렸지만 스리차판의 전성기가 시작된 2002년 이후엔 이형택을 압도하였으며 스리차판의 전성기 기간은 2002년부터 2006년까지였다. 니시코리 케이 이전의 아시아 최고의 남자 테니스 선수답게 2003년에 아시아 국적 선수로는 세계 랭킹 최고 순위인 9위를 기록하였으며 2010년 은퇴 때까지 ATP 투어 남자 단식 통산 우승 5회, 준우승 6회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은 1번도 8강에 진출하지 못했고 마스터스 시리즈 남자 단식에서 거둔 성적도 4강 진출 3회를 기록하여 세계 랭킹 최고 순위 기록에 비해 큰 대회에선 성적이 부진한 편이었다.[14] 2001년에 프로에 데뷔하여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최고 성적은 2010년 윔블던 남자 단식 8강 진출, ATP 월드 투어 남자 단식에서 기록한 최고 성적은 2014년 ATP 월드 투어 오클랜드 오픈 남자 단식 준우승, 그리고 ATP 월드 투어보다 한단계 아래인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에선 무려 29번의 우승을 달성하여 역대 최다 챌린저 투어 남자 단식 우승자이며 2010년에 세계 랭킹 최고 순위 33위를 기록한 대만 남자 테니스 선수 중 역대 최고의 선수.[15] 이들의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최고성적은 모두 8강 진출로 이형택보다 살짝 위지만 대신 이형택은 루옌순이 못한 투어 남자 단식 우승을 기록한 점, 물론 마츠오카 슈조의 경우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8강 진출 성적은 물론이고 투어 남자 단식에서 우승 1회, 준우승 2회를 기록하여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16강 진출에 투어 남자 단식 우승 1회, 준우승 1회인 이형택보다 마츠오카 슈조의 성적이 약간 위지만 대신 이형택은 마츠오카 슈조와 달리 투어 대회에 출전한 8년간 꾸준히 투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며 세계 랭킹 순위를 꾸준히 70위 이내의 위치를 유지하였고 여기다 마츠오카 슈조가 못한 세계 랭킹 순위 40위 안에 들어간 것을 고려하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16] 같은 어쩌다 FC 멤버인 이봉주,진종오는 청룡장,안정환은 맹호장이 있다.[17] 근데 본인말고 그 해시태그를 쓴 사람이 아직까지 없다...[18] 와이프의 증언으로 봤을때 실제 성격도 깐죽대는듯 하다.더 무서운건 뭉찬에서 깐죽대는건 집에서 깐죽대는 거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고.[19] 여기서 조언을 들었는데 밤에 바로 나가서 들은걸 그대로 연습했다.우연의 일치인지 그냥 편한 곳에서 한 것인지 하필 테니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