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사원 집단자살사건

 



1. 개요
2. 전말
2.1. 사이비 종교의 등장
2.2. 존스의 왕국
2.3. 희대의 학살극
2.3.1. 살아남은 사람들
2.4. 자살인가, 타살인가?
3. 사건 이후
4. 그 외
5. 관련 문서


1. 개요


1978년 11월 18일 남아메리카 가이아나 존스 타운에서 벌어진 미국의 사회주의 목사 짐 존스가 창시한 사이비 종교 인민사원의 집단자살사건.
외국에서는 이 사건이 벌어진 곳의 이름을 따서 ''''존스타운 대학살(Jonestown Massacre)''''이라고 부르고 있다.
사망자 수 '''918'''명, 생존자 약 25명. 자세한 사망자 및 생존자 목록은 이 사이트로. # 아래에도 언급되지만 정확히 표현하면 '''집단 자살 및 대량 살인 사건'''이다.
관련 이미지 모음. '''수많은 시신 사진이 등장하니 열람에 주의를 요한다.'''[1]

2. 전말



2.1. 사이비 종교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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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워런 존스1931년 미국 인디애나 주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사회주의기독교 관련 서적을 읽으며 그 사상들에 심취한 존스는 인디애나폴리스의 로럴 스트리트 예배당에서 설교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목회 활동에 나섰다. 존스의 주장은 인종 통합(인종차별 반대), 사회정의, 평등, 자유, 빈민구제 등의 바람직한 가치들을 함유하고 있었고 존스 자신의 카리스마도 굉장했기에 곧 많은 사람들이 존스를 따랐다. 이후 존스는 몇 명의 신도들을 이끌고 '해방의 날개' 라는 조직을 창설했다.
존스는 자기애성 성격장애 혹은 반사회성 성격장애 중 하나 혹은 둘 다 심각한 수준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자기애가 강한 덕분에 강력한 카리스마로 이해될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인다. 같은 정신병을 가진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지도자로 활약하고 있다. 자기애적 성격장애자로써의 존스는 사회주의나 기독교 등을 다른 사람을 낚는 도구로 이용했을 뿐이지 실제로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사회주의와 기독교를 합쳐서 자기 캐릭터로 이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 둘 다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사회정의와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적 요소와 빈민구제와 박애를 주장하는 기독교적 요소로 자신을 치장해 남을 낚기 위해 이용한 것이다.
존스는 체계적인 신학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이러한 영향력 있는 행동 때문에 개방적인 개신교 교단 중 하나인 '그리스도의 제자회'가 존스에게 목사 안수를 주고 자신들의 교파로 포함시켰다. 그러나 여느 사이비 종교가 그렇듯이 세력이 커지자 존스는 차츰차츰 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실 라들을 비롯한 몇몇 주변 인물들은 이전부터 존스의 위험성을 잘 알았다고 한다.

2.2. 존스의 왕국


존스는 조직명을 '인민사원 완전 복음 그리스도교회(Peoples Temple Christian Church Full Gospel)'로 개명하고 70여 가구의 사람들을 캘리포니아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공산주의 사상과 초기 기독교 신도들의 사상을 따라 신도들의 소득, 부동산, 보험금 등의 자산을 사원에 바쳐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나눠 가지도록 했다.[2] 여기까지는 그래도 용납 가능한 범위였지만 신도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고, 사회에서도 이 요상한 종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카메라를 들이대기 시작하자 존스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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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인민사원은 남아메리카 가이아나의 토지를 구입했고, 아예 미국을 떠나 그곳에 마을을 꾸리고 정착했다.[3] 이 '존스타운'이란 자신만의 왕국에서 짐 존스는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존스는 미국 사회와 기독교를 공공연하게 '자본주의 제국주의'라 비난하고 신도들을 선동하며 스스로를 신격화했다.
당시 가이아나 정부가 주권침해 가능성이 높은 미국인 마을을 묵인해준 이유를 두고 배리 캐넌(전 미국 대사) 등 정부인사가 한 증언에 따르면, 당시 가이아나는 베네수엘라 정부와 영토갈등을 빚는 상황이었는데[4] 베네수엘라 국경 근처의 미국인 마을이 베네수엘라의 공격을 막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신도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마을 밖으로 나가면 독사와 원주민들 때문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하면서 무장 경비병들을 마을 근처에 세우고 감시를 시키기까지 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서 농작물이나 다른 작업에 대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거나 조금이라도 불만을 품을 시 가차없이 구타와 정신적 학대를 했다고 한다. 신도들, 심지어 가족들 사이에서도 서로 감시하며 존스타운에 대한 적대적 자세가 보이면 짐 존스와 간부들에게 보고를 했다. 생존자인 레슬리 윌슨이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자신은 감시체제로 인해 당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부모와 형제들에게도 밝힐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5]

2.3. 희대의 학살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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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 라이언 하원의원
결국 존스 타운에 갇혀있는 신도들의 안전을 염려한 미국 본토에 있는 가족들의 항의로 캘리포니아 출신 리오 라이언 하원의원[6]이 진상조사를 위해 가이아나로 떠났다. '''그러나 이 방문은 존스 타운의 사람들을 해방시키기는커녕 끔찍한 결말을 부르고 말았다.'''
1978년 11월 17일 가이아나 시간으로 아침 리오 라이언 의원과 조사단, 기자단들은 비행기를 타고 존스타운을 방문했다. 당시 짐 존스는 조사단을 속이기 위해 신도들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것처럼 꾸미고 거짓증언을 하도록 강요했으며, 처음에 라이언 의원도 신도들이 행복해보인다며 속아넘어갔다.
그런데 버논 고스니라는 신도가 존스타운의 실상을 적은 쪽지를 짐 존스와 그의 하수인들이 보는 시선을 피해 조사단원인 NBC 기자 돈 해리스에게 전달하여 라이언 의원과 조사단들도 실상을 알게 되었다. 18일 아침 조사단이 조사를 하러 온 가운데 신도 한 명이 "존스타운에서 빠져나가게 해달라."라고 말했고, 이후 조사단원이던 NBC 기자 돈 해리스가 신도들을 영상 인터뷰를 했는데 대부분의 신도들은 존스타운에 대해 행복하다, 살기 좋다는 말만 하지만 표정을 보면 존스의 보복이 있을까봐 불안해하는 모습이 드러나 있었다.
그 후, 패트리샤 파크스라는 신도가 라이언 의원의 법률고문이던 재키 스피어에게 가족들과 미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면서 돌아가겠다는 입장을 밝힌 사람이 늘어났으며, 인민사원 내부는 발칵 뒤집혀 교주인 존스와 간부들은 당혹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귀국 의사를 밝힌 15명의 신도들과 면담을 하고, 미국으로 보내주기로 결정하면서 15명이 조사단을 따라 존스타운을 빠져나가기로 되어있었다.
사원 내부의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던 돈 해리스가 급히 짐 존스에게 실상이 적힌 쪽지를 보여주며 묻자, 심각한 표정이던 존스가 쪽지에 적힌 글은 거짓말이라며 제발 여기에서 당장 나가라는 말을 하였다. 라이언 의원이 존스에게 가서 신도들이 떠나려고 한다며 단도직입적으로 인민사원의 문제점을 말하려고 하던 그 때, 돈 슬라이라는 신도가 뒤에서 라이언의 목을 잡고 칼로 찌르려고 했지만 존스의 변호사 2명이 흉기를 빼앗아 저지하여 라이언 의원은 자상을 입기는 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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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1월 18일, 존스는 조사를 마치고 돌아가려 하는 조사단과 신도들을 살해하려고 이륙장으로 무장한 사람들을 보냈다. 탈출하는 사람들 속에 몰래 총을 든 첩자 한 명을 숨겼는데, 이 첩자는 래리 레이턴이라는 신도였다. 레이턴은 이륙하는 도중에 총을 꺼내 다른 신도들에게 총을 쏘았다. 이 과정에서 결국 리오 라이언과 NBC 기자 돈 해리스, 패트리샤 파크스를 포함한 5명이 살해당했고, 중상을 입은 일부 사람들은 정글의 수로로 도망쳐서 살아남았다. 래리 레이턴은 이후 정글로 숨었다가 가이아나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된 후 2002년에 출소하였다.
오후 5시 30분 비행장에서 습격 직후 짐 존스 자신을 포함하여 총 909명의[7] 신도들이 청산가리를 탄 쿨에이드를 마시고 집단자살을 했다.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순순히 존스의 말에 따라 '''자신의 자식들에게 독을 먹인 다음''' 자기들도 마셨다.
한편 짐 존스는 자신의 일련의 과정을 녹음한 뒤 최종적으로는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되었는데, 존스가 자살했는지 아니면 함께 숨진 채 발견된 교단 간부에 의해 살해됐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8] 조지타운에 있는 인민사원 지부에서도 신도 4명이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9]
사건 직후 가이아나군이 출동하여 시신들을 모두 수습하였다. 그 뒤 지금까지도 존스타운의 철거나 재개발 등 소식은 일절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당시 이 사건은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고, 오늘날까지도 미국인들의 머릿속에 사이비 종교의 대표적인 예로 자리잡고 있다. 사건의 원인에 대해 여러가지 상충하는 견해들을 담은 책과 기사들이 지금까지도 발표되고 있으며 종교학, 심리학, 철학, 범죄학 등 각종 학문에서도 이 사건을 메인 테마로 다룬 적이 있다. 공산주의와 크게 연계되었기 때문에 종교, 정치적으로도 주요한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호주 방송에서 취재한 학살 40주기 추모 다큐멘터리. 여기선 인민사원에서 탈출하려 하던 신도, 자살한 신도의 가족, 그리고 짐 존스의 아들이 증언을 해주었다. 존스타운의 현재 모습도 덤으로 보여주었다.[10]

2.3.1. 살아남은 사람들


이 와중에도 다행히 생존한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사건 당일 이륙장을 통해 15명의 신도들이 귀국하려고 하기 전, 11명의 또 다른 신도들이 존스와 간부들이 라이언 의원과 조사단들에게 신경을 쓴 틈을 타 몰래 정글로 도망친 후 탈출해서 살아남았다.
여기에 존스타운에서 일하던 변호사 두 명은 사건 직전 심각한 분위기를 감지하여 존스에게 허락을 받고 존스타운을 빠져나왔고, 무장 경비가 뒤쫓았지만 이들은 정글에 숨었다가 조지타운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존스는 사건 직전에 존스타운에서 보유하고 있던 현금을 가방 두 개에 나눠 담고 조지타운에 있는 소련 대사관으로 가져다 주라고 심부름을 시켰는데, 이를 수행한 남자 세 명은 살아남았다.
이외에도 귀가 안 들려서 모이라는 소리를 못 들었다가 나중에 수로에 몸을 숨겨서 살아남은 사람 한 명, 모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침대 밑에 숨은 사람 한 명, 모였다가 경비를 속이고 탈출한 사람 한 명, 모였다가 청진기를 가져오겠다고 하고는 숨은 사람 한 명이 있다.
또한 5살짜리 아이 한 명이 숲속에 숨어 있었다가 가이아나 정부 쪽 사람들에게 구조되었다. 이 아이는 나중에 미국으로 돌아간 후 한 가정에 입양되었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고 한다.
한편 짐 존스의 아들 짐 존스 주니어는 당시 가이아나 대표팀과의 농구 경기 때문에 조지타운으로 출장을 가서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고,[11] 다른 아들인 스티븐 존스[12]도 조지타운에 있어서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다. 이 두 명의 아들들은 조사단이 존스타운에 들어올 때 쯤에 존스로부터 돌아오라는 명령을 들었으나 뭔가 수상쩍어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존스의 다른 자식들과 존스의 아내는 이 사건으로 짐 존스와 존스타운에 남은 다른 신도들과 함께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2.4. 자살인가, 타살인가?


그러나 이 사건은 '''자살사건'''이라고 불리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는데, 인민사원 신도였던 스탠리 클레이튼[13], 오델 로즈[14] 두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존스는 신도들을 모아놓고 강제로 자살할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또한 이 사건과 관련해서 세간에 퍼져 있는 '신도들이 나란히 줄을 서서 독극물을 받아먹고 아무 저항없이 죽어갔다'는 인식 또한 사실이 아니라고 증언했다. 그 당시 신도들 주위에는 무장 경비원들이 배치되어 있었기에 섣불리 저항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로즈는 어린이들에게 강제로 독극물을 먹이는 모습도 실제로 가까이에서 목격했다고 한다.
로즈를 포함한 생존자들의 증언에는 깜깜한 새벽에 사이렌을 울리며 존스가 화이트 나이트라고 방송하며, 신도들을 모이게 하고 외부세력이 인민사원의 신도들과 존스 자신을 위협하려고 한다는 가정하에 자신을 따르는지를 확인하려고 자살연습을 한 적이 수차례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신도들이 강요로 인해 독극물을 마신 것이었는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자살한 것인지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다. 특히 존스타운 주민 중 3분의 1이 16살 이하의 어린이였다. 어린이들이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존스는 제일 먼저 부모들더러 자식에게 독극물을 먹이라고 명령했다. 뒷걸음질치는 어린이들을 붙잡은 인민사원 임원들이 물딱총으로 독극물을 먹였고,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이 고통에 울부짖는 와중에 집단자살을 합리화하는 연설을 해대면서 서로 박수를 쳤다. 이 과정이 하나도 남김없이 녹음 테이프로 남아있으며, 후일 FBI가 이를 발견하여 Q042라는 코드네임을 붙였다.[15]
다만 모두가 짐 존스의 이런 미친 결정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틴 밀러[16]라는 중년 흑인 여성은 "러시아로 가자", "아이들은 살려주자", "생명권은 각자 자신에게 있으니 자살 또한 각자에 맡겨야 한다"는 정도의 상식적인 반론을 제기하였다. 이때 짐 존스는 "이 파시스트 세상에 아이들을 남겨 고통받게 할 수는 없다", "당신은 지금 죽기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등의 염세적인 비관론으로 밀러의 말문을 막아버렸고, 다른 충성파 신도들은 밀러를 겁쟁이라며 비판해서 묵살시켰다.
한편 짐 존스는 자신이 살해를 의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며 라이언 의원 살인사건은 자신들을 음모의 희생양으로 모는 것이라며 우겼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총을 든 경비병들이 강요하는 분위기를 만든 것은 사실로 보이나, 또 많은 신도들이 순순히 독극물을 받아 마신 것도 허구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실제로 자살자들이 남긴 유언이나 메모에서 이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짐 존스에 대한 믿음을 유지한 것을 알 수 있다. 인민사원 관련 자료 모음

3. 사건 이후


시신은 모두 미국으로 이송되었으며,[17] 인수할 유가족이 없는 이들은 오클랜드에 있는 에버그린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2010년까지는 추모비만 달랑 있는 무덤이지만 현재는 희생자 전원의 이름이 적혀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원래 2008년 Jynona Norwood[18]가 주도한 모금 프로젝트에 의해서 '(존스를 제외한)성인 희생자의 이름'을 새긴 기념석 2개가 제작되었다. 그런데 그 기념석의 크기가 6피트에 달할 뿐더러 무겁기도 해서 이걸 희생자들의 무덤에 세우는 순간, 필연적으로 유골을 훼손시키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이유로 매장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시켰다. 그런데 2010년 짐 존스의 양아들 등이 주도하여 ''''존스를 포함한''' 희생자 전원의 이름이 새겨진 새로운 기념비'를 제작하였고 이는 우리가 보듯, 희생자의 집단묘 위에 세워지게 된다.
Norwood는 존스의 이름을 새긴 것을 희생자를 모욕하는 것으로 여겨 에버그린을 고소함과 동시에 문제의 기념비를 철거하고 자신들의 기념비를 그 자리에 세울 것을 청구하였다. 그러나 Alameda 지방법원과 샌프란시스코 항소법원은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피해자 추모 단체는 둘로 쪼개져 버리게 되었다. Norwood를 지지하는 쪽은 https://www.jones-town.org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렇지 않은 쪽은 https://jonestownmemorial.com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참고로 존스는 에버그린에 묻히지 않고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졌다.
한편, 희생자 중 9구가 유가족이 아닌 이에게 넘어갔다가 2014년 델라웨어에서 뜬금없이 발견되는 일도 있었다.[19] 에버그린에 따르면 희생자의 가족이나 생존자 중에서도 여기에 묻힌 사람이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받을 것이라고 한다. 다만 더 이상 시신 안장을 할 자리는 없기에 정 오고 싶으면 화장해야 한다고 한다.

4. 그 외


흔히 앞서 언급된 Q042가 존스타운의 마지막 기록이라고 생각하지만 Q875라 불리는 학살 다음날, 라이언 의원의 안타까운 죽음에 관하여 방송한 내용을 담은 녹음 테이프가 존재한다. 도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했는지 기이할 따름인데 먼저 생존자들은 광란의 학살을 피하기 위해 정글에 숨어있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가이아나군인데, 이게 맞다면 가이아나군이 최초의 발견자이나 미국 수사관들이 도착하기 전에 사건 현장을 건드렸다는 문제가 생긴다.[20] 물론 존스가 19일 오전에도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있다.
워낙 괴이한 사건이다보니 당연히 음모론이 등장했다. 음모론에 따르면 존스는 미국 정부의 의뢰로 집단 최면 실험을 진행하는 중이었고, 캘리포니아나 가이아나에 정착하는 데 든 비용 등이 전부 미국의 비밀자금이었다고 한다. 미 하원 조사단이 방문하여 이런 사실이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존스와 미국 정부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조사단을 살해하고 피실험자(신도)들을 집단자살시켰는데, 이러한 작업을 존스를 지원하고자 남미에 주둔 중이던 그린베레 대원들이 수행했다고 한다.
진상조사에 나섰다가 살해당한 라이언의원의 딸은 아이러니하게도 오쇼 라즈니쉬의 사상에 공감해 그 공동체에 아버지의 사망보상금을 모조리 때려넣었다고..
한국에서는 9년 뒤 이와 비슷한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Psychic TV의 노래 중 'White Nights'는 가사를 모르고 들으면 매우 행복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인민사원 집단자살사건을 소재로 했다. 참고로 존스타운에서 자살예행연습이 수시로 있었는데, 그 모의행사 이름이 백야였다고 한다.
꽤나 유명한 학살사건이기 때문인지 서구 쪽 만화 대부분에서 가공의 사이비 종교 소재로 잘 쓰인다. 대표적으로 심슨 가족에 나오는 무브먼트교도 인민사원과 교리가 비슷하다.
이 사건을 모델로 만들어진 영화로 새크라멘트가 있다.
2017년 4월 25일에 출시된 게임 아웃라스트 2는 여기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제작자가 밝혔다. 2017년 초에 출시 예정인 게임 The Church in the Darkness 역시 이 사건을 모티브로 발표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쿨에이드를 마시다.(Drink the Kool-Aid)''''라는 표현이 북미에서는 '무언가를 심각할 정도로 믿는다.'는 은어가 되었다.# 또한 사이비 종교집단의 집단 자살을 빗대어 표현할 때도 쓰인다.
BTS슈가의 싱글 앨범에 짐 존스의 연설이 들어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의도가 어찌되었든간에 슈가 측에서는 연설자를 모르고 쓴 것이라 해명했지만 학살자의 연설을 사용했다는 비판을 피할 순 없었다.
이 사건은 9.11 테러 이전까지 20년 이상 가장 많은 시민의 생명을 앗아간 단일 사건이었다.[21]

5. 관련 문서


[1] 사실 사진이 원거리에서 찍힌데다 유혈이 없기 때문에 잔인하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상상할 수 없을만큼 많은 시신들이 늘어진 모습이 충격적일 수 있다. 사진중에는 10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도 보인다.[2] 당시 존스는 집회에서 인터내셔널가를 찬송가로 부르고, 설교에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까기도 했을 정도로 사회주의의 색채를 강하게 드러냈다.[3] 이때 존스를 따라간 신도들은 대부분 흑인이었다고 한다.[4] 사실 이는 가이아나가 건국된 이후로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분쟁이다. 가이아나 서부 영토를 베네수엘라가 이 지역이 남미 독립운동에 참여하려다가 결국 영국에 귀속된것을 이유로 자국 영토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베네수엘라 국기의 별이 7개에서 8개로 늘어난 것도 이를 반영한 것이다.[5] 윌슨은 사건 당일 충성파 신도였던 남편에게 피크닉을 할 것이라며 속이고, 자신의 2살배기 아들과 탈출하려는 마음이 맞은 다른 신도 2명과 함께 경비들을 피해 정글로 도망친 후 탈출하여 생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집단 대학살로 인해 윌슨은 자신의 남편과 부모, 형제, 조카들을 잃고 말았다.[6] 리오 라이언은 프레이저 보고서에 참여한 의원이기도 했다.[7] 914명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초기에는 300여명으로 알려졌다가 700여명으로 늘어나는 등 집계가 정확히 이루어지지 않았다.[8] 다만 부검 결과, 본인도 음독은 했다.[9] 샤론 아모스라는 신도는 조지타운 지부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존스에게 자살하라는 지시를 받자 자식 3명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0] 현장 보존을 위해 들어가지는 않았다.[11] 최초로 백인 가정에 입양된 흑인 아이였다고 하며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하기도 했다. 짐 존스는 아일랜드웨일즈 혈통.[12] 짐 존스의 친아들.[13] 이 사람이 앞서 서술한, 모였다가 학살이 진행되는 도중 무장경비를 속이고 탈출하여 살아남은 신도이다.[14] 이 사람이 앞서 서술한, 모였다가 청진기를 가져오겠다며 빠져나온 후 숨어서 살아남은 신도이다.[15] 해당 테이프의 마지막 부분에 음악이 뒤섞여 매우 음산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이 음악의 정체에 대해 논란이 있다. 의견1, 의견2[16] 정설은 아니지만 연구진 사이에서도 들어볼만한 의견이라고 게시한 내용이니 영어가 되면 이 글을 보는 것도 좋다. 의견1, 의견2, 의견3[17] 학살 발생 전 이미 죽어 매장된 8인은 제외되었으며 이들은 지금도 존스타운에 남아있다.[18] 사촌 이내의 친인척 '''27명'''을 잃었다.[19] 4구는 유가족에게 인계되었고, 나머지는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안식을 취하게 되었다.[20] 다만 학살극은 끝났으니 안심해도 좋다는 취지로 방송하다 이를 그냥 두고 온 것이 실수가 미스테리로 작용했다는 의견이 있다.[21] 910여명이 사망했다.